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수업 -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예술 강의
문광훈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2011년에 출판된 '영혼의 조율'을 새로이 수정, 편집한 책이라고 한다. 단지 '미학'수업이라는 제목에 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서문에서 예전의 제목을 읽을때까지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책을 한꼭지씩 읽다보니 새삼 왜 그 제목을 썼는지 알것같다. '미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미학이 아니라 삶과 관통하는 미학을 배우게 되었다.

 

아름답다, 라고 느끼는 것은 개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사실 나는 스스로 미적 감각이 없다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생각때문인지 책을 통해서라도 많은 그림을 보고 디자인뿐만 아니라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접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많이 알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러다보니 '아름다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나는 나의 주관적 관점으로 아름다움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감각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는다. 이 이어짐 속에서 두 세계의 대립을 넘어선다. 미는 이어짐이고 넘어섬이며, 이 넘어섬 속의 균형이다. 그리고 이 균형 속에 행해지는 반성이다. 반성의 능력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반성으로 하여 대상의 미는 나의 미가 되기 때문이다."(139)

 

이 책에서 저자는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유와 연결되지 못하는 미는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연은 그것을 ‘읽을 만한 것‘으로 우리가 읽어낼 때, 그렇게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된다."(239)라는 말에 잠시 멈칫하게 된다. 아름다움에 대해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책을 읽어가다보면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미학이라고 하면 흔히 그림을 떠올리곤 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림, 문학,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물론 사유속에서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타인과 이어지는 삶의 모습, 자연과 어우러지는 우리의 삶에 대해 떠올리며 관계성을 인식하게 하고 있다.

자꾸만 이 책의 느낌을 추상적으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있다. 뭔가 막연하게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는 것이 참된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고 언저리만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보다. 뭔가 어려울 것 같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가가 색채로 사물의 드러남과 숨음을 보여주듯, 시인은 언어에 기대어 사물과 하나가 되고, 그 사물처럼 느끼며, 이 느낌속에 사물의 숨은 배후를 드러낸다.
세계의 풍경은 그 세계를 느끼는 내 마음의 풍경이다. 풍경과 마음을 하나로 잇는 것이 시이고 그림이고 예술이다."(224)

지금 내게 세계의 풍경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생각해볼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초 보태니컬 아트 세트 (본책 + 컬러링북) - 전2권 기초 보태니컬 아트
송은영 지음 / EJONG(이종문화사)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언제나 그림에 대한 열망은 있으면서 연습은 하지 않는 게으름때문에 드로잉 연습도 조금씩 하다가 말곤 해서 그럼 실력은 전혀 늘지 않는다. 실사 그림은 포기하고 귀여운 일러스트라도 연습해보자며 일러스트 그리기책을 보지만 게으른 천성은 어디가질 않아서 그림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이다. 그러면서 또 여전히 그림을 잘 그려보고 싶어서 '기초'라는 말이 붙으면 다시 시도를 해 보고 싶어진다. 기초보태니컬 아트 책은 그렇게 해서 또 펼쳐보게 된다.

 

보태니컬 아트는 간단히 말하자면 그 대상인 식물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드로잉의 기초는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그 대상을 정확하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알고 있는데 나같은 생초짜는 무작정 대상을 보면서 그리는 것보다 이런 가이드가 되는 책을 보면서 형태를 잡아가며 드로잉을 하고 순차적인 채색 방법을 배우고 연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이 책도 다른 많은 보태니컬 책과 그리 다르지는 않지만 가장 크게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은 채색과정의 세세함이 묘사되어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 드로잉을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컷은 많지만 채색의 과정을 이렇게 많은 그림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색연필로 채색을 하면서 대충 흉내내기만 했었는데 책을 펼쳐드니 조금 더 정성이 들어간다. 사진 컷으로 보면 별 것 아닌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나름 3,4일에 걸쳐 색을 덧칠하면서 명암을 표현하고 꼼꼼하게 색을 넣은 것이다. - 여기서 한가지 조금 아쉬운 것은 사실적인 색감을 위해 저자는 색연필의 번호까지 다 적어주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48색 색연필도 찾지 못하고 겨우 찾아낸 24색 색연필로는 똑같이는커녕 흉내내기도 쉽지는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색연필로는 똑같은 색감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보이지만 그래도 책에 나와있는 채색 과정을 보면서 최대한 명암과 꽃의 사실적인 결을 살려내는 것을 배울수는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이렇게 책을 보면서도 제대로 그리는 것이 힘들지만 책을 통해 연습을 하다보면 직접 식물을 보면서 세밀화를 그려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기대를 조금 해본다.

그때가 되면 이 책과 같이 나온 컬러링북을 꺼내어 색을 칠해볼까, 싶다. 한장씩 떼어내어 선물할수도 있고 맘에 드는 꽃은 액자나 장식용 소품으로 이용할수도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를 믿고 따르기도 어렵지만 드물게 믿는 것조차 헛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고 또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실망하는가. 잘못이 쌓이고 쌓이면 용서란 말도 꺼내는데 주저하게 된다. 그럴즈음 용서받을 것은 지나간 일만큼이나 다가올 일임을 깨닫게 된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지금까지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과오는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가 알고 믿고 행하는 것에 희생될 뿐이다. 더 슬픈 것은 이런 회한마저 곧 휘발될 것이라는 점이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가장 깊은 슬픔은 이 생존의 현실이 훼손되는 데 있다.

한탄과 부정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 기쁨을 북돋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투정이 될 수도 있다. 삶의 진실 하나는 노래하든 울든, 이렇게 '뭐라고 하는 순간에도 내가 소진해간다'라는 사실이다. 일할 때도 우리는 늙어가고, 쉴 때도 생명은 녹아든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소중한 것은 여기 있음-지금 살아 있음일 것이다. 삶의 경이를 새롭게 발견하는, 발견하려는 일일 것이다. 힘겨워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삶 속에서가 아닌가. 우리가 죽음을 향유할 수는 없다. 생존의 놀라움에 비하면 슬픔은, 그것이 아무리 크다해도, 사소한 것일 수 있다. 적어도 근원적인 사항은 아니다.

이 세상의 일과 하루의 저녁과 다시 아침으로 이어지는 나날들. 곳곳에 침묵이 어려있고, 그 침묵에서 나는 길고 짧은 죽음을 본다. 그림자들은 고개 숙인 채 울고, 생활의 먼지는 진군하는 적들처럼 우리를 덮친다. 나무와 의자와 하얗게 펼쳐진 종이 그리고 지우개. 지워야 하고 또 기억해야 할 무수한 것들. 우울도 해묵으면 에너지가 된다던가.

곪고 찢어진 마음들이 만나 서로 위로받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부질없는 기대는 실망을 낳고, 실망은 쌓여 환멸이 된다. 환멸 속에서 모욕은 자산처럼 쌓여가지만 그래도 명심하자. 무엇보다 먼저 존중돼야 할 것은 자기자신이라고. 나의 안위로부터 세계의 평화는 발원한다고. 개체의 안녕은 물과 공기처럼, 또 뿌리처럼 근본적이다. 삶의 많은 의미는 아마도 이 뿌리를 타고 올 것이다. 그 거대한 뿌리는 땅 밑으로 내 속으로 나 있다. 89-91

 

 

 

 

 

 

호들러의 [삶에 지친 자들]

이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모두 지쳐있다. 두 어깨는 축 처지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우리는 발치를 내다본다. 이 땅의 도시와 거리, 사람과 그 관계는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만물들로부터의 만인의 격리, 여기에 도시인들의 깊은 슬픔이 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 중 이 중앙의 인물이 가장 절망적으로 보인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쥔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두 팔을 맥없이 늘어뜨리고 있다. 겨우 남아 있던 신앙의 한 가닥마저 그는 포기한 것일까? 90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ika 2019-04-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는다. 이 이어짐 속에서 두 세계의 대립을 넘어선다. 미는 이어짐이고 넘어섬이며, 이 넘어섬 속의 균형이다. 그리고 이 균형 속에 행해지는 반성이다. 반성의 능력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반성으로 하여 대상의 미는 나의 미가 되기 때문이다.ㅣ (139)

화가가 색채로 사물의 드러남과 숨음을 보여주듯, 시인은 언어에 기대어 사물과 하나가 되고, 그 사물처럼 느끼며, 이 느낌속에 사물의 숨은 배후를 드러낸다.
세계의 풍경은 그 세계를 느끼는 내 마음의 풍경이다. 풍경과 마음을 하나로 잇는 것이 시이고 그림이고 예술이다.(224)

자연은 그것을 ‘읽을 만한 것‘으로 우리가 읽어낼 때, 그렇게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지각하는 합목적성은 주관적으로, 그 원천은 비록 주관적이지 않지만, 매개된다. 그것은 성찰하는 주체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239)

 
걸어서 세계 속으로 : 일본편 - 걸세 PD의 일본 여행 베스트 12 걸어서 세계 속으로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제작팀 지음 / 봄빛서원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저런 여러가지 이유로 여행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래서인지 대리만족처럼 여행프로그램을 자주 챙겨본다. 그런 프로그램중에서 어머니와 공통적으로 보는 프로그램이 걸어서 세계속으로다. 어머니는 조금 길게 걷는 게 힘들어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힘들어하시는데 늘 편하게 방에 앉아 여행을 떠난다고 하신다. 물론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며 떠나는 세계여행이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이 책으로 나왔다. 티비 프로그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분자분 설명을 하면서 이색적인 영상이 펼쳐지는데 그걸 책으로 보여준다면 티비 영상만큼 매력적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책을 펼쳐드니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조곤조곤 설명하던 피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막 들리는듯한 느낌이 들곤 했지만.

 

이 책은 걸어서 세계속으로에 소개된 일본의 여러 도시를 소개하고 있다. 여행에세이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그리 낯설지 않은 도시의 이야기지만 이 책만이 주는 매력은 분명하다. 대부분 핫스팟을 소개하고 유명한 관광지와 지리적인 정보를 주는 여행도서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 주를 이루는 에세이와는 또 다르게 여행자와 현지인 사이의 어디쯤이라고 짚어보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규슈나 시코쿠의 올레길은 제주올레를 벤치마킹하여 탄생한 길이기에 익히 들어알고 있고 도고온천이나 교토의 풍경은 익숙한데 미술과 건축 이야기로 먼저 접했던 이시카와 이야기는 낯익으면서도 또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축제를 통해 보는 지역의 특색과 주민들의 이야기는 그냥 스쳐가는 여행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좋고 그러면서도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아 여행자로서의 이질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사실 영상이 조금 적게 나올뿐 - 사진도 꽤 많이 담겨있으니 영상이 없다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 티비속의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그대로 책에 담겨있다.

교토와 고베지역을 빼면 가본적이 없는 곳들이다. 티비에서 화면으로만 보며 입맛을 다시던 우동집도 나오고 늘 가고 싶다고 말로만 떠들어대던 온천도 보인다. 지금 당장 갈 수 없으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책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며 휴식같은 여행을 떠나본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도리이로 붉은 터널을 이룬 사진을 보고 생각났다. 산책으로 통과하기에는 좀 길어 기념 사진만 한 장 찍고 돌아나오는데 지나치는 트럭 한대가 눈길을 끌어당겼었는데, 도리이가 토막으로 잘려 실려나가고 있었다. 돈으로 도리이를 산다고 들었는데 그 조각들을 보면서 저걸 넣은 사업가는 망했을까? 라는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함께 갔던 친구도 잘려져 나가는 도리이는 처음본다고 했었는데.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가끔 들춰보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여행을 떠나게 될 때도 한번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아니, 조만간 꼭 펼쳐볼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지만 일단 여행지로서는 가까운 것이 먼저일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급하게 시집을 살 예정은 아니었으나.

제목이 마음 한구석을 찌르고 있는 어느 날, 이 시집을 사야겠구나 싶은 생각에 다른 책들을 제끼고 덜컥 구입을 했다.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시편들을 낯섦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은 공간이 아니었다면 책을 펼쳐들고 참았던 눈물이 또 베개를 적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띄엄띄엄 글자들을 읽었다. 꿈은... 무엇일까.

 

아플 때, 가끔 아픔이 오는 곳을 생각한다. 바닥을 구르던 가시덤불이 어느 웅덩이에 처박히듯이, 고통은 어디로부터 날아와 내 몸속에 뛰어드는 것일까 아니면 , 폐가의 전선들처럼 치렁치렁 늘어진 고통의 핏줄을 찾아 누가 두꺼비집을 올리는 것일까?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면 들을 만큼 들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다. 그러나 고통은 아는 것이 아니라 현전하는 감각이기에, 영원히 젋다. 고통은 몸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마음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그 끝에 죽음이라는 거울을 맑게 세워놓음으로써 삶 건너편을 사유하게 만든다. 다시말해 '고통'은 개체(나)가 개체 바깥으로 열어놓은 통로이자 그 바깥과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이미 '나'로 가득차 있어서 고통으로밖에 연결되지 않으며 고통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나 아닌 것'에 대한 감각을, 우리는 시로 쓴다.

 

인생의 고통은 늘 은유적으로 이야기되어 왔지만, 고통을 은유적으로 생각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고통은 인간의 삶 속에 있지만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며, 오히려 인간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비인간적인 지렛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인간의 것임을 자각하는 일은 이 가혹한 삶의 굴레에서는 쉽지 않기에 우리는 그 자각에 필요한 재료로써 시를 사용해왔는지도 모른다.

 

신용목, 발문. 시작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스물다섯 번의 행운과 스물일곱 살의 불행. 행운이었을까?

 불행이긴 할까.

 신체를 잘라내고 타낸 보험금.

 천만다행을 믿어?

 날개도 다리도 믿지 않아, 시간을 공평하게 자르지 못하는 것처럼, 삐뚤빼뚤하게 잘린 신체 절단 마술처럼, 어느순간부터 실험이고 시험인지. 칭찬과 비난과.

 비가 오고 개는 순간이 나뉘고 있어. 표구사가 입술을 찢으며 웃을 때, 박수가 태어나네. 변태해 날아가는 비둘기? 종과 종 사이. 몸이 잘리는 기쁨과 멀쩡히 살아날 거라는 실망 사이.

 잘리기 전과 후, 다시는 같아질 수 없어.

 매초 다른 사람으로 분리되고 있잔항. 괜찮아?

 괜찮아.

 강렬한 긍정 ㅇ속에서 다시

 태어나. 언니의 냉담에 동참하며. 엄마의 믿음에 부응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세례의 끝. 미개한 신앙인 타고난 모으로

 입술을 찌으며 웃을 수 있어.

 

권민경, 플라나리아 순간, 일부.

 

 

종양의 맛, 을 읽는 순간 처녀의 몸으로 잉태라는 걸 모르고 뱃속에 커다란 종양을 키워내고 있었음을 새삼 떠올렸고 그 모든 것이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배를 가르며 내 몸속의 장기를 잘라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서도 그중 다행인것은 실손보험도 없는 상태에서 중증환자로 수술을 하면 수술비는 적게 들겠다는 안도감. 이런것이 천만다행인건가?

그래서 권민경의 시를 꾹꾹 누르며 읽어내려갔다. 비행기를 타려고 할때마다 가방도 내려놓으세요,라는 말에 의료기기를 담은거예요,라고 말하지만 굳이 다가와서 손으로 훑고 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주머니 풀고 소변줄을 보여준다. 이제 그 기능을 상실한 신장을 떼어내면 한밤중에 갑자기 온몸에 촉수처럼 관을 꽂은 외계 생물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도 사라지게 될까. 과연 이런 것이 천만다행일까?

 

그래도 살아가고 있어, 라는 건 날아오르는 꿈을 가진 희망인걸까.

꿈은 또 날아가네 절망의 껍질을 깨고. 넥스트. The Dream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