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잃은 무언가가 나를 돌아서게 했다

나는 몇 걸음인가 되짚어 가다가 

다시 되돌아서서 걸음을 디뎠다.

 

그렇게 걷고 있었지만 

무엇인지도 언제인지도 어디서 잃었는지도 

모를 것이 걷고 있는 나를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어느새 고향을 잃었고 

나이를 잃었고 부모를 잃었으며 

그렇게 아리던 기억마저 잃어 갔다. 

 

나는 누구였을까? 

나는 무엇이 되려했을까? 

 

잃어버린 무언가가 그 모두를 의미 잃게 했다.

 

그런데도 나는 물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는 멈춰 서 있었다. 

돌아보지도 나아가지도 앉았다.

나의 비명 뒤에  

그가 멈춰 섰지만

그에게는 따스함도 단호함도 없었다. 

그런 거리에 그가 서있었다.

 

나로선 그가

주춤한 것인지

주저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잠시

다리가 아파 서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서있던 자리 몇 발자국 뒤에서 내가 그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후회하지 마라 기대하지 마라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머물라고 한다. 하지만 

후회도 기대도 인간의 천성이 아닐까? 

모질게 마음 먹다가도 다시 돌아서는 것 역시 그럴 것이다

나를 속이고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의 

세월에 안타까워함도 

원망과 함께 연민이 인간의 천성이어서 그러리라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노래가

너무 오래 처연하다가도 끝내는 이해되는 순간이 오는 것도 

자신 마저 연민할 수 있는 인간의 천성 때문이리라 

살아남은 사람의 허풍 같다는 느낌이 크던 그 노래가 

다가오는 순간에는 아마도 

후회도 기대도 모진 마음도 돌아섬도 안타까움도 자기연민도

모두 가슴 한 자락을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이겠지 

그래, 나는 살아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상의 주인
로버트 휴 벤슨 지음, 유혜인 옮김 / 메이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최초의 작품이라고 한다. 1907년 쓰여진 이 소설은 어두운 미래를 그리고 있는 대중들에게 너무도 유명한 1932년 출간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1949년 출간한 조지오웰의 [1984] 보다도 평균 30년 정도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분량은 [멋진 신세계]와 비슷하고 [멋진 신세계] 보다는 구성이 단순하지만 밀도 있다고 여겨진다. 다만 올더스 헉슬리의 미래관이 미래상의 세계관을 좀더 다채롭게 이야기 하고 있다면 이 소설은 기독교적 종말론의 한부분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다른 것 같다. 교황과 적그리스도를 등장시키며 인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또 종교인들의 우려가 드러나 있는 것도 같다.

 

작품에 그려져 있는 안락사 제도가 현재 일부 국가에서 제도화된 존엄사를 연상하게도 하지만 작품 속에 그려지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적그리스도적인 인물이 등장해 세계적 지도자가 된다해도 몰살형 등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을까 싶다. 한 집단 전체를 몰살해 버린다? 차별에 적대적이기에 그러한 차별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수단으로 한 집단을 몰살해 버린다는 논리에 수긍하고 동조하는 지도자들이 있을까? 이 소설은 극적이긴 한데 너무 극적이라 현실감각이 없다고 여겨진다.

 

[이 책을 출간한 연대가 1907년인 것을 고려하면 이후 등장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면 저자가 가정한 미래의 몰살형이 이미 실행되었던 것과도 다름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가까운 과거에도 동유럽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인종청소라고 불리운 학살들이 일어났으니 (현재의 상식으로 보아 상식적이지는 않지만) 특정 종교인들을 몰살시킨다는 것과는 형태가 다른 집단학살이라면 미래에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흡인력있고 재밌는 소설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그가 이야기하는 미래의 세계관이 생각해 볼만은 했지만 재미면에서는 선뜻 다른 분들에게 권하기 그랬다. 그런데 이 소설은 1907년 출간된 소설임에도 옛날 소설식의 늘어지는 주석 같은 묘사가 없다. [1984]만 해도 읽다가 지겨워져서 중단한 바 있는데 이 소설은 제법 빠른 전개이다.

 

저자가 영국 성공회의 최고위직인 켄터베리 대주교의 아들이면서 성공회 사제로 제직하다가 카톨릭으로 전향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카톨릭의 예식에 대한 관찰이나 호감이 이 소설에서 충분히 느껴지기도 한다. 카톨릭 사제가 쓴 종말과 적그리스도관이 드러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 면이 독자에게 남다른 호기심을 불러올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종말론이나 적그리스도를 묘사하는데 그리 치밀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기독교적 시각을 빌려 보자해도 적그리스도라면 좀더 설득력 있게 종교를 탄압하고 인구 감소를 유도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19 같은 대감염병을 인위적으로 전파시켜 인구를 감소시키면서 예방차원의 접종 백신에 손을 써 접종자들이 어느 비율로 사망하거나 접종 이후 오랜 시간 후에 사망하게 하고 차츰 불임이 오게 해서 인구를 감소시킬 것 같다. 또 적극적인 방역을 시행하기 위해서라면서 종교 모임을 차단한다던가 하며 종교 모임을 갖는 이들을 금고형에 처한다던가 종교 집회 주동자를 무기징역에 처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종교도 탄압하고 말이다. 저자가 그린 로마 폭격이나 나자렛 폭격 같은 예는 너무도 만화 같은 발상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처 / http://unnews.net/View.aspx?No=1854069



이 기사를 믿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영어를 못해서 번역문만 읽어보았는데 심각한 사안인 것 같아 올려 봅니다.


실제로 한국도 백신 접종후 사망자가 509명인데

이는 코로나19 확진 후 사망자 비율이 1일  0.7명인데 반해 백신 접종후 사망자가 1일 8.5명으로 백신 접종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코로나19로 사망하는 비율의 12배가 더 많다고 합니다.


또 백신 접종 이후 불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해외 의학자의 발표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니 음모론이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19로 노년층 인구를 감소 시키고 백신 접종으로 청장년층의 인구감소를 유도하고 불임까지 유도하면 대대적인 인구 감소가 일어나겠죠. 


저로서는 음모론을 음모론으로만 볼 수 없는게 음모론으로 치부되었던 사건들이 사실로 밝혀진 사례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20세기엔 흑인들을 대상으로 의료실험 대상 아르바이트를 권하며 대대적으로 매독을 퍼트려 그 증상과 전파과정을 연구했다는 사례도 사실로 판명되어 정부가 대상 흑인들에게 보상을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mk울트라프로젝트라고 해서 CIA가 미국시민들을 대상으로 마인드컨트롤 실험을 20세기 중반 동안 실행한 것이 이후 사실로 밝혀져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당시에 공개 사과를 하기도 했었죠.


또 고도의 마약 LSD를 군인과 민간에게 대대적으로 실험용으로 주입한 사례도 사실이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미 정보부가 민간인을 감시하는 프리즘이라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었던 사실도 폭로 되었었죠.


국가 단위로 민간인을 대중을 실험용으로 삼던 이들이 전세계적인 실험이나 의도를 지닌 인구 감소정책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네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초딩 2021-07-10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음모론이네요 ㅜㅜ
그래서 미국은 접정률이 더 오르지 않나봐여

이하라 2021-07-10 16:54   좋아요 1 | URL
화이자 백신에 대한 연구나 백신 무용론보다 더한 백신 유해론이 퍼지기 시작하면 접종률은 바닥을 칠 것 같습니다. 몇몇 의학자들이 연이어 백신이 무용하고 유해하다는 발표들을 하고 있어서 백신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