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민이셨나요?˝
그녀가 움찔했다. ˝그래, 정착민이었지.˝
˝왜 케냐였죠?˝
그녀는 대답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추었는데, 그러고서 다시 말을 시작할 때 보니 집중을 하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질문을 그런식으로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구나.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케냐냐고 물으려던 건 아니겠지. 왜냐하면 만일 그런 뜻이었다면, 케냐든 다른 어디든 상관없었다고 말해야 할 테니까. 우리는 유럽인이었어. 이세상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지. 네 말은 왜 굳이 가서 다른 사람들이 가졌던 것을 빼앗았느냐는 그리고 왜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부르며 이중성과 무력을 앞세워 번영을 누렸느냐는 뜻이겠지. 심지어 우리에게 권리가 없던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못 쓰게 만들면서까지 말이야.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니? 음,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그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는 권리가, 검은 피부와 곱슬곱슬한 머리를 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을 뿐이던 장소들에 대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를 살았으니까. 그것이 바로 식민주의의 의미였고, 우리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게 해준 방법들을 우리가 모르는 척하게끔 회유하는데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었어. 215







 나는 그들의 자신감에 놀랐고, 내가본 것이 엘레케가 자신의 부모님이 케냐에서 보였다는 자기 연민의 오만함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다른 무엇, 그러니까 그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여긴 신념의 가치에 대한 느긋한 확신 같은 것이었는지 궁금했다. 심지어 식민주의의 추악함을 겪고도, 나치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비인간적 행위를 겪고도, GDR의 권위주의적 행태에 기인한 수모를겪고도 완전히 파괴되지 않던 신념에 대한 그 지속적인 열정을 지금의나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었고, 그들의 태도를 드레스덴의 그 아파트의 축소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매력적인 기이함으로만 여겼다. "삶은 우리를 그렇게 끌고 다니지‘
한번은 엘레케가 말했다. "우리를 이렇게 끌고 가다가, 우리를 뒤집어서는 또 저렇게 끌고 가지."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합리적인 무언가에 매달리게 된다는 말이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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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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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를 내가.. 죽였던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책을 읽은 것 같은데 그런 나의 기억력을 의심하며 책을 펼쳐들다가 익숙한 듯한 전개에 그저 일본 가옥 구조의 보편성으로 인해 내 기억이 왜곡되었을거라 위안하며 계속 읽었는데 결국 그 위안마저 거짓이 될판이다. 

짧은 기록이라도 있을까 몇몇 페이퍼를 뒤적여보기는 했지만 증거가 될만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고 다만 내 기억속에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몇가지의 에피소드는 점점 뚜렷해지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내가 이 책을 읽은 것 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까마득히 몰랐다. 소녀를 죽인 범인이 ......


예전에는 하라 료의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에 선뜻 적응이 안되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읽으며 사와자키 탐정의 이야기가 왜 이리 좋은가 하고 있다. 아마도. 어줍잖게 범인이 누구일까,에만 몰두하여 책읽기를 하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사와자키 탐정의 행동과 말 모두 의미있는 것이라 여기며 문장을 곱씹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이야기의 시작과 중심은 언제나 그렇듯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이다. 탐정사무소로 걸려 온 사건 의뢰 전화를 받은 사와자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의뢰인을 찾아 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의뢰인은 요구대로 6천만엔이 담겨있다며 트렁크를 그에게 전하며 딸을 돌려달라고 한다. 영문을 모르는 그에게 경찰이 들이닥치고, 의뢰인이라고 전화를 건 사람의 딸이 유괴되었으며 몸값을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에서 온 사람에게 전해야 무사히 딸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며 사와자키는 그런 사건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이후 유괴범의 몸값 전달에 응하는 심부름꾼으로 사와자키가 지명되었고, 유괴범과의 공범 의심을 받는 사와자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몸값을 운반하다 폭행사건에 휘말리며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돈가방을 분실하게 된다. 유괴된 소녀의 생사여부도 파악할 수 없고, 몸값은 분실되었으며, 공범의 누명을 벗기는 했지만 범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사와자키는 유괴된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또 다른 사건 의뢰를 받는다. 자신의 자식들이 혹여 금전적인 이유로 유괴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통해 사와자키는 주변 인물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유괴된 소녀의 행적을 추적해가는데......


내가 죽인 소녀는 서둘러 가지 않고 천천히 관련된 인물들과 그에 얽힌 사연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을 볼 수 있는 짜임새가 있는 탐정소설이다. 문장속에서 냉소적이면서도 재치있는 사와자키를 느낄수도 있으며 오래 전 작품이라 전화를 통한 사건과 실마리, 쪽지, 미행, 종이비행기 통신(!)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읽으면서도 범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해 마지막까지 긴장감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 축복받을만한 기억상실일지니! -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탐정놀이보다는 어떻게 범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사족(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서평쓰기를 미뤄두다가 마침 드라마 그린마더스클럽의 최종회를 보다가 범인은 가까이에 있다,라는 공통점을 발견해 둘을 연결해보고 싶었지만 이건 스포일러 없이는 얘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이제 소설도 다 읽어버리고 드라마도 끝나버리고 이번 주말에는 어떤 재미를 찾을까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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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형식적인 권유를 못 본 척했고, 대신 값나가는 가구로 가득한 그 방을 무례하게 둘러보았다. 편안한의자, 양탄자, 양각한 청동 장식이 달린 검은 알미라, 금박 거울. 그 물건들은 모두 각각의 아름다움과 용도를 지닌 것들이었지만 그 방에 난민들처럼 서 있었고, 자부심과 위엄의 요구로 가만히 서 있긴 했지만 다른 곳에 있었을 때 더 활기찬 삶을 누렸을 것같았다. 누군가의 영리함과 부를 기념하기 위한 환하게 불을 켜고 로프를 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물건들처럼 보였다. 약탈품처럼 보였다.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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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는 짓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모두 잘못이지만, 적어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잘못을 선택하려는 노력은 해야겠죠.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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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하루는 돈을 꾸기위해 늘어놓는 서론저럼 길어, 니시신주쿠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는데도 창밖은 아직 훤했다. 368


한 해에도 손꼽을 만큼 쾌적한 밤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기분은 곧 닥쳐올 장마철의 낮게 드리운 회색 구름처럼 무거웠다. 395


★★★★★ 하라 료의 사와자키 탐정을 계속 기다리게 하는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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