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아빠는 말하려는 의지를, 혹은 말할 능력 자체를 상실했다. 왜 갑자기 침묵하는 것인지 의사들조차 의학적 이유를 대지 못했다. 나는 아빠가 의식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본다. 정신 능력의 약화는 아빠 같은 사람이 견디기엔 너무 버거운 공포였을 테니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아빠 나이는 고작쉰셋, 아직 한창 잘나가던 때였다. 아빠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성과 뛰어난 능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공포가 다른 모든 생각을 몰아냈다. 아빠는 생각하는 자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려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따라서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품위를전혀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아빠는 죽음이란 게 남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인 양 그래서 자신은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없다는 듯, 그렇게 죽음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어린애처럼 굴었다. 아빠의 의식은 뛰어넘을 수도, 그 너머를 바라볼수도 없는 한계에 부딪혀 움츠러들었고, 아빠는 거칠게 반항했다. 여러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지만, 흐려지는 정신으로 고통받는 아빠만큼 힘겨워하는 사람은 본 적이없다. 아빠의 병세가 빠르게 나빠질 것이며 결국 목숨을 앗아가리란 것을 이미 다들 알고 있던 무렵,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그건 전혀 다른문제지." 아빠는 대답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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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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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가 딱히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는 편견을 갖게 하지만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힘들다. 대출사기와 대출의 늪에 빠져드는 이야기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처럼 상세하게 서술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서사는 현실 속 이야기같은 느낌으로 다가와 새삼스럽게 경각심을 갖게 되기도 한다. 

사실 가족의 부탁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줬는데 대출이자를 주지 않아 내 월급에서 몇년간 대출이자를 계속 냈던 기억이 떠오르며 원금은 커녕 대출이자도 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결국 내가 모아놓은 돈을 다 모아서 원금을 대신 갚아버린 것이 생각났다. 당시 내게는 전재산에 맞먹는 금액이었는데 대출이자를 부담한 금액을 생각하니 원금에 버금가는 금액을 지출했던 것이라 더 늦기전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서술트릭이 담겨있어서 책을 다 읽고난 후 뭔가 허를 찔린 느낌이 드는 건 독자로서의 느낌이고, 소설 속 속는 사람과 속이는 사람 중 실상 속이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싶다. 

소설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다시피 해 살아가고 있는 다카요의 이양기로 시작하고 있다. 아이가 있어 취업을 하는데도 제한적일수밖에 없고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어 월세도 밀려있고 집주인에게 퇴거명령까지 받고있는 상황이다. 취업이 되지 않으니 신용이 없어 대출을 받고 싶어도 받기가 쉽지 않다. 결국 불법 개인 사채업자에게 연108%라는 고이율로 대출을 받게 되는데 ......


어떤 방법으로 조금씩 대출금을 늘려 받게 하는지, 그렇게 하면서 결국 돈을 받아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방법들이 나오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 이상으로 속은 좀 매스꺼운 기분이었다. 서서히 늪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현실에서도 빚을 갚지 못할만큼 빚을 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돈을 빌리고 빌린 돈으로 사치부리며 사는 사람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소설 속 인물들의 절박한 사정보다는 이번만, 조금만 더 하면서 자꾸만 대출액을 늘려가는 인물들에게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더 기분이 나쁜 건 그렇게 사람들을 늪의 수렁으로 조금씩 몰아넣고 있는 사기꾼들이 세상 곳곳에 넘쳐나게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이야기를 읽는 재미만으로 읽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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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5-10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출사기가 소재로 등장하는 책인가요. 일본 작가의 책이니까 설정상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겠지만, 비슷한 점도 많을 것 같아요. 부채도 자산이라는 이야기도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도한 빚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불법 사금융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chika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영화번역가로서 가장 기분좋은 순간은 ˝내가 번역한 영화를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줄 때˝가 아니라 ˝관객들이 저렇게나좋아해주는 영화를 내가 번역했을 때다. 얼핏 같은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주는 영화를 내 품에 안을수 있었던 행운. 내 손으로 고이 보듬어 내놓을 수 있었던 행운.
그 모든 건 행운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때 그 할머니 관객의말을 듣고 느낀 감정의 정체는 감사함이었다. 그 우연한 행운에대한 감사함.112



내가 번역했다는 것 따윈 몰라줘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인생영화 누군가에게 소중한 영화를 내가 번역할 수 있었다는 감사함과 뿌듯함이면 충분하다. 영화 한 그릇 만족스럽게 먹는 모습을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나는 참 괜찮은 직업을 골랐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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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고 배우기를 반복하며 굳은살이 박이는 성실함. 이런미련한 성실함은 단순해 보여도 아무나 쉬이 가질 수 없는 재능이다. 조직의 입장에선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 치명적일 때가있다는 건 인정해야 하지만 개인에겐 결과보다 노력이 중요할 때도 있다. 이상론, 낙관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렇다. 갈수록 재능이니 결과니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노력과 성실을 저평가하는분위기가 나는 아주 고깝다. 뭔가를 성취해낸 사람을 보면 노력의방향을 잘못 잡았을지언정 바보 같고 우직하게 자기 일을 열심히했던 사람들인 경우가 훨씬 많다.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실제로 주위에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다. 노력과 성실도 재능이라는 걸 언제쯤 이해할는지.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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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모과나무를 맨 처음 심은 이는 누구였을까
오경아 지음 / 몽스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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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님의 생활에세이이다. 사실 '생활에세이'라고 했지만 오랜 세월 정원을 가꾸며 식물과 함께 하는 삶에서 깨달은 지혜는 새겨들을 이야기가 많다. 식물과 동물을 구별할 필요없이 모든 생명체는 닮은 꼴로 살아가고 있으며 각자 나름의 수고로움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지만 구체적인 식물의 성장과 같이 비유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한꼭지 한꼭지가 다 마음에 남는다. 


"가드닝을 잘할 수 있는 노하우가 뭔가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 이런 대답도 한다. '그런 거 없습니다. 저 역시 아무리 배워도 매번 풀한테 이겨본 적이 없는데요'... 필요한 건 노하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어쩌다 들여다보는 정원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속에 정원이 자리하면 그게 가장 좋다"(142)


어렸을 때는 꽃이 피는 것만 좋아했었는데 - 물론 지금도 꽃을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 지금은 쑥쑥 자라나는 다육이들도, 잎의 모양과 색이 독특해서 꽃처럼 보이는 관엽식물, 공기정화를 한다고 해서 키우기 쉽다고 해서 등등 꽃이 피는 녀석들보다 오히려 다양한 식물을 더 많이 키우고 있다. 솔직히 정원이라고 할 수는 없는 화분 몇개를 놓고 간혹 너무 크게 자라서 큰 화분으로 옮긴 후 마당에 방치해두는 식물들도 하나 둘 늘어가고 있어서 내가 가꾼다 하지 않고 얘네들이 알아서 잘 커주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오경아님의 가드닝을 잘 할 수 있는 노하우에 대해 '매일의 일상 속에 정원이 자리하면 그게 가장 좋다'라는 말을 새겨 보게 된다. 


특별히 식물을 살리기 위해 약을 쳐본적이 없지만 거의 말라 죽어가고 있는 식물을 포기해본적도 없기는 하다. 벌레를 없애기 위해 약을 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식물은 자체 화확물질을 생성해내어 올해는 벌레에게 먹히더라도 벌레가 번식을 하지 못하게 하는 물질을 생성해 미래를 도모(?) 한다고 하니 오늘을 사는 식물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식물이 아닌가.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은 새삼스럽게 식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지구환경의 변화로 많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 중 하나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었다. 약을 치는 것도 그렇지만 양봉을 하며 설탕으로 벌을 키우고 있어서 꽃이 피면 수정을 하는 역할을 하는 벌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꽃 사진을 찍으려면 늘 찍히는 꿀벌이 어느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그래도 우리 집 마당에 비파나무 꽃이 필 때쯤이면 꿀벌이 모여드는 모습을 확인한 것으로 조금은 위안을 삼아본다. 꽃이 피어 사진을 찍으려면 늘 벌이 모여들어서 꽃과 같이 찍었으니, 올해도 지구환경을 위해 소소한 행동 하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당의 비파나무는 비파를 먹다가 씨를 묻어뒀는데 내 키만큼 자라났고 5년이 되어가도록 열매를 맺지않아 잘라버리자는 것을 1년만 더 기다리면 열매가 열린다고 하며 기다렸는데 그 해에 첫 비파열매가 많이 열려 내심 뿌듯해했었다. 해피트리도 꺾어진 가지를 물에 담궈뒀더니 뿌리가 나와 화분에 옮겨심고 지금은 나무로 성장해가고 있다. 물론 실패도 많지만 이렇게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는 식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늘 성격이 급한 사람들에게, 특히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나 교사들에게 나의 이 경험을 이야기하곤 한다. 진즉에 죽어버렸을 것 같은 식물이지만 끝까지 정성을 다하고, 몇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같지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열매를 보게 된다고. 그리고 사실 나무는 내가 가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명력을 갖고 자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올해도 나는 맘대로 안 되는 정원이라는 우주에서 라벤더에게 잘 살아보라고 독려도 하고, 쑥에게 너는 왜 이렇게 사냐고 원망도 하고, 꽃 피면 찾아오는 벌들에게 그 꿀은 어디에 모아두고 사냐고 묻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 볼 참이다"(67)

나도 그렇게 살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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