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남양성지의 뜨락이래요. 이 사진을 선물로 보내준 선생의 말로는 저 뜨락의 꽃들이 성지의 기도하는 소리들로 저리 아름다운 거라고 하시더군요. <잿빛달>을 받았답니다. 첫 장을 넘기니 잿빛달은 고작 여덟 쪽밖에 안 되네요. 일행과 헤어진 내가 시가나와 방향의 전차를 타고 졸고 있는 후줄근한 소년 옆자리에 앉습니다. 누군가 소년의 무릎에 물건을 내려놔도 되느냐고 묻는데 졸던 소년은 안 된다고 해요. 올려놓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자신의 짐을 끌어안습니다. 그러다 나는 소년에게 묻지요. 어디까지 가냐고. 소년은 우에노에 간다고 말해요. 나는 대답하지요. 그럼 차를 잘못 탓는걸. 전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래요. 소년이 창밖을 보려고 몸을 일으키다 중심을 잃고 내쪽으로 쓰러져요. 이 짧은 소설의 백미는 여기에 있군요. 내가 어떻게 했을까요. 치카언니 같음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이건 비밀! 근데 소설의 끝에 소년은 이렇게 말하는군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리고 마지막 줄은 이렇게 되네요. "1945년 10월 16일의 일이었다."

제가 요즘 전쟁에 관한 책들을 계속해서 치를 떨며 읽게 되는 것은 사실은 저런 거예요. 자기의 짐은 소중한 것인데,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어도 된다는, 실은 방향도 갈 곳도 없어져버린 시대에 개개인의 될대로 되라는 식의 생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1945년이라는 시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결코 "아무래도 상관없어"라고 말하면 안 되겠기에. 잉, 짧게 쓰려고 했는데 또 길어졌네요. 우울함은 우울함에게 줘버리고, 비오는 날은 우산을 쓰자, 알지요!! 고맙습니다. 

<Timothy Grub> - Vashti Bunyan
[Just Another Diamond Day] - (1970, Dicristina St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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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0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도 곱고^^

chika 2006-05-1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뭔가 이상하다...하며 봤는데 내 서재...;;;;;
비오는 날은 우산을 써야 되고...엄.. 내 쪽으로 쓰러진 소년을 어떻게 했을까요?
음...정말 궁금하다. 내가 어찌할런지.... ^^;;;;;;

돌바람 2006-05-1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책 또 받았어요. 어제 다녀가신 택배 아저씨랑 사귀겠는걸요. 어찌나 순박하게 웃어주시는지. 이런 책이구나, 아침 나절에 이젠 아예 집기랑 농가 기물까지 뿌시고 있다는 대추리 소식 접하고 이를 어쩐다냐, 속이 푹푹했었는데 속은 여전하지만, 책은 고마워서 어쩐다냐. 언니야, 고맙다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