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책을 접하는 밤이다. 책을 접하면, 내 서재가 떠오르고- 산책 후에도 떠오른다-, 근데 비밀번호가 뭐였지? 중얼거리며 능히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의 머리가 아직은 아주 곤두박질친 건 아니라는 위안을 갖은 적도 몇 번 있을 정도다. 

 읽고 있는 책은, 윤성희의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이다. 이 작가는 소설을 일기처럼 쓰는 재주가 있고, 별 내용도 없는데,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을 가진 것 같다. 미상불 나는 그게 이야기꾼이 가져야 할, 단 하나의 자질을 가져야만 한다면,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왜 한 거지? 

 

 그러고 보면, 근래에 외숙모의 복권방에 출입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일부러 안 했다고 말해야 적확하겠지만.

 먹고 사는 데 몰두한 면도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복권의 세계에 발을 담갔고, 발을 담그니 나 역시 빼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고 말해야 하리라. 기실 나는 나 자신을 일체의 중독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왔었다. 내 생각에 즉석복권과 축구는 공히 헤어나오기 힘들게 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오 시원해, 여기가 천국이네요. 1등은 저 빼고 잘도 나왔나요?

 글쎄 모르겠구나. 오랜만이다. 하는 일은 잘되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데.... 건강하시죠?

 를 포함해 여남은 마디를 했다는 기억이다.


 아무려나 스무 장가량의 즉석복권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즉석복권과 책이라는 물질을 나란히 놓고 보니 모종의 회색지대에 내 자신이 부려져 있는 느낌이다. 일단 두 편의 단편만 읽고, 


 긁어봐야겠다. 50프로 미만 당첨시 외숙모와 당분간 멀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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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예의 네 시간가량 걸었고, 하산길에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단골커피집 1)에서 까라멜 마키아또를 테이크아웃해 누가 앉아 있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는 벤치로 가 앉아 마셨다. 맞은편 벤치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것도 삶인가를 진중하게 생각하는 척하며 남녀의 이야기를 잠시간 엿들었다. 미상불 어떻게 안 들을 수가 있는가, 들리는데. 정리하자면, 둘은 시나리오 작가는 알지만 소설가는 모르는 어떤 기예에 대해,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적 기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별로 새겨둘 말이 없었는데, 예술적 기술이란 게 당사자의 고유 감각일 뿐이어서, 어떻게 해도 공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불어 나와 무관한 이야기였다.

 아무려나 6시간 코스로 걸어야 하는데, 요새 게을러진 탓을 이유로 축소해버린 건 흠으로 남는다. 더구나 너무 무리할 경우 내일 새벽으로 예정된 유로 2020 결승전을 못 볼 수도 있으리라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써놓고 보니 매우 구차한 변명 같다. 응, 귀찮아서 그랬다. 걷는 게 귀찮다니, 어쩌자는 건가.

 나는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둘 모두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 약자를 응원하겠지만, 승부차기까지 가기를 바라지만, 우승은 이탈리아가 했으면 좋겠다. 잉글랜드에서 경기가 열리니 우승은 이탈리아가 해도 좋겠지, 뭐 그런 생각이다. 기실 잉글랜드가 우승할 듯싶지만.

 씻고 앉아 있으려니, 나른하고 좋다. 이제 뭘 해야 하나, 고찰해야겠다. 

 음, 최은미의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을 읽어야겠군? 2) 아는 분이 집으로 보내 준 소설집인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작가다. 읽고 괜찮으면 리뷰를 남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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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일부터 또 다시 문을 닫을 것이고, 부산으로 간다고 사장님이 말했다.

    언제 돌아오시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걸 물을 만한 사이가

    아니거니와, 아니 그런 걸 왜 묻는다는 말인가?


 2) 지금 당장 읽는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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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집구석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창 밖으로 우와기를 입은 중년남성이 보인다. 아는 얼굴이다. 나와 시간대, 동선이 어느 정도 겹치는 면이 있는 남성이다. 그는 한 손에 통닭 봉지를 들고 있다. 나도 아는 통닭집의 통닭이다. 통닭집의 사장은, 강북에 위치한 꽤 유명한 호텔에서 주류 요리사로서 25년 가까이 일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걸 알린 이는 내가 알기로 본인, 당사자다. 내 경우만 놓고 볼 때 그렇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처음 본 음식점 사장님께 그게 뭐든 어떻게 물어볼 수가 있겠는가?- 그런 유의 이야기를 얼마 전 포장 주문하러 간 날 사장이 15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하며 그 이유 1)를 부기한 뒤로 직접 해 줬다. 나는 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해 줘도 통닭에 의미가 부여되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한데 집으로 쭐래쭐래 오는 동안, 통닭에 약간의 의미 부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기사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 반문해 가며. 그러나 집에 가자마자 한 입 냉큼 먹어본 통닭은, 딱히 특기할 만한 어떤 특장을 띠고 있지 않았다. 

 장마라 걷지 않았니? 그럼 오늘은 가게에 안 들를 거니? 외숙모의 카톡도 읽씹했다.

 나는 외숙모의 카톡을 읽고 나서야 이제 명백히 우기에 접어든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자, 내가 왜 오늘따라 정도 이상의 게으름을 피웠는지 이해가 되었다. 상황이 이해되고 나자 나 자신을 옹호하고 싶어졌다. 

 기실 나는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관점을 달리해 보며, 인칭을 바꿔 가며 <걷는 내내> 했다. 그러나 활자화해 보니 겨우 이 정도다.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려나 씻고 앉아 있으려니, 나른하고 좋다.

 이제 수행해야 할 일들을 미루지 않고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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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문과 동시에 냉장고에서 손질해 놓은 생닭을 꺼내 일련의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속 메모장을 열어 사장님의 말과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 반 년쯤 뒤에도 이와 같은

    작업 방식을 고수하는지 아니면 조금은 달라졌는지 확인해볼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까맣게 잊고 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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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레길 초입에서 전체를 걸을 것인가, 부분을 선택해 걸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1) 말끔한 수트 차림을 한, 누가 봐도 노인으로 보였다, 노인이 다가오더니 여기서 아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서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나는 전화기를 내어주며, '이것으로' 전화를 다시 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맙다며 내 전화기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노인은 보다 사색이 된 얼굴로 역시 안 받는다고 말했다. 나는 노인의 섬섬옥수를 바라보며 오늘은 부분을 걸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 맞은편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피어올랐다. 아들이구나, 절로 직감되는 것이었다. 아들이 '아버지 거기 계세요'라고 소리쳤다. 나는 노인에게 여기 계시래요, 하고 전달했다.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고 보니 노인은 아들의 전화번호 한 자리를 빼놓고 전화를 걸고 있었다. 더불어 노인의 전화는 묵음으로 설정돼 있었다. 나는 부자가 떠나는 모습을, 정확히는 k9의 멀어져가는 꽁무니를 바라보며 이쯤 되면 나도 부모 생각이 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므로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치며 삶의 의지가 약동했다. 


 아무려나 집에 돌아와 씻고 막 앉았을 때 거센 비바람이 치기 시작했다.

 어제 운세를 보면, 오늘은 무슨 일이든 도모하면 잘 풀린다는 식으로 써 있던데,

 이건가 싶어서 웃음이 피식, 비어져나왔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가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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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략, 정오께였다. 왜 기억나느냐 하면

   어느 속옷가게의 스피커에서 정오 알림음이 울리고 얼마 후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디제이의 음색이 귀에 닿자마자 '조금은' 익숙한 여성가수임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내가 멋있게 생각하는 이효리와 친한 친구라는 걸

  티비에서 봤던 기억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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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하나밖에 없는 조카는, 자기도 모르게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남이 따라 부르면, 가령 자기 부모, 특히 아빠가 따라 부르는 걸 자각할라치면 미간을 현저히 찌푸리는 것 같다. 나는 두 가지 지점 덕분에 약간의 웃음이 지어졌는데 다음과 같다.

 1. 저 아이의 기분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안다

 2. 싫은 표정을 전혀 감추지 못하는 저 아이에게 공감한다 

 나는 혈육이라든지 가족간의 정 같은 게 사실상 없는 인간이지만 조카를 보면 친연성이라고 규정해도 좋을 감정이 가끔이나마 느껴진다.

 

 오후 내내 숲을 홀로 걸으며 잠시 조카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말해 생각이라고 할 만한 건 그저 조카에 관한 것뿐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이내 전망대 근처에 다다랐다. 지난 주에 봤던 노인이 오늘도 바나나를 까고 있으면 좋겠구나 싶어졌으므로 나는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전망대에는 그러나 두 남녀, 등산복을 맞춰 입은 커플이 앉아 있었다.

 둘은 마주보고 앉은 채 약간의 주전부리 1)를 앞에 놓고 쌀보리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끝말이어가기를 주로 했었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스라이 지나쳤던 기억이 아령칙하게 난다.


 아무려나 나른하니 기분 좋은 저녁의 초입이다.

 정유정의 장편 '완전한 행복' 2)을 몇 장 읽고 저녁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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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중 로하커 웨하스가 눈에 띄었다. 주문해야겠지, 머릿속으로 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2) 고기 손질 도구, 즉 각종 칼에 대한 설명으로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정유정의 소설적 경향성을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음식공화국에 다름 아닌 한국의 문화를 예각적으로 반영시킨 것인가, 중얼거려 보았다.

   읽어 보면 해소가 될 중얼거림. 해소의 욕망보다 질문의 욕망이 더 크다는 점을 부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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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1-06-2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역시 오래오래 걸으셨군요^^ 와인 한 잔 하며 야구 봅니다. 요즘 유로도 하고 코파 아메리카도 하고 있어서 좋은데 체력방전으로 본방사수를 못 하고 있네요ㅠㅠ 한수철님은 잘 보고 계실까 생각했습니다. (크리스티안 에릭센 선수 일은 정말로 아찔@_@;;;; )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시길요^^

한수철 2021-06-20 20:49   좋아요 0 | URL
일요일은 조건 없이 걷기.ㅎㅎ^^

와인과 야구라, 역시 달밤님!

암, 코파는 볼 엄두를 못 내고 있고.... 유로는 새벽 4시 경기는 대부분 보고 있습니다(저는 에릭센 관련 뉴스 보고서야 유로 2020 하는 걸 알았습니다. 근데 왜 2020이지? 의문하며 검색했던 기억이...)

저는 이제 슬슬 침대로 가서 누워서 책 좀 읽다가 잘 전망입니다. 내일 새벽 웨일스 경기가 좀 당기지만(오, 베일!) 3차전 경기는 모두 스킵하려고요.

달밤 님도 ‘완전한 행복‘에 버금가는 저녁시간 구가하시길요! ;)

컨디션 2021-06-27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수철님! 고민상담도 하시나요?

한수철 2021-06-27 18:59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컨디션 님, 정말 격조했습니다! 네? 잘 지내시지요? ;)

(근데 전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인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