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읽기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거기에 덧붙이려다가 자리를 따로 마련했는데, 분량이 짧게 끝나면 도로 갖다 붙일 작정이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님이 추천한 만델바움(A. Mandelbaum)의 영역본(Everyman's Library, 1995)과 함께 <미메시스>의 저자 아우얼바하(E. Auerbach; '아우어바흐'로도 표기)의 <단테: 세속 세계의 시인>(시카고대출판부, 1961/1974; 독어본은 1929)도 대출했다. 영역된 <단테>는 195쪽이며 분량으로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신곡>을 읽으며, 혹은 읽고 나서 내가 읽고픈 책인지라 미리 대출해놓은 것. 

 

 

 

 

아우얼바하(1892-1957)가 <미메시스>를 출간한 것이 1946년이므로(영역본은 1953년에 나온다) 그가 37세에 출간한 <단테>는 그의 초기 저작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특별히 이 책을 기억하게 된 것은 작년 러시아 체류 시절에 러시아어본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미메시스>의 저자라는 것 말고는 저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이 없었던 나로선 비교적 얇은 분량의 '단테론'에 여러 차례 손이 갔다. 하지만 끝내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어차피 영역본으로 읽으면 되리라는 판단과 아직 <신곡>도 읽지 않았다는 사정이 거기에 보태어졌다. 그건 러시아어본 <미메시스>에도 똑같이 적용이 됐는데(나는 국역본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무리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미련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난 1999년 한 학술지에 아우얼바하 특집이 마련되었었고(특별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 특집은 2003년에도 있었다. 그건 이유가 없지 않은데, <미메시스>(영역본) 출간 50주년 기념으로 <미메시스>(프린스턴대출판부, 2003)가 재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E. 사이드나 T. 이글턴 같은 쟁쟁한 비평가들이 새로운 서평을 씀으로써 아우얼바하의 업적을 기렸다(사이드의 글은 계간 <세계의 문학>에 이글턴의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각각 번역/소개되었다). 내게 더 흥미로웠던 건 이글턴의 시각이었는데, 그는 동시대 이론가들이었던 바흐친, 루카치와 아우얼바하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루카치에게 현실주의가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면, 아우어바흐에게 그것은 서민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우어바흐는, 루카치의 역사주의와 바흐찐의 성상파괴주의가 혼합되는 흥미로운 교차점이다."(지주형 역) 이들의 계열체는 이렇다: 루카치(부르주아)-아우얼바하(서민)-바흐친(민중)

 

 

 

 

잠시 우회했는데, 여하튼 단테와 <신곡>에 대한 관심이 작년부터 무르익었었다는 개인적인 사정 얘기이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런 개인 사정을 조금 더 늘어놓자면, <신곡>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중2 때이다. 학교에서 공부 라이벌이었던 한 친구가(이 친구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변호사가 돼 있다) 어느날 세로 읽기로 된 <신곡>을 들고 다녔던 것. 200쪽 정도의 분량이었으니까 지금 생각에 좀 조잡한 다이제스트판이었던 듯싶은데(당시에 따로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이름을 꿰고 있지만 정작 읽지는 않은 '고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는 게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같은 책을 사서 (끼고 다니지는 않고)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해설만 읽었던 모양으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를 나는 이후에 (여러 미팅 자리에서) 여러 번 욹어먹은 기억이 있다. 가령,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말이야... 너무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너무 멀리 떨어질 수도 없어서... 진정한 사랑이란 아마도...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본론이란 특별한 게 아니고 지난번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서" 읽기를 약간 보충하고자 할 따름. 내가 새롭게 동원하고자 하는 건 서두에서 언급한 만델바움의 번역과 허인 옮김으로 돼 있는 '단떼'의 <신곡>(학원출판공사, 1996)이다. '학원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인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 헌책방에서 2,000원을 주고 샀다. 2단 조판의 본문이 376쪽이므로 다이제스트는 아니지만 번역본 서지나 역자에 대한 소개 등이 누락돼 있어 신빙성 있는 번역인지는 좀 의심스럽다. 하여간에 이 번역본에서 지난번에 읽은 첫 9행을, 비교를 위해서 한형곤 역과 같이 옮겨보면 이렇다. 만델바움의 영역도 나란히 옮겨놓겠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한형곤)
-인생의 중반기에서/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컴컴한 숲속에 있었다.(허인)
-When I had jouneyed half of our life's way,/ I found myself within a shadowed forest,/ for I had lost the path that does not stray.(만델바움)

-아, 거칠고 사납던 이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한형곤) 
-그 가열하고도 황량한, 준엄한 숲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입에 담는 것조차 괴롭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허인)
-Ah, it is hard to speak of what it was,/ that savage forest, dense and difficult, which even in recall renews my fear:(만델바움)

-죽음 못지 않게 씁쓸했기에/ 나 거기서 깨달은 선을 말하기 위하여/ 거기서 본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리라.(한형곤)
-그 괴로움이란 진정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거기서 목격한 두세 가지 일을 우선 이야기할까 한다.(허인)
-so bitter - death is hardly more severe!/ But to retell the good discovered there,/ I'll also tell the other things I saw.(만델바움)

1, 2연의 번역은 지난번 읽기를 수정할 사항이 없다. 3연에서 역시나 'the good'의 번역이 문제인데, '선을 깨닫다'(한형곤)나 '선을 만나다'(박상진)란 표현이 어색하다는 건 여기서도 변함없다. 다만 허인 역에서는 '행복'이 지옥와 연옥의 안내자로 등장하는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뜻한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박상진 역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이 두 행을 "그러나 나는 거기서 귀중한 선(善)을 만났으니, 내가 만난 선을 보여주려면 거기서 본 다른 모든 것들도 말해야 하리라"라고 옮겼을 법하다. 박상진 역은 만델바움의 영역과도 걔 중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 과연 그 '선' 혹은 '행복'이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더 읽어봐야겠다. 참고로, <신곡>을 읽으면서 반드시 참조해야 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는 천병희 선생이 정역본이 작년에 나왔다(이래저래 <신곡> 읽기를 피해갈 구멍이 없는 셈!).

 

 

 

 

이상을 종합하여, 나의 '독단'에 따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번역 작업은 때로 작곡과 유사하다).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 가야할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을 헤맸었네.
-아, 얼마나 아득하고 거친 곳이었는가/ 말로 다 이를 데 없고/ 생각만으로도 두려워라.
-죽음도 그보단 덜 쓰라릴 것이나,/ 거기서 나 은총을 마주했으니/ 이제 이 모든 걸 이야기하리라.

05. 10. 26. 

P.S. 아주 짧은 분량은 아니군... 마지막 연에서 '은총을 마주했으니'가 '신의 은총'이 아닌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면, '은혜/은인을 만났으니'라고 옮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이런 게 나대로의 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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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잘 읽었어요.

로쟈 2005-10-27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에 감사를...

2005-10-27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2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칼라일 읽기 프로젝트를 저도 구경하면 안될까요?^^

쿠자누스 2005-11-0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을 출간하시면 어떨지요 ? 주문 예약을 하겠습니다.

로쟈 2005-11-0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이라니요? 턱도 없는 말씀이고, 저는 고전을 제 식으로 읽고 즐길 뿐입니다. 조만간 박상진 교수의 <신곡> 새 번역본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런 걸 기다리는 설렘을 누리면서...

2008-12-05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