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믿고 따르기도 어렵지만 드물게 믿는 것조차 헛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고 또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실망하는가. 잘못이 쌓이고 쌓이면 용서란 말도 꺼내는데 주저하게 된다. 그럴즈음 용서받을 것은 지나간 일만큼이나 다가올 일임을 깨닫게 된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지금까지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과오는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가 알고 믿고 행하는 것에 희생될 뿐이다. 더 슬픈 것은 이런 회한마저 곧 휘발될 것이라는 점이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가장 깊은 슬픔은 이 생존의 현실이 훼손되는 데 있다.

한탄과 부정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 기쁨을 북돋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투정이 될 수도 있다. 삶의 진실 하나는 노래하든 울든, 이렇게 '뭐라고 하는 순간에도 내가 소진해간다'라는 사실이다. 일할 때도 우리는 늙어가고, 쉴 때도 생명은 녹아든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소중한 것은 여기 있음-지금 살아 있음일 것이다. 삶의 경이를 새롭게 발견하는, 발견하려는 일일 것이다. 힘겨워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삶 속에서가 아닌가. 우리가 죽음을 향유할 수는 없다. 생존의 놀라움에 비하면 슬픔은, 그것이 아무리 크다해도, 사소한 것일 수 있다. 적어도 근원적인 사항은 아니다.

이 세상의 일과 하루의 저녁과 다시 아침으로 이어지는 나날들. 곳곳에 침묵이 어려있고, 그 침묵에서 나는 길고 짧은 죽음을 본다. 그림자들은 고개 숙인 채 울고, 생활의 먼지는 진군하는 적들처럼 우리를 덮친다. 나무와 의자와 하얗게 펼쳐진 종이 그리고 지우개. 지워야 하고 또 기억해야 할 무수한 것들. 우울도 해묵으면 에너지가 된다던가.

곪고 찢어진 마음들이 만나 서로 위로받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부질없는 기대는 실망을 낳고, 실망은 쌓여 환멸이 된다. 환멸 속에서 모욕은 자산처럼 쌓여가지만 그래도 명심하자. 무엇보다 먼저 존중돼야 할 것은 자기자신이라고. 나의 안위로부터 세계의 평화는 발원한다고. 개체의 안녕은 물과 공기처럼, 또 뿌리처럼 근본적이다. 삶의 많은 의미는 아마도 이 뿌리를 타고 올 것이다. 그 거대한 뿌리는 땅 밑으로 내 속으로 나 있다. 89-91

 

 

 

 

 

 

호들러의 [삶에 지친 자들]

이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모두 지쳐있다. 두 어깨는 축 처지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우리는 발치를 내다본다. 이 땅의 도시와 거리, 사람과 그 관계는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만물들로부터의 만인의 격리, 여기에 도시인들의 깊은 슬픔이 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 중 이 중앙의 인물이 가장 절망적으로 보인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쥔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두 팔을 맥없이 늘어뜨리고 있다. 겨우 남아 있던 신앙의 한 가닥마저 그는 포기한 것일까?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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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19-04-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는다. 이 이어짐 속에서 두 세계의 대립을 넘어선다. 미는 이어짐이고 넘어섬이며, 이 넘어섬 속의 균형이다. 그리고 이 균형 속에 행해지는 반성이다. 반성의 능력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반성으로 하여 대상의 미는 나의 미가 되기 때문이다.ㅣ (139)

화가가 색채로 사물의 드러남과 숨음을 보여주듯, 시인은 언어에 기대어 사물과 하나가 되고, 그 사물처럼 느끼며, 이 느낌속에 사물의 숨은 배후를 드러낸다.
세계의 풍경은 그 세계를 느끼는 내 마음의 풍경이다. 풍경과 마음을 하나로 잇는 것이 시이고 그림이고 예술이다.(224)

자연은 그것을 ‘읽을 만한 것‘으로 우리가 읽어낼 때, 그렇게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지각하는 합목적성은 주관적으로, 그 원천은 비록 주관적이지 않지만, 매개된다. 그것은 성찰하는 주체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