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국에서의 영어열풍에 관한 논평/좌담 기사를 모아놓았었는데, 담비에 실린 '과학기술계 속의 한국인과 외국인'이란 칼럼의 리뷰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외국인'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과연, 외국인이란 무엇인가?). 마침 거론되는 게 '러시아 애들'인지라 '영어 조기유학 문제'에 견주어 '러시아 애들 문제'라고 이름붙여둔다.

담비(07. 07. 12) "논문은 왜 써? 그냥 러시아 애들 시키지”

한두해 전 국내 모 유명(?) 과학자가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며 온 매스컴을 달군 적이 있었다. 과학을 설탕처럼 달콤한 민족주의적 색채와 절묘하게 혼합시키며 수많은 한국인들을 눈물이 찔끔 나도록 열광시켰다.

이론물리학자로 끈이론에 대한 연구로 주목받아온 이수종 서울대 교수가 ‘과학과기술’4월호에 ‘과학기술계 속의 한국인과 외국인’이란 칼럼을 실었다. 내용인즉 이렇다. 이 교수는 매달 정기적으로 갖는 학술토론을 마치고 여러 동료학자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국내에 있는 외국인 유학생 및 연구자에게 옮겨갔다.

그 때 평소 민족주의라면 부르르 몸을 떨며 열변을 토해내는 H대학교 S교수의 요지는 이랬다. “금쪽같은 대한민국의 예산으로 외국인들을 이렇게 데려다가 고등교육도 시켜주고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장도 주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 능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한국인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고 나머지 자리가 있거나 여력이 있으면 외국인을 고용하자”는 것이었다. 반반으로 나뉘어 이에 대한 불꽃논쟁이 벌어졌다.

이 교수는 반대하는 편에 섰다. 그가 20년전 대학원공부를 해보겠다고 교수님 추천서를 첨부해 미국 명문대학의 문을 두드렸을 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한군데가 아니라 몇군데에서 오라고, 그리고 장학금도 준다고 연락이 왔다. 도대체 이 대학들은 듣도보도 못한 외국학생을 무얼 믿고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러고보니 앞의 H대 S교수도 K대 N교수도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장학금 받으며 공부한 사람이다. 그 덕에 지금 각자 한국의 내로라하는 명문대학에서 교수로 취업해 사회적 지위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의 대학에서 재직하는 우리가 외국학생들을 차별없이 받아들여 그렇게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을까. 이게 이 교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S,N교수는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고.

이 교수는 또 상념에 빠진다. 자신이 박사학위 후에 머물던 산타바바라의 연구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를 시작으로 12년간 그는 미국에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다. 연구비 따내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허탈하게 지내는 날이 많았고, 그나마 학술행사로 방문한 외국 교수들과 학문적으로 토론하는 일로 갈증을 풀었던 날들이었다. 이는 이 교수만이 아니라 P대학 P교수, K대학 C교수, E대학 A교수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앞서나간 유학파 과학자들의 보편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 젖어가고 있을무렵 또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경험하게 됐다고 한다. 좋은 연구성과를 이뤄냈다고 외국의 기관에서 상을 받은 것이다.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받았다. 꽤 큰 액수의 상금도 줬다. 그뿐 아니라 독일에서는 방문연구 때마다 필요한 경비도 제공했다. 물론 그 전에는 독일에 가본적도 공동연구를 해본 적도 없었다. 또 이런저런 자리들을 받지 않겠냐는 질문의 빈도수도 늘어났다. 이 교수는 읊조린다. “내가 프랑스에 대해 무얼 안다고, 세금 한푼 안낸 영국과 캐나다에 무슨 기여를 했다고, 미국에 어떤 애국적 행동을 했다고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그들에게 자국인과 외국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교수는 말한다. 외국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보라. 수많은 재력가들이 과학연구에 엄청난 액수의 재산을 흔쾌히 기부하고 있다. 그 기부금으로 브라질의 생태학자를 불러오든, 아니면 에콰도르의 수학자를 채용하든 전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교수는 묻는다. 우리 과학계에 외국인이란 무엇인가. 프로스포츠 팀처럼 형형색색 장식하며 만들어낸 장식품인가. 그러니 C대학 H교수가 한탄하며 이야기에 끼어든다. 대덕에 있는 K국책연구소에 연구 관련으로 찾아갔더니 그곳 부장급 연구원이 “뭐 힘들게 연구해? 논문은 저 러시아애들 몇 명 불러다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해 먼길 찾아온 사람 맥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외국인 과학자란 그저 부려서 논문 만들어내는 제조기라는 말인가. 이 교수는 프랑스 정부가 매년 기초과학분야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배정하며 백서에 남기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증대하고 전 인류가 프랑스의 연구활동을 통해 우주와 합리적 사회, 그리고 과학기술문명을 향유할 수 있도록 기여한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물론 이 땅에서는 강아지가 웃을 소리지만.

이 교수 일행은 찻집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토론을 멈출 줄 몰랐다. 그 때까지 조용히 논쟁을 듣고 있던 S대학 B교수가 한마디 툭 던졌다. 골목길에 미군 지프차가 나타나면 달려가서 “Give me gum!”을 노래 부르듯 외치며 자라왔던 전후세대가 지나가면 아마도 한국인과 외국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도 희미해질 것이라며, 그 때까지 늙더라도 죽지 말고 악바리로 살아남자고 했단다. 이것이 어느 저녁 느닷없이 벌어진 논쟁의 전말기다.

이 교수 일행의 논쟁은 실제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논했던 듯하다. 다만 정치사회적 맥락이 충분히 음미되는 인문학적 논쟁은 아닌 듯하다. 다만 가치가 있는 논쟁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다. “러시아 애들을 불러다 논문을 쓰게”한다니. 그것도 말 많은 국책연구소에서 말이다.(리뷰팀)

07.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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