인생길 반고비에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읽는다. 단테가 얘기한 반고비는 ("인생은 기껏해야 70년"이란 성서 시편의 구절을 기준으로 하여) 35세이지만, 그리고 그 나이라면 나로선 몇 년전에 (일없이)통과해 왔지만, 얼추 반고비로 간주하여(평균수명이 좀 늘어나기도 했으니 혹 여든까지 살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신성한 코미디'를 한번 읽어볼 계획이다. 이런 계획을 더 일찍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 개정된 완역본 <신곡>과 관련서들이 얼굴을 내민 게 바로 얼마전이기 때문이다.

 

 

 

 

 

 

 

 

 

해서 <신곡>을 읽기 위해 내가 갖추어 놓은 책은 한형곤 교수의 완역본 <신곡>(서해문집, 2005), 박상진 교수가 (산문으로)풀어쓴 <신곡>(서해문집, 2005), 그리고 김운찬 교수의 해설서 <신곡>(살림, 2005)이다. 거기에 덧붙여 도서관에서 영역본 <신곡>(J. Ciardi 옮김, New American Library, 2003)을 대출했고, 작년에 구해온 러시아어본 <신곡>(악트출판사, 2002)을 펼쳐놓고 있다(605쪽의 러시아어본은 '새 책'인데 헌책방에서 3,400원에 산 것이다. 그런 게 애서가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읽을 줄 모르는 이탈리아어(단테는 피렌체 방언으로 썼다고 하며 그게 '단테 덕분에' 표준어로 성장했다고 한다)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 띄워놓았다. 계획상으로 이 읽기는 이번 겨울까지 계속될 것이며, 간간이 읽기의 흔적들을 이런 자리에 남겨놓도록 하겠다. 오늘은 시작하는 의미로 '지옥편'의 첫 아홉 행을 읽는다.

 

먼저 원문은 이런 모양으로 돼 있다(왼쪽의 숫자는 칸토(Canto)와 행수를 표시한다. 시에서 '칸토'란 소설의 '장(章)', 혹은 'chapter'에 해당하는 용어인데, 현대 시인들 가운데서는 T. S. 엘리엇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E. 파운드의 시집 <칸토스(Cantos)>(문학과지성사, 1992)가 유명하다. '시편들' 정도의 뜻이 될까? <신곡>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곡'이라고 옮기는바, '1.1'은 제1곡의 제1행이란 뜻이다.

 

1.1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1.2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1.3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1.4   Ahi quanto a dir qual era è cosa dura
1.5 esta selva selvaggia e aspra e forte
1.6 che nel pensier rinova la paura!

1.7   Tant'è amara che poco è più morte;
1.8 ma per trattar del ben ch'i' vi trovai,
1.9 dirò de l'altre cose ch'i' v'ho scorte.

 

<신곡>의 형식은 알다시피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은 33편의 곡(노래)으로 돼 있다(단테는 '3'이란 숫자에 유달리 집착했다고). 김운찬 교수의 해설을 참조하면, 각각의 시행은 11음절로 돼 있으며, 세 개의 행이 하나의 단락을 이루는 3행 연구(聯句)로 구성돼 있다. 거기서 1, 3행이 각운을 이루고 있는바, aba, bcb, cdc...하는 식으로 운이 맞추어져 있는 것. 예컨대, 인용한 대목에서 굵은 글씨로 표기한 각 연구의 1, 3행 마지막 단어들이 각운을 맞추고 있는 단어들이다. 33편의 각 곡은 115-160행 사이의 행들로 구성돼 있으며(가장 많이 활용되는 길이는 139행과 142행이라고), 맨마지막에는 3행 연구 다음에 1행이 덧붙여진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 <신곡> 전체는 1만 4,233행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첫 9행은 그러니까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의 첫 세 걸음인 셈이다. 나는 3행 연구를 편의상 '연'이라고 부르겠다. 해서, 1연부터 살펴보면, 우리말 번역은 이렇게 돼 있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한형곤, 42쪽)

 

시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행가름은 돼 있지만, 원시처럼 운율(특히 각운)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우리 완역본의 경우엔 3행연구의 연 구분을 따로 해주고 있지 않다(그랬다면, 현재 968쪽인 번역본의 쪽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 불어났을 것이다). 일종의 절충식인 것. 참고로 영역본에서 1연을 옮기면 이렇다.

 

Midway in our life's journey, I went astray
from the straight road and woke to find myself 
alone in a dark wood. How shall I say

 

1, 3행의 마지막 단어를 굵을 글씨로 표기한 것은 각운을 맞추고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건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굴절어에 속하는 같은 인구(印歐)어일 경우에 시 번역은 시로서의 형식적 조건을 맞추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내용상 약간의 변형을 감수하더라도). 반면에 교착어인 한국어로는 그런 형식미를 충족시켜주기 어렵다. 해서, 박상진 교수가 산문으로 풀어쓴 문장, "인생의 반평생을 지냈을 무렵, 나는 바른길에서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들어서게 되었다."를 그냥 행가름만 해주면 한형곤 교수의 번역과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인생의 반평생을 지냈을 무렵, 
나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들어섰다.(박상진, 14쪽)

 

혹은 같은 대목의 다른 번역:

 

우리 인생길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 처해 있었다.(김운찬, 59쪽)

 

다시 말해서 <신곡>의 시로서의 묘미는 대개의 시 번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역본에서는 음미하기 어렵다. 해서, 우리가 따라가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대략적인 줄거리이고 여정일 따름. 원문의 'mezzo'(많이 보던 단어이다!), 영역의 'midway'에 해당하는 것이 우리말의 '반 고비'인데, '고비'란 '막다른 때나 상황'을 가리키는 고유어이고 '반 고비'는 인생의 전환점, 30대 중반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비교적 제한적인)쓰임새를 갖고 있다. 이 경우에는 '반평생'이나 '한가운데에서'보다는 '반 고비'란 말이 시적이다. 참고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30대 중반에 쓴 기행문집에 <반고비 나그네 길에>가 있었다.

 

 

 

 

 

 

 

 

 

1연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인생길 반고비에서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서 정신이 들었다는 것. 그런 상황에 처해서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는 게 2연의 (당연한)내용일 테다.

 

아, 거칠고 사납던 이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산문적으로 조금 풀면, "그 숲이 얼마나 거칠고 무서웠던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절로 솟아난다."(박상진) 그렇다면, 이러한 회상을 늘어놓고 있는 화자-단테는 그러한 경험/여정이 완료된 상태(=현재)에 놓여 있다. 요컨대, 어두운 숲에서의 두렵고도 굉장한 경험을 이제 말해보겠노라는 것. 왜? 그 이유가 3연이다.

 

죽음 못지 않게 씁쓸했기에   
나 거기서 깨달은 선을 말하기 위하여
거기서 본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리라.

 

다시 풀면, "죽음도 그보다는 더 무섭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거기서 귀중한 선(善)을 만났으니, 내가 만난 선을 보여주려면 거기서 본 다른 모든 것들도 말해야 하리라." 다른 번역들을 참조하건대, (한형곤 역에서의) '죽음 못지 않게'라는 동등비교보다는 (박상진 역에서의) '죽음보다 더'라는 우등비교가 더 타당한 듯하다(문맥의 논리상으로도 그렇다). 비교의 대상은 물론 '숲'과 '죽음'이다. 그리고 내가 좀 어색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이란 번역어인데, 짐작에는 원문의 'ben'(원형은 'bene'라고 한다)을 옮긴 게 아닌가 싶다(불어의 'bien'을 연상케 하는데, 영어의 'good'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 3연의 영역은 이렇다.

 

Death could scarce be more bitter than that place!    
But since it came to good, I will recount 
all that I found revealed there by God's grace.  

 

'선(善)' 이란 뜻 외에 불어 bien이나 영어의 good, 그리고 러시아어의 blago(영어의 'good' 혹은'grace') 모두가 공유하는 뜻은 '행복'이나 '은총'이며, 기독교적 문맥에서는 '선'보다 '은총'이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화자인 단테는 어두운 숲과 거기서의 경험이 죽음보다도 더 두렵고 씁쓸했지만(그걸로 끝이라면 더 얘기할 것도 없다), 거기서 '은총'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제 모든 걸 얘기하겠노라는 것(recount, 즉, 하나씩 되새김질하면서). "거기서 본 다른 것들"도 문맥상 "거기서 본 모든 걸들"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물론 나는 <신곡>에서 내가 읽은 모든 걸 늘어놓은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거기서 읽은 몇몇 대목들' 정도를 앞으로 따라가볼 작정일 뿐. 왜? 벌써 인생길의 반고비를 지나(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테를 따라서 한번쯤 지옥과 천국을 오락가락 해보는 편이 마땅하다... 

 

0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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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0-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점심을 드시고 와서 나머지 글을 쓰시겠지만 일단 추천부터 해 두렵니다.
미리 보지 않아도 나쁜 글이 아닐 거라는 걸 아니까요. 흐흐.

로즈마리 2005-10-2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손 대고 싶은데...이럴 때 이탈리아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

로쟈 2005-10-2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천국은 장담할 수 없구요, 지옥 정도는 같이 가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2005-10-25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2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Mandelbaum의 영역본도 도서관에는 있는데, 제가 어떤 번역본이 더 나은가에 대한 정보는 안 갖고 있었습니다. 추천해 주시니까 그 책도 참조하겠습니다. 뭐, 저로선 <신곡>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까지는 안 갖고 있습니다(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서 러시아어를 배우겠다는 게 쉬운 결심이 아니듯이). 다만, 스페인어권 시를 읽을 때 원문을 낭송해보곤 했었는데, 그런 방식 정도를 흉내 내볼 수 있겠네요(이탈리아어도 대충 철자대로 발음하는 거 맞지요?^^)...

산손 2006-06-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 리플 답니다 ;; 저는 최민순 신부 번역을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한뉘 나그냇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이던 나 컴컴한 숲 속에 서 있었노라/아으 호젓이 덧거칠고 억센 이 수풀 그생각조차 새삼 몸서리 쳐지거든 아으 이를 들어 말함이 얼마나 대견한고!/죽음 보다 못지않게 쓰거운 일이 었어도 내 거기서 얻어본 행복을 아뢰려로니 게서 익히 보아둔 또 다른것들도 나는 얘기하리라'. 읽기 편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영어로 번역이 미심쩍은 거 살펴보면 최민순 신부님이 더 맞더라구요(불어, 스페인어 번역과 일치하죠). 영어번역은 워낙 여러 시도가 있었는지라 ;; 이탈리아어랑 대조하면서 보시려면 Singleton 아저씨의 산문 번역(이탈-영어)을 참고하시면 될 거에요. 주석본도 같이. 이탈리아어 낭송은 www.ilnarratore.com에 단테 검색하시면 Canto I 낭송한 게 있습니다. 이상 뒷북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