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의 37 수행법 - 티벳어본 보현행원품
톡메 상뽀 지음, 정공 옮김 / 하늘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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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어느 불국토에 왕생하시겠나이까?"

"나는 지옥에 가서 지옥 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위의 대화는,《보살의 37 수행법》이란 이 책의 저자이신 톡메 상뽀 스님께서 75세를 일기로 입적하시기 전의 일화를 역자인 정공스님께서 서문에 전해주신데서 마지막 대화를 옮겨 보았습니다. 

① 톡메 상뽀 스님의 일화를 정공 스님 서문에서 더 인용해 전하자면 14세 출가하신 톡메 상뽀 스님의 30대 때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님께서 절문 밖에 이가 득시글거리는 걸인에게 매일 자신의 음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걸인이 불결하다고 여긴 다른 스님들이 걸인에게 절문 앞에 있지 말고 떠나라고 했다고 하네요. 걸인이 사라지자 다른 스님들에게 상황을 전해들은 톡메 상뽀 스님께서는 떠나간 걸인을 다시 찾아 자신의 처소에 머물게 하셨다고 합니다. 또 걸인의 이가 득실거리는 옷을 벗기고 자신의 외투를 입혀주셨다네요. 다만 여기서부터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숭고함도 느낄 여지가 없을만큼 보편성을 넘어선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걸인이 벗은 그 외투에 득실거리는 그 이가 불쌍하다고 스님께서는 이를 구제하려고 자신이 그 걸인의 버린 옷을 걸쳤다고 합니다. 그러다 병이 옮아 시름시름 앓게 되시자 이제 그만하시라고 다른 스님들이 말리는 지경까지 갔다고 하네요. 그러다 16일이 지나자 이들이 모두 죽었고 그 죽은 이들을 화장해 주시며 염불과 기도로 천도하셨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판타지급 성자이신 겁니다. 이건 자이나교 수행자분들 중 일부 수행자분들이 풀한포기의 생명도 해칠 수 없다며 채식 마저 마다하다가 굶어 죽는 경우와 같은 수준의 성스러운 행위셨다고 봅니다. 저는 예수님의 죽음도 자이나교 수행자분들의 죽음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긴 하셨습니다만 하나의 역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누구나가 모두 그와 같이 자신을 해치는 이들 마저 용서 하며 죽임을 당하고, 풀한포기에 마저 연민을 갖는 분들은 모두 죽어 버리는 극단적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그렇게 숭고한 분들은 모두 사라져가고 세상엔 자기 이익을 위해 또 지가 보기에 만만한 이들은 모조리 짓밟고 죽여도 된다고 믿는 이들만 살아남는 상황이 거듭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끝내 이곳은 지옥이 될 뿐입니다. 

이곳이 지옥이지 않으려면 그런 사랑과 자비로 가득찬 분들이 살아가는 세계여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탐욕과 분노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의 마저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 이들을 치유하려 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다행히 톡메 상뽀 스님께서는 1294년 태어나셔서 75세를 일기로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동안 자비와 헌신을 실천하는 불가의 보살행을 펼치시며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모범을 보이다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께서도 보살의 삶을 살다간 이들의 본보기를 들고 싶을 때 톡메 상뽀 보살이 떠오른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마만큼 한결같은 귀감이 되고 계신 것이지요. 이런 본받고 따라야 할 분들께서 우리 곁에 때때로 계셔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개인적 성취만 추구하는 것을 사람이라 당연하다 여기는 것만이 상식이 되버린 사회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일 겁니다. 개인의 성취만 부각된다는건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이타심과 이기심 중 이기심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현시대의 논리를 더욱 강화할뿐이니까요.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두드러지는 사이코패스 성향은 역사 속에서 쉬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이 외국에서 전혀 연고도 없던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 마저 버리는 이타성을 간혹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이기심만으로 분노만으로 이해타산만으로 누구든 얼마나 많은 생명이든 해치고도 남는 흉물임에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은 위험 속에 던져진 낯 모르던 단하나의 생명을 구하려 자신의 생명도 내던지는 숭고한 성자일 수 있는 이들입니다.

사회가 온통 인간의 이기심에만 주목하도록 몰아갑니다. 너 자신이나 생각하며 살면 된다고 세뇌하는 듯 합니다. 이기심에만 주목하도록 하여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윤추구를 위해서 또 개인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타인의 안정은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관점에서도 불합리한 논리일 뿐입니다. 계층의 격차가 커지고 부의 편중이 심화 될 수록 사람들 사이에 박탈감과 저항의식에 뿌리 삼는, 근거있는 분노가 커갈 것입니다. 게다가 생계가 불안정하고 특권층이 모든 부를 빼앗아가며 착취해서 그렇다는 편향을 갖게 된다면, 사회에 폭력과 갈등의 여지만 깊어지고 범죄 발생율만 상승할 겁니다. 그런 분노와 폭력이 팽배한 세계, 갈등과 충돌만 커가는 불안정한 나라, 언제나 범죄 피해 소식이 잇다르고 그 피해의 대상이 내 가족과 나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사회... 이기심만으로 살아가다 맞이할 것은 이런 세계, 이런 나라, 이런 사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나만을 보는 눈이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를 아울러 보는 눈을 뜨려 노력해야 합니다. 알고 보면 이기적인 눈도 길고 긴 시간 사회와 제도를 통해 그런 노력을 하고 하고 또 해서 갖게 된 것이지 않나요? 

-요즘은 성적도 절대평가라며 자기가 무슨 과목을 잘하고 무슨 과목이 부족한지 알려주는 형식이라더군요. 이렇게 좀더 나아지고 있는건지 모르겠으나 아직도 일등이니 명문대니 상위 1%니 특권층이니 기득권층이니 하는 계층화하는 성향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치우친 관념들이 사람에게 이겨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올라서야 한다는 관점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중 이기적인 성향만을 키우는 것을 합리화하게 하는듯 합니다- 

한측으로 치우친 관점을 깨려는 노력과 이기적인 눈 만큼이나 아울러 보려는 노력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자면 사고력을 계발하고자 학업에 열중하는 시간 만큼 공감할 줄 아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해타산 따지는 딱 그만큼만이라도 내가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줄 알았던가 돌아보아야 할 겁니다.


② 본서는 보리심 또는 보살심으로 불리우는, 慈悲의 마음으로 모두를 대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복에 미소 지어지고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본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보리심이라고 하던 보살심이라고 하던... 뭐라던 간에 그 이름이 가르키는 숭고하면서도 당연한 그 심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짧은 주석에서는 불가와 요가 체계에서 쓰이던 다른 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이르는 어휘를 한자로 번역한 慈를 자애로 다시 재번역했고, 다른 이의 고통을 안타까워 하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파 하는 심정을 번역한 悲를 자비로 옮기고 있습니다-


본문의 몇몇 구절을 옮겨 봅니다.

#4 ...전략... 몸이라는 숙소를 의식이라는 손님이 버리고 떠나야 하나니, 이 생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 불교와 인도 철학 체계가 주장하듯, 현실은 실상이 아닌 하나의 꿈과 같으니 육신에 집착해 꿈 속에서 좋아라 하고 아프다 하는 헛소동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몸이 나라는 집착에서 부터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불교에서는 애초에 나라는 것이 어디서도 근거를 찾을 길 없는 그저 파도가 칠 때 일어나는 물거품 같이 금새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현상'이라 말합니다. 그런 나를 몸에서 찾자고 해 보았자 그저 잠시 뒤 떠나야 할 경유하는 곳일 뿐이란 거겠지요. 그저 아주 잠시 스쳐 지나는 곳에 무슨 미련을 갖고 집착을 할 것이냐? 이것 부터 깨닫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는 말씀입니다.


#9 삼계의 행복은 풀잎의 이슬과 같아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성질의 것이니...후략...

(삼계: 욕계,색계,무색계 -이 가로 안의 '주'도 역자이신 정공 스님께서 남기신 것을 옮긴 것입니다-)


+삼계는 불교의 윤회관에서 생명(중생)이 환생하는 여러 차원 중 인간계와 그 상위 차원들을 이르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을 통한 사마디의 수준을 설명하며 이 용어로 사마디의 단계-색계도 무색계도 다시 세부화해서 여러 단계의 사마디를 설명하기도 합니다-를 정의하기도 합니다만 세세히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스킵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구속도 한계도 덜한 행복하다는 차원의 환생을 한다해도 그 모든 것이 한순간 꾸고 깨어야 할 꿈처럼 덧없는 거라는 말씀인가 봅니다.


#10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우리에게 자애로왔던 모든 어머니들이 고통 속에 있는데 자신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가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보리심 bodhicitta : 일체 중생을 위해 내가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큰 발심을 말한다)


-어느 성현의 가르침이던 공감에서 시작하실 때 가장 마음 안에서 울립니다. 입보리행론을 10년 전에 읽었었는데 내용이 거의 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수한 환생을 해오며 셀 수없는 어머니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라 살았었기에 그 셀 수도 없는 어머니들이 이 세계 환생하셔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로 살아가시니, 이 세계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거란 식의 내용이 있었던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사람이면 더우기 심리학자 애들러 씨 처럼 자신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의 경우 어머니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살아가는게 남녀 누구나의 보편적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고아로 자라 어머니 얼굴 마저 희미하게 기억 안난다는 이더라도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에 더욱 입보리행론의 접근방식이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그럼 그 고마움과 그리움의 대상이신 어머니를 거듭되는 생에서의 무수한 어머니들로 확장하고 그 어머니들이 이 세계 모든 생명들로 환생하신거라 재차 확장해 그 무수한 생 동안의 어머니들께서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의 대다수가 슬픔을 느끼며 안타까움과 함께 반드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리란 결심이 일게 되겠지요.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리라는 결심도 말입니다. 어머니가 고통 속에 있단걸 알면서도 행복에 겨울 수 있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11 모든 고통은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는데서 생겨나고 원만하신 부처님은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셨으니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바꾸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 고통의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는 것도 극단적인 수준의 과대 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를 돌보지 않으면서도 타인만을, 세상만을 위해 살아가던 이들 마저 중상모략에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름 건실하게 살아오던 사람이 다른 이의 위증에 의해 무고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내 탓을 하는게 낫다며 타인들의 비난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에게 끝도 없는 모욕과 멸시가 계속 되기도 합니다. 이 순간에 내적 수양을 하라는 둥 불교적으로 인욕바라밀 수행의 기회를 줬으니 감사하라는 둥 한다는 것도 미친게 아닌가 싶군요. 그 정도의 의식 수준이라면 이미 수행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의 성자인 겁니다.


타인에게 무슨짓이던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행위로 고통스러워 하는 그를 보고 "그건 니가 너 자신의 정서를 통제 못하고 괴로워 하니 너 자신의 탓이다." 말한다면 또라이가 명백합니다. 그와 같이 자신의 고통의 탓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모두 자기 탓만 하는 것도 스스로 모든 상황과 자기 감정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과대 망상인 겁니다. 건널목(횡단보도)에서 파란 신호등을 보고 건너는데 교통법규를 위반하고 나를 덮치는 자동차에 의해 사고를 당한다면, 이 상황에서도 모든 상황을 통제 못한 자신을 탓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정신적인 테러나 물리적 테러를 당하면서도 자기에게서만 원인을 찾아야 할까요? 거듭 그렇게 모든 원인은 내게 있다며 내적 수양을 갖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날들이 멈추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내면의 분노와 억울함으로 수양을 안하던 날들만도 못한 트라우마 상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고통과 바꾸겠다는 잡도리가 진심이 되려면 내면의 응어리나 정신적 혼란 등 트라우마가 거의 치유되고 완화되는 것이 전제일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단계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공감하고자 마음을 여는데서 부터 접근해 가야 할 것입니다.


역자인 정공 스님은 37수행법 중 이 11번째 본문에 대한 주석에 『자타교환법』이라며 날숨에 자신의 행복을 세상 모든 생명들에 나눠주고 들숨에 세상 모든 생명의 고통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수행을 간략화하여 주석을 다셨습니다. 이는 12세기 티베트 보살 케세체가와의 《마음수행의 일곱가지 요점》에 대한 여러 주석서들을 참고하면 실수행으로 삼기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트라우마 상태로 치달을 정도로 울분과 슬픔과 상실감과 박탈감, 체념에 빠진 상태라면 이 수행은 할 수 없습니다. 하려는 심정 자체가 들지 않고 하려 한다해도 억울함만 가득해 질 수 있습니다. 단계를 거쳐 내면의 부조화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울분과 억울한 심정 등을 모멸감과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머리로만이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너와 나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 네가 네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닫기 위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살의 37 수행법》 낱낱의 법문 대부분이 수긍도 가고 공감 속에 실천 가능한 가르침들입니다만, 사람으로서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해도 쉬이 실천할 수 없을 항목들은 #12~#18 까지의 법문들입니다. 



-간략히 의미만 담아 옮기겠습니다-

#12는 탐욕스런 사람이 나의 재산을 모조리 앗아가도 자신의 몸과 재산, 전생부터 현생까지 그리고 미래생까지 행할 자신의 모든 선한 행위의 보답 마저 그에게 돌아가도록 기도하고 바라라는 것입니다. 

#13은 누군가 나를 살해해도 그의 그런 악행의 댓가 마저 내게 돌아오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14는 남들에게 나를 욕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비방하더라도 그의 공덕을 칭찬하라는 말씀입니다.

#15는 남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나의 허물들을 들춰내고 수치스럽게 만들더라도 그에게 가르침 받는다 여기라는 것입니다.

#16은 내가 그(그녀)를 마치 자녀 처럼 소중히 여기며 사랑과 정성을 다했던 이임에도 나를 원수 보듯 할 때 실망도 원망도 하지 말고 그(그녀)를 아픈 자녀 대하듯 측은히 여기며 더 큰 사랑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17은 나와 비슷하거나 나 보다 부족한 사람이 지가 잘났다며 나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라도 스승과 같이 공경하며 나의 정수리에 모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수리에 모시라는건 티베트의 심상화를 기반으로한 스승을 공경하는 명상 체계를 연상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이 마저 공경하는 과정을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다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도 더이상의 수행이 필요없을 인격의 최고 경지일텐데 열여덟번째는 과히 성자를 넘어선 경지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18 비록 생활이 가난하고 항상 남의 멸시를 받으며 중병에 걸리거나 악귀에 시달리더라도 모든 중생의 악업과 고통까지 내가 대신 받으며 결코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열여덟번째는 뜻으로 옮기지 않고 전문을 그대로 받아 옮겼습니다. 궁핍한 환경으로 어렵더라도 매순간 타인들이 같잖게 보고 모욕하며 모멸감을 주더라도 낫기 힘든 병에 걸려 고통 속에 허덕이고 악령에 씌여 제 정신을 못차리겠는 순간에 마저 온세상 뭇생명들 전체의 악행의 댓가와 그들의 고통을 모조리 내가 감당하겠노라 결심하고 그리 고통과 징벌 같은 삶 속에서도 용기를 내며 살아가라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쯤이면 이미 수행이 더이상 필요도 없는 인격의 궁극에 이른 성자인 겁니다. 이 정도 수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는건 벌써 득도를 너머 깨달음의 경지란 말 아닙니까?


대개 수행은 의식과 영적 성장을 바라며 다가섭니다. 즉, 마음을 닦는다고 여기며 수행의 길로 들어서지요. 하지만 이 시대에 이 정도 경지의 가르침이라면 '이런 분들이 실제 했을까?' 의문이 일면서 만약 '예전엔 있었겠지' 수긍을 한다해도 자신이 실천하기에는 엄두가 안날 수준입니다.

수행법문을 보고 실천할 수 있으리라는 열의가 솟아야지 그저 '듣기 좋은 이상적인 소리들만 나열했네' 정도의 감상으로 지나쳐버리고 말게 된다면 수행법문들이 대중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게 궁극에 가까운 가르침들로 나아가기 전까지 사람의 마음 속 상처를 보듬고 치료해줄 체계들이 필요한 겁니다. 인지심리학 아동심리학 정신분석학 부터 분석심리학을 거쳐 자아초월심리학 등등과 실존치료 예술치료 기법들을 포함한 심리치료기법들까지 심리학과 심리치료 전반을 체계를 갖추어 교육과정에 도입해야만 합니다. 심리학 전반만이 아니라 세계 다양한 명상 체계와 수행체계도 교육과정에서 지식을 머리에 쌓는 것 보다 비중있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 속에 상처와 아픔만 응어리진채 방치된 아이들이 자라나 범죄자로 성장하면 처벌만 하겠다는 사회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합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가해나 방치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도 편견과 독선과 아집에 차 자라나서는, 자기 스스로도 추스리지 못하면서 지가 갑이라는 의식만 가득해 특권층이 되면 어떤 사회가 되는지 다들 충분히 넘치게 경험하며 살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더 이런 세계를 외면할 일도 아니고 버려둘 일도 아닙니다. 교육학자들과 다양학 심리학자들, 세계 각 수행체계의 명상가들과 명상의 효과를 연구한 뇌과학자들이 모두 새로이 교육과정을 다시 갖추려 논의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과정 전반을 새로운 커리큘럼을 완비해 실제 초중고 교육과정 전체에 적용해야 합니다. 전인교육이라고 말만 해왔지 입시위주의 교육만으로 인격은 학교나 학원 취미활동 등의 사회생활로 저절로 갖춰지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교육체계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만들어 가고 있기에, 연일 신문과 뉴스의 사건사고가 모질대로 모진 사람들의 흉한 이야기로 가득한 겁니다. 그 사람들이 알고 보면 유아시절 자신의 아이스바를 뺏어가 자신을 울리고만 거지아저씨한테 다음날 빵을 가져다 주던 그런 아기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아기들이 그 심정 그대로를 간직한 채 자라날 수 있도록 이젠 상처는 추스려주고 아픔엔 귀기울여 주는 제도적 지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교육체계 전반을 입시가 아닌 심성을 갖추는 체계로 자리잡을 수 있게 누구나 관심과 지원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세계 다채로운 종교들 전반과 무신론 또한 포함시켜 그 장점과 단점, 폐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급진이슬람 테러단체들의 확장으로 중동뿐 아니라 세계 다수 지역이 어지럽습니다. 각국에 과도히 유입된 이슬람 난민들과의 취업경쟁이나 그들로 인한 복지비용부담과 복지혜택 축소를 경험하며 난민 수용국가들 원거주인들의 이슬람 유입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커갈 수 있습니다. 일부 이슬람 사람들로 인해 야기될 사회 불안 요소들을 근거로 난민수용국가 원거주민들이 이슬람 이민자들에게 적대감을 더이상 숨기지도 않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그것을 차별이라 여기며 생활하게 될 무슬림들이 끝내 급진 이슬람 테러단체 추종세력으로 변모할 우려가 큽니다.


-이 상황을 원천 차단하려 했다면, 애초에 난민 수용이 아니라 아프리카 등에 조차지를 조성하거나 대서양에 인공섬을 만들어 이슬람 난민들을 이주 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을 겁니다. 어차피 난민수용으로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로봇과 인공지능 도입이 목전인 상황에서 헛소리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역설었으니까요.-


그러니 자기 종교의 폐해도 속속들이 배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맹목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인종적 지역적 관행적 종교 추종이 아니라 합리적인 분석을 통해 자기 종교의 폐해와 단점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추종할 가치가 진정으로 있는 것인지 판단하도록 또 자기 종교의 페해는 바로 잡으려 그들 스스로가 노력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리되면 옛 성인들과 현인들 가르침이, 그저 넘사벽의 실천 불가능한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넉넉히 실천할 수 있다 자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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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 결정적 1%, 사소하지만 치명적 허점을 공략하라
리처드 H. 탈러 지음, 박세연 옮김 / 리더스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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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① 우선 본서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뉴스와 신문 기사를 통해 보고 듣는 세계상 때문이었습니다.

갈등이 넘치고 격렬해지는 세계는 아마도 공감과 타협 보다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최우선시 하는 이기주의가 무엇 보다 가장 큰 이유라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갈등은 어떻게 중재하여야 할까? 다시 말해 이기주의를 어떻게 공감과 공의로 자리바꿈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일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갈등을 원천 차단하거나 완전 해소할 수는 없더라도 이 갈등을 중재할 수만이라도 있는 길이 무얼까? 평생을 두고 고통과 구속과 한계에서 벗어나고 벗어나게 할 방법이 무얼지 의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았자 예수님께서도 부처님께서도 답을 찾지 못하고 미뤄두고 가신 길을 제가 감히 찾을 수 있을 성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살면서 마주친 많은 이들의 편견과 독선과 아집을 감당하며 그걸 참고 참고 또 참아내다 끝내 내가 그들 보다 더 미쳐 날뛰게 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람은 뭘로든 갑질하는 존재더군요. 금전적 계층으로던, 권력으로던, 지적 우위로던, 외모로던, 하다못해 지 부모의 평판으로던, 웃기지도 않는건 지가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여기면 그것으로도 계층을 나눠 갑질하려 드는게 인간이더군요. 그러면서 연장자를 우대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이 대우는 스킵해 버릴 줄 아는 탁월한 센스 마저 발휘하는 스마트한 남녀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이딴 나라라면 조직폭력집단 구성원들이던 전직 특수부대원이던 오래 수련한 고수들이건 연장 들고 갑질하며 살인하는 것도 원초적인 갑질에 속하니 그것도 인정해야 하는 사회가 한국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더군요. 이런 식으로 다들 갑질하며 살아가다 보면 역시나 이 세계는 마계이며 지구는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구나 깨닫게 되겠죠.-


저는 그래서 갈등을 중재할 방안 중 하나는 도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도덕의 사전적 의미인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라는 전제에서 사회적 여론과 관습을 배제한 전세계인이 다들 공감할 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도덕이란 것의 원초적 그대로는 양심이며 그것은 공감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님의 논어 강좌를 통해 공자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우리가 유교 문화하면 떠올리는 그런 관습과 질서나 규범을 가르침 하실 때 공자님께서는 공감에서 시작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억나는 한가지는, 3년상인가(?) 부모님 사후 부모님의 묘에서 생업과 학문도 뒤로 한채 3년 간 묘 곁을 지키던 그 시절 문화이자 관습에 대해 비판하는 이가 있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에게 공자님께서는 부모님은 널 낳으시고 니가 혼자서는 대소변도 처리 못하고 먹지도 씼지도 못하던 시절 3년 동안은 한시도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널 돌보셨지 않겠느냐는 말씀으로 3년 상을 문제 삼는 이에게 가르침 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3년 상은 이 시절 논리로는 이해 불가한 관습입니다만 이런 시절에도 그 말씀에서 부모님의 노고와 사랑은 느껴질 만큼 공감 가능한 주장이셨다고 생각됩니다. 


이 시대에는 관습과 상식이 다른 많은 나라들이 나름의 문화적 차이를 실감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각 문명권역들은 제각기의 문화를 유지하며 교류했을 것입니다. 허나 이 시대처럼 이토록 인류 누구나가 타문명의 특성과 자신의 문화와의 괴리를 체감하며 살아가는 시대는 초고대문명 이후로는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시대에 자신의 문화와 관습의 우월성만 내세우는 것은 타문화권을 무시하는 것을 너머 정벌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문화에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그 문화에서 자라나며 익숙한 문화가 자연스러울테니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자긍심이 타문화에 대한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이슬람의 꾸란과 하디스에 근거해 6세 이상의 유아와 결혼과 유사성행위가 허용되고 결혼한 여아가 9세만 되도 성생활이 용인되는 문화는 이 시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저로서는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 문화입니다. 미친 유아 아동 성폭행범들을 국가도 아니라 문명권역의 차원에서 용인도 아니라 상식으로 여기는 문화가 납득될 한국인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분명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넘을 수도 건널 수도 없는 괴리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해의 노력 자체를 체념해 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감 가능한 대상으로 치환하고 비유로써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지속할 수 있습니다. 


공감에서 시작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공존할 여지가 생기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공감과 이해라는 긍정성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말했듯 타인을 이해하기 보단 자신이 타인 보다 우월한 면을 어떻게든 찾아내 타인을 짓밟기를 즐겨하는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자신은 특권의식이 없는 양 교양있고 우아한 양 구는 인간들일 수록 더더욱 내적으로 우월감을 숨기고 있더군요. 그런 은폐해둔 우월감으로 타인에게서 자신 보다 못해 보이는 면을 찾아내 무시해도 될 성 싶으면, 갖은 수단으로 멸시와 모욕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진면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론 지들 계산에 이로운 대상에게는 천사 코스프레를 하며 갖은 헌신을 다하는 양 아양을 떨테죠. 무시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는 주저않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들의 헌신 코스프레에서 그 순간을 겪어본 사람은 그들의 진정성을 어찌 찾아야 할까요?


그렇기에 더더욱 인간의 공감과 이해는 문명과 문명, 문화와 문화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 내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반드시 지녀야 하고 없어서는 안될 조건들입니다. 


②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면 무엇보다 사람들 중 이기심과 합리적 판단만으로 대중을 대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행동경제학자인 리처드 틸러 씨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약칭해 '이콘'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행동경제학자들은 이콘은 현실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경제학 이론에서 가정한 가상의 존재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일상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요인'으로 판단과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비합리적인 존재들이라 단정 지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이미 영화 [검은 집] 리뷰에서 언급했던 성경과 역사를 다시한번 짚어보려 합니다. 


[신명기20:10~20:17]을 보자면 하나님의 명이라며 침략 지역의 어린이와 여자만을 남겨두고는 젊은이 부터 노인까지 모조리 죽이고 침략지역의 모든 재산을 나눠 갖는 이스라엘인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2:23~ 24]에서는 하나님과 함께한 가장 강력한 선지자인 엘리야의 제자이기도 한 엘리사는 죽은 이를 되살리기도 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에서는 다른 여타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위의 문제있는 인간이었던 듯 합니다. 그저 어린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린다고 엘리사가 돌이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콤 두마리가 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인 사례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3;25]에서는 침략지의 성읍을 쳐서 헐고 돌을 던져 경작지를 가득 채우고 모든 샘을 메워버리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여자만 살려 두는 것은 여자는 성노예, 어린이는 어린시절 부터 복종하고 굴복하도록 길들여 순종적인 노예로 길러 장기적인 노동력으로 쓰기위해 살려두는 것이 명백합니다 성인 남자들을 몰살하는 것은 생명존중이니 인권이니 하는 걸 따지기 전에 이방인의 유전자를 남기지 않겠다는 가장 '이콘'다운 판단과 의사결정 방식입니다. 다만 엘리사의 행동은 '이콘'답다기 보단 지 감정대로 성질난다고 어린이들까지 집단살해 하는 경악할 수준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아닌가 합니다. 또 침략지의 성읍을 파괴하고 경작지를 망치고 샘을 모두 메워버리는 것은 자신들 영지 주변에서 경쟁상대가 될 부족이 위협이 될 만큼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하기 전에 그 지역에서 거주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한 선제 차단이었습니다. 이 또한 합리적인 판단이 남다른 '이콘'다운 의사결정 방식일 것입니다.


동양역사 속에서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진의 장군 백기의 명령으로 포로가 된 조나라 병사 40만명을 생매장한 사건은 동아시아 전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집단 학살 사례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통일 이전 위급 상황에서 부모를 버리고 도주한 사례나 삼국지에서 덕망있는 군자로 묘사된 유비는 위급시 아내를 내팽개치고 도주한 인물입니다. 


진시황이 자신의 행보에 도덕적 기준으로 딴지를 걸 우려가 있는 학문인 유학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 자신을 비판할 우려가 있으며 반기를 들 가능성 마저 있는 유학자들을 대거 묻어 죽인 것을 봅시다.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헤아릴 수 있고 그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반역을 미연에 차단하고 다른 이들의 반론의 여지 마저 예방하는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이걸 고려하고 사람 생명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그런 짓을 명령한다는 자체가 무엇보다 '이콘'답기에 가능했던 것일 겁니다. 또 백기 장군의 40만명 생매장 명령은 '이콘'다운 명령 또 사이코패스다운 명령입니다. 식량과 인적 물적 자원 낭비를 최소화한다는 차원에서 효과적 의사결정이니까요. 유방과 유비의 사례는 자신의 목적 달성 즉, 왕권 획득을 위해서라면 부모와 가족 정도는 얼마든 희생할 수 있다는 인간미를 상실한 합리성이라고 봅니다. 여기까지만 봤을뿐인데도 '이콘'적인 것이 결국 사이코패스적인 것이더군요. 


십자군 전쟁에서의 살육은 스킵하고 마녀사냥만을 보더라도 그저 고정관념만으로 몇세기에 걸쳐 몇백만명을 처형한 경우입니다. 희생자 중에는 8~12세에 이르는 여자어린이들 마저 있습니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영토 내 '스타이엘마르크'라는 한지역에서만 16~18세기 사이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희생자가 1,160명이라고 합니다. 몇몇 마녀사냥 재판관 개인이 처형한 마녀사냥 희생자들을 예로 들자면 '바르다세르 후스'라는 단한명의 재판관이 화형시킨 마녀사냥 희생자만 700명이라고 합니다. '니콜라스 레미'라는 재판관이 재직 중 화형 시킨 마녀사냥 희생자만 900명이라고 하고요. 이러니 마녀사냥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유럽 내에서만 몇백만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한 자료가 과장이 아닌듯 합니다. 마녀사냥은 누군가의 기소로 이루어지며 기소된 이들 중 절반은 일상적으로 처형 되었다고 합니다. 마녀로 기소된 이들이 무죄를 주장할 때 그들의 무죄를 입증하는 방식은 몸에 바위를 묶어 강물에 던져서 떠오르는 경우 마녀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죄한 이를 살리시는 것이며 가라앉아 죽는 경우 마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처벌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이렇다면 처형 기록에 남아있는 마녀사냥 희생자들 외에 무죄 입증으로 죽어간 희생자들도 그에 육박할 것입니다. 마녀로 기소되는 여성들은 대개 아름다운 처녀들이었고 주변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죽어간 희생자들이 모두 서민층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뷰르스부르크 숭정령이란 지역에서 1623~1631년 사이 단지 8년 간 처형당한 희생자만 900명이라 합니다. 당시 희생자 중에는 위에서 예를 든 8세,9세,12세 어린소녀들 외에도 그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자매와 시의회의원, 시의회의원의 처자, 고급관리의 아내 등이 있습니다. 시기의 대상이 될 정도의 미모를 지녔다면 모조리 기소됐고 거의 다 처형 당한 겁니다. 한국으로 치면 한채영, 한지민, 이성경 같은 미녀들은 주변 못난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소하고 봤고 거의 모두 화형 당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 아름다운 유전자들이 계승되지 못했기에 유럽여자들이 그 지경인가 봅니다.- 마녀사냥에 기소되면 무조건 처형 당한다는 걸 그 당시 누구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단지 시기심이 일면 기소 부터 하고 봤던 거지요. 한마디로 '망할 년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에서 끝낸 것이 아니라 '너 이년 죽어버려라'였던 겁니다. 그리고 그냥 그 말로 끝나는게 아니라 반드시 죽을 거란 걸 명백히 알면서 기소한 것이고요. 세치 혓바닥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며 확실히 죽을 것을 알고 그랬으니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살해입니다. 게다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학살한 것입니다. 그 시절 누구나가 다 그렇게 타인을 마녀란 기소를 통해 살해할 수 있었고 그렇게 세치 혀로 손쉽게 살해하고 있는 환경 속에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친구를 이웃을 죽임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무고한 그들이 마녀라는 이름에서 갖는 선입견에 해당될 진정한 마녀가 아닙니까? 아니, 마녀도 아닌 살아 숨쉬는 악마들이었다고 봅니다. 마녀사냥이 그토록 끝이 없었다는 건 누군가를 마녀라 무고하는 행위가 끝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마녀와 악마들로 변한 인간들이 자신의 세치 혀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 욕구를 자제하지도 않았음을 마녀사냥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군중이 되면 인간은 그 자체로 마녀고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악마의 다른 이름... 그것이 바로 군중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라는 대대적 학살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인간의 사이코패스성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본군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으로 성노예 삼을 목적으로 여인들을 강제 납치한 일본의 사례 역시 마찬가지일테고요. 일본군 731부대의 마루타 생체실험,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북한군, 미군 등의 너나 할 것 없이 자행하던 민간인 학살, 베트남전에서 미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이 모두가 집단으로서의 인류는 모두 사이코패스다라는 걸 증명한 것만 같습니다.  


홀로코스트는 히틀러의 시온의정서 목격 이후 유태인 인종 말살을 의도해 자행된 것이라 증언하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그 저작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수긍한다면 이 학살 사례는 지들이 정의라는 독선으로 행하는 누구도 인정 안할, 지만 우기는 정의감이 원인일 겁니다. 그 말도 안될 정의감이 인류를 정복하려는 세력이 가져올 시대를 막기 위해 그럴 인물이 등장할 인종 자체를 말살 시켜 그런 인물의 등장을 방지하겠다는 말도 안될 합리적 판단에 이르게 한 것일 겁니다.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란 이름으로 성노예 대상 양민여성 납치 사례는 사병들의 성욕을 해소해 주고 전시의 스트레스를 완화하여 전투의지와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는 암흑어린 합리적 판단만으로 한 의사 결정이었을 겁니다. 전투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만 보고 정복지의 양민들 인권이나 고통 받을 그 심정을 무시할 수 있는 그 판단력도 '이콘'다운 것이었다 싶습니다. 일본군의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 역시 인류사에 남을 '이콘'성향, 사이코패스 성향이 명백합니다. 전시 정복지역 민간인과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으로 의학과 전쟁 무기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인권이던 생명존중이던 그 따위 것들은 간과해도 된다는 관점... 그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은 누가 양민이고 누가 적군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정보전달과 직접적 테러로 아군피해를 가져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치 못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갑니다. 격전지에서 전우라는 이름의 친구와 이웃이 죽어가는 것을 거듭 목도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살아 돌아갈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매일 매순간 강렬히 압박해 왔을 겁니다. 그런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서 극단적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휘관이라면 단한명의 사병이라도 타국에서 죽어가는 현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살릴 수 있는 사병들은 반드시 살려 고향으로 돌려 보내리라는 결심에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는 현실이... 그것이 무장한 자신들에게는 저항하지도 못할 민간인 여성과 아이와 노인들이 절반은 넘었을 양민들을 학살하는 근거일 수 있음이 너무 안타까워 옵니다. 그 책임감과 그 생존본능이 단순한 덧셈뺄셈만을 거쳐, 피아구분 안되는 상황에서는 이방인 양민들 쯤은 학살해도 된다는 차가운 결론에 이르도록 했음이 안타깝고 가슴 아픕니다. 


518 광주항쟁에서 국민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해 주어야 할 정부와 군이 자행한 학살은 어떻습니까? 적군 포로도 아니고 파병지역의 피아식별 불가 상황에서의 결정도 아닌, 주권자인 국민을 그들의 생명과 안전과 안정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정부와 군이 하나되어 살육한 말도 안될 사건입니다. 정부에 반발할 우려가 있으면 국민도 학살의 대상이 될 수 있던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겁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 IS의 중동 내 유소년 참수와 개종 거부자들에 대한 집단 학살, 현지 이슬람테러단체 추종자들을 독려해 일어난 프랑스 테러 등도... 피와 눈물 따위는 당연히 너희들 몫이라는 매서운 어리석음이 불러오는 사건들이지 않습니까? 집단 이기주의는 때론 이토록 어리석고 모질게 사람을 몰아갑니다. 이 어리석음은 상대에게 커다란 피해만 줄 수 있다면 그 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감당해야 할 상황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눈 감은채 모질어지도록 만드나 봅니다. '너희 피해가 100 이라면 우리 피해가 99 라도 감당하겠다.' 이런 머저리 같은 셈법도 가능한 것은 계산만으로 주저없이 행하는 '이콘'이기에 가능할 것입니다. 손실회피 성향(지닌 것을 잃기 싫어하는 심리)이나 현상유지 편향(앞으로도 지금까지와만 같기를 바라며 변화 보다는 현재상태 유지를 바라는 심리) 따위도 작용하지 않을만큼 덧셈뺄셈만 할줄 아는 '이콘'이 되버리기에 행하는 일들일 겁니다. '난 잃을게 별로 없거든... 근데 니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 크게 잃었다며 공황에 빠질테지?' 이런 계산으로 상대의 피해만 고려하는 머저리가 또 어찌보면 '이콘'인지 모르겠습니다.


행동경제학자들이 정의한 '이콘'은 분명 사이코패스를 말하는 것이더군요. 머리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과 내 가족과 내 친구와 내 이웃의 죽음을 덧셈 뺄셈해서 '이 정도 피해를 줄 수 있다면 가족과 친지 중 누군들 좀 죽어도 그만이지' 란 결론을 답이라 내놓을 수 있는 인간들이라면 분명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코패스를 행동경제학자들은 '이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헌데 이제까지 언급해온 사례들은 모두 인류사 깊숙히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제 뇌리에 강렬히 아로새겨진 사건들만 예로 들어 그렇지 낱낱의 사례들을 찾아보자면 끝이 없을 겁니다. 이것은 결코 확증편향(어떤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 보다 확인해 주는 증거를 찾으려는 성향)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은 사이코패스 성향은 인간의 속성이며 이러한 속성은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꺼리낌 없이 발현된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봅니다. 기존의 심리학에서는 사이코패스란 몇몇 특정한 사람들만이 갖는 유전적 속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인류는 선량한데 일부 불량품들이 간혹 출현할 때가 있다는 것이 기존 심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미 예를 들었듯 사이코패스는 집단을 이룬 인간들 즉, 인류의 가장 확연하고 명백한 속성입니다. 아마도 다른 긍정적 성향들을 압도해 버리고도 남을 강력한 속성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인류가 창조되고난 직후 있었던 일이라면 속이고 끌어들이고 규범을 거스리고 남탓하고(여기까지가 아담과 하와의 사례) 시기하고 살인(카인의 사례)하는 사건까지가 우선 기억날 정도 아닙니까? 그러고도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심정인 것인지 면죄만을 요구하던 것(카인)이 인간이고 말입니다.


 역사지식이 일천해서 한정된 사례만을 예로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될 수 있으면 전투가 아닌 살육의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려 했습니다. 전장에서의 경우라면 '니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적군을 죽이고 아군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을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해 논하는 것입니다. 그 전장에서 검과 창과 철퇴와 도끼가 난무하는 상황이거나 현대의 총탄 빗발치는 상황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실존적 위기도 감당해 보지 않은 인간이 감히 옳고 그름만 논하고 있는 것이 염치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사의 경우 최대한 전장에서도 전투 외의 사례만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람이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은 나 자신 부터가 사람임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한때는 고통과 상처를 추스리면서도 내게 상처를 주고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들 마저 이해하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많은 이들을 사랑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그건 아마 어느 정도의 생명일거라 헤아린다해도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일 겁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종소리는 잦아들고 말았습니다. 공감은 주고 받아야 하는 겁니다. 일방적인 공감은 어느 사이엔가 끝을 알리게 됩니다. 그래서 더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서로서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건 그에게 공감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너무도 일방적인 위치에서 공감 받기만을 해왔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어떤 외면과 방치 속에서도 사람을 이해하던 아기가 꼬마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더이상 세상에 없지만 그 소년을 기억 속에 담고 있는 한 남자는 알고 있습니다. 노력이 없는 공감은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 아기는 그 꼬마는 언제나 실망하고 언제나 상심하고 언제나 슬프고 서러운 상황에서도 누구나 이해하고 싶어했습니다. 다들 아파서 그런거라고 온갖 애를 써대며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자신을 학대하는 이를 그런 학대를 외면하는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더이상 그 아기도 꼬마도 세상엔 없지만 분명 이해하고 공감하고파 하던 그 아이의 노력은 어느시절 속엔가 영원히 담겨 있을 겁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모든 걸 공감하기만 해서도 안될 일입니다. 문제를 발견하면 개선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겠지요. 역사 속 학살로 죽어간 그 숱한 사람들 만큼의 생명을 살리는데 인류가 노력을 기울인 역사를 본적 있습니까? 물론 아무 이익도 없는 고래 한마리 살리는데 대중이 열정을 다했던 실화 바탕의 영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사이코패스성향이 고래 한마리의 생명으로 상쇄되리만치 가벼운 문제라 여겨지진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학살된 몇천만명도 훌쩍 넘어버릴 그 인명이 고래 한마리의 생명과 다를 바 없다는 득도한 스님 코스프레 하는 이들에겐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염세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래 한마리에 쏟던 관심과 사랑, 하다못해 정치적 포퓰리즘까지도 인류에게 찾을 수 있는 미약한 불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불씨 하나가 온세계를 태울 거대한 불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식 표현을 빌리자면 군중은 미친 '폭두'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허나 한편으론 군중심리를 통해 역으로 대중이 서로를 위해 살아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체념을 현실 인식이라며, 차갑고 맥빠진채 세상을 포기해선 안될 일입니다. '누구도 그 스스로 완전한 섬이 아님'을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부분이며, 대양의 일부임'을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킴'을 그렇게 모두가 '인류에 속해 있음'을... 무엇보다 그것을 납득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세계에 시대가 울리는 종은 모두를 위해서 입니다. 당신을... 나를... 서로를 위해서...


④ 서론이 길었으니 최대한 짧게 가보겠습니다.

본서의 원제는 Misbehaving 으로 '의외적 행동' '예상 외의 반응' 쯤으로 번역되어야 할테지요? behave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행동하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다. 얌전하게 굴다. (기계가)작동하다. (물질 등이) 반응을 보이다.'는 뜻이더군요. 그러니 Mis+behave는 정상적인 행동규범을 벗어난 일탈적 행동, 일상적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는 예수님 말씀, "본래면목이 곧 부처"라는 불교의 법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교의,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고,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는 [에메랄드 타블렛의 비밀]를 통해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가 한 가르침이 인간의 본모습이자 인류가 이 세계에 구현해 내야 할 사명이라면... 인간은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는 상태이며, 또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세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인간은 부처이고 하늘이고 천국이며,  지상에서 천국을 구현해 내려 노력하고 서로에게 천국이어야 하는 존재란 것이 어느 가르침에서나 가질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느끼는 간극이 더 커갈 뿐이죠.


'이상'은 behave 해야 할텐데, '현실'은 misbehave 하고 있다고 보면, 이 "의외적 행동들 예상 외의 반응들만 보이는 사람들에 어찌 대응해야 할 것이냐?"-대중의 행동을 어떻게 예측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의 판단과 결정에 개입해 갈등을 중재하고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가 관건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서를 탐독한다면 행동경제학이 경제학에 심리학이 융합된 학문이기에 이해할 바가 더 한층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합리적 판단 유형을 '이콘'으로 비합리적 판단 유형을 '인간'으로 분류해 논하고 있습니다. 저자 눈에는 인류 대다수가 저자가 말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인'으로나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는 비합리적 존재로 보였나 봅니다. 하지만 이제껏 언급해 왔듯 인간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숨길 수 없는 합리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도덕 감정론》에서 애덤 스미스가 든 '열정'이란 표현과 케인스의 '야성적 충동'이란 표현을 저자 자신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인'과 같은 선상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욕망과 감정, 취향에 따라 때론 이해가 불가능한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는 비합리적 존재라는 것이 행동경제학에서의 전제입니다. 


최적화 이론(인간은 경제활동에 있어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이론)을 근거로 일상에서의 선택에서는 미숙할지라도 거액의 투자 등에서는 심사숙고하여 선택하며 거듭 학습효과를 얻는다는 다른 경제학자의 논리에 저자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일상에서의 식품과 필수용품들의 소비는 빈번하게 거듭하는 것이다. 헌데 그것의 학습효과가 어떻게 일생에 한번뿐일 퇴직금 활용이나 노후자금 운용에 있어서의 학습효과 보다 미숙할 수 있는 것인가?  빈번한 일상 소비의 학습효과가 저조하고 일생 기회가 자주 없는 자금활용에서의 학습효과가 더 높다는 것이 납득이 가는가?'


-맞는 말이 아닌가요? 시행착오를 일생동안 겪으면서도 우리는 지름신 강림했다며 충동구매를 하고 바가지를 쓸 때가 있습니다. 할인매장에서 별 쓸모도 없는 것들을 바리바리 사들고서 돈 굳었다며 흐뭇하게 웃을 때가 있고 말이죠. 그러면서도 거액의 투자나 자금 운용에서는 실수가 없을 거라 자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주식투자액이 7분의 1 로 토막나기도 하고...- 


이렇듯 인간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기존경제학 이론의 전제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을 통해 선택한다는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하고 결국 하나의 학문으로 성장발전한 것이 행동경제학입니다.


때론 대중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난민 사태가 사회문제화 될 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미 무슬림 이민자들의 범죄율과 수감율이 인구대비를 거치지 않고도 수감인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며 유럽 주요국가들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의 폭동이 몇차례 이어진 전적이 있는 유럽입니다. 그걸 고려할 때 난민 수용이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은 1+1이 2가 아니면 귀요미인 것 만큼이나 명백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유럽으로 밀입국하던 난민 아기가 익사한 시신 사진 한장으로 독일을 위시해 유럽 각국이 앞다투어 유럽 각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난민수용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해소하여 오히려 유럽 국민들에게 유익하다는 여론몰이도 시작했었죠. 하지만 알고보면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이 적용단계에 도달했기에 조만간 산업계는 로봇이 인력을 대체할테고 사무직 인력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노동력 감소가 문제가 아니라 대대적인 실업난이 문제가 될 시대를 앞두고 감당도 안될 인구증가를 유도한 것입니다. 현재의 사회갈등은 문제가 아닙니다. 실업난과 사회갈등 요소 증가로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적대감을 갖게될 유럽 원거주자들과 무슬림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은 나날이 증가할 것입니다. 결국 사회불만이 커진 무슬림 이민자들의 급진이슬람화가 순차적으로 일어날테죠. 현재의 무슬림 유입자들은 잠재적 테러단체 추종자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벌써 그리본다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르겠군요. 어떻든 세월이 흐르고 흐를 수록 산업과 기업에서 로봇과 인공지능 기술 도입으로 대대적인 인력 감원이 더해지는 그 순간에 이르면, 더더군다나 급진이슬람테러 추종자들로 인한 유비쿼터스 테러로 유럽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몇백명의 피해자(사망 166명, 부상자 300명 이상)로도 충격이었던 지난해 11월 13일의 파리테러는 피해규모상 주목할 일도 아니었던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를 근거로 벌써부터 유럽과 미국이 공조하여 각국국민들 신상정보를 공유하고 인터넷과 통신 감청, 계좌와 결제이용 정보, 이동경로 확인 등 모든 개인 정보가 빅데이터화 하는 상황이 확대되어 말 그대로 사람에 대한 통제가 일반화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이 상황들이 순차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시발은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보고 그에 따른 대중심리 유도를 해왔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난민이 생겨날 상황 자체에서 문제를 인식했어야 마땅했지만 미래예측기구를 적극활용하고 있는 미국도 유럽도 그외 어느나라 정부도 시리아 내전과 IS의 세력 확장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되려 사태의 심화를 관망하고 있었던 것으로만 보입니다. 


대중을 비합리적이고 미숙한 판단을 하는 이들로 보았기에 그랬을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의 대응이 주효했던지 유럽 각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현실에 냉담합니다. 결국 유럽 유입 난민이던 무슬림 이주자들 대다수가 급진이슬람 테러단체 추종세력으로 변모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이 문제가 유럽만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구나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날을 맞이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 때때로 '이콘'이 되어 사태를 바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콘적 사고가 사이코패스적이라고 지금까지 말해 왔으나 이콘적 사고를 무조건 금지 해야 할 것이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합리적 사고가 위험할 때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할 경우입니다. 기준이 되는 규범이 공존이라는 전제에서의 합리적 사고라면 되려 금하는 것이 아니라 권하는 것이 더 마땅할테지요.




유럽 난민 수용은 어찌보면 행동경제학을 적용해 대중 심리를 통제한 경우가 명백하지 않나 싶습니다. 현상유지 편향(변화 보다는 현재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심리)과 소유효과(기존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이나 최근이라도 자신의 소유가 된 것에서 소중함을 느끼는 심리), 손실회피성향(자신이 지닌 것을 잃을 까봐 두려워하며 잃을지 모를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 등을 고려한다면 난민 수용을 국민적 차원에서 거부감을 갖고 그런 정부의 결정에 적대적 반응을, 난민 수용을 유럽 각국 정부가 발표한시점부터 유럽 각국민들이 보여야 했습니다. 허나 밀입국을 시도하던 난민 아기의 시신 사진과 그것을 난민 수용 허용의 계기로 이용한 유럽 정부와 유럽 언론의 감성적 호소는 행동경제학에서 〈넛지〉라고 일컫는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의도적 개입을 통한 행동유도의 경우였다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난민수용을 결정하는 것은 유럽 정부겠으나 국민적 합의가 암묵적으로라도 따라주었어야 난민 수용이 가능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난민 수용 정책은 시도 조차 못해봤을 겁니다. 


본서를 읽으면서 초반에는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점차 불안하고 두려워지더니 마지막 쯤에는 약간의 적대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개입하고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본서의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하는 인사말에서 언급했듯 미국의 오바마 정부도 영국의 캐머론 총리도 행동경제학자들을 기용해 정보국을 신설하고 운영하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끝내 대중심리통제를 정부차원에서 합법적으로 눈치도 안보며 할 수 있는 정당성 마저 갖게 된 것입니다.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이 그 개인과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는 각도로 합리적 차원의 선택을 하도록 넛지(옆구리 찔러 행동을 촉구하는) 정도할뿐이라는 합리화와 변명의 꺼리 마저 있는 대중심리통제가 될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아무런 개입이 없었던 경우는 유사 이래 없습니다. 스승이 개입하고 부모가 개입하고 자신이 속한 혈연과 지연이 개입하고 사회규범과 관습 게다가 고정관념까지 선택을 제약하고 하다못해 친구나 지인 우연히 마주친 남의 한마디도 우리의 선택에 개입하게는 됩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부모가 진학과 진로와 취업과 결혼에 개입하는 경우는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비일비재한 경우입니다. 스승의 경우라면 스승이 옳다고 믿는 규범을 답습하며 살던 분들이 우리네 선조들이시구요. 초반에 예를 들었던 3년 상에 대한 공자님 말씀이 공감은 가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당시 3년 상으로 생업이 어려우면 가족이 궁핍한 처지일 분이 계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그분이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3년상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고 궁핍을 마다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또 지병으로 묘 옆에서 찬바람 맞으며 기거하는 것이 치명적인 분이 계셨다고 가정해도 그분이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부모님께서 낳아주신 이 한목숨 부모님 가시는 길 3년을 곁에서 모시는게 마땅하다며 무리하다가 병이 깊어지거나 돌아가셨을지 모릅니다. 스승의 가르침도 이런 식으로 개인의 판단과 가치결정에 개입합니다. 


그리고 혼인과 진로에도 과거 종가에서나 가문 어르신들의 말씀이 꽤나 깊이 개입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관직에 나서는 선비들 중 같은 요직을 원하는 능력있는 인물이 한가문에서 두명있었다고 합시다. 이 둘에게 문중 어르신께서 "이 요직은 결단을 할 때 깊이 숙고하는 '갑'이가 맡고 '을' 너는 과단성이 있으니 다른 요직을 맡거라" 말씀하시면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면서 바라마지 않던 지위마저 사양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혈연이 개인의 판단에 개입하는 거라면 지연이 개입하는 경우는 아마도 이럴 것 같습니다. 과거의 어느 시대라 가정한다해도 A와 B 두 마을 사이가 다툼이 커질 지경이라면 다른 마을에 별다른 적대감이 없는 A 마을의 구성원 한명도 굳이 B 마을 구성원들에게 냉담해야 했을 것입니다. 특히나 다른 마을에 좋아하는 이성이나 우연히 친해진 친구가 생겼더라도 마을 간의 충돌이 있을 시 달리 선택할 수도 없이 그 충돌에 휘말리고 말았을테지요. 


사회규범과 관습이 판단과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경우, 우린 이것을 도덕이라며 우리의 양심과도 같이 여기고 절대적인 개입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성동본 결혼이 금지되던 시절이라면 아무리 사랑하던 남녀도 고작 동성동본이란 이유만으로 주변 모두의 반대를 경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성동본이면서 결혼식도 못올리고 사실혼 관계만 유지하던 남녀가 아기를 낳았을 때 결코 친아버지인 남편의 호적에 아기를 입적할 수 없게 제도를 그 따위로 운영했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국가 차원의 횡포라 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관습이 개입하는 경우라 한다면, 유럽과 전세계 다수 국가들에서는 합법이지만 한국에서는 사촌 간의 결혼은 근친혼과 다를 바 없이 본다는 것입니다. 

관습과 사회규범이란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기도 하나 대개 같은 시대의 대중이 공감하고 준수하는 원칙을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규범과 관습은 시대 마다 달리 변해왔습니다. 고구려 초기엔 형이 죽으면 형수와 혼인을 계승하는 형사취수제가 있었고, 신라시대엔 마복자라 하여 풍월주(화랑들의 대표)에게 다른 화랑들이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보내 같이 자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풍월주와 자신의 정기를 둘다 받은 아기를 원해서라고 학자들이 해석합니다. 하지만 유럽과 일본에 존재하던 초야권 중 유럽의 경우 처럼 권력자에게 압도 당해 그런 경우라면, 이유로는 납득이 갑니다. 허나 일본의 경우처럼 처녀인채 시집 보내지 않는다는 야릇한 논리에 따른 전통이 이 시대의 논리로는 왜 처녀인채로 시집 보내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갈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풍월주와 화랑 구성원들이 임신한 아내를 그런 식으로 스와핑한 이유가 쉬이 납득이 간다는 이는 없을 겁니다. 풍월주와 도대체 왜 정기를 나눠서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전우로서의 동질감? 음, 그런 동질감을 누구나 다 느끼고 싶었을리는 없을듯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독점욕은 어느 시대 누구나 남자라면 무엇보다 강렬할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관습이 유지되었다는건 사람의 판단과 의지에 작용하는 규범과 관습이라는 개입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관습이 어떠한 논리로 왜 생겼는지는 이 시대의 우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고정관념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여자들이 준성범죄 피해대상이며 여자가 무고를 해도 남자가 진짜 성범죄를 했을 것이라 의심 부터 하는 고정관념들 말입니다. 도대체 왜 "요즘 날씬해졌네"라는 수준의 말이나 "그렇게 입으니까 섹시한데" 정도의 말이 직장 내 성희롱이 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다이어트해서 그런지 몸매가 살아났어" 라는 말로 고소 당한다는게 말이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과장 같겠지만 작년 중순 네이트에서 검색했던 신문기사 내용입니다. 게다가 에이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알아본다며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남자들 반응을 엿보는 실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20대 여성이 '이쁜 여대생이 프리키스를 해 드립니다'라는 팻말을 놓고 남학생들과 키스를 한 후 "나 에이즈인데" 라고 말하고나서 남학생들의 반응을 보는 실험이었다더군요. 그런데 여성단체에서 이를 문제 삼아 기사화 되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프리키스도 아닌 '이쁜' 이란 표현이었습니다. 여성을 두고 이쁘다는 표현을 해서 여성을 성상품화했다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여자들이 줴다 미쳤다고 봅니다. 남자 대학생이 여대에 가서 똑같은 실험을 했다면, 그것도 "멋진 훈남이 프리키스를 해 드려요" 라는 내용의 팻말을 이용했다고 문제 삼을 남자도 여자도 없었을 겁니다. 위에서 들었던 직장 내 성희롱 사례나 이 사례나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을 준성범죄 피해 대상이거나 잠재적 성상품화 대상이라고 결론 짓고 있기에 가능한 논란입니다.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피해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그리고 되려 그것을 권력으로 이용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고정관념은 10대 소녀를 보고 애라고 한다거나 더군다나 20대를 보고도, 더 웃긴건 20대 중반 여성을 보고도 애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16세면 고구려에선 남자면 수의를 만들어 놓고 전쟁터로 나가 전사하던 나이입니다. 수의를 만들었다는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거죠. 그리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건 2세를 낳았을거라는 겁니다. 어느 시대라도 남자라면 가문의 대를 이을 자손을 낳고 나서 죽는 것이 기본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백제 계백 장군에게 참수 당한 신라의 화랑 관창이 풍월주(화랑들의 대표)가 된 나이가 16세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까지의 과거 어느시대나, 남자던 여자던 15~16세면 아기를 낳고 나서 육아에 전념하던 평균 나이였을 것입니다. 당시 18세인 노총각, 노처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 당시라면 30세~32세면 기본적으로 할머니가 되던 나이이죠. 근데 애엄마 나이 16세를 애라고 하는게 말이 되는 논리인 겁니까? 게다가 근래는 조숙증이라며 이차성징도 성적 발달도 더 빨리 완숙해지는 시대입니다. 또한 이 시대 16세 소녀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접하며 조선시대까지의 16세 아녀자들 내적 수양 보다 훨씬 다채로운 갈등 양상을 경험하며 거듭 도덕적 시험과 검증 과정을 거치며 지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16세까지의 아녀자들이야 기껏 내훈이라던가 칠거지악 정도의 기본 지식만 배운채 그러한 지식이 도덕적 시험과 검증을 경험할 기회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외부와 단절 되어 보내야 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소녀들은 다양한 도덕적 시험과 검증의 기회가 넘쳐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보이스피싱이라던가 게임에서의 채팅 상에서 이익을 추구하며 타인을 속이거나 순간을 모면하고자 거짓말 하는 사람들 등 여러 상황을 마주하고, 그에 대처하면서 점차 처세술 마저 갖출 수 밖에 없는 시대상황입니다. 조선시대에 여자들은 그것도 시집도 안간 16세 이하 여자라면 대외 교류가 전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생활이나 취미활동 등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처세할 상황 자체가 주어지는 이 시대의 소녀들은 조선시대 16세 아녀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인격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애엄마인 16세 아녀자와 비교한다면 이 시대 16세 소녀들의 내적 자원은 할머니 급임에 명백합니다. 사람에 대처하고 처세하는데 월등히 기교적일수 있을 다양한 기회를 갖으며 충분히 사회화를 거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애가 둘인 경우라도 조선시대 16세 아녀자는 순진할 수 밖에 없었고 아무리 지네 부모한테 우리 애기 소리 듣는 16세 여중생이더라도 이 시대 16세 소녀라면, 조선시대 80~90대 할머니들 급의 인생경험에 노출 되어본 처세 베테랑들입니다. 절대 애인 것만은 아니죠.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이 실상이라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존 자신의 고정관념에 익숙한채 익숙한 판단을 할 경우의 수가 더 클 겁니다. 그런 경향이 앞서 말한 현상유지 편향에 해당하는 판단이며 사고방식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고정관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리란 기대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깨고자 이런 글을 남긴 시도는 '선호역전'-A를 B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B를 A 보다 좋아하게 하는 것-을 시도 한 것이고요.


거듭 언급하지만 행동경제학은 인간은 비합리적 판단 유형에 속하는 존재들이라는 전제에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비합리적 판단으로 선택 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해(즉, 개입을 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유도하자는 결론에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이런 비합리적 존재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개입하자는 취지가 과연 대중들에게 유익하기만한 결과를 가져올지 저로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미 보아왔듯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타자의 어떠한 희생도 개의치 않는 인간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계속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광기어린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이 인간인데 미국 정부도 영국 정부도 정보국을 신설해 대중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개입할 것임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개입하겠다는게 무슨 문제냐? 이런 물음에 선뜻 "맞아요.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당연히 국민들에게 유익하도록 유도할테죠." 라고 확신에 차 말할 수만은 없을듯 합니다. 이미 민간 감시와 대중심리통제를 위한 모든 첨단기술력과 제도를 완비한 상태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이 사자에게 날개를 달아줄 뿐만 아니라 발톱과 이빨을 더 매섭게 날카롭게 다듬고 보완해준 셈입니다.


행동경제학자들은 독재자 게임(자신에게 더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선택과 공정하게 나누는 선택 중 무엇을 선택할지 묻는 실험), 처벌 게임(앞서 이기적 선택을 한 측과 이익이 더큰 보상을 함께 나눌 것인지, 공평한 선택을 한 측과 그보다는 적은 보상을 함께 나눌 것인지 선택하는 실험) 등을 통해 부당함을 응징하고자 하는 심리와 그런 심리가 어느 정도 보상에서 무너져 내리는지까지 실험을 거쳤습니다. 즉, 인간의 정의감, 도덕성이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충족 시킬 때 붕괴되는지를 검증 해 본 것이지요.


또한 공공재 게임(10명에게 각기 5달러씩을 주고 기부자가 있으면 그 두배의 금액을 10등분 해서 고르게 나누어 주는 실험, 만약 모든 인원이 전액을 기부할 시 모두 처음 배당 받은 5달러의 두배인 10달러를 받게 된다)을 통해서는 대중이 공익을 위해 과연 이기적인 충족을 멈출 수 있는가를 실험한듯 합니다. 한마디로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상황에서 공익을 추구하면 보다 나은 보상이 있음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즉 대중이 그러한 사실 자체를 알 수 없게 만든다면 대중은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보상에서만 만족을 찾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희구하는것을 멈추고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겁니다. 현재유지 편향과 손실회피 성향, 소유효과를 이용해  혁신이 아닌 안주만으로 멍청하게 통제 당하는 삶에 만족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매몰비용이란 개념(이미 지불한 비용의 가치에는 연연하지 않게 되는 심리)에 긍정적 거래효용(할인)을 더해 대중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하며 마치 이윤 추구가 아니라 대중에게 혜택을 주는 듯 가장을 하는 단체(기업, 기관)의 이익만을 더해 주도록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6개월 이용권을 끊으면 원가 보다 25% 할인해 준다는 말에 솔깃해 피트니스 클럽 6개월 이용권을 계산하고서 1개월도 채 다니지 않는다면 지불한 이용권 결제금액이 고객 자신에게는 버린 돈이 되지만 피트니스 클럽 측으로는 마치 공돈이 생긴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경우를 이릅니다.


이것을 정부던 기업이던 악용한다면 마치 커다란 혜택이 대중들에게 주어지는듯 포장하고서 대중이 지불하는 비용을 전혀 다른 용도로 지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선거 출마자들의 헛공약 남발도 위의 사례가 적용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대중이 돈이 아닌 주권자인 자신의 한표를 지불하고서는 공약 이행이라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자기통제의 두가지 전략은 보상 없는(내지는 보상이 미미한) 과도한 노동력이나 과다한 비용지불을 대중에게 부담하게 하는 방편으로 악용될 우려가 짙더군요. 자기통제의 두가지 전략 중 하나는 서약 전략이라하는데 -말 그대로 자신의 선택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자기의 선택권을 스스로 제한하는것을 말합니다- 체중조절을 하려는 사람이 열량이 높은 군것질거리를 멀리 하려 눈에 보이는 먹거리는 모두 눈 앞에서 치우는 것과 같은 대처 방안을 말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만족지연 전략으로 당장 받는 쪽을 선택한다면 1개가 주어지지만 5분을 기다리겠다면 3개를 준다는 애들 약 올리는 수작을 말합니다. 이 만족지연 전략은 실제적용 될 시엔 시간차 만족지연으로 활용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당장 받는다면 5개를, 내일 받는다고 한다면 6개를 준다고 할 때 대부분 두 경우 중 심각한 고려를 하고 선택하기 보단 내키는대로 전자던 후자던 선택할테죠. 하지만 1년 뒤 오늘 당장 5개 받는 것을 선택할지 1년 뒤 그 다음날의 6개를 선택할지를 묻는 경우라면, 누구라도 후자를 선택할 경우가 더 많을거라 짐작할 것입니다.


여기서 좀더 생각해 보면, 이 두가지 서약 전략과 시간차 만족지연 전략이 악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용자측이 피고용자측에게 임금의 일부를 몇년 동안 누적하고서 지급 받는다면 누적액의 몇십 %를 추가 지급하겠다는 보상지급 논리를 제안해 동의를 얻는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임금의 일부를 미지급하고 그 금액 만큼을 투자비용에 할당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미지급분은 기업에게 금융권 대출 등의 채무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만 본다면 고용자 피고용자 어느측에게도 손해는 없는 제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가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고 투자가 이윤만을 남겼을 때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예측불가능한 경제상황이거나 투자손실이 고려해 본 규모 이상일 때는 직접적 리스크를 고용자만큼이나 피고용자 마저 떠안는 제도입니다. 


게다가 이 두가지 자기통제 전략을 역으로 활용해 대중에게 채무를 지속하거나 증가 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기업이 결제액 분할 납부를 초고가명품에 마저 시행해서 십년 이상의 초장기 할부 제도를 도입한다면 젠장할 제품하나 구입했다가 평생 빚쟁이 신세인 것이죠. 정부가 후결제 입주 제도를 시행해 거주 주택 금액 결제를 거의 반평생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금융권이 담보 평생 대출 제도를 시행한다면 평생 금융권 이자의 압박이자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죽으면서는 상속할 재산도 없이 몽땅 채권자들에게 뺏기고 가야 하는거죠. 평생 월세 신세와 다를 바없는 생활, 평생 생활용품 전체의 할부금을 갚으며 살아가야 하는 삶, 살아있는 동안엔 금융권 대출 이자나 갚다가 죽으면서는 자기재산을 상속할 권리행사도 못하고 가는 삶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서약전략과 만족지연 전략을 역의 차원에서 적용한다면 이런 식일 것이다 생각해 봤습니다. 헌데 파쇄할 길은 빚 안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뿐이더군요. 문제는 한번 빚지면 기업의 제품 할부 구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자액이 는다고 해도 소유효과, 손실회피성향, 현상유지 편향으로 인해 다들 잘들 지불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행동경제학은 이런 식으로 대중심리와 일상 통제가 가능합니다. 이딴 통제라면 넣어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들의 편견과 독선과 아집과 고정관념과 무싸가지를 극복 못해서 나도 그리 돼가는 지경인데 이젠 각국이 범세계적 차원에서 행동경제학으로 판단과 결정 마저 유도하려 들테니... 하~ 짜증난다.


어찌되었던 사회 이곳 저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통제의 압박이 더해 오는 것을 눈치도 못채고 당하고 싶지 않다면 본서를 한번 정도는 읽어보아야 할지 모른다고 직언해야 할듯 합니다.


※ 행동경제학이 적용된 사례를 일상에서 찾아 보고 싶다면 '디폴트옵션' -다운로드한 프로그램 설치시 자동설정으로 깔리는 연계 프로그램 같은 '자동설정' 자체- 이라는 것이 바로 행동경제학이 만들어낸 아직까진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에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사례이니 말이죠. 그외에 '옵트아웃'-선가입 되어 있고 이후에 탈퇴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은 이건 향후 집 사면 화재보험 자동 가입, 아기 낳으면 교육보험 자동 가입, 퇴직권고 연령이 되면 상조보험 자동가입 등 사람들 일상 전반으로 확대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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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작았을 때 - 김용택의 어른을 위한 토닥토닥 동시 필사 감성치유 라이팅북
김용택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자신이 어른아이인 걸 잊어버린 채 참고 참던 인내가 언젠가 부터 괴팍하게 강퍅하게 세월을 겪어가게 한다면, 끝내 성탄절 밤이 절실할 스크루지 같은 노인네나 되어야 할테죠. 그게 싫다면 본서와 만나 보세요 101번의 크리스마스 유령과의 만남을 어느 계절에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가져다줄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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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작았을 때 - 김용택의 어른을 위한 토닥토닥 동시 필사 감성치유 라이팅북
김용택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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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어느 화장품 브랜드의 예전 광고 카피 마냥  그저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그렇게 깨끗하고 맑아서 예쁜 시절들만 영혼에 담고서 훈훈함만 돌아볼 사람들을 위한 것일거라 내심 치우쳐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아주 작았을 때' 라는 이 동시 필사집에 눈길이 가던 것은, 나 역시 그저 동시로라도 훈훈함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고...

책을 받아든 날, 그 저녁 책을 읽으며 밑줄 긋던 흑심 뭉툭한 4B 연필을 들고서 동시를 필사해 보려 책장을 넘겼거든요. 한장 한장 지나치다 눈이 머무는 페이지 마다 흔적들을 남기면서 말이죠. 그러다 깨달았아요. 동시는 아이가 된 척 어른이 가식을 떠는 것이 아니라 어른아이가 노래하는 동심이라는 것을... 

읽다가 어린시절 음악시간을 지나며 익숙해진 동시들이 문득 문득 눈에 띠더군요. 그런 익숙한 기억 속의 동시도, 마냥 아기자기한 동시도 훑으며 지나치다가 부러움이 가득한 날을 노래하는 동시에, 아픔에 같이 아려지는 그런 동시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한줄한줄 따라쓰며 때론 부러웠고 때론 같이 아렸고 때론 휑한 채 멍해 있다가 그러다 어느새 책장을 덮게 되더군요.

어린마음을 물들이는 것은 '기쁨 즐거움 행복'만의 빛깔이 아니죠. 세상의 낮과 밤엔 무슨 색인지 모를 눈물빛이 어린마음에 젖어드는 날들이 많으니까...



봄 시내

이원수

마알가니 흐르는 시냇물에
발 벗고 찰방찰방 들어가 놀자.

조약돌 흰 모래 발을 간질이고
잔등엔 햇볕이 따스도 하다.

송사리 쫓는 마알간 물에 
꽃이파리 하나 둘 떠내려온다.
어디서 복사꽃이 피었나 보다.


☆ 이런 유년시절의 기억을 담고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삶을 누렸던 건지 은혜와 사랑 속에 자라온 건지 깨달아야만 할거에요...



꽃씨를 따라간 햇살

권영상

아기가 
꽃씨를 
심을 때,

햇살도 
몇 조각
따라 묻혔다.

어두운 
흙 갈피서
꽃씨 눈을 틔워

파란 새싹으로
밀어올리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
꽃씨 곁에 묻혔다.


☆ 우리의 영혼이 꽃씨라면 우리 안에 햇살은 하나님이시고 사랑이고 희망일테죠? 어두운 흙 갈피 같은 세상이란 곳에서 어떻게든 우리는 파란 새싹이 되기 위해 꽃씨가 눈을 틔우도록 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모른다해도 "난 천사의 씨지만 넌 악마의 씨야!" 라며 선 긋고 몰아부칠 때라도 우리라는 꽃씨는 늘 햇살과 함께일테니까...




소라 일기장

함민복

뻘은 말랑말랑해
발자국이 다 남아
어디 갔다 왔는지
누구와 놀았는지
거짓말할 수 없어
뻘 마을은 정직해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마태 10:26, 누가12:02]
자기 어깨 위의 짐이 또 자신의 선택들이 단하나도 수치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이들이라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온, 내면의 빛과 사랑에 따라 산 축복받은 부럽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부끄럽다고 수치스럽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은 이 어두운 세상에도 없는 것 같아요. 밤에 아파하며 어두움에 물들어 한 일들도 무작정 숨기려 해 보았자 더더 어두움 속으로 들어서며 스스로 어두움과 자신을 분별할 수도 없게 되니까... 감추지도 숨기지도 말아요. 마음만 더 무겁고 습하고 차가울거에요. 아무리 어둡던 날에도 때가 이르면 동녘으로 빛은 솟아오를테니까 태양을 피하겠다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숨어들려해도 금새 밝아온 낮일 겁니다. 그러니 숨지 마세요. 숨을 수 없어요. 바보 같은 짓이에요.

아무리
숨었어도

한혜영

아무리 숨었어도
이 봄햇살은
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
땅속 깊이 꼭꼭 숨은
암만 작은 씨라 해도
찾아내
꼭 저를 닮은 꽃
방실방실 피워낼걸

아무리 숨었어도 
이 봄바람은
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
나뭇가지 깊은 곳에
꼭꼭 숨은 잎새라 해도
찾아내
꼭 저를 닮은 잎새
파릇파릇 피워낼걸

☆ 말했잖아요. 햇살과 함께라고 숨을 수 없다고...



하늘

최계락

하늘은 바다
끝없이 넓고 푸른 바다

구름은 조각배

바람이 사공되어
노를 젓는다.


☆ 하늘이 하나님, 우주, 세계라면 구름은 내가 되고 누구나가 되고 바람은 운명일지 숙명일지 모르겠군요. 어른이 되면 자유를 떠올리던 구름이 그저 바람에나 휘어잡혀 떠밀려다니는 녀석일 뿐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죠. 하늘 구름 바람에서 바다와 조각배와 사공을 그릴 수 있게 해준 시절이 있었다면, '사공이 노를 젓는 수고 정도의 한가로움이 삶인거라'는 감상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시절들에 감사할 일입니다.



내 귀는 
앵두꽃처럼 
작아서

이준관


엄마,
내 귀는 앵두꽃처럼 작아서
작은 소리를 좋아해요.

봄비처럼 사근사근
말해 주세요.
봄비처럼 내 가슴에
사근사근 젖어 들게요.

별처럼 새록새록
말해 주세요
별처럼 내 마음 속에
새록새록 떠오르게요.

☆ 파인애플이 꽃이라는 말도 안될 것 같은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사진 속 잎사귀도 줄기도 달린, 꽃으로 피어있는 파인애플을 보고 놀란 눈으로 보고 또 봤더랬죠.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애한테는 파인애플 던지면 안될테니까요. 아이가 말하네요. 사근사근 새록새록 말해 달라고... 



꽃씨

최계락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면서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가 숨어 있다.

☆ 아이도 어른아이인 우리도 꽃씨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더라도 내면에 햇살을 담고 있는... 아무리 숨고 싶어도 언젠가 파란 새싹을 틔워낼 꽃씨요. 파아란 잎 하늘거리는 사이 빠알가니 꽃 피어오르면 우리 사이 숨어있던 노오란 나비 떼가 날아오를거에요.




가을 하늘

윤이현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 하늘은 언제나 머리 위에 있죠. 그런데 그 하늘을 하루 몇번이나 올려다 보나요? 십대 후반과 20대 초반 매일 밤을 술에 절어 보냈습니다.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선 하나님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눈물로 흐르고 있었죠. 그 시절 어느 기억에도 밤하늘 별은 없습니다. 밤을 닮은 어두움이 웃는 가면 뒤 흐르는 내 눈물에나 어려있었죠. 

한영애님의 '조율'이란 노래 아시나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조율 한번 해 주세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하늘빛... 그렇네요. 하늘빛은 어둠만이 아니라 푸르름도 있었네요. 어두움이 12시라면 낮도 그만큼일테죠? 온 낮을 온 밤을 그리움으로 절망,상실감, 박탈감, 저항할 수도 없다는 무력감, 수치만으로... 원망과 잃어버린 꿈과 그녀로 아파 지낼 때도 분명 하늘은 제 머리 위로 푸르렀고 어두움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겠죠. 그러니 살면서 한번은 도시가 전경이고 하늘이 배경인 날들만이 아니라 온전히 하늘이 전경인 나날도 보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하늘이 심장 안에서도 푸르르게 펼쳐져 있음을 그렇게 영혼을 조율하고 세상을 조율할 거라... 믿으면서...



사랑

서동수

나는 어머니가 좋다. 왜 그냐면
그냥 좋다.

☆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다.' 라는 옛 광고 카피가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는 분명 이유가 있죠. 외로움과 아픔으로 헤멜 때 함께였다거나 힘겨운 날에 기댈 어깨였다거나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의미가 보이지 않더라던가 나의 이상을 완성하는 걸 지지해 줄 것 같다거나...
사람이 사람을 그냥 좋다라고 할 때는 이유가 없어서라기 보단 이유도 떠올리기 성가실 만큼 그 또는 그녀와의 시간이 아리고 두렵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이유를 찾을 수 없을만큼 그냥 좋은 누군가는 분명히 있죠. 대개의 경우 그 이유없이 좋은 사람은 어머니일 겁니다. 세월을 거슬러 보면 누구나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하나였던 시절이 있죠. 어머니의 일부로 시작되어 어머니의 태내에서 인체를 갖추어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납니다.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고 어머니의 젖으로 숨을 이어가는 때를 보내죠. 알고 보면 우리의 첫울음과 첫미소와 첫옹알이와 처음으로 기고 일어서던 그 모든 날에 어머니는 함께셨겠지요. 열나고 기침하고 코흘리고 똥오줌 못가리던 모든 시절을 함께하며 우리 웃음과 울음에 웃고 울던 분입니다. 감히 이유를 찾으려든다면 미안할 일이죠. 원망뿐인 것 같던 순간에 마저 진심은 사랑으로 향하던 그녀... 태양이 불타며 피부 마저 벗겨지고 있는데도 날 감싼 어두움을 끝내겠다면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던 순간... 그 순간에도 떠오르던 기억들 중 아리던 하나... 어머니 



살구꽃 지는 날

안도현

할머니, 살구나무가 
많이 아픈가 봐요

살구꽃 이파리 깜빡깜빡
저렇게 떨어지는데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봐요
흰 머리카락 올올이 풀어져도
빗을 생각을 안 해요
참빗을 어디 두었는지
잊어먹었나 봐요

할머니, 살구나무가
할머니처럼 아픈가 봐요


☆ 아이야, 할머니는 아픈게 아니라 기다리고 계신거야. 
눈 내리고 꽃 피고 태양이 작렬하고 하늘이 높다가 다시 눈 내리고 
찬바람 화롯불 곁에서 도란도란 버텨가던 그 계절들을 많이많이 오래오래 보내셨잖니?
그런 오랜 변성을 거쳐 할머니께선 다음 계절을 맞이하시려 
완숙함으로 강을 건너 새로운 언덕에 이르려 기다리고 계신거야. 



뜨개질

권명희

꽁꽁 엉킨 가난을 풀어내어
엄마는 
긴 겨울을 뜨개질 한다.

두 평 남짓한 아가의 잠자리와
곤한 아빠의 머리맡을 덮어줄
발 고운 사랑을 짠다.

댓돌 쓸던 찬 바람이 
문풍지를 뚫고 
잔물결진 이맛살을
따갑게 보채도

코바늘에 꿰어 엮는
아가의 눈웃음이
어둡고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 준다.

발돋움해 일어선
아가 얼굴
손 꼽으며

언밤 지펴
날 밝히는
여린 손끝에는

밤새도록
빛살 고운 사랑이
무늬져 짜인다.

☆ 꽁꽁 엉킨 가난도 이 가족의 긴 겨울 마저 품어버린 따스한 봄을 앗아갈 순 없을 겁니다. 
그 발 고운 사랑이 짜내는 것은 아가의 잠자리와 아빠의 머리맡을 덮고만 멈추지 않을거에요. 
아빠를 통해 동료에게로 이웃에게로... 
아가가 자라나며 연인에게로 친구에게로... 
그렇게 서로를 세상을 덮어줄테죠. 

이 시가 너무 아렸어요. 
너무 따듯해서 너무 포근해서 너무 아렸어요. 
세상엔 이런 따사로움만 있는게 아니란 걸 아니까요. 

분명 피가 도는 육신을 지닌, 귀신이 웃는 모습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 귀신은 잘 웃고 잘 울고 달변가였습니다. 
그렇게 너무도 선명해서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귀신인 줄을 몰랐더랬죠. 
그를 버텨야 했던 아이는 되려 웃어도 울어도 말을 해도 사람들이 귀기라네요. 숨쉰 채 귀신이라네요. 

바닷가에서, 산골에서, 학교 옆 공터에서, 공사장에서, 도시 한 켠에서 그 어디서나 그 어느녁에나 
거센 바람도 모두 감당해내고 말았던 그 아이는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얼어버린 계절에만 머물다가 찬이슬만으로 식어가는 몸뚱이 안에서 버거워 울고 있네요. 

그래서 알 것 같아요. 뜨개질이란 시 속 가족은 한번도 한순간도 시린 가슴 지닌 적 없더란 걸... 
아가의 눈웃음과 더불어 포근한 빛이 그 가슴 속에서 한결같이 반짝이고 있었음을...
이 가족이 짜는 빛살 고운 사랑이... 
그 따스함을 마을로 도시로 세계로 우주까지 데워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꽃샘추위

유강희

꽃이 피는 게
샘나서 추위가 
닥친 게 아냐

꽃들이 너희들도 한번
꽃향기에 취해 보라고
추위를 초대한 거야

얇은 잎이 찢겨지고
줄기가 갈라지는 것도
까마득 모르고 말야

꽃들이 반갑게 추위를 껴안은 거라고 


☆ 알고 보면 추위 속에서도 꽃향기에 풍요로울 수 있었어. 
잎이 찢겨지고 줄기가 갈라지는 속에서도 
서로의 향기로 따사로울 수 있었다구. 

누군가 안에 사랑이 너무 푹 잠들어 있어서 
또 다른 누군가 안의 사랑도 이젠 영면에 든거야. 

그들은 서로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봄날

신형건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 움이 트려나 봐요.

☆ 그러게 아이들에게 상처가 잘 여문 꽃씨처럼 무르익어가려면 
꼭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만큼만이어야 할 거에요.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패혈증으로 내면에서 
사랑이 앓지도 못한 채 숨이 멎어버리면, 
새 움을 트게 하는 근질거림이 꿈틀거리는 것은 
마주해 보지도 못한 채 눈 감고 말테니까요.



술래잡기 

양승진

술래잡기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어디선가
예쁜 나비가 날아오네.
내가 나비를 잡으려니
나비가 자꾸 도망가네.
그런데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렸다.
뭐라고 하냐면
'내가 잡아줄까?'
바로 꽃이었네.
꽃이 나비를 잡아 주네.


☆ 나비를 잡아줄 나만의 꽃을 바라기 보다
나비를 잡아주겠다며 누군가의 꽃이 되길 꿈꾸기 보다

꽃과 나비가 어우러지는 들녘에서
바람과 햇살 마저
나 마저 아울러 머금을 수 있는

그런 한 때를 보내다 산을 건너고 강을 걸으면
속삭임도 지나쳐 갈 지 모르지



산 너머 저쪽

칼 붓세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남 따라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글썽이며 돌아왔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 동시라기엔 너무 시린... 가진 자는 더 가질 거라며 가지지 못한 자는 그 지닌 것 마저 빼앗길 거라던 빛으로 오신 분께서 선언하신 차가운 방정식이 떠오르는군요. 행복은 행복한 사람들만 커가나 봅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는 행복한 사람들 구경만 해야하나 봅니다. 그러게 더 행복하라 기도나 드릴 걸 (행복) 없는 내가 마주대고 악을 써대 퍽이나 죄송하네요.




선인장

김륭


울고 싶으면 울어, 마음껏
울어 보래요 울 수 있다는 건
무슨 일이 닥쳐도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거래요
겁먹지 말래요
이글거리는 태양 머리에 이고
모래바람을 견디고 전갈도 물리친대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어도
꽃을 피울 수 있대요
선인장에게 가시는 
눈물이래요


☆ 그래도 물 한 모금의 안식도 없이 가시뿐이라면
선인장도 목타고 아플거야




먼지

사이조 야소


눈으로 먼지가 들어갔네.
암만 비벼도 안 나오네.

뒷담에 기대섰는데
옆집 아저씨 하는 소리,
"아가, 아빠한테 꾸중 들었니?"

큰길로 나왔더니
앞집 누나 하는 소리,
"아가, 어떤 사람이 때렸니?"

아무도 모르는 눈 속의 먼지
암만 비벼도 안 나오네.

☆ 언젠가 자라나 늙고 
먼지로 돌아갈 날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눈 속의 먼지 그 작은 하나에도 
따스함이 깃들던 시절이 있었음을 담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는 길이 서늘하지만은 않겠네...




하얀 눈과 
마을과

박두진


눈이 덮인 마을에
밤이 내리면
눈이 덮인 마을은
하얀 꿈을 꾼다.

눈이 덮인 마을에 
등불이 하나
누가 혼자 자지 않고
편지를 쓰나?
새벽까지 남아서
반짝거린다.

눈이 덮인 마을에 
하얀 꿈 위에
쏟아질 듯 새파란
별이 빛난다.
눈이 덮인 마을에
별이 박힌다.

눈이 덮인 마을에
동이 터 오면
한 개 한 개 별이 간다,
등불도 간다.

☆ 눈이 그저 하얀 쓰레기가 되어버린 순간 깨달아야 했어
하얀 꿈에 짧게나마 물들던 시절로도
반짝거리는 그리움이던 시절로도
그리고 그런 시절을 가져다 주었던 낮과 밤으로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그 눈이 덮인 마을엔
하얀 꿈 위로 쏟아질 새파란 별들로
아름다운 밤이길 바란다

그 마을, 동이 터온다해도
하늘로 돌아가 별들은 거세게 빛날거라 기도하며...


무지개 뜨면
좋겠다

유강희

남쪽 마을과
북쪽 마을을 잇는
무지개 뜨면 좋겠다

토라진 네 마음과
내 마음 사이에
무지개 뜨면 좋겠다


☆ 무지개 같은 건 
무지 개 같은 건
곧 사라지고 마는 걸...

토라진 내 마음이
네 마음을 원망하는 건
아마도 내 마음 속
네 마음을 바란 
바람이 빛났던 
때문이겠지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어디가 풀잎이고
어디가 꽃잎인지

어느시절엔
정말 꽃이기라도 했던건지

상처투성이로
해체되어 버리면

그 향기는 시릴뿐
향기롭길 기대한들

아릿하고 시큰하게 흩어져 버릴 것을...




뒷걸음질

남진원


뒷걸음질하면
멀어지겠지

뒷걸음질하면 
네가 점점 작아 보이겠지

뒷걸음질하면
나중엔 네가 안 보일지도 몰라

그러나 발자국은
여전히 네게로 향해 있지


☆ 뒷걸음질하며
널 향하던 발자국을 짚어본다

그 걸음이 길게 이어질 수록 깨닫는다
난 한순간도 네게 가닿았던 적 없었음을

그리고 이 순간 흐르는 아릿한 눈물도
결코 네 손끝에 닿지 않을 것임을



아침 버스에서

권영상


추운 날 아침
아침 버스의
차가운 좌석에 앉다가

뜻밖에도
따스하게 밀려오는
그 누구인가의 체온을 느낀다.

이 자리에 앉았다가
따스한 체온만을 남겨 두고
내린 사람은 누구일까.

추운 겨울의
한 모퉁이를 녹여주는
이 의자에 앉아

나는
다음 사람을 위해
더 따스한 자리를 만든다.


☆ 누군가의 따스함이 데워둔 자리
추운 겨울의 한 모퉁이를 녹여준다는

겨울만 이어지는 이들을 위해
그 데워둔 따스함을 지고가 들러야 할까?

다들 그러려 할까?

그렇게 외쳤는데도 속삭임이라던데
넓은 들 어딘가 누군가
듣기는 했을까?

이러다 그 따스함
다 식어버리지 않을까?

할 수 있는게 
누가 속삭임이라는
외침뿐인데 

소리치다 잠겨버린 목으로

따스함 따라 
나도 식어 간다



꼬마 장갑

박목월


아기 손은 꼬마손
꼬마 장갑 껴야지

빨간 털실 한바람
살살 풀어서
하얀 털실 한바람
살살 풀어서

우리 아기 자는 틈에
한 코 짜고
우리 아기 노는 틈에
한 코 짜고

꼬마 장갑 꼬마 장갑
이내 짠다.


☆ 이봐! 꼬마 장갑이라도 짜보지 그래?




그러고 보니 도서의 커버에 감싸인 한켠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울고 싶은 날, 힘내라는 위로의 말 대신' 김용택 시인이 당신에게 보내는 101편의 동심'이라는 카피는 그냥 마구 지은 광고 문구가 아니었네요. 힘내라는 식상한 말 보다 누군가 어떻게든 공감해 주는 순간이 있어야만 할 겁니다. 누구 하나 진정으로 공감하는 이 없다면, 그 어디서든 어느 계절이든 날카론 바람이 시리게 뼛속까지 부수고 스며들테니까요. 

자신이 어른아이인 걸 잊어버린 채 참고 참던 인내가 언젠가 부터 괴팍하게 강퍅하게 세월을 겪어가게 한다면, 끝내 성탄절 밤이 절실할 스크루지 같은 노인네나 되어야 할테죠. 그런 날이 올까봐 두려운가요? 그렇다면 '내가 아주 작았을 때'란 이 동시필사집을 만나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마도 101번의 크리스마스 유령과의 만남을 어느 계절에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가져다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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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실 죠셉 켐벨의 [신의 가면] 시리즈 1권인 [원시신화]의 리뷰를 몇편으로 분할해 쓰려면서 서론으로 전제 삼을 작정으로 쓴 글을 추려서 따로 올리는 것입니다. 도입부가 다소 맘에 들지않는 신앙인분들께 앞서 양해를 구합니다-


"삶의 충만성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화의 깊이와 폭에 직접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화의 신화들은 ...중략...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신화 속 상징들은 가장 깊은 동기 부여를 가져온다"

"신화가 자신의 특질을 무의식으로 부터 꺼낼 때 삶은 그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죠셉 켐벨은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삶의 동기와 방향을 부여하며 (아마도 신화적 이해를 통해) 삶이 흘러들어가야 할 대상을 신화라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신화가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무의 세계란 무엇일지 쉬이 가늠할 수 없지만 아마도 우리가 '이것이 실상이다' 라고 갖고 있는 삶과 세계, 우주에 대한 정의가 실체 없음을 깨닫는 바를 이르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없다는 의미에 대한 이해로 삶과 세계와 우주가 정체하지 않고 끝내 무한으로 영원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딛게 할 것이기에,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 모두는 삶과 세계와 우주가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무한과 영원이라는 상징의 본모습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실 겁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으며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였으며 함께이며 함께일 것임에 대해 신화만이 아닌 뇌과학-[신은 왜 우리를 떠나지 않는가?]참고-까지 유전공학-[슈퍼내추럴]참고-까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죠셉켐벨이 말하는 그 무의 입구라는 것을 거쳐 이르러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과정입니다. 죠셉 켐벨은 삶의 충만성,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것으로 신화를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죠셉 켐벨이 말하는 신화란 상징임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역사이며 앞으로의 역사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지나온 그 역사와 그 가치와 의미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갈 역사의 이정표를 성경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프롤로그가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서 휴식하고 계신 하나님을 깨워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전개의 도입부(프롤로그도 전개도 '어찌 예수님이 아니시냐?' 할 분들이 있을까봐 말씀드리는데 예수님께서는 전개상의 도입부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역사에 있어 주제이십니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을 지구 전체로 확장한 현재의 이스라엘을 태양계를 시작으로 우리은하를 너머 물질차원의 우주 전체로 확장해 그 물질차원 전체에 천국을 구현하는 것일 겁니다. -왜 물질차원의 우주 전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을 정복하라'의 땅에 해당하는지 천국을 구현하라는 건 (연상하기 쉽겠지만) 어떤 말씀을 근거한 것인지 이야기 해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당연히 이 구절 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제가 히브리어를 아직 공부하지 못해 서균석 목사님의 [성경의 잣대] 라는 그 분 저서를 근거 삼자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에 대한 원어인 해당 히브리어를 한글로 직역하면 '하늘들의 본체' '땅의 본체'라고 한다는군요. 서균석 목사님께서는 창세기를 1차적 해석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각성 과정을 이른다고 재해석하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은 늘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해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저 역시 수긍하고 당연하다 여기지만 그런 중의적 재해석 이전에 1차적 전달하려는 의미가 성경 독해를 하며 최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리라 봅니다. 그러니 영적 정신적 차원의 관점 이전에 그저 단순한 시각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하늘들'이라고 하늘이 복수로 쓰인 것과 '땅'만 단수로 쓰인 것으로 보아 '하늘들'이라며 특별히 복수로 기록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 의식으로 바라보는 단순한 하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이 상징하는 공간 즉 우주가 여러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씀하는 것일 겁니다. 상위차원의 우주가 여럿 존재하며 단계를 거쳐 물질차원에서의 우주-땅-에 이르렀다는 것을 설명하려 '하늘들'이라며 복수를 '땅'이라며 단수를 사용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초끈이론에서도 차원은 다차원이며 우주는 중첩되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차원의 숫자가 11차원이니 몇십차원이니 초끈이론의 변형 이론들 마다 다른 관점은 있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태양계 그를 품은 우리 은하 다시 그가 속한 우주 이 하나의 차원에서의 우주만이 전부가 아니라 11차원 이상의 우주가 존재함은 과학도 주장하는 바이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세기 1장1절이 하나님께서 다차원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임을 성경과 과학 서로가 상호 근거 삼을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특히 여기서 다차원 우주 중에서 하위차원의 물질차원 우주를 성경에서 '땅'이라 일렀을 거라는 정의는 앞으로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중요하니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야기를 전개하자면 이전에 이미 언급했던 해석들은 간략히 하겠습니다만 짚고는 가야 할 것은 같군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창세기 2:07]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이 구절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전 글의 내용 중 인용부분과 이후 내용 전개를 위해 필요 부분을 옮깁니다.  

<아리예 카플란의 [성경과 명상]에 의하면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Neshamah는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Neshimah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Nefesh는 휴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Nafash에서 온 것이라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혼'이자 숨이 불어넣어져 '살아있는 영혼'이 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페쉬의 어원인 어근이 나파쉬라는 것에서 의미를 확장하자면 그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상태는 '하나님의 영(숨)이 휴식'하고 있는 상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구절들을 근거 삼자면 사람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부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자 영이 물질차원의 껍데기 속에 잠시 휴식하고 있는 상태가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 영의 부분인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구조로서는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있는 하나님의 부분'이며 위상적으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상태'를 가르켜 사람이라 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다차원적 구조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생물들을 창조하신 후 자신을 닮은 구조와 자신을 담은 상태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물질 차원의 우주에 충만하라. 물질 차원의 우주를 정복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땅이 상징하는 것이 물질 차원의 우주 전체임은 이미 초반에 언급하였습니다. 


간략히 스킵을 살짝 거치자면 이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단하나의 금기라는 깨어질 수 밖에 없을 유혹을 주셔서 원죄라 일컬어지는 과정을 거쳐 때때로 인간들이 저주라 해석도 하는 실락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죄이기만 하고 저주이기만 하였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이후에야 즉, 하나님께서 주신 단하나의 금기를 깨고 난 이후에야 인간은 지혜를 갖추었고 실락을 거치고서야 자신과 만물에 대한 이해의 길을 걸으며,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는 중 갈등하고 충돌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두루 경험하고 때론 긍정성에 때론 부정성에 휩쓸리면서도 되도록이면 부정성은 잠재우고 긍정성을 키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해와 노력의 어우러짐이 인간이 건설한 제도와 문화 즉 문명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애초에 깨어질 수 밖에 없었을 유혹이라 해야 할 단 하나의 금기는 인간이 반드시 깨고말아야 할 과도기였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이후 인간의 삶에서 인간이 겪게 될 가장 원초적인 과정과 결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며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물론 그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성인이 되면 남녀 대다수가 다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만)과 수고와 출산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3:16]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죄를 지었으니 판결을 내린다시며 하신 처벌이기만 할까요? 잉태의 고통이라하셨지만 이 시대의 성인여성이라면 미혼이더라도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 결코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걸 거의들 알지 않나요? 이 시대 성인남성으로서 여성들이 그 과정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더 크게 느낀다는 걸 이 나이다 보니 어쩐지 알 것 같아서요...  상상해 보면 커다란 빛의 행성 하나에 수억 수십억개의 혜성이 뛰어들다가 단하나의 혜성이 그 빛의 행성과 합일하고 그 빛의 행성이 둘로 넷으로 여덟으로 64개로 분열하면서 그 분열이 셀수없는 재분열을 거쳐 제모습을 갖추며 성장해 가서는 생명체를 이루어 마지막으로 출산하는 것이 잉태에서 출산에 이르는 과정입니다.(출산 이전까지의 상징은 난자에 정자가 결합하고 세포분열하는 것을 파동적 차원에서 그려보았습니다.) 잉태하기까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잉태와 출산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소우주로서 작게 나마 모방해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또 그러한 창조 후에 하나님께서 매번 보시기에 좋아하신 것처럼 우리 인류는 미술이던 음악이던 춤이던 연극이던 그외 다양한 예술로 창조 과정과 그를 감상하는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과정과) 창조 이후에 느끼셨다는 그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마음을 비슷하게나마 느껴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구조로 지음받아 하나님을 담은 상태로 존재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성에게 하신 잉태, 수고, 출산이라는 전제가 이렇듯 저주 보다는 축복이였다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씀이라고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이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표현이 이 시대 대다수 여성들에게 반감을 가져올지 모르겠으나 다스리다는 뜻의 히브리어 원어 '이르두'는 성경 히브리어 학자들에 의하면 문맥에 따라 '혹독한 훈련, 영향력, 통달하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르두'의 문맥상 쓰임에 따른 의미를 되짚고 보면 '혹독한 훈련을 거쳐 통달하게 되고 그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향력을 행사하리만큼 통달하기까지 혹독한 훈련에 뛰어들기 위해 무엇이 선행해야 하는걸까요? 특정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 열정이 그 대상에 뛰어들게 하고 그러한 관심과 애정과 열정이 지속될 때에야 비로소 부단한 노력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 않나요? 통달한다는 것은 혹독한 훈련이 끊임없이 이어져서야 이르는 것인데 이를 동양에서는 功 이라 합니다. 內功 外功 功夫 功力 등으로 나타나는 功 이란 것은 하나 같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얻는 결실과 결실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이릅니다. 문자적으로 二 자를 위아래로 이은 것은 천상의 원리를 지상의 원리(제도와 과학과 사상 등으로) 구현해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 힘(力)쓰는 것이 즉 노력을 끊이지 않는 것이 공(工+力=功)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통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학 등의 학문적으로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이 문자가 쓰이는 어휘들이 적용되는 제가 아는 모든 경우에 功 은 결실인 통달과 과정인 혹독한 훈련 모두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功을 이루기 위해 관심과 사랑과 열정이 전제된다고는 하였으나 때로는 살기 위해 생업에 종사하며 자신의 일에 달인이 되기도 하며 자의 보다는 타의로 하여 들어선 길에서 통달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이 더군다나 끊임없는 노력도 없이 무언가에 통달하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요? 지긋지긋하다며 하는 일에서도 달인이 되려면 끊이지 않고 그 일에 전념하며 숙련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 능률적이며 더 효율적으로 결과를 보이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랑까지는 몰라도 자신이 맡은 바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주의하고 몰입하니 당연히 전체적으로도 또 세밀하게도 맡은 바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맡은 바에 대해 이해하고 숙련되는 과정과 그 과정상에서 매순간 갱신되는 결과물이 功 입니다. 이것이 단지 생계를 위한 일임에도 그러하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생명에게 사람이 만물에게 이러한 다스림을 실천하려할 때는 사랑과 관심과 열정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일 겁니다. 이상적으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라지만 이상이란건 기대할만 한 것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데 많은 분들이 공감할거라 믿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과제를 인간이 따르며 앞으로 거듭 갱신해 통달해야 할 과정 중 초반에 이룬 결실의 하나로 게놈프로젝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진작에 게놈프로젝트 연구의 성과가 있었다고 하니, 모든 생명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는 육신차원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는 일이나 생명연장이라는 희망도 희망에서 그치지 않을 조건은 갖춘 것입니다.)


[...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사모하는 아내에게 사랑과 관심을 지닌 채 열정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살아갈 것이라 말씀하신 거라고 봅니다. 아내를 이해하려 끊임없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사랑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향해 행사해야할 영향력이라 한다면 다름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한결 같이 아내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힘겨움 속에서 격려하고 때론 도덕적 영적 흔들림을 겪는 순간 마다 의지할 대상이며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심정적 바탕을 일깨울 수 있을 대상, 이 사람을 위해서라도 흔들리지 말자는 내적 근거를 불러일으킬 자원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기대할만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 이상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다스림은 남편이 아내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역시 남편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을 이 말은 서로가 서로의 편이 되어 두둔하고 지지하고 옹호하며 분발해야 할 순간과 힘겨운 순간 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고 흔들리는 순간 마다 내면의 도덕성이 효력을 할 자원이 되어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나날이 서로를 알아가려는 관심과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움과 부족함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에 매료될 수 있고 칭찬해 줄 수 있고 부족함을 메워주거나 스스로 채워가려는 의지가 일어나서 열의를 다하도록 힘이 되어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상대를 감싸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자로 포용包容이라고도 하지만 순우리말로 품는다는 표현이 더 와닿을듯 합니다. 알을 품듯 서로를 품어 줄 때 서로는 알 속의 생명이 차츰 온전한 개체로서의 형체를 이루어가 제 생명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이려 끝내 알을 깨고나와 갇혀있던 자신을 너머 진정 아름다운 생명으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어야 할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사랑 안에서 가능하며 그 사랑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한일서 4:16]에서의 말씀을 창세기2:07 에 비추어 보면 좋을듯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기(Neshamah)는 하나님의 숨(Neshimah)과 영을 뜻하는 중의적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숨)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셔서 사람은 생령(Nefesh)이 된 바, 이는 하나님의 영(Neshamah,숨-Neshimah-)께서 사람의 내면에서 휴식(Nafash)하고 계신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요한일서 4:16의 말씀을 창세기2:07 말씀에 비추어 보자면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영께서 휴식하고 계시다는 이 해석은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잠들어 계신다 또는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쉬고 계신다는 말씀인 겁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쉬고 계신 사랑을 우리 스스로 일깨우도록 지지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다시말해 사랑이 날개짓하려 나서도록 품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 서로일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다스림(부부에게 있어서는 사랑과 관심을 열정으로 지속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두둔하고 옹호하고 지지하며 격려하는 이가 되어주는 것, 도덕적 의지를 바로 세울 내적 바탕이 기능할 자원이 되어주는 것)을 위한 전제 조건이리라 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이 말씀은 이렇듯 결코 여성들이 자존심 상할 표현도 아니고 여성의 자긍심을 저버리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렇게 아담에게 하신 말씀 역시 결코 저주일 수만은 없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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