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 결정적 1%, 사소하지만 치명적 허점을 공략하라
리처드 H. 탈러 지음, 박세연 옮김 / 리더스북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① 우선 본서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뉴스와 신문 기사를 통해 보고 듣는 세계상 때문이었습니다.

갈등이 넘치고 격렬해지는 세계는 아마도 공감과 타협 보다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최우선시 하는 이기주의가 무엇 보다 가장 큰 이유라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갈등은 어떻게 중재하여야 할까? 다시 말해 이기주의를 어떻게 공감과 공의로 자리바꿈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일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갈등을 원천 차단하거나 완전 해소할 수는 없더라도 이 갈등을 중재할 수만이라도 있는 길이 무얼까? 평생을 두고 고통과 구속과 한계에서 벗어나고 벗어나게 할 방법이 무얼지 의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았자 예수님께서도 부처님께서도 답을 찾지 못하고 미뤄두고 가신 길을 제가 감히 찾을 수 있을 성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살면서 마주친 많은 이들의 편견과 독선과 아집을 감당하며 그걸 참고 참고 또 참아내다 끝내 내가 그들 보다 더 미쳐 날뛰게 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람은 뭘로든 갑질하는 존재더군요. 금전적 계층으로던, 권력으로던, 지적 우위로던, 외모로던, 하다못해 지 부모의 평판으로던, 웃기지도 않는건 지가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여기면 그것으로도 계층을 나눠 갑질하려 드는게 인간이더군요. 그러면서 연장자를 우대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이 대우는 스킵해 버릴 줄 아는 탁월한 센스 마저 발휘하는 스마트한 남녀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이딴 나라라면 조직폭력집단 구성원들이던 전직 특수부대원이던 오래 수련한 고수들이건 연장 들고 갑질하며 살인하는 것도 원초적인 갑질에 속하니 그것도 인정해야 하는 사회가 한국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더군요. 이런 식으로 다들 갑질하며 살아가다 보면 역시나 이 세계는 마계이며 지구는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구나 깨닫게 되겠죠.-


저는 그래서 갈등을 중재할 방안 중 하나는 도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도덕의 사전적 의미인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라는 전제에서 사회적 여론과 관습을 배제한 전세계인이 다들 공감할 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도덕이란 것의 원초적 그대로는 양심이며 그것은 공감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님의 논어 강좌를 통해 공자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우리가 유교 문화하면 떠올리는 그런 관습과 질서나 규범을 가르침 하실 때 공자님께서는 공감에서 시작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억나는 한가지는, 3년상인가(?) 부모님 사후 부모님의 묘에서 생업과 학문도 뒤로 한채 3년 간 묘 곁을 지키던 그 시절 문화이자 관습에 대해 비판하는 이가 있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에게 공자님께서는 부모님은 널 낳으시고 니가 혼자서는 대소변도 처리 못하고 먹지도 씼지도 못하던 시절 3년 동안은 한시도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널 돌보셨지 않겠느냐는 말씀으로 3년 상을 문제 삼는 이에게 가르침 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3년 상은 이 시절 논리로는 이해 불가한 관습입니다만 이런 시절에도 그 말씀에서 부모님의 노고와 사랑은 느껴질 만큼 공감 가능한 주장이셨다고 생각됩니다. 


이 시대에는 관습과 상식이 다른 많은 나라들이 나름의 문화적 차이를 실감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각 문명권역들은 제각기의 문화를 유지하며 교류했을 것입니다. 허나 이 시대처럼 이토록 인류 누구나가 타문명의 특성과 자신의 문화와의 괴리를 체감하며 살아가는 시대는 초고대문명 이후로는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시대에 자신의 문화와 관습의 우월성만 내세우는 것은 타문화권을 무시하는 것을 너머 정벌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문화에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그 문화에서 자라나며 익숙한 문화가 자연스러울테니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자긍심이 타문화에 대한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이슬람의 꾸란과 하디스에 근거해 6세 이상의 유아와 결혼과 유사성행위가 허용되고 결혼한 여아가 9세만 되도 성생활이 용인되는 문화는 이 시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저로서는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 문화입니다. 미친 유아 아동 성폭행범들을 국가도 아니라 문명권역의 차원에서 용인도 아니라 상식으로 여기는 문화가 납득될 한국인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분명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넘을 수도 건널 수도 없는 괴리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해의 노력 자체를 체념해 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감 가능한 대상으로 치환하고 비유로써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지속할 수 있습니다. 


공감에서 시작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공존할 여지가 생기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공감과 이해라는 긍정성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말했듯 타인을 이해하기 보단 자신이 타인 보다 우월한 면을 어떻게든 찾아내 타인을 짓밟기를 즐겨하는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자신은 특권의식이 없는 양 교양있고 우아한 양 구는 인간들일 수록 더더욱 내적으로 우월감을 숨기고 있더군요. 그런 은폐해둔 우월감으로 타인에게서 자신 보다 못해 보이는 면을 찾아내 무시해도 될 성 싶으면, 갖은 수단으로 멸시와 모욕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진면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론 지들 계산에 이로운 대상에게는 천사 코스프레를 하며 갖은 헌신을 다하는 양 아양을 떨테죠. 무시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는 주저않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들의 헌신 코스프레에서 그 순간을 겪어본 사람은 그들의 진정성을 어찌 찾아야 할까요?


그렇기에 더더욱 인간의 공감과 이해는 문명과 문명, 문화와 문화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 내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반드시 지녀야 하고 없어서는 안될 조건들입니다. 


②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면 무엇보다 사람들 중 이기심과 합리적 판단만으로 대중을 대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행동경제학자인 리처드 틸러 씨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약칭해 '이콘'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행동경제학자들은 이콘은 현실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경제학 이론에서 가정한 가상의 존재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일상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요인'으로 판단과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비합리적인 존재들이라 단정 지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이미 영화 [검은 집] 리뷰에서 언급했던 성경과 역사를 다시한번 짚어보려 합니다. 


[신명기20:10~20:17]을 보자면 하나님의 명이라며 침략 지역의 어린이와 여자만을 남겨두고는 젊은이 부터 노인까지 모조리 죽이고 침략지역의 모든 재산을 나눠 갖는 이스라엘인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2:23~ 24]에서는 하나님과 함께한 가장 강력한 선지자인 엘리야의 제자이기도 한 엘리사는 죽은 이를 되살리기도 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에서는 다른 여타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위의 문제있는 인간이었던 듯 합니다. 그저 어린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린다고 엘리사가 돌이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콤 두마리가 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인 사례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3;25]에서는 침략지의 성읍을 쳐서 헐고 돌을 던져 경작지를 가득 채우고 모든 샘을 메워버리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여자만 살려 두는 것은 여자는 성노예, 어린이는 어린시절 부터 복종하고 굴복하도록 길들여 순종적인 노예로 길러 장기적인 노동력으로 쓰기위해 살려두는 것이 명백합니다 성인 남자들을 몰살하는 것은 생명존중이니 인권이니 하는 걸 따지기 전에 이방인의 유전자를 남기지 않겠다는 가장 '이콘'다운 판단과 의사결정 방식입니다. 다만 엘리사의 행동은 '이콘'답다기 보단 지 감정대로 성질난다고 어린이들까지 집단살해 하는 경악할 수준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아닌가 합니다. 또 침략지의 성읍을 파괴하고 경작지를 망치고 샘을 모두 메워버리는 것은 자신들 영지 주변에서 경쟁상대가 될 부족이 위협이 될 만큼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하기 전에 그 지역에서 거주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한 선제 차단이었습니다. 이 또한 합리적인 판단이 남다른 '이콘'다운 의사결정 방식일 것입니다.


동양역사 속에서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진의 장군 백기의 명령으로 포로가 된 조나라 병사 40만명을 생매장한 사건은 동아시아 전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집단 학살 사례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통일 이전 위급 상황에서 부모를 버리고 도주한 사례나 삼국지에서 덕망있는 군자로 묘사된 유비는 위급시 아내를 내팽개치고 도주한 인물입니다. 


진시황이 자신의 행보에 도덕적 기준으로 딴지를 걸 우려가 있는 학문인 유학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 자신을 비판할 우려가 있으며 반기를 들 가능성 마저 있는 유학자들을 대거 묻어 죽인 것을 봅시다.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헤아릴 수 있고 그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반역을 미연에 차단하고 다른 이들의 반론의 여지 마저 예방하는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이걸 고려하고 사람 생명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그런 짓을 명령한다는 자체가 무엇보다 '이콘'답기에 가능했던 것일 겁니다. 또 백기 장군의 40만명 생매장 명령은 '이콘'다운 명령 또 사이코패스다운 명령입니다. 식량과 인적 물적 자원 낭비를 최소화한다는 차원에서 효과적 의사결정이니까요. 유방과 유비의 사례는 자신의 목적 달성 즉, 왕권 획득을 위해서라면 부모와 가족 정도는 얼마든 희생할 수 있다는 인간미를 상실한 합리성이라고 봅니다. 여기까지만 봤을뿐인데도 '이콘'적인 것이 결국 사이코패스적인 것이더군요. 


십자군 전쟁에서의 살육은 스킵하고 마녀사냥만을 보더라도 그저 고정관념만으로 몇세기에 걸쳐 몇백만명을 처형한 경우입니다. 희생자 중에는 8~12세에 이르는 여자어린이들 마저 있습니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영토 내 '스타이엘마르크'라는 한지역에서만 16~18세기 사이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희생자가 1,160명이라고 합니다. 몇몇 마녀사냥 재판관 개인이 처형한 마녀사냥 희생자들을 예로 들자면 '바르다세르 후스'라는 단한명의 재판관이 화형시킨 마녀사냥 희생자만 700명이라고 합니다. '니콜라스 레미'라는 재판관이 재직 중 화형 시킨 마녀사냥 희생자만 900명이라고 하고요. 이러니 마녀사냥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유럽 내에서만 몇백만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한 자료가 과장이 아닌듯 합니다. 마녀사냥은 누군가의 기소로 이루어지며 기소된 이들 중 절반은 일상적으로 처형 되었다고 합니다. 마녀로 기소된 이들이 무죄를 주장할 때 그들의 무죄를 입증하는 방식은 몸에 바위를 묶어 강물에 던져서 떠오르는 경우 마녀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죄한 이를 살리시는 것이며 가라앉아 죽는 경우 마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처벌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이렇다면 처형 기록에 남아있는 마녀사냥 희생자들 외에 무죄 입증으로 죽어간 희생자들도 그에 육박할 것입니다. 마녀로 기소되는 여성들은 대개 아름다운 처녀들이었고 주변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죽어간 희생자들이 모두 서민층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뷰르스부르크 숭정령이란 지역에서 1623~1631년 사이 단지 8년 간 처형당한 희생자만 900명이라 합니다. 당시 희생자 중에는 위에서 예를 든 8세,9세,12세 어린소녀들 외에도 그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자매와 시의회의원, 시의회의원의 처자, 고급관리의 아내 등이 있습니다. 시기의 대상이 될 정도의 미모를 지녔다면 모조리 기소됐고 거의 다 처형 당한 겁니다. 한국으로 치면 한채영, 한지민, 이성경 같은 미녀들은 주변 못난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소하고 봤고 거의 모두 화형 당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 아름다운 유전자들이 계승되지 못했기에 유럽여자들이 그 지경인가 봅니다.- 마녀사냥에 기소되면 무조건 처형 당한다는 걸 그 당시 누구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단지 시기심이 일면 기소 부터 하고 봤던 거지요. 한마디로 '망할 년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에서 끝낸 것이 아니라 '너 이년 죽어버려라'였던 겁니다. 그리고 그냥 그 말로 끝나는게 아니라 반드시 죽을 거란 걸 명백히 알면서 기소한 것이고요. 세치 혓바닥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며 확실히 죽을 것을 알고 그랬으니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살해입니다. 게다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학살한 것입니다. 그 시절 누구나가 다 그렇게 타인을 마녀란 기소를 통해 살해할 수 있었고 그렇게 세치 혀로 손쉽게 살해하고 있는 환경 속에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친구를 이웃을 죽임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무고한 그들이 마녀라는 이름에서 갖는 선입견에 해당될 진정한 마녀가 아닙니까? 아니, 마녀도 아닌 살아 숨쉬는 악마들이었다고 봅니다. 마녀사냥이 그토록 끝이 없었다는 건 누군가를 마녀라 무고하는 행위가 끝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마녀와 악마들로 변한 인간들이 자신의 세치 혀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고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 욕구를 자제하지도 않았음을 마녀사냥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군중이 되면 인간은 그 자체로 마녀고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악마의 다른 이름... 그것이 바로 군중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라는 대대적 학살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인간의 사이코패스성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본군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으로 성노예 삼을 목적으로 여인들을 강제 납치한 일본의 사례 역시 마찬가지일테고요. 일본군 731부대의 마루타 생체실험,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북한군, 미군 등의 너나 할 것 없이 자행하던 민간인 학살, 베트남전에서 미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이 모두가 집단으로서의 인류는 모두 사이코패스다라는 걸 증명한 것만 같습니다.  


홀로코스트는 히틀러의 시온의정서 목격 이후 유태인 인종 말살을 의도해 자행된 것이라 증언하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그 저작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수긍한다면 이 학살 사례는 지들이 정의라는 독선으로 행하는 누구도 인정 안할, 지만 우기는 정의감이 원인일 겁니다. 그 말도 안될 정의감이 인류를 정복하려는 세력이 가져올 시대를 막기 위해 그럴 인물이 등장할 인종 자체를 말살 시켜 그런 인물의 등장을 방지하겠다는 말도 안될 합리적 판단에 이르게 한 것일 겁니다.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란 이름으로 성노예 대상 양민여성 납치 사례는 사병들의 성욕을 해소해 주고 전시의 스트레스를 완화하여 전투의지와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는 암흑어린 합리적 판단만으로 한 의사 결정이었을 겁니다. 전투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만 보고 정복지의 양민들 인권이나 고통 받을 그 심정을 무시할 수 있는 그 판단력도 '이콘'다운 것이었다 싶습니다. 일본군의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 역시 인류사에 남을 '이콘'성향, 사이코패스 성향이 명백합니다. 전시 정복지역 민간인과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으로 의학과 전쟁 무기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인권이던 생명존중이던 그 따위 것들은 간과해도 된다는 관점... 그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은 누가 양민이고 누가 적군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정보전달과 직접적 테러로 아군피해를 가져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치 못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갑니다. 격전지에서 전우라는 이름의 친구와 이웃이 죽어가는 것을 거듭 목도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살아 돌아갈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매일 매순간 강렬히 압박해 왔을 겁니다. 그런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서 극단적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휘관이라면 단한명의 사병이라도 타국에서 죽어가는 현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살릴 수 있는 사병들은 반드시 살려 고향으로 돌려 보내리라는 결심에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는 현실이... 그것이 무장한 자신들에게는 저항하지도 못할 민간인 여성과 아이와 노인들이 절반은 넘었을 양민들을 학살하는 근거일 수 있음이 너무 안타까워 옵니다. 그 책임감과 그 생존본능이 단순한 덧셈뺄셈만을 거쳐, 피아구분 안되는 상황에서는 이방인 양민들 쯤은 학살해도 된다는 차가운 결론에 이르도록 했음이 안타깝고 가슴 아픕니다. 


518 광주항쟁에서 국민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해 주어야 할 정부와 군이 자행한 학살은 어떻습니까? 적군 포로도 아니고 파병지역의 피아식별 불가 상황에서의 결정도 아닌, 주권자인 국민을 그들의 생명과 안전과 안정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정부와 군이 하나되어 살육한 말도 안될 사건입니다. 정부에 반발할 우려가 있으면 국민도 학살의 대상이 될 수 있던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겁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 IS의 중동 내 유소년 참수와 개종 거부자들에 대한 집단 학살, 현지 이슬람테러단체 추종자들을 독려해 일어난 프랑스 테러 등도... 피와 눈물 따위는 당연히 너희들 몫이라는 매서운 어리석음이 불러오는 사건들이지 않습니까? 집단 이기주의는 때론 이토록 어리석고 모질게 사람을 몰아갑니다. 이 어리석음은 상대에게 커다란 피해만 줄 수 있다면 그 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감당해야 할 상황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눈 감은채 모질어지도록 만드나 봅니다. '너희 피해가 100 이라면 우리 피해가 99 라도 감당하겠다.' 이런 머저리 같은 셈법도 가능한 것은 계산만으로 주저없이 행하는 '이콘'이기에 가능할 것입니다. 손실회피 성향(지닌 것을 잃기 싫어하는 심리)이나 현상유지 편향(앞으로도 지금까지와만 같기를 바라며 변화 보다는 현재상태 유지를 바라는 심리) 따위도 작용하지 않을만큼 덧셈뺄셈만 할줄 아는 '이콘'이 되버리기에 행하는 일들일 겁니다. '난 잃을게 별로 없거든... 근데 니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 크게 잃었다며 공황에 빠질테지?' 이런 계산으로 상대의 피해만 고려하는 머저리가 또 어찌보면 '이콘'인지 모르겠습니다.


행동경제학자들이 정의한 '이콘'은 분명 사이코패스를 말하는 것이더군요. 머리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과 내 가족과 내 친구와 내 이웃의 죽음을 덧셈 뺄셈해서 '이 정도 피해를 줄 수 있다면 가족과 친지 중 누군들 좀 죽어도 그만이지' 란 결론을 답이라 내놓을 수 있는 인간들이라면 분명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코패스를 행동경제학자들은 '이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헌데 이제까지 언급해온 사례들은 모두 인류사 깊숙히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제 뇌리에 강렬히 아로새겨진 사건들만 예로 들어 그렇지 낱낱의 사례들을 찾아보자면 끝이 없을 겁니다. 이것은 결코 확증편향(어떤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 보다 확인해 주는 증거를 찾으려는 성향)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은 사이코패스 성향은 인간의 속성이며 이러한 속성은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꺼리낌 없이 발현된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봅니다. 기존의 심리학에서는 사이코패스란 몇몇 특정한 사람들만이 갖는 유전적 속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인류는 선량한데 일부 불량품들이 간혹 출현할 때가 있다는 것이 기존 심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미 예를 들었듯 사이코패스는 집단을 이룬 인간들 즉, 인류의 가장 확연하고 명백한 속성입니다. 아마도 다른 긍정적 성향들을 압도해 버리고도 남을 강력한 속성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인류가 창조되고난 직후 있었던 일이라면 속이고 끌어들이고 규범을 거스리고 남탓하고(여기까지가 아담과 하와의 사례) 시기하고 살인(카인의 사례)하는 사건까지가 우선 기억날 정도 아닙니까? 그러고도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심정인 것인지 면죄만을 요구하던 것(카인)이 인간이고 말입니다.


 역사지식이 일천해서 한정된 사례만을 예로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될 수 있으면 전투가 아닌 살육의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려 했습니다. 전장에서의 경우라면 '니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적군을 죽이고 아군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을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해 논하는 것입니다. 그 전장에서 검과 창과 철퇴와 도끼가 난무하는 상황이거나 현대의 총탄 빗발치는 상황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실존적 위기도 감당해 보지 않은 인간이 감히 옳고 그름만 논하고 있는 것이 염치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사의 경우 최대한 전장에서도 전투 외의 사례만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람이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은 나 자신 부터가 사람임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한때는 고통과 상처를 추스리면서도 내게 상처를 주고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들 마저 이해하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많은 이들을 사랑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그건 아마 어느 정도의 생명일거라 헤아린다해도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일 겁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종소리는 잦아들고 말았습니다. 공감은 주고 받아야 하는 겁니다. 일방적인 공감은 어느 사이엔가 끝을 알리게 됩니다. 그래서 더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서로서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건 그에게 공감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너무도 일방적인 위치에서 공감 받기만을 해왔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어떤 외면과 방치 속에서도 사람을 이해하던 아기가 꼬마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더이상 세상에 없지만 그 소년을 기억 속에 담고 있는 한 남자는 알고 있습니다. 노력이 없는 공감은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 아기는 그 꼬마는 언제나 실망하고 언제나 상심하고 언제나 슬프고 서러운 상황에서도 누구나 이해하고 싶어했습니다. 다들 아파서 그런거라고 온갖 애를 써대며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자신을 학대하는 이를 그런 학대를 외면하는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더이상 그 아기도 꼬마도 세상엔 없지만 분명 이해하고 공감하고파 하던 그 아이의 노력은 어느시절 속엔가 영원히 담겨 있을 겁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모든 걸 공감하기만 해서도 안될 일입니다. 문제를 발견하면 개선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겠지요. 역사 속 학살로 죽어간 그 숱한 사람들 만큼의 생명을 살리는데 인류가 노력을 기울인 역사를 본적 있습니까? 물론 아무 이익도 없는 고래 한마리 살리는데 대중이 열정을 다했던 실화 바탕의 영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사이코패스성향이 고래 한마리의 생명으로 상쇄되리만치 가벼운 문제라 여겨지진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학살된 몇천만명도 훌쩍 넘어버릴 그 인명이 고래 한마리의 생명과 다를 바 없다는 득도한 스님 코스프레 하는 이들에겐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염세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래 한마리에 쏟던 관심과 사랑, 하다못해 정치적 포퓰리즘까지도 인류에게 찾을 수 있는 미약한 불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불씨 하나가 온세계를 태울 거대한 불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식 표현을 빌리자면 군중은 미친 '폭두'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허나 한편으론 군중심리를 통해 역으로 대중이 서로를 위해 살아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체념을 현실 인식이라며, 차갑고 맥빠진채 세상을 포기해선 안될 일입니다. '누구도 그 스스로 완전한 섬이 아님'을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부분이며, 대양의 일부임'을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킴'을 그렇게 모두가 '인류에 속해 있음'을... 무엇보다 그것을 납득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세계에 시대가 울리는 종은 모두를 위해서 입니다. 당신을... 나를... 서로를 위해서...


④ 서론이 길었으니 최대한 짧게 가보겠습니다.

본서의 원제는 Misbehaving 으로 '의외적 행동' '예상 외의 반응' 쯤으로 번역되어야 할테지요? behave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행동하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다. 얌전하게 굴다. (기계가)작동하다. (물질 등이) 반응을 보이다.'는 뜻이더군요. 그러니 Mis+behave는 정상적인 행동규범을 벗어난 일탈적 행동, 일상적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는 예수님 말씀, "본래면목이 곧 부처"라는 불교의 법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교의,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고,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는 [에메랄드 타블렛의 비밀]를 통해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가 한 가르침이 인간의 본모습이자 인류가 이 세계에 구현해 내야 할 사명이라면... 인간은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는 상태이며, 또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세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인간은 부처이고 하늘이고 천국이며,  지상에서 천국을 구현해 내려 노력하고 서로에게 천국이어야 하는 존재란 것이 어느 가르침에서나 가질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느끼는 간극이 더 커갈 뿐이죠.


'이상'은 behave 해야 할텐데, '현실'은 misbehave 하고 있다고 보면, 이 "의외적 행동들 예상 외의 반응들만 보이는 사람들에 어찌 대응해야 할 것이냐?"-대중의 행동을 어떻게 예측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의 판단과 결정에 개입해 갈등을 중재하고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가 관건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서를 탐독한다면 행동경제학이 경제학에 심리학이 융합된 학문이기에 이해할 바가 더 한층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합리적 판단 유형을 '이콘'으로 비합리적 판단 유형을 '인간'으로 분류해 논하고 있습니다. 저자 눈에는 인류 대다수가 저자가 말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인'으로나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는 비합리적 존재로 보였나 봅니다. 하지만 이제껏 언급해 왔듯 인간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숨길 수 없는 합리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도덕 감정론》에서 애덤 스미스가 든 '열정'이란 표현과 케인스의 '야성적 충동'이란 표현을 저자 자신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인'과 같은 선상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욕망과 감정, 취향에 따라 때론 이해가 불가능한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는 비합리적 존재라는 것이 행동경제학에서의 전제입니다. 


최적화 이론(인간은 경제활동에 있어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이론)을 근거로 일상에서의 선택에서는 미숙할지라도 거액의 투자 등에서는 심사숙고하여 선택하며 거듭 학습효과를 얻는다는 다른 경제학자의 논리에 저자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일상에서의 식품과 필수용품들의 소비는 빈번하게 거듭하는 것이다. 헌데 그것의 학습효과가 어떻게 일생에 한번뿐일 퇴직금 활용이나 노후자금 운용에 있어서의 학습효과 보다 미숙할 수 있는 것인가?  빈번한 일상 소비의 학습효과가 저조하고 일생 기회가 자주 없는 자금활용에서의 학습효과가 더 높다는 것이 납득이 가는가?'


-맞는 말이 아닌가요? 시행착오를 일생동안 겪으면서도 우리는 지름신 강림했다며 충동구매를 하고 바가지를 쓸 때가 있습니다. 할인매장에서 별 쓸모도 없는 것들을 바리바리 사들고서 돈 굳었다며 흐뭇하게 웃을 때가 있고 말이죠. 그러면서도 거액의 투자나 자금 운용에서는 실수가 없을 거라 자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주식투자액이 7분의 1 로 토막나기도 하고...- 


이렇듯 인간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기존경제학 이론의 전제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을 통해 선택한다는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하고 결국 하나의 학문으로 성장발전한 것이 행동경제학입니다.


때론 대중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난민 사태가 사회문제화 될 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미 무슬림 이민자들의 범죄율과 수감율이 인구대비를 거치지 않고도 수감인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며 유럽 주요국가들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의 폭동이 몇차례 이어진 전적이 있는 유럽입니다. 그걸 고려할 때 난민 수용이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은 1+1이 2가 아니면 귀요미인 것 만큼이나 명백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유럽으로 밀입국하던 난민 아기가 익사한 시신 사진 한장으로 독일을 위시해 유럽 각국이 앞다투어 유럽 각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난민수용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해소하여 오히려 유럽 국민들에게 유익하다는 여론몰이도 시작했었죠. 하지만 알고보면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이 적용단계에 도달했기에 조만간 산업계는 로봇이 인력을 대체할테고 사무직 인력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노동력 감소가 문제가 아니라 대대적인 실업난이 문제가 될 시대를 앞두고 감당도 안될 인구증가를 유도한 것입니다. 현재의 사회갈등은 문제가 아닙니다. 실업난과 사회갈등 요소 증가로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적대감을 갖게될 유럽 원거주자들과 무슬림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은 나날이 증가할 것입니다. 결국 사회불만이 커진 무슬림 이민자들의 급진이슬람화가 순차적으로 일어날테죠. 현재의 무슬림 유입자들은 잠재적 테러단체 추종자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벌써 그리본다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르겠군요. 어떻든 세월이 흐르고 흐를 수록 산업과 기업에서 로봇과 인공지능 기술 도입으로 대대적인 인력 감원이 더해지는 그 순간에 이르면, 더더군다나 급진이슬람테러 추종자들로 인한 유비쿼터스 테러로 유럽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몇백명의 피해자(사망 166명, 부상자 300명 이상)로도 충격이었던 지난해 11월 13일의 파리테러는 피해규모상 주목할 일도 아니었던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를 근거로 벌써부터 유럽과 미국이 공조하여 각국국민들 신상정보를 공유하고 인터넷과 통신 감청, 계좌와 결제이용 정보, 이동경로 확인 등 모든 개인 정보가 빅데이터화 하는 상황이 확대되어 말 그대로 사람에 대한 통제가 일반화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이 상황들이 순차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시발은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보고 그에 따른 대중심리 유도를 해왔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난민이 생겨날 상황 자체에서 문제를 인식했어야 마땅했지만 미래예측기구를 적극활용하고 있는 미국도 유럽도 그외 어느나라 정부도 시리아 내전과 IS의 세력 확장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되려 사태의 심화를 관망하고 있었던 것으로만 보입니다. 


대중을 비합리적이고 미숙한 판단을 하는 이들로 보았기에 그랬을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의 대응이 주효했던지 유럽 각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현실에 냉담합니다. 결국 유럽 유입 난민이던 무슬림 이주자들 대다수가 급진이슬람 테러단체 추종세력으로 변모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이 문제가 유럽만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구나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날을 맞이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 때때로 '이콘'이 되어 사태를 바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콘적 사고가 사이코패스적이라고 지금까지 말해 왔으나 이콘적 사고를 무조건 금지 해야 할 것이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합리적 사고가 위험할 때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할 경우입니다. 기준이 되는 규범이 공존이라는 전제에서의 합리적 사고라면 되려 금하는 것이 아니라 권하는 것이 더 마땅할테지요.




유럽 난민 수용은 어찌보면 행동경제학을 적용해 대중 심리를 통제한 경우가 명백하지 않나 싶습니다. 현상유지 편향(변화 보다는 현재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심리)과 소유효과(기존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이나 최근이라도 자신의 소유가 된 것에서 소중함을 느끼는 심리), 손실회피성향(자신이 지닌 것을 잃을 까봐 두려워하며 잃을지 모를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 등을 고려한다면 난민 수용을 국민적 차원에서 거부감을 갖고 그런 정부의 결정에 적대적 반응을, 난민 수용을 유럽 각국 정부가 발표한시점부터 유럽 각국민들이 보여야 했습니다. 허나 밀입국을 시도하던 난민 아기의 시신 사진과 그것을 난민 수용 허용의 계기로 이용한 유럽 정부와 유럽 언론의 감성적 호소는 행동경제학에서 〈넛지〉라고 일컫는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의도적 개입을 통한 행동유도의 경우였다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난민수용을 결정하는 것은 유럽 정부겠으나 국민적 합의가 암묵적으로라도 따라주었어야 난민 수용이 가능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난민 수용 정책은 시도 조차 못해봤을 겁니다. 


본서를 읽으면서 초반에는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점차 불안하고 두려워지더니 마지막 쯤에는 약간의 적대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개입하고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본서의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하는 인사말에서 언급했듯 미국의 오바마 정부도 영국의 캐머론 총리도 행동경제학자들을 기용해 정보국을 신설하고 운영하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끝내 대중심리통제를 정부차원에서 합법적으로 눈치도 안보며 할 수 있는 정당성 마저 갖게 된 것입니다.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이 그 개인과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는 각도로 합리적 차원의 선택을 하도록 넛지(옆구리 찔러 행동을 촉구하는) 정도할뿐이라는 합리화와 변명의 꺼리 마저 있는 대중심리통제가 될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아무런 개입이 없었던 경우는 유사 이래 없습니다. 스승이 개입하고 부모가 개입하고 자신이 속한 혈연과 지연이 개입하고 사회규범과 관습 게다가 고정관념까지 선택을 제약하고 하다못해 친구나 지인 우연히 마주친 남의 한마디도 우리의 선택에 개입하게는 됩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부모가 진학과 진로와 취업과 결혼에 개입하는 경우는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비일비재한 경우입니다. 스승의 경우라면 스승이 옳다고 믿는 규범을 답습하며 살던 분들이 우리네 선조들이시구요. 초반에 예를 들었던 3년 상에 대한 공자님 말씀이 공감은 가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당시 3년 상으로 생업이 어려우면 가족이 궁핍한 처지일 분이 계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그분이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3년상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고 궁핍을 마다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또 지병으로 묘 옆에서 찬바람 맞으며 기거하는 것이 치명적인 분이 계셨다고 가정해도 그분이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부모님께서 낳아주신 이 한목숨 부모님 가시는 길 3년을 곁에서 모시는게 마땅하다며 무리하다가 병이 깊어지거나 돌아가셨을지 모릅니다. 스승의 가르침도 이런 식으로 개인의 판단과 가치결정에 개입합니다. 


그리고 혼인과 진로에도 과거 종가에서나 가문 어르신들의 말씀이 꽤나 깊이 개입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관직에 나서는 선비들 중 같은 요직을 원하는 능력있는 인물이 한가문에서 두명있었다고 합시다. 이 둘에게 문중 어르신께서 "이 요직은 결단을 할 때 깊이 숙고하는 '갑'이가 맡고 '을' 너는 과단성이 있으니 다른 요직을 맡거라" 말씀하시면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면서 바라마지 않던 지위마저 사양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혈연이 개인의 판단에 개입하는 거라면 지연이 개입하는 경우는 아마도 이럴 것 같습니다. 과거의 어느 시대라 가정한다해도 A와 B 두 마을 사이가 다툼이 커질 지경이라면 다른 마을에 별다른 적대감이 없는 A 마을의 구성원 한명도 굳이 B 마을 구성원들에게 냉담해야 했을 것입니다. 특히나 다른 마을에 좋아하는 이성이나 우연히 친해진 친구가 생겼더라도 마을 간의 충돌이 있을 시 달리 선택할 수도 없이 그 충돌에 휘말리고 말았을테지요. 


사회규범과 관습이 판단과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경우, 우린 이것을 도덕이라며 우리의 양심과도 같이 여기고 절대적인 개입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성동본 결혼이 금지되던 시절이라면 아무리 사랑하던 남녀도 고작 동성동본이란 이유만으로 주변 모두의 반대를 경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성동본이면서 결혼식도 못올리고 사실혼 관계만 유지하던 남녀가 아기를 낳았을 때 결코 친아버지인 남편의 호적에 아기를 입적할 수 없게 제도를 그 따위로 운영했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국가 차원의 횡포라 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관습이 개입하는 경우라 한다면, 유럽과 전세계 다수 국가들에서는 합법이지만 한국에서는 사촌 간의 결혼은 근친혼과 다를 바 없이 본다는 것입니다. 

관습과 사회규범이란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기도 하나 대개 같은 시대의 대중이 공감하고 준수하는 원칙을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규범과 관습은 시대 마다 달리 변해왔습니다. 고구려 초기엔 형이 죽으면 형수와 혼인을 계승하는 형사취수제가 있었고, 신라시대엔 마복자라 하여 풍월주(화랑들의 대표)에게 다른 화랑들이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보내 같이 자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풍월주와 자신의 정기를 둘다 받은 아기를 원해서라고 학자들이 해석합니다. 하지만 유럽과 일본에 존재하던 초야권 중 유럽의 경우 처럼 권력자에게 압도 당해 그런 경우라면, 이유로는 납득이 갑니다. 허나 일본의 경우처럼 처녀인채 시집 보내지 않는다는 야릇한 논리에 따른 전통이 이 시대의 논리로는 왜 처녀인채로 시집 보내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갈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풍월주와 화랑 구성원들이 임신한 아내를 그런 식으로 스와핑한 이유가 쉬이 납득이 간다는 이는 없을 겁니다. 풍월주와 도대체 왜 정기를 나눠서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전우로서의 동질감? 음, 그런 동질감을 누구나 다 느끼고 싶었을리는 없을듯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독점욕은 어느 시대 누구나 남자라면 무엇보다 강렬할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관습이 유지되었다는건 사람의 판단과 의지에 작용하는 규범과 관습이라는 개입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관습이 어떠한 논리로 왜 생겼는지는 이 시대의 우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고정관념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여자들이 준성범죄 피해대상이며 여자가 무고를 해도 남자가 진짜 성범죄를 했을 것이라 의심 부터 하는 고정관념들 말입니다. 도대체 왜 "요즘 날씬해졌네"라는 수준의 말이나 "그렇게 입으니까 섹시한데" 정도의 말이 직장 내 성희롱이 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다이어트해서 그런지 몸매가 살아났어" 라는 말로 고소 당한다는게 말이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과장 같겠지만 작년 중순 네이트에서 검색했던 신문기사 내용입니다. 게다가 에이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알아본다며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남자들 반응을 엿보는 실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20대 여성이 '이쁜 여대생이 프리키스를 해 드립니다'라는 팻말을 놓고 남학생들과 키스를 한 후 "나 에이즈인데" 라고 말하고나서 남학생들의 반응을 보는 실험이었다더군요. 그런데 여성단체에서 이를 문제 삼아 기사화 되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프리키스도 아닌 '이쁜' 이란 표현이었습니다. 여성을 두고 이쁘다는 표현을 해서 여성을 성상품화했다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여자들이 줴다 미쳤다고 봅니다. 남자 대학생이 여대에 가서 똑같은 실험을 했다면, 그것도 "멋진 훈남이 프리키스를 해 드려요" 라는 내용의 팻말을 이용했다고 문제 삼을 남자도 여자도 없었을 겁니다. 위에서 들었던 직장 내 성희롱 사례나 이 사례나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을 준성범죄 피해 대상이거나 잠재적 성상품화 대상이라고 결론 짓고 있기에 가능한 논란입니다.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피해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그리고 되려 그것을 권력으로 이용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고정관념은 10대 소녀를 보고 애라고 한다거나 더군다나 20대를 보고도, 더 웃긴건 20대 중반 여성을 보고도 애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16세면 고구려에선 남자면 수의를 만들어 놓고 전쟁터로 나가 전사하던 나이입니다. 수의를 만들었다는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거죠. 그리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건 2세를 낳았을거라는 겁니다. 어느 시대라도 남자라면 가문의 대를 이을 자손을 낳고 나서 죽는 것이 기본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백제 계백 장군에게 참수 당한 신라의 화랑 관창이 풍월주(화랑들의 대표)가 된 나이가 16세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까지의 과거 어느시대나, 남자던 여자던 15~16세면 아기를 낳고 나서 육아에 전념하던 평균 나이였을 것입니다. 당시 18세인 노총각, 노처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 당시라면 30세~32세면 기본적으로 할머니가 되던 나이이죠. 근데 애엄마 나이 16세를 애라고 하는게 말이 되는 논리인 겁니까? 게다가 근래는 조숙증이라며 이차성징도 성적 발달도 더 빨리 완숙해지는 시대입니다. 또한 이 시대 16세 소녀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접하며 조선시대까지의 16세 아녀자들 내적 수양 보다 훨씬 다채로운 갈등 양상을 경험하며 거듭 도덕적 시험과 검증 과정을 거치며 지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16세까지의 아녀자들이야 기껏 내훈이라던가 칠거지악 정도의 기본 지식만 배운채 그러한 지식이 도덕적 시험과 검증을 경험할 기회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외부와 단절 되어 보내야 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소녀들은 다양한 도덕적 시험과 검증의 기회가 넘쳐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보이스피싱이라던가 게임에서의 채팅 상에서 이익을 추구하며 타인을 속이거나 순간을 모면하고자 거짓말 하는 사람들 등 여러 상황을 마주하고, 그에 대처하면서 점차 처세술 마저 갖출 수 밖에 없는 시대상황입니다. 조선시대에 여자들은 그것도 시집도 안간 16세 이하 여자라면 대외 교류가 전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생활이나 취미활동 등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처세할 상황 자체가 주어지는 이 시대의 소녀들은 조선시대 16세 아녀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인격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애엄마인 16세 아녀자와 비교한다면 이 시대 16세 소녀들의 내적 자원은 할머니 급임에 명백합니다. 사람에 대처하고 처세하는데 월등히 기교적일수 있을 다양한 기회를 갖으며 충분히 사회화를 거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애가 둘인 경우라도 조선시대 16세 아녀자는 순진할 수 밖에 없었고 아무리 지네 부모한테 우리 애기 소리 듣는 16세 여중생이더라도 이 시대 16세 소녀라면, 조선시대 80~90대 할머니들 급의 인생경험에 노출 되어본 처세 베테랑들입니다. 절대 애인 것만은 아니죠.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이 실상이라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존 자신의 고정관념에 익숙한채 익숙한 판단을 할 경우의 수가 더 클 겁니다. 그런 경향이 앞서 말한 현상유지 편향에 해당하는 판단이며 사고방식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고정관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리란 기대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깨고자 이런 글을 남긴 시도는 '선호역전'-A를 B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B를 A 보다 좋아하게 하는 것-을 시도 한 것이고요.


거듭 언급하지만 행동경제학은 인간은 비합리적 판단 유형에 속하는 존재들이라는 전제에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비합리적 판단으로 선택 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해(즉, 개입을 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유도하자는 결론에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이런 비합리적 존재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개입하자는 취지가 과연 대중들에게 유익하기만한 결과를 가져올지 저로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미 보아왔듯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타자의 어떠한 희생도 개의치 않는 인간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계속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광기어린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이 인간인데 미국 정부도 영국 정부도 정보국을 신설해 대중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개입할 것임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개입하겠다는게 무슨 문제냐? 이런 물음에 선뜻 "맞아요.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당연히 국민들에게 유익하도록 유도할테죠." 라고 확신에 차 말할 수만은 없을듯 합니다. 이미 민간 감시와 대중심리통제를 위한 모든 첨단기술력과 제도를 완비한 상태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이 사자에게 날개를 달아줄 뿐만 아니라 발톱과 이빨을 더 매섭게 날카롭게 다듬고 보완해준 셈입니다.


행동경제학자들은 독재자 게임(자신에게 더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선택과 공정하게 나누는 선택 중 무엇을 선택할지 묻는 실험), 처벌 게임(앞서 이기적 선택을 한 측과 이익이 더큰 보상을 함께 나눌 것인지, 공평한 선택을 한 측과 그보다는 적은 보상을 함께 나눌 것인지 선택하는 실험) 등을 통해 부당함을 응징하고자 하는 심리와 그런 심리가 어느 정도 보상에서 무너져 내리는지까지 실험을 거쳤습니다. 즉, 인간의 정의감, 도덕성이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충족 시킬 때 붕괴되는지를 검증 해 본 것이지요.


또한 공공재 게임(10명에게 각기 5달러씩을 주고 기부자가 있으면 그 두배의 금액을 10등분 해서 고르게 나누어 주는 실험, 만약 모든 인원이 전액을 기부할 시 모두 처음 배당 받은 5달러의 두배인 10달러를 받게 된다)을 통해서는 대중이 공익을 위해 과연 이기적인 충족을 멈출 수 있는가를 실험한듯 합니다. 한마디로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상황에서 공익을 추구하면 보다 나은 보상이 있음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즉 대중이 그러한 사실 자체를 알 수 없게 만든다면 대중은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보상에서만 만족을 찾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희구하는것을 멈추고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겁니다. 현재유지 편향과 손실회피 성향, 소유효과를 이용해  혁신이 아닌 안주만으로 멍청하게 통제 당하는 삶에 만족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매몰비용이란 개념(이미 지불한 비용의 가치에는 연연하지 않게 되는 심리)에 긍정적 거래효용(할인)을 더해 대중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하며 마치 이윤 추구가 아니라 대중에게 혜택을 주는 듯 가장을 하는 단체(기업, 기관)의 이익만을 더해 주도록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6개월 이용권을 끊으면 원가 보다 25% 할인해 준다는 말에 솔깃해 피트니스 클럽 6개월 이용권을 계산하고서 1개월도 채 다니지 않는다면 지불한 이용권 결제금액이 고객 자신에게는 버린 돈이 되지만 피트니스 클럽 측으로는 마치 공돈이 생긴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경우를 이릅니다.


이것을 정부던 기업이던 악용한다면 마치 커다란 혜택이 대중들에게 주어지는듯 포장하고서 대중이 지불하는 비용을 전혀 다른 용도로 지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선거 출마자들의 헛공약 남발도 위의 사례가 적용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대중이 돈이 아닌 주권자인 자신의 한표를 지불하고서는 공약 이행이라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자기통제의 두가지 전략은 보상 없는(내지는 보상이 미미한) 과도한 노동력이나 과다한 비용지불을 대중에게 부담하게 하는 방편으로 악용될 우려가 짙더군요. 자기통제의 두가지 전략 중 하나는 서약 전략이라하는데 -말 그대로 자신의 선택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자기의 선택권을 스스로 제한하는것을 말합니다- 체중조절을 하려는 사람이 열량이 높은 군것질거리를 멀리 하려 눈에 보이는 먹거리는 모두 눈 앞에서 치우는 것과 같은 대처 방안을 말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만족지연 전략으로 당장 받는 쪽을 선택한다면 1개가 주어지지만 5분을 기다리겠다면 3개를 준다는 애들 약 올리는 수작을 말합니다. 이 만족지연 전략은 실제적용 될 시엔 시간차 만족지연으로 활용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당장 받는다면 5개를, 내일 받는다고 한다면 6개를 준다고 할 때 대부분 두 경우 중 심각한 고려를 하고 선택하기 보단 내키는대로 전자던 후자던 선택할테죠. 하지만 1년 뒤 오늘 당장 5개 받는 것을 선택할지 1년 뒤 그 다음날의 6개를 선택할지를 묻는 경우라면, 누구라도 후자를 선택할 경우가 더 많을거라 짐작할 것입니다.


여기서 좀더 생각해 보면, 이 두가지 서약 전략과 시간차 만족지연 전략이 악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용자측이 피고용자측에게 임금의 일부를 몇년 동안 누적하고서 지급 받는다면 누적액의 몇십 %를 추가 지급하겠다는 보상지급 논리를 제안해 동의를 얻는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임금의 일부를 미지급하고 그 금액 만큼을 투자비용에 할당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미지급분은 기업에게 금융권 대출 등의 채무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만 본다면 고용자 피고용자 어느측에게도 손해는 없는 제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가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고 투자가 이윤만을 남겼을 때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예측불가능한 경제상황이거나 투자손실이 고려해 본 규모 이상일 때는 직접적 리스크를 고용자만큼이나 피고용자 마저 떠안는 제도입니다. 


게다가 이 두가지 자기통제 전략을 역으로 활용해 대중에게 채무를 지속하거나 증가 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기업이 결제액 분할 납부를 초고가명품에 마저 시행해서 십년 이상의 초장기 할부 제도를 도입한다면 젠장할 제품하나 구입했다가 평생 빚쟁이 신세인 것이죠. 정부가 후결제 입주 제도를 시행해 거주 주택 금액 결제를 거의 반평생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금융권이 담보 평생 대출 제도를 시행한다면 평생 금융권 이자의 압박이자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죽으면서는 상속할 재산도 없이 몽땅 채권자들에게 뺏기고 가야 하는거죠. 평생 월세 신세와 다를 바없는 생활, 평생 생활용품 전체의 할부금을 갚으며 살아가야 하는 삶, 살아있는 동안엔 금융권 대출 이자나 갚다가 죽으면서는 자기재산을 상속할 권리행사도 못하고 가는 삶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서약전략과 만족지연 전략을 역의 차원에서 적용한다면 이런 식일 것이다 생각해 봤습니다. 헌데 파쇄할 길은 빚 안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뿐이더군요. 문제는 한번 빚지면 기업의 제품 할부 구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자액이 는다고 해도 소유효과, 손실회피성향, 현상유지 편향으로 인해 다들 잘들 지불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행동경제학은 이런 식으로 대중심리와 일상 통제가 가능합니다. 이딴 통제라면 넣어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들의 편견과 독선과 아집과 고정관념과 무싸가지를 극복 못해서 나도 그리 돼가는 지경인데 이젠 각국이 범세계적 차원에서 행동경제학으로 판단과 결정 마저 유도하려 들테니... 하~ 짜증난다.


어찌되었던 사회 이곳 저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통제의 압박이 더해 오는 것을 눈치도 못채고 당하고 싶지 않다면 본서를 한번 정도는 읽어보아야 할지 모른다고 직언해야 할듯 합니다.


※ 행동경제학이 적용된 사례를 일상에서 찾아 보고 싶다면 '디폴트옵션' -다운로드한 프로그램 설치시 자동설정으로 깔리는 연계 프로그램 같은 '자동설정' 자체- 이라는 것이 바로 행동경제학이 만들어낸 아직까진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에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사례이니 말이죠. 그외에 '옵트아웃'-선가입 되어 있고 이후에 탈퇴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은 이건 향후 집 사면 화재보험 자동 가입, 아기 낳으면 교육보험 자동 가입, 퇴직권고 연령이 되면 상조보험 자동가입 등 사람들 일상 전반으로 확대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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