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아빠는 말하려는 의지를, 혹은 말할 능력 자체를 상실했다. 왜 갑자기 침묵하는 것인지 의사들조차 의학적 이유를 대지 못했다. 나는 아빠가 의식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본다. 정신 능력의 약화는 아빠 같은 사람이 견디기엔 너무 버거운 공포였을 테니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아빠 나이는 고작쉰셋, 아직 한창 잘나가던 때였다. 아빠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성과 뛰어난 능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공포가 다른 모든 생각을 몰아냈다. 아빠는 생각하는 자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려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따라서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품위를전혀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아빠는 죽음이란 게 남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인 양 그래서 자신은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없다는 듯, 그렇게 죽음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어린애처럼 굴었다. 아빠의 의식은 뛰어넘을 수도, 그 너머를 바라볼수도 없는 한계에 부딪혀 움츠러들었고, 아빠는 거칠게 반항했다. 여러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지만, 흐려지는 정신으로 고통받는 아빠만큼 힘겨워하는 사람은 본 적이없다. 아빠의 병세가 빠르게 나빠질 것이며 결국 목숨을 앗아가리란 것을 이미 다들 알고 있던 무렵,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그건 전혀 다른문제지." 아빠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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