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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안토리오 솔레르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베아트리체의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용된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라. 갈 길은 멀고 길은 험하다'라는 문구는 그저 지옥편의 마지막 노래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성장통을 겪듯, 인생의 성장기에 겪게 되는 인생의 고통은 지옥편의 끝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볼 뿐이다.
"모든 것이 자리바꿈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꾸려왔던 삶이 뭔가 모호한 것으로, 아직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느 순간 우리 모두 그런 모호한 것으로 변해갈 거라고. 에테르 같은 존재로,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떠도는 목소리로, 전파방해로 조금씩 일그러지는 그런 목소리로,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다른 목소리의 메아리로, 내 머릿속 어느 깊숙한 곳에서, 꿈이 만들어지는 혼란스러운 곳에서, 누군가가 복수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항해서, 그러나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가도 언젠가는 되살아날 것 같았다. 이십 년 후라도 상관없었다. 우리를 비추고있던 태양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 태양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랬다. 그 해 가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304)
이 책은 스페인의 소도시, 영국인 거리에서 일어나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첫사랑'에 대한 가슴설레임이나 삶의 기로에서 진로를 결정하는 고뇌가 담겨있는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꿈과 낭만이 어린 친구들과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청춘'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생기넘치는 희망만 담겨있을 것이라 생각해왔던 내게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무겁고 슬픈이야기로 다가왔을 뿐이다.
이야기는 신장수술을 받은 후, 옆 침상의 숨져버린 환자에게 받은 '단테'를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 미겔리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미겔리토는 그 후 그의 베아트리체 '룰리'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서로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는 청춘들의 사랑이 겪는 아픔과 슬픔이 우리의 인생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가듯 그 처절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폭풍우 몰아치는 어느날, 아버지가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고 믿는 그의 친구 멧돼지 아마데오 눈니의 가족이야기와 바람벽 파코가 사귀던 살덩이와의 관계가 아버지의 유언같은 한마디 말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랑과 우정과 반항과 인생이 담겨있는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자라왔던 고향, 스페인의 소도시 영국인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또다른 청춘들의 이야기에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와 삶의 방향을 틀어버린 또 다른 만남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그들의 인생을 보여주는 자화상의 한 장면처럼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내 느낌을 낱낱이 고해바치는 것과 다르지 않겠기에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내 안에 묵직하게 남아있는 느낌을 그저 혼자 간직할 수 밖에 없겠다. 이 책을 읽어보기 전에는 내가 말하는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 페이지에 씌어진 단어 하나하나는 한 마리 새와 같아. 단어는 끝이없어. 너는 하얀 종이 위에 씌어진 단어나 마찬가지야. 너는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어. 책을 덮기 전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날아올라야 해. 밤이 오기전에'(27)
미켈리토에게 단테의 신곡을 남겨 준 그 남자는 죽기 전에 그에게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날아올라야 한다'고 말을 한다. 단테의 신곡이 아니라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를 다 읽고난 후 이 묵직한 마음을 어떤 느낌으로 정리를 해야할까, 되새기고 있을 때 무심코 넘겼던 이 글이 눈에 띄었다.
현재의 감정과 생활에 충실한 청춘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인 듯 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이긴 하지만, 흔들리는 삶 속에서 불안정하게 자신의 모습을 왜곡시켜버리고 있기는 하지만, 어두운 밤이 오기전에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담고 있는 이들이 바로 청춘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인 것이다.
다만 그들도 그랬고 다른 수많은 청춘들도, 나 역시 그러했듯 청춘을 살아갔던 그 때, 흔들리고 불안한 삶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어버렸다는 깨달음은 그 시절을 회상하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그 시절을 좀 더 아프게 회상하게 된다는 서글픔도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지금도 이 세상의 어느 곳, 소도시의 자그마한 거리에서는 시인을 꿈꾸지만 한줄의 시도 쓰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미겔리토와 그의 베아트리체가 사랑의 기쁨과 아픔을 겪고 있을 것이고 가족의 운명에 울부짖는 또 다른 아마데오 눈니나 어린 청춘의 마음에 존재하는 베아트리체를 일깨워주려고 하는 카르타고 투구 아가씨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벼랑에서 떨어지는 못난 놈들. 그렇다. 때로는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신선한 허브 향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가 오래전에 책상 서랍 속에 처박아둔 수선화 향기를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