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사랑하기로 했다.
만약 지금이 운명을 믿는 그리스 로마 시대였다면 나는 진작 사랑하는 쪽을 택했을 거다. 어차피 이렇게 사는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내려 했을 테니까. 거지 같음 속에서도 옅게 빛나는 작은 조각은 있지 않겠는가.
문득 생각했다. 사랑하자. 그러나 눈앞에는 여전히 돈가스용 돼지고기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오늘 만들어 팔아야 할 할당량이었다. 다시 생각했다. 차라리 사랑하자. 차라리면 어때, 포기 아닌 선택지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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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착한 미술사 - 그동안 몰랐던 서양미술사의 숨겨진 이야기 20가지
허나영 지음 / 타인의사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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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어서인지 갑자기 '착한' 이라는 말에 반감이 생기고 있다.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 착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서양미술사의 주요 흐름을 씨실로 그 사이에 감춰졌던 조명 밖 이야기를 날실로 엮어낸 '처음 만나는' 미술사 수업"이라는 말 속에 착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은 해 보지만 사실 굳이 착하다는 표현이 필요할까 싶다.

책을 다 읽고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하니 괜히 딴소리를 해보는 것일뿐이고 실상 이 책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내게 있어 착하다는 의미는 그것으로 퉁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만큼.


고대 신화의 이야기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미술사의 큰 흐름속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나 포인트가 되는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동안 미술 관련 책을 읽었던 지식이 축적되어 그런지 낯선 작품과 낯선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약간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하는 설명이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새로움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도 이미 언급이 되고 있었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일수도 있겠지만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이나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예전에 느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함을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종교화로서의 관심만 갖고 있었는데 성모무염시태 그림에서 착시효과를 극대화해서 성모마리아의 얼굴을 작게 그리고 몸체를 더 크게 그렸다는 설명을 읽으며 작품의 실제 크기를 가늠하며 그림을 올려본다고 생각하니 그레코의 그림이 또한 다르게 보인다.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담겨있는 그림에 대한 설명에 더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또 다른 시선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화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고, 그림 안에는 어느 것 하나 아무 의미없이 그려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림을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그림보기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준다. 


서양미술사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안에서 '비틀어보기'를 권하고 있는 느낌이 좋았다. 미술사와 화가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삶의 모습이 그림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지금까지 그림에 대한 해석에 더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소스를 제공해준다고 할까, 그런 것들이 내게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포인트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책의 내용이나 화가, 그림들 역시 낯설지 않고 익숙한 것들이어서 그런지 책은 쉽고 재미있게 잘 읽힌다. 미술사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솔직히 어렵기만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보다는 이 책이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다고 추천해주고 싶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작은 전시관에서 대학생들의 작품 전시회가 열려 찾아가봤다. 관계자말고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듯 해 며칠을 망설이다가 전시 마지막 날이라 용기를 내 들어가봤는데 가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마음에 훅 치고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의 풍자나 은유가 담겨있는 작품들을 보고 있으려니 현대미술의 다양함과 화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는 것을 날것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미술사의 한 획이 그어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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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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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제일 먼저 이 소설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는 증거를 찾아보았다. 전쟁 속에서 첩보활동을 했다는 것이 공식 기록으로 남아 공개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2차세계대전 당시 첩보 활동을 하고 자국의 이익과 독립을 위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것에 남녀의 구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활동을  한 여성독립군은 많으니. 


사라진 소녀들은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치하에 있던 프랑스에 잠입해 들어가 활동을 한 여성첩보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레이스, 마리, 엘레노어 세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긴장감 넘치는 내용이 아님에도 자꾸만 긴장을 하고 그들의 운명을 지켜보게 된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레이스는 출근길에 그랜드센트럴역에서 주인없는 가방을 발견하고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열어보다가 충동적으로 가방안에 담겨있는 사진 뭉치를 집어들고 자신의 가방에 넣어버린다. 젊은 여성들의 사진 뭉치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그레이스는 사진을 돌려주기 위해 다음날 역으로 되돌아가지만 그 사이 가방은 사라져버렸다. 우연히 뉴스를 통해 그 가방의 주인은 엘레노어 트리그라는 여성이며 영국인임을 알게 된다. 

사실 엘레노어는 영국의 특수작전국 소속으로 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로 여성 요원들을 보낸 장본인이다. 모든 면에서 '여자라서 안된다'라는 시선을 바꾸고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자연스럽게 잠입하기에는 여성이 최적화 된 조건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결국 특수작전국 내에 특별부서가 생기고 엘레노어는 적임자를 찾아 훈련시키고 임무를 주어 보내는 책임을 맡게 된다. 

그레이스가 집어 든 사진의 인물 중 한명인 마리는 그렇게 훈련된 요원 중 한명이다. 어린 딸을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마리는 투철한 애국심이라기보다는 더 많은 주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조금 더 마음이 쏠려 엘레노어의 요원이 된다. 사실 사명감으로 시작된 일이 아니기에 마리는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하는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함께 훈련을 받는 동료 조시의 도움을 받으며 결국 실전에 투입되는데...


이야기는 그레이스와 엘레노어, 마리의 시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어진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대활약을 펼쳤지만 결국 전쟁의 역사속에 이름없는 무명씨로 사라져가는 이야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가 이야기의 결이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어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얽히고 그들읫 삶에 담겨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 단숨에 읽어버릴만큼 이야기 자체로도 재미있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 많은 생각할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단순히 여성첩보비밀요원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곳곳에 포진해있는 문장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엘레노어는 남자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자신의 성취감 때문에 이루어진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프랑스로 떠났다가 사망을 확인하지 못하는 행방불명인 요원들의 행적을 찾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엘레노어는 온 세상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돈때문에 특수작전을 맡게 되었다고 하지만 마리는 딸 테스가 성장해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떠올리며 테스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으며 견디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세상에 묻혀버렸을지 모르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리고 또 이 이야기에서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기로 한다. 이건 스포가 되는 내용이기도 하고, 무척 화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이 소설은 전쟁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 그냥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이 우연처럼 맞닥뜨린 현실앞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갔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이 책의 곳곳에 전쟁에 대해, 전쟁이 만들어 낸 수많은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고 있어서 소설의 여운이 오래 남고 있다. 그러고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미얀마에서는 또 다른 마리와 엘레노어와 그레이스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과 독재와 억압이 없는 자유, 민주, 평등, 평화의 세상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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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27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이 소망합니다. ^^
얼마전에 냉전의 마녀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주제면에서 통하는듯해요. 물론 냉전의 마녀들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지만요.

chika 2021-07-27 11:16   좋아요 0 | URL
냉전의 마녀들요? 역사서라니. 함 찾아보것슴다!
 

그런 면에서, 신화적인 스토리나 정치와 철학으로만 이해하던 그리스를 사회의 구성원이었던 한 여성의 묘비를 통해 다시 생각해보는 건흥미로운 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묘비와 로마제국의 한 구석에서 발견된 파이윰 초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초상화를 통해 그들이 죽음과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너무나 오래전에 제작된 것들이고 이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게 하고자했던 어떤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그 이유가 그다지 국가적이나 신념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대의명분은 없더라도, 한 사람 혹은 한 가족과 집단이 얻게 되는 위안과 이야기를 담고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이 아닌 작은 이야기들이지만, 이러한 삶의 흔적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남길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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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는 분수로 걸어가면서 어머니의 팔짱을 꼈고, 자신이 열여섯번째 생일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깜짝 놀랐다. 그날은 언제나 그 자리에, 돌리가 성장한 하루로 남을 것이다.
길은 여러 가지라는 사실, 어머니의 방식은 그저 하나의 길이라는사실을 깨달은 날로, 딱히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틀린 길도 결코 아니다. 그저 앞에 놓인 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22, 돌리의 어머니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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