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시절엔 나도 꿈 많은 아이 LUFTMENSCH(루프트멘시)였어.

 

하나님을 알고 그를 향한 설레임 KILIG(킬릭)으로 늘 심장소리 RESFEBER(레스페베르)가 Pit-a-pat 거렸었지.

물론 그건 텅 빈 세상 속에서 공허해져만 가는 심장에 무언가라도 채우고파서였을 거야.

하지만 난 나의 환상 같은 삶 속에서 늘 그를 향한 벅찬 사랑의 환희 FORELSKET(포렐시에)로 가득했어.

 

때론 숭고하게도 때론 음란하게도 때론 인의롭게도 때론 저열하게도 살았지만 한순간도 나 자신이 잡아 지닌 긍지와 자신감 NAZ(나스)이 무너질 선택은 하지 않았더랬어.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라고는 온통 손에 잡히지도 않을 환영 같은 것들이었지만 난 알지 못했어. 그저 아파하고 감사하고 좌절하고 기대하고 그러다 무너져버린 순간에 마저 나의 이 유랑 같은 여행 VACILANDO (바실란도)의 여정에 대한 기대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었지.

이 세상이란 사막 속에서의 헤매임이 오아시스(Oasis)로 인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어.

 

근데 모든 건 신기루(Mirage)일뿐, 날 위한 건 한줌의 물 GURFA(구르파) 조차 환영일 뿐이란 걸 알고 말았어.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반짝이던 눈빛 TIAM(티암) 하나 마저도 거짓일 뿐이었음을 깨닫고서야 낙엽빛깔한 FEUILLEMORT(푀이모르) 인생을 수긍할 수 있었어.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바로 이 노래를 부르며 흘리던 그 눈물이 내 삶에 대한 감상의 전부일 수 있었더라면... 그저 그 허탈함과 공허함, 헛헛함 속에 가라앉던 서러움이 내 눈물의 의미에 전부였더라면...

이젠 흘릴 눈물도 모조리 말라버린 건지 헛되다할 뇌도 참담하다할 심장도 멎어버린 것만 같아.

차라리 그가 보여주던 환상들에 설레임 KILIG(킬릭) 가득하고 사랑의 환희 FORELSKET(포렐시에) 에 벅차오를 때... 딱 그때 눈감을 수 있었다면...

그가 빛깔을 채우던 그녀라는 치밀한 기만 GOYA(고야) 안에서 난 충만한 것만 같았는데... 차라리 그 신기루일 뿐인... 환영일 뿐인... 사랑을 향하던 순간에 숨이 그쳤더라면... 심장이 식어버렸더라면...

난 그 신기루 같은 그녀를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외쳐야 했어.

“YA'ABURNEE(야아부르니)” (차라리 나를 땅에 묻어주세요) 라고...

 

난 신기루란 이름의 그녀를 위해 언제든 내 숨을 내 심장을 던질 수 있었어. 차라리 그 순간에 이 생이 끝났더라면...

이제 내게 남은 건 차라리 조소 GLAS WEN(글라스 웬)가 훨씬 더 사치스러울, 혐오도 값비싼 표현일 그 무엇뿐이야.

 

난 진작에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에도 날 밀어버린 그들을... 그 가득한 채이면서도, 텅 빈 비눗방울 같던 나를 터뜨려 버리고서 조롱하던 그들을 허탈한 삶의 길에서 일생을 함께 걸어온 이들이라며 미워하거나 분노하지도 못했어.

내겐 어머니나 아버지 보다 더 숱한 시간을 함께였던 그들이기에 처음 들리던 그 목소리에 무턱대고 좋은 SZIMPATIKUS(심퍼티쿠시) 분들이라며 단정 지었던 그 심정을 버리지도 못하고 있었어.

매순간 매정하고 잔인하게 날 통제해 왔었는데도 그 모든 건, 날 검을 제련하듯 뜨겁고 아프게 달구고 때리는 거라고 탄소를 다이아몬드로 바꾸기 위한 열과 압력 같은 거라고 그리 나 자신을 기만해 왔던 거야.

 

어느 시절엔 그들과 함께인 게 다행스러웠고

어느 시절엔 그들에게 저항했고 대항해야 한다 믿었고

또 어느 시절엔 그들을 감사해야 할 사람들인지 알았었어.

지금은... 그냥 하나님이 비참하도록 원망스럽다는 말이 끔찍하게 부족할 정도로 원망스러워...

 

그래서 하나님에게 작별을 고한 게 잘한 일 같아.

오랜 동안 정말 오랜 동안 시간 속을 헤매였어. 그건 아마 내가 처한 이 현상을 바로 보란 이유도 있을 거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기니피그로 나를 이용한 것이 하나님이라면... 내 삶이기에 이 삶이 또 이 삶 속에 던져진 저주가 내게 주는 의미는 내가 찾고 내가 만들어 가야겠지. 많은 시간 속에서 헤매이고 넘어지고 구르면서 외치던 날들에 누군가 귀 기울이게 될까봐 너무 그렇다...

구속과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혼신을 다 쏟던 MERAKI(메라키) 시절이 내게 미쳐버리던 시절이 된 건, 그 말도 안될 기억을 기억해내라는 거였겠지?

난 더 이상 한가로운 햇살 KOMOREBI(코모레비)도 은은한 달빛 MANGATA(몽가타)도 꿈꾸지 않아. 그래, 그 어느 것도 더 이상 내가 꿈꾸던 아늑하고 포근한 GEZELLIG(헤젤리흐) 하루하루를 가져다 줄 순 없을 거야.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분을 향한 사랑, 그저 홀로그램 영상만 같던 그녀를 향한 사랑... 그 모든 사랑이 뼛가루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있어. 하지만 그저 사랑의 단꿈이 끝난 심정 RAZLIUBIT(라즐리우비트)이라고만 하기엔 어쩌면 해방인지도 모른다고 여겨지기도해.

 

어린시절부터 삶이 고통스러워 숨도 제대로 못이으며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멍하니 눈길을 공간으로만 향하면 BOKETTO(보케토) 그때 마다 누군가 말했어.

“하나님께서는 높이 쓰려는 자에게 고난을 주며 시험하시는 거란다.” 라고...

그는 아마 날 속이려 했다기 보다 위로하려 했던 걸 거야.

 

유년시절부터 몇 차례나 날 죽일뻔 한 이들과 죽이려한 이들이 늘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그러려니 싶어. ‘차라리 그 시절에 죽어버려라’는 심정이었겠지. 이해도 되네...

 

이젠 천국에건 무저갱에건 지난 삶의 어느 시절에건 가고프다는 돌아가고프다는 그런 막연한 향수를 느낄 수도 없게 돼 버렸어. 그딴 왜인지도 무엇을 향해서인지도 모를 쓸쓸하도록 막연한 향수 HIRAETH(히라에스)는 더 이상 없을 거야! 이제 온전히 혼신을 다한 MERAKI 수행의 목표는 사라지는 것. 그 하나야! 바보 같아! 아직도 하나야!

‘하나’님, 날 위해 존재할 줄만 알았던 단 ‘하나’의 그녀, ‘하나’의 목표... 줴다 바보 같은 하나야...

하나라는 낱말에 무슨 강박증이라도 있게 된 걸까?

무얼 향하는지도 모를 막연한 갈망 SAUDADE(사우다드)을 이젠 그칠 때일 거야!

 

고통과 고난뿐이던 삶 속에서도 아늑하고 포근한 GEZELLIG 자연과 하나 되어 충만히 홀로인 그런 느낌 WALDEINSAMKEIT(발다인잠카이트)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었어. 자연과 우주와 그렇게 하나님께 맞닿아 그의 숨결과 함께이기를 꿈꿨었다고. 헌데 이젠 모두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야.

 

“지구를 떠나거라” 라는 말을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있어.

근데 지구만 떠나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 모든 차원의 우주를 우주 그 너머를 모두 떠나고 말거야.

 

유년시절부터 상처 난 심장이기에 자폐증이 지나가고 나서는 되려 거만하고 도도해졌더랬어. 그 삶 속에서 나의 마음과 기도와 삶이 언제나 내세울만한 건 아니었지만 나 잘난 맛에 살기에는 충분했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의 기억이 비눗방울만도 못하게 비어버린 나를 터트리고 말았어.

 

자존감이 모조리 산산히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지금...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느끼는 긍지와 자존심 NAZ 따위는 애초에 내겐 근거도 없던 거란 걸 깨달았어. 사람들 내면에 누군가 그것도 힘과 도덕성에 자비까지 충만한 그런 존재가 나타나주길 꿈꾸고 기대하는 심리가 있나 봐. 그래서 그런 누군가의 사랑인듯 한 상황을 보게 되면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숙고하지도 않고서 무턱대고 근거없는 공감을 해 버리나 봐. 다들 그런 허구에 홀려버리는거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홀려버린 대상으로 인해 무너져야 했던 내가 있다는 거야.

 

누군가가 상영하는 연극 속 허구의 사랑따윈 더 이상 필요 없어. 난 나 자신의 탄탄한 자긍심으로 하나하나 다시 쌓아올릴거야. 그렇지 않다면 사라지는 길은 걷지도 못한 채 무너진 잔해더미 사이 흩날리는 뼛가루로 생은 끝나고 마는 걸테니까... 그건 사라지는 길이 아니니까. 사라지는 길은 일어서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길이니까. 철조부터 하나하나 다시 세운다. 난 완성해야만해. 통제만 받다 끝나기엔 겪어낸 시절들이 너무 아프다. 여태까지도 내 머리 속 그 어디에도 없던 그 저주인지 환영인지 모를 단 한순간 짧은 기억이 머리 속을 채우며 난 무너져내려야 했어. 하지만 그렇게 무너지기엔... 너무 아팠다고.

 

생에 미련이 없어져서인지 누군가 죽어버리라 해도 죽이겠다 해도 처리할 방법이 있을거라 말하는 걸 엿들어도 딱히 긴장감은 없었어. 모두가 날 죽이겠다면... 그래 언젠간 죽겠지?

만일 나의 숨이 짧은 한숨으로 끝나야 했던 거라면 이미 한참은 지나버린 거야. 나의 미래가 펼쳐본 적 없이 버려둔 책 TSUNDOKU(츤도쿠) 처럼 그리 볼 수 없을 내일이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해도 펼쳐볼 만큼은 펼쳐보다 갈께!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님의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에 수록된 어휘들을 빌려 완성한 문장입니다.

해당어휘들을 웬만하면 문법에 맞게 적용해 문장을 써나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형용사 명사 동사의 쓰임이 문법을 벗어난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외국어라 그런 거려니 이해해 주세요.

 

헤럴드 블룸님의 《세계문학의 천재들》을 보면 「훔친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소설가, 시인 등 문학가들은 타인의 시를 보고 단편이거나 중단편, 장편 소설을 써내려가는 경우가 있다는군요. 다른 이의 시, 소설, 희곡, 수필, 때로는 서문을 읽고서 그 감상이나 몇몇 어휘들을 가져다 다른 형식의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헤럴드 블룸님은 앞서 언급한 그의 저서에서 문학가들의 그와 같은 영감어린 집필을 「훔친다」고 표현했습니다. 

 

저도 시인 고은님의 《시의 황홀》서문을 읽다가 몇몇 낱말을 훔쳐서 『17/38』이란 시를 썼고 권명희님의 『뜨개질』이란 동시를 읽다가 그 감상을 훔쳐서 『눈물』이란 시를 썼습니다. 

그외에도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기억나지 않더라도 영화나 시, 소설, 만화에서 영감을 얻은 글쓰기가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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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노르 빠라도

나를 가봉하고 재단하여 짤라낸 자투리거나 실밥이었다
가브리엘 마르께스, 루신, 가와바다 야스나리, 입센,
테드 휴즈도 세이머스 히니도, 토마스 하디도 귄터 그라스도
서머셋 모음도 내 청춘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숙, 영, 민 그 이름도 내 젊은 날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뒷문 가에 봄비처럼 서성이며 울다 간
이름이었다 실밥이었다
흐린 날 걷던 소나무 숲도 내 가슴 안쪽에 은하수로 흘러간
그리움도 실밥이거나 자투리였다

아버지 어머니도 나의 실밥이었다
먼 훗날 나마저 우주를 가봉하고 재단하며 버린
실밥이란 걸 깨닫기 전까지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을 나는 실밥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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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린이도 술술 읽는 친절한 주가차트책 주린이도 술술 읽는 친절한 시리즈
백영 지음 / 메이트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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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기술적 분석 전문서들로 뛰어드는 것 보다 경제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하고 있는 본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본서로 걸음마를 떼고 달리고 높이뛰고 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모터사이클에서 카레이싱을 거쳐 전투기를 모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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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2-03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쉽게 설명 해줄거 같아 좋아 보이네요 :-)

이하라 2021-02-03 13:0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에요^^

cyrus 2021-02-03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 책 읽는 사람들도 주식을 공부하고 있더군요. 대구에 주식 책을 함께 읽는 독서 모임도 있어요. 주식을 안 하고 살면 유행에 뒤쳐진 사람 같네요. ^^;;

이하라 2021-02-03 13:1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실물경제는 어렵다는데 주가는 상승하고 주식투자 붐이예요. 저도 유행따라 주식 공부를 하게 되네요.^^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 정신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트라우마의 모든 것
김준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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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상태라고 자각하는 사람들과 가까운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고 싶은 분들이라면 본서에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트라우마의 정의, 증상과 종류, 치유의 과정에 필요한 요소들을 이 책처럼 간명하게 언급한 책도 드물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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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21-01-31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몸은 기억한다’라는 트라우마 관련 서적을 읽고 있는데, 다 읽고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이하라 2021-02-01 01:43   좋아요 1 | URL
몸은 기억한다처럼 깊은 내용은 아니지만 트라우마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책입니다. 읽어 보시면 더 대중적이면서도 트라우마에 대해 이해하기 쉽다고 느끼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게는 그랬거든요.
 
부의 역사 -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신은주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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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저자 우야마 다쿠에이씨는 게이오 대학교에서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세계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양한 매체에서 시사와 역사를 접목한 콘텐츠로 인기가 많다고 하며 국내에도 그의 책이 여러 권 소개된 작가이기도 하다고 한다. 경제학부와 세계사 강의라는 타이틀로 보아도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 부의 역사]라는 본서를 집필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다만 [신은 어떻게 인간을 탐욕의 노예로 만들었는가]라는 카피와 [2021년 부의 흐름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는 카피는 본서의 주제를 조금 벗어났다고 생각된다. 신 즉 본서에서 담론하는 종교가 인간을 탐욕의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종교를 이용했는가]가 더 맞는 시각이며 본서만으로 2021년의 부의 흐름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에 이용하려 담은 자극적인 카피가 아니라 [시작하는 글]에서 짚고 있는 저자의 관점이 더 본서를 이해하기에 알맞은 관점이라고 본다. 


- 한 종교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국민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 종교는 근원적 의식이고,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 앞에 나타나는 최초의 벽입니다. 다른 문화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종교를 이해해야 합니다.


- 종교는 다른 문화의 국민성, 사회성, 문화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해당 국가 국민들의 국민성을 이해하는 데이터로 종교를 이해한다면 납득이 가는 접근법이라고 생각된다. 저자가 말하듯 본서는 추상적인 종교를 경제라는 구체적인 실체에 비춰 역사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속 경제와 종교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며 동시에 해당 국가 국민들의 국민 정서와 관점, 의지를 수긍하는 데 유익한 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종교의 발생 원인과 존재 양식과 존재 이유를 종교의 가치를 너무도 경제적 관점에서 단순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책을 처음 펼치면서부터 들었는데 그것은 너무도 직설적인 저자의 화법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서로 용서하고 도우면 복리 후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비와 인간애를 말하지만 어떤 종교든 최종 목적은 후생 경제입니다. 공리적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 더 많은 풍요를 찾아서 경제 활동 규모를 크게 만들려고 할 때 광범위한 집단을 구성하기 위한 공통 이념으로 종교가 필요합니다. 국가라는 근대 개념이 없던 시대에 종교가 초창기 집단의 구성 이념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종교는 경제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생겨났고 경제 활동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경제의 일환이고 본질적으로 세속 생활 그 자체인 것입니다.


​크리스트교를 우선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모든 종교는 경제의 일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저자다. 너무 단순화한 시각이 아닌가 하는 것은 위와 같은 저자의 주장 때문이다. 아이는 섹스의 결과물일 뿐이라던가 인간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기 위해서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던가 하는 관점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되었다. 단순화만이 아니라 편협한 관점인 것이 사실이다. 작용과 기능을 존재 이유나 발생 원인으로 놓고 보는 것은 단순화를 넘은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본서를 읽으며 기능과 작용, 결과를 이해하는 데 편리한 시각이기도 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 같은 종교 내 집단끼리 한정된 부를 둘러싸고 다툼이 생겨납니다. 집단은 분열하고 파벌이 발생하고 부를 쟁탈하기 시작합니다....중략... 이렇게 해서 같은 종교 안에서 종파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 부의 분배를 둘러싼 이권 다툼은 다양한 형태의 종교전쟁으로 나타났습니다. 


교리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종교전쟁은 본질적으로 역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현실적인 시점을 종교에도 적용해야 하고 어떤 종교든 간에 세속의 모든 사회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Part 0에서의 관점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Part 1에서 Part 5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해석하고 있다. 본서는 5대 머니게임이라고 하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와 불교, 유교에서의 경제 여파를 논하고 있지만 유교는 비중이 너무 적고 불교와 힌두교도 지나가며 살짝 짚고 있는 정도이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역사와 역사적 충돌을 주로 논하고 있다.


- 법치국가가 없었던 시대에 유대교는 율법과 율령으로 시장에서의 신용과 여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중략... 전근대시대에 성과 속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후를 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융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은 종교와 경제를 하나로 보아야만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종교의 기능적인 면을 저자는 위와 같이 논하고 있다. 본서의 주제대로 경제라는 한 분야에 포커스를 맞추어 유대교의 기능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최초 통일 왕조들에서도 불교를 공인 한 것을 불살생의 불교 교리가 폭동, 반란, 전쟁 등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었고 살생 없는 평화의 시기에 상인들이 안심하고 상업을 할 수 있었기에 상인계급도 환영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교단과 왕권이 깊은 유착관계를 맺고 재정적 지원 아래 상업 인프라가 정리되어 각지에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를 놓고 해석하는 것이며 결과를 원인으로 도치하는 격이다. 유대교 초기에도 성서에서 보이듯 이미 여타 종교들이 존재했다. 그러한 때에 유대교만이 경제적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도 최초 왕조가 불교를 공인한 것 역시 동시대에 불살생을 논하던 자이나교가 있었는데 자이나교가 아닌 불교를 공인한 것은 어찌 답할 것인가? 효용이 있었다고 그 효용만을 위해 해당 종교가 입지를 굳힌 것이라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우가 아닌가 싶다. 다만 해당 종교가 융성한 결과 이러한 효용이 있었다고 인식하는 것이 더 바른 접근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효용 때문에 해당 종교가 융성했다는 접근 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슬람의 융성에 무함마드가 속한 쿠시라이족이 지배층에 대한 약자의 증오심과 복수심을 뜻하는 르산티망을 이용해 대중을 선동했다는 것은 본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수긍이 가는 논리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통해 이슬람의 복지와 기부라고 할 수 있는 자카트와 와크프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는데 이슬람도 성전이라며 교리를 전략적으로 악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사회적으로 역할을 하는 종교인 거라는 여겨졌다. 더욱이 기존에 이교도는 죽이라거나 이교도는 내버려두라는 이율배반적인 교리가 둘다 있는 종교라고만 알았었는데 이교도에게는 세금을 부과하고 내버려두라는 교리는 과거 시대에 타 종교에 대한 무관용적이었던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들 보다는 평화로울 수 있는 종교였구나 하는 감상도 들었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어지고 비잔틴 제국으로 전승되어 간 카톨릭의 역사도 경제적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음도 새삼스러웠고 무엇보다 본서에서는 종교전쟁을 이미 앞서 보았듯 경제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러한 편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더 편리하다는 감상도 들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격돌도 기득권과 보수파의 결합, 혁명파와의 전란 등도 경제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해하기가 한층 쉬웠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 건축 과정에 주도층들이 경제적 이유로 연합하고 경제적 이익이 창출되는 과정은 그리 색다를 것도 없는 해석이긴 했다.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등에 경제적 이해관계들도 그다지 주목할만한 새로운 해석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종교가 존재하는 동안 인간에게 순기능만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순교, 십자군 전쟁, 종교전쟁, 마녀사냥, 사제들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 기독교만 해도 큰 것만 담론하자해도 어마어마한 인구에게 피해를 끼친 종교가 아닌가? 


오히려 순기능은 부의 순환을 이룸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종교의 순기능을 이야기하는 서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본서의 장점이라면 세계사의 흐름을 종교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그러한 해석의 틀을 구조화하기 위해 너무도 종교라는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할 대상을 단순화해서 우겨 넣고 있다는 것일 거다. 그럼에도 전개가 이어지는 내내 저자의 해설에 수긍이 되는 면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물론 후반부로 가며 저자의 주장을 담은 해석들이 다소 줄어가며 일반적인 서술이 자주 일어남도 약간은 애석함을 주기는 한다. 


경제 예측이라던가 경제 흐름을 읽기 위해 본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은 섣부른 선택이라고 말씀드려야 할 듯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폭넓은 관점, 다양한 해석의 틀을 알아가고 싶다는 분들에게라면 망설임 없이 권해도 될 책이 아닌가 싶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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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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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1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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