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주식투자는 처음이지?
황우성.김태경 지음 / 행복우물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치투자를 위해 핵심이 될 최소한의 기업분석, 재무제표 상식을 근간으로 기술적 분석과 심리게임까지를 간추리고 있다. 다만 기업분석의 장에 있는 투자를 위한 재무제표에는 성의가 느껴지지만 기술적 분석 장과 심리게임란은 일반 상식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심플함이 강점이자 취약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물이 지각되는 바대로 존재한다면, 시인은 그 지각의 특이성과 확장성으로 주목받는다. 시인이 드러내는 지각의 특이성은 항시 다르게 보기, 낯설게 보기의 결과로 나타난다."


"시인은 한 사람의 생애를 살되 한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 한 시인은 여러 사람으로, 여러 겹의 생을 살아낸다."


"시는 씌어지면서 지워진다. 이것이 시가 품은 비밀스러운 내면성의 원리이다. 정작 시에서 씌어진 것들, 언표된 표면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중략... 시들의 표면은 심층을 갖지 않는 한에서 명료하고, 무의식의 외침 같은 다양한 선을 머금은 심층을 갖는 한에서 모호해진다. 시력이 나쁜 비평가들은 그 난해와 모호함이 만드는 강렬함을 견디지 못한다."


"좋은 시는 항상 말의 부재 속에서 나타난다."


"시인들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시는 말을 채집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일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한다."


""시의 언어는 기능하는 것이지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언어가 가진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쓰는 언어 놀음이다. 당연히 시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와 맞물린다."


"시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뚫고 우리에게 온다. 좋은 시들은 예외없이 해석할 수 없는 심연을 갖고 있다. 시는 해석의 불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지속성을 얻는데, 이는 시가 말할 수 없는 것의 "말함"이기 때문이다."


"시인을 '견자(見者)'라고 한다....중략... '봄'과 '앎'은 본디 하나다. 시가 태어나는 찰나는 의식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그 대상이 마음에 도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찰나는 기지의 것에서 미지의 것을 직관하는 순간이다....중략... 시인은 이 빛, 이미지로 온 것에 언어를 덧입힐 뿐이다. 시인은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다."


장석주 시인은 은유를 더욱 독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이 책을 쓰고서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을지 모르겠다. 시인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시인을 이 시대의 샤먼이라한다거나 하는 경우까지는 그렇다해도 시는 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설명이 이 책의 전반이라고 말해도 될 듯 싶다. 이 책을 한번 읽고서 이해가 쉽지 않아 바로 다시 읽기 시작한 분도 있다고 하는데 두번 읽는다고 별다를 것 같지 않은 난해와 모호함이 깃든 책이다. 시가 좋아 간혹 시를 쓰기도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시력이 나쁜 비평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이 저작의 난해와 모호함이 견디기 쉽지 않았다. 이 책을 깊이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철학자도 이 시대의 샤면도 되기에 합당한 분들이지 않은가 싶다. 시인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뭔가 아련해지면서도 설익은 이해가 교차하게 하는 저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각과 우연을 넘어서 - 과학이 외면해온 경이로운 의식 체험의 기록들
스타니슬라프 그로프 지음, 유기천 옮김 / 정신세계사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가 심령적 위기라고 언급한 내용은 누구나 인생을 살며 맞이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삶에 대한 총체적인 회의... 주로 예전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인생무상을 이야기 하는 대사가 등장하던 그런 상황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누구나의 삶에서 반드시라고 할만큼 겪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배우자의 배반, 자식의 실망스런 일탈, 시종일관하던 일의 전도(사업의 실패 등), 믿어마지 않던 동료나 친구 후배 형제의 배신 또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사고나 사건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 상태 등 우리 누구나가 한번쯤 삶의 여정에서 겪을 법한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누구나 그 삶의 과정 속에서 방황하고 선택하며 후회하거나 뿌듯해할 감정적 기복과 교훈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여정을 저자는 우리가 진화 내지는 각성할 기회라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전체의 내용이 저자 자신과 저자의 전 부인의 체험이 주를 이루며 다분히 개인적인 체험의 기록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다. 책을 읽는 중도에 지루해 읽기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완독을 마친 지금 인생 전체가 거대한 교육의 장이라는 인생의 모든 체험과 행위가 가르침의 도상 위에 있는 과정이라는 저자의 관점이 새로이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가 심령적 위기의 상태에 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생의 의미를 일러주는 우연의 연속이 거듭된다고 한다. 우리가 모태에 잉태되어 있던 순간과 출생 과정 그리고 출생 이후의 의식차원에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모든 여정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에서 지닌 자각 못할 만큼 뿌리 깊은 정서적 관계적 문제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생을 기억하거나 우리로서는 정신질환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 상황까지도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 각성시키는 여정이 된다고 한다. 


사실 전생 퇴행이 우리의 내외적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음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가 문제라 인식하던 부분들이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사회에 대한 생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얻을 기회라는 것 역시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관점이다. 


하지만 그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책이 인생의 어느 순간 이를테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심령적 위기 상태에 놓인 누군가에게 주어진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래장의 의미나 불성론의 의의나 또 이태영님의 <요가>에 수록된 쉬바상히타 3장 74절의 카야비우하(kayavy uha)에 대한 주석(전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 내생에 숙명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육체를 만들어 미리 업의 결과를 모두 경험하게 하여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게 한다)에 대한 진정한 심의가 다시 와닿는 계기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그 순간이 생의 고난들로 부터 새로이 눈뜨며 피어날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스티븐 휠러씨의 <이것이 영지주의다>를 보자면 영지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불교나 요가의 깨달음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측면, 또 하나는 백마법의 멜카바 명상처럼 단계적으로 우리의 의식을 상승시켜 나가는 가르침을 담은 환영의 측면...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적극적 심상화'등의 의미나 꿈과 환상 등을 분석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마치 영화처럼 -[머쉬니스트]나 [매치스틱맨]과 같은 영화들처럼-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슈퍼내추럴에 근거하자면 더욱 와닿겠지만)... 그것이 아무리 심대한 혼란과 아픔을 통해야 하는 것일지라도 끝내 우리를 치유와 성장으로 이끄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많이 아프고 싶지만은 않은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곧 인류 전체가 심령적 위기 상황에 놓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하라 2017-08-19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08.01.30 타사이트에 올린 글을 옮겨옴

한수철 2017-08-2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일상적 위기 상황에서처럼, ‘심령적 위기 상황에 놓이는 순간‘에도 결국 문제의 타개를 위한 자기긍정의 ˝회복탄력성˝- 회복탄력성은 ‘우연의 세계라는 책에서 가져온 용어입니다-의 강화가 해결 과정에 있어 주요한 관건일 것 같은데요.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이하라 2017-08-20 09:55   좋아요 0 | URL
회복탄력성만큼이나 당면한 상황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주어진 상황 그 자체, 심령적 위기 상황 그 자체가 심령적 문제 해결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내용이기에 회복탄력성에 대한 것은 주제와 거리가 좀 있는 내용입니다

한수철 2017-08-20 10:19   좋아요 0 | URL
음, 마침 동네 도서관에 책이 있네요. 비가 그치면 빌려와야겠습니다. 모쪼록, 빠른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성격이 급한 편이라.ㅎㅎ^^

이하라 2017-08-20 10:53   좋아요 0 | URL
약간은 지루한 책이지만 즐거운 독서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는 시 - 시인 최영미, 세계의 명시를 말하다
최영미 / 해냄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시인과 독자의 감성 즉 마음이겠으나 

시를 완성하는 것은 시대일 것이다 


물론 시라는 것이 굳이 시대를 노래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의 소회와 감상을 담음에서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나, 

개인적 성향인지 모르겠지만 잠언 같은 시들에 문득 깨우침을 얻고 

시대를 넘나드는 다가섬에 감격스울 때가 더 좋다 


최영미 시인이 권하는 55편의시 

[내가 사랑하는 시]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 55편의 시 모두에서 

감동을 느낀 것도 아니고 여류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에 파문을 남긴 

시들에 공감을 얻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최영미 시인의 감성을 두드린 시들이 내게 다가와 준 경우도 있었다 

더욱이 가깝고 먼 어디에서나 일고 있는 사건사고와 전쟁과 테러, 재해와 질병이 

견뎌내기 버거운 이 시대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누구나가 공감할 만한 시들이 있다 


존 던의 '명상17' 중에서 

누구든 그 스스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 중략...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느니. 


왜 이스라엘은... 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왜 말레이기를 격추한 우크라이나 또는 반군들은 이 시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에게, 레이디스코드 은비양과 리세양의 죽음을 불러온 안전불감증이 만연한 이 사회에도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 

에볼라와 마버그열병, 뎅기열, 호흡기증후군 등 사건사고, 전쟁, 테러, 자연재해 이외에 지독한 전염성 질병까지도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이 시대는 누구나의 귓가에 울리고 있는 종소리이다.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가 궁금해 할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눈떠야 한다. 


'코코아 한 잔'이라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도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을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후략... 


꼭 테러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태로 가자지구 거주민들을 보며,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를 보며, 또 그외의 독립 열기가 고취되고 있는 지역들의 대립을 보며 이 시가 와닿기도 했다. 

(허나 결코 IS 같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이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날로 격화되고 있는 이 시대는 '4천의 낮과 밤'이란 시에서 다무라 류이치가 말했듯 시를 완성하기 위해 아름다운 것들이 사살되고 암살되고 독살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시대가 끝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기형도의 시 '빈 집'에서 처럼 사랑을 잃고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고 빈 집에 가엾은 사랑(희망)이 갇혀버리는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 '아! Ay!' 처럼 제발, 나를 이 벌판 속에 홀로 울게 내버려 달라며 그렇게 체념해야 하는 걸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존 던의 '명상 17'을 다시 인용하자면 누구든 완전한 섬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가 깨우칠 일이다. 이 시대라는 종이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해 울림을 누구나가 깨달을 일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사랑에의 길'이 일러주듯 모든 감정은 사랑으로 정열로 이끌어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최영미 시인이 모아준 [내가 사랑하는 시]는 이렇게 우리에게 시대를 일깨워준다. 

그대라는 시는 결코 시대를 떠나 읊조려질 수 없으니, 이 시대에 그대가, 우리가 노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시집을 읽으며 묵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하라 2017-08-19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10.14 타사이트에 올렸던 글을 옮겨옴
 
인디언의 복음 - 그들의 삶과 철학
E. T. 시튼 지음, 김원중 옮김 / 두레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책에는 두 개의 정서가 흐른다. 
하나는 책 전체에 흐르는 인디언문화에 대한 경배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한 예찬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문화에 대해 그들 스스로가 내리는 자성과 환멸이다. 


“인디언이 우리들의 문명보다 더 나은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철을 다룰 줄 몰랐다는 사실이 인디언 문명의 약점이었다.” -애드거 L. 휴화이트 박사 


“미학과 윤리, 사회, 문화에서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복자를 앞질렀다.”
<<미국 남서부 지역의 옛 삶>> 


“통틀어서 보면 우리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배출한 문화체제를 우리가 짓밟아 버린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텍사스 조지타운의 사우스 웨스턴 대학 C.A. 니콜스교수 


또한 제로니모와 격전을 치룬바 있는 N. A. 마일즈 장군은 인디언들을 “이 세계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영웅적인 종족”이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이런 평가는 자기 자신과의 비교 평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서양사는 역사의 의미를 진화와 발전의 도상에서 찾고 있다. 허나 발전한 것이라고는 과학을 매개로한 기술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가 역사나 철학서를 통해 또 그 보다 대중적으로는 영화를 빌어 그들 스스로의 발전과정에 회의를 드러내며 인류의 번성을 바이러스의 증식과정과 동류라 하고 있지 않나! 


물론 그들은 모든 인류라 하고 싶겠지만 암세포의 전이와 완전히 동일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서양인들의 문화 전파사일 뿐이다.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미대륙을 처음 발견했다고 회자되고 있는 중국 명나라 영락제 시절 정화의 원정대 경우를 보아도 세계 곳곳에서 이들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지만 이들이 서양인들이 남긴 폐악과 조금의 유사함이라도 보이고 있는 사례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언젠가 성병과 법정 전염병 전파의 역사에 관한 연구서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고스란히 서양 문화 전파사와 동일함을 알게 될 것이다. 서양인들은 말해왔다. 인류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라고... 허나 언젠가부터 우월한 것이 열등한 것을 제거하며 발전해왔다는 것은 착각이었다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역사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그들 스스로가 자성하고 있다. 


인디언사와 초기 미국사에 대한 재조명도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직접 인디언 정복에 나선 적은 없었지만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정부, 그리고 국가가 부끄럽다. 인디언들이 언제나 옳고 우리가 언제나 그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협정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반해 우리는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버팔로 빌이라 개명한 윌리엄 프레드릭 코디 


또한 저자 스스로는 이렇게 말했다. ‘백인의 문명은 실패작이다. 그것은 눈에 띄게 우리 주변에서 와해되고 있으며 모든 중요한 시험에서 실패했다. 결과로써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도 이 핵심적인 명제를 의문시할 수 없다. ......중략...... 우리의 제도는 무너졌다-우리 문명은 실패이다. 논리적으로 결론을 어떻게 내리든지 그 문명은 한 사람의 백만장자와 백만명의 거지를 만든다 그 문명의 재앙 아래서 완전한 만족은 없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의 본론은 인디언 문화에 대한 총체적 조망이다. 또한 야만과 미개란 오명을 감내해야 했던 그들의 경건한 삶을 아주아주 감미롭게 그려내고 있음도 말씀드리고 싶다. 


이 책의 제목에 복음이란 어휘가 사용된 것 답게 ,인디언 종족들 마다 약간씩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는 했으나 이들은 근본적으로 유일신을 신앙했으며. 인디언들이 미대륙으로 초기 이주해온 청교도들 보다 더 청교도적이었음을 그 시절 목사들 까지 증언하고 있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아브라함의 지파 중 한 지파가 그 옛날 미대륙으로 이주해 지금의 인디언이 생겼고 예수그리스도도 부활 직후 인디언들에게 나타나 복음을 전파했다면서 한 미국인이 종파를 창시한 것이 몰몬교로 알려진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이다. 하지만 실제론 인디언들의 전승<<몽골리안 일만년의 지혜>>를 통해 보자면 빙하기 때 베링해협을 거쳐 북미로 이주해간... 근원적으로 우리의 선조와 동일한 민족임을 알수있다.) 


그냥 인디언 부족의 천막으로 잠시 캠핑을 떠난다는 심정으로 책을 읽으신다면 느껴지는 청량감이 무거운 관념들 보다는 더 크실거라 생각됩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하라 2017-08-19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06.12.07 타사이트에 올린 글을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