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작았을 때 - 김용택의 어른을 위한 토닥토닥 동시 필사 감성치유 라이팅북
김용택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동시... 어느 화장품 브랜드의 예전 광고 카피 마냥  그저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그렇게 깨끗하고 맑아서 예쁜 시절들만 영혼에 담고서 훈훈함만 돌아볼 사람들을 위한 것일거라 내심 치우쳐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아주 작았을 때' 라는 이 동시 필사집에 눈길이 가던 것은, 나 역시 그저 동시로라도 훈훈함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고...

책을 받아든 날, 그 저녁 책을 읽으며 밑줄 긋던 흑심 뭉툭한 4B 연필을 들고서 동시를 필사해 보려 책장을 넘겼거든요. 한장 한장 지나치다 눈이 머무는 페이지 마다 흔적들을 남기면서 말이죠. 그러다 깨달았아요. 동시는 아이가 된 척 어른이 가식을 떠는 것이 아니라 어른아이가 노래하는 동심이라는 것을... 

읽다가 어린시절 음악시간을 지나며 익숙해진 동시들이 문득 문득 눈에 띠더군요. 그런 익숙한 기억 속의 동시도, 마냥 아기자기한 동시도 훑으며 지나치다가 부러움이 가득한 날을 노래하는 동시에, 아픔에 같이 아려지는 그런 동시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한줄한줄 따라쓰며 때론 부러웠고 때론 같이 아렸고 때론 휑한 채 멍해 있다가 그러다 어느새 책장을 덮게 되더군요.

어린마음을 물들이는 것은 '기쁨 즐거움 행복'만의 빛깔이 아니죠. 세상의 낮과 밤엔 무슨 색인지 모를 눈물빛이 어린마음에 젖어드는 날들이 많으니까...



봄 시내

이원수

마알가니 흐르는 시냇물에
발 벗고 찰방찰방 들어가 놀자.

조약돌 흰 모래 발을 간질이고
잔등엔 햇볕이 따스도 하다.

송사리 쫓는 마알간 물에 
꽃이파리 하나 둘 떠내려온다.
어디서 복사꽃이 피었나 보다.


☆ 이런 유년시절의 기억을 담고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삶을 누렸던 건지 은혜와 사랑 속에 자라온 건지 깨달아야만 할거에요...



꽃씨를 따라간 햇살

권영상

아기가 
꽃씨를 
심을 때,

햇살도 
몇 조각
따라 묻혔다.

어두운 
흙 갈피서
꽃씨 눈을 틔워

파란 새싹으로
밀어올리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
꽃씨 곁에 묻혔다.


☆ 우리의 영혼이 꽃씨라면 우리 안에 햇살은 하나님이시고 사랑이고 희망일테죠? 어두운 흙 갈피 같은 세상이란 곳에서 어떻게든 우리는 파란 새싹이 되기 위해 꽃씨가 눈을 틔우도록 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모른다해도 "난 천사의 씨지만 넌 악마의 씨야!" 라며 선 긋고 몰아부칠 때라도 우리라는 꽃씨는 늘 햇살과 함께일테니까...




소라 일기장

함민복

뻘은 말랑말랑해
발자국이 다 남아
어디 갔다 왔는지
누구와 놀았는지
거짓말할 수 없어
뻘 마을은 정직해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마태 10:26, 누가12:02]
자기 어깨 위의 짐이 또 자신의 선택들이 단하나도 수치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이들이라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온, 내면의 빛과 사랑에 따라 산 축복받은 부럽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부끄럽다고 수치스럽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은 이 어두운 세상에도 없는 것 같아요. 밤에 아파하며 어두움에 물들어 한 일들도 무작정 숨기려 해 보았자 더더 어두움 속으로 들어서며 스스로 어두움과 자신을 분별할 수도 없게 되니까... 감추지도 숨기지도 말아요. 마음만 더 무겁고 습하고 차가울거에요. 아무리 어둡던 날에도 때가 이르면 동녘으로 빛은 솟아오를테니까 태양을 피하겠다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숨어들려해도 금새 밝아온 낮일 겁니다. 그러니 숨지 마세요. 숨을 수 없어요. 바보 같은 짓이에요.

아무리
숨었어도

한혜영

아무리 숨었어도
이 봄햇살은
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
땅속 깊이 꼭꼭 숨은
암만 작은 씨라 해도
찾아내
꼭 저를 닮은 꽃
방실방실 피워낼걸

아무리 숨었어도 
이 봄바람은
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
나뭇가지 깊은 곳에
꼭꼭 숨은 잎새라 해도
찾아내
꼭 저를 닮은 잎새
파릇파릇 피워낼걸

☆ 말했잖아요. 햇살과 함께라고 숨을 수 없다고...



하늘

최계락

하늘은 바다
끝없이 넓고 푸른 바다

구름은 조각배

바람이 사공되어
노를 젓는다.


☆ 하늘이 하나님, 우주, 세계라면 구름은 내가 되고 누구나가 되고 바람은 운명일지 숙명일지 모르겠군요. 어른이 되면 자유를 떠올리던 구름이 그저 바람에나 휘어잡혀 떠밀려다니는 녀석일 뿐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죠. 하늘 구름 바람에서 바다와 조각배와 사공을 그릴 수 있게 해준 시절이 있었다면, '사공이 노를 젓는 수고 정도의 한가로움이 삶인거라'는 감상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시절들에 감사할 일입니다.



내 귀는 
앵두꽃처럼 
작아서

이준관


엄마,
내 귀는 앵두꽃처럼 작아서
작은 소리를 좋아해요.

봄비처럼 사근사근
말해 주세요.
봄비처럼 내 가슴에
사근사근 젖어 들게요.

별처럼 새록새록
말해 주세요
별처럼 내 마음 속에
새록새록 떠오르게요.

☆ 파인애플이 꽃이라는 말도 안될 것 같은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사진 속 잎사귀도 줄기도 달린, 꽃으로 피어있는 파인애플을 보고 놀란 눈으로 보고 또 봤더랬죠.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애한테는 파인애플 던지면 안될테니까요. 아이가 말하네요. 사근사근 새록새록 말해 달라고... 



꽃씨

최계락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면서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가 숨어 있다.

☆ 아이도 어른아이인 우리도 꽃씨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더라도 내면에 햇살을 담고 있는... 아무리 숨고 싶어도 언젠가 파란 새싹을 틔워낼 꽃씨요. 파아란 잎 하늘거리는 사이 빠알가니 꽃 피어오르면 우리 사이 숨어있던 노오란 나비 떼가 날아오를거에요.




가을 하늘

윤이현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 하늘은 언제나 머리 위에 있죠. 그런데 그 하늘을 하루 몇번이나 올려다 보나요? 십대 후반과 20대 초반 매일 밤을 술에 절어 보냈습니다.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선 하나님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눈물로 흐르고 있었죠. 그 시절 어느 기억에도 밤하늘 별은 없습니다. 밤을 닮은 어두움이 웃는 가면 뒤 흐르는 내 눈물에나 어려있었죠. 

한영애님의 '조율'이란 노래 아시나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조율 한번 해 주세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하늘빛... 그렇네요. 하늘빛은 어둠만이 아니라 푸르름도 있었네요. 어두움이 12시라면 낮도 그만큼일테죠? 온 낮을 온 밤을 그리움으로 절망,상실감, 박탈감, 저항할 수도 없다는 무력감, 수치만으로... 원망과 잃어버린 꿈과 그녀로 아파 지낼 때도 분명 하늘은 제 머리 위로 푸르렀고 어두움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겠죠. 그러니 살면서 한번은 도시가 전경이고 하늘이 배경인 날들만이 아니라 온전히 하늘이 전경인 나날도 보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하늘이 심장 안에서도 푸르르게 펼쳐져 있음을 그렇게 영혼을 조율하고 세상을 조율할 거라... 믿으면서...



사랑

서동수

나는 어머니가 좋다. 왜 그냐면
그냥 좋다.

☆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다.' 라는 옛 광고 카피가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는 분명 이유가 있죠. 외로움과 아픔으로 헤멜 때 함께였다거나 힘겨운 날에 기댈 어깨였다거나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의미가 보이지 않더라던가 나의 이상을 완성하는 걸 지지해 줄 것 같다거나...
사람이 사람을 그냥 좋다라고 할 때는 이유가 없어서라기 보단 이유도 떠올리기 성가실 만큼 그 또는 그녀와의 시간이 아리고 두렵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이유를 찾을 수 없을만큼 그냥 좋은 누군가는 분명히 있죠. 대개의 경우 그 이유없이 좋은 사람은 어머니일 겁니다. 세월을 거슬러 보면 누구나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하나였던 시절이 있죠. 어머니의 일부로 시작되어 어머니의 태내에서 인체를 갖추어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납니다.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고 어머니의 젖으로 숨을 이어가는 때를 보내죠. 알고 보면 우리의 첫울음과 첫미소와 첫옹알이와 처음으로 기고 일어서던 그 모든 날에 어머니는 함께셨겠지요. 열나고 기침하고 코흘리고 똥오줌 못가리던 모든 시절을 함께하며 우리 웃음과 울음에 웃고 울던 분입니다. 감히 이유를 찾으려든다면 미안할 일이죠. 원망뿐인 것 같던 순간에 마저 진심은 사랑으로 향하던 그녀... 태양이 불타며 피부 마저 벗겨지고 있는데도 날 감싼 어두움을 끝내겠다면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던 순간... 그 순간에도 떠오르던 기억들 중 아리던 하나... 어머니 



살구꽃 지는 날

안도현

할머니, 살구나무가 
많이 아픈가 봐요

살구꽃 이파리 깜빡깜빡
저렇게 떨어지는데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봐요
흰 머리카락 올올이 풀어져도
빗을 생각을 안 해요
참빗을 어디 두었는지
잊어먹었나 봐요

할머니, 살구나무가
할머니처럼 아픈가 봐요


☆ 아이야, 할머니는 아픈게 아니라 기다리고 계신거야. 
눈 내리고 꽃 피고 태양이 작렬하고 하늘이 높다가 다시 눈 내리고 
찬바람 화롯불 곁에서 도란도란 버텨가던 그 계절들을 많이많이 오래오래 보내셨잖니?
그런 오랜 변성을 거쳐 할머니께선 다음 계절을 맞이하시려 
완숙함으로 강을 건너 새로운 언덕에 이르려 기다리고 계신거야. 



뜨개질

권명희

꽁꽁 엉킨 가난을 풀어내어
엄마는 
긴 겨울을 뜨개질 한다.

두 평 남짓한 아가의 잠자리와
곤한 아빠의 머리맡을 덮어줄
발 고운 사랑을 짠다.

댓돌 쓸던 찬 바람이 
문풍지를 뚫고 
잔물결진 이맛살을
따갑게 보채도

코바늘에 꿰어 엮는
아가의 눈웃음이
어둡고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 준다.

발돋움해 일어선
아가 얼굴
손 꼽으며

언밤 지펴
날 밝히는
여린 손끝에는

밤새도록
빛살 고운 사랑이
무늬져 짜인다.

☆ 꽁꽁 엉킨 가난도 이 가족의 긴 겨울 마저 품어버린 따스한 봄을 앗아갈 순 없을 겁니다. 
그 발 고운 사랑이 짜내는 것은 아가의 잠자리와 아빠의 머리맡을 덮고만 멈추지 않을거에요. 
아빠를 통해 동료에게로 이웃에게로... 
아가가 자라나며 연인에게로 친구에게로... 
그렇게 서로를 세상을 덮어줄테죠. 

이 시가 너무 아렸어요. 
너무 따듯해서 너무 포근해서 너무 아렸어요. 
세상엔 이런 따사로움만 있는게 아니란 걸 아니까요. 

분명 피가 도는 육신을 지닌, 귀신이 웃는 모습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 귀신은 잘 웃고 잘 울고 달변가였습니다. 
그렇게 너무도 선명해서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귀신인 줄을 몰랐더랬죠. 
그를 버텨야 했던 아이는 되려 웃어도 울어도 말을 해도 사람들이 귀기라네요. 숨쉰 채 귀신이라네요. 

바닷가에서, 산골에서, 학교 옆 공터에서, 공사장에서, 도시 한 켠에서 그 어디서나 그 어느녁에나 
거센 바람도 모두 감당해내고 말았던 그 아이는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얼어버린 계절에만 머물다가 찬이슬만으로 식어가는 몸뚱이 안에서 버거워 울고 있네요. 

그래서 알 것 같아요. 뜨개질이란 시 속 가족은 한번도 한순간도 시린 가슴 지닌 적 없더란 걸... 
아가의 눈웃음과 더불어 포근한 빛이 그 가슴 속에서 한결같이 반짝이고 있었음을...
이 가족이 짜는 빛살 고운 사랑이... 
그 따스함을 마을로 도시로 세계로 우주까지 데워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꽃샘추위

유강희

꽃이 피는 게
샘나서 추위가 
닥친 게 아냐

꽃들이 너희들도 한번
꽃향기에 취해 보라고
추위를 초대한 거야

얇은 잎이 찢겨지고
줄기가 갈라지는 것도
까마득 모르고 말야

꽃들이 반갑게 추위를 껴안은 거라고 


☆ 알고 보면 추위 속에서도 꽃향기에 풍요로울 수 있었어. 
잎이 찢겨지고 줄기가 갈라지는 속에서도 
서로의 향기로 따사로울 수 있었다구. 

누군가 안에 사랑이 너무 푹 잠들어 있어서 
또 다른 누군가 안의 사랑도 이젠 영면에 든거야. 

그들은 서로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봄날

신형건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 움이 트려나 봐요.

☆ 그러게 아이들에게 상처가 잘 여문 꽃씨처럼 무르익어가려면 
꼭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만큼만이어야 할 거에요.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패혈증으로 내면에서 
사랑이 앓지도 못한 채 숨이 멎어버리면, 
새 움을 트게 하는 근질거림이 꿈틀거리는 것은 
마주해 보지도 못한 채 눈 감고 말테니까요.



술래잡기 

양승진

술래잡기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어디선가
예쁜 나비가 날아오네.
내가 나비를 잡으려니
나비가 자꾸 도망가네.
그런데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렸다.
뭐라고 하냐면
'내가 잡아줄까?'
바로 꽃이었네.
꽃이 나비를 잡아 주네.


☆ 나비를 잡아줄 나만의 꽃을 바라기 보다
나비를 잡아주겠다며 누군가의 꽃이 되길 꿈꾸기 보다

꽃과 나비가 어우러지는 들녘에서
바람과 햇살 마저
나 마저 아울러 머금을 수 있는

그런 한 때를 보내다 산을 건너고 강을 걸으면
속삭임도 지나쳐 갈 지 모르지



산 너머 저쪽

칼 붓세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남 따라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글썽이며 돌아왔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 동시라기엔 너무 시린... 가진 자는 더 가질 거라며 가지지 못한 자는 그 지닌 것 마저 빼앗길 거라던 빛으로 오신 분께서 선언하신 차가운 방정식이 떠오르는군요. 행복은 행복한 사람들만 커가나 봅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는 행복한 사람들 구경만 해야하나 봅니다. 그러게 더 행복하라 기도나 드릴 걸 (행복) 없는 내가 마주대고 악을 써대 퍽이나 죄송하네요.




선인장

김륭


울고 싶으면 울어, 마음껏
울어 보래요 울 수 있다는 건
무슨 일이 닥쳐도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거래요
겁먹지 말래요
이글거리는 태양 머리에 이고
모래바람을 견디고 전갈도 물리친대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어도
꽃을 피울 수 있대요
선인장에게 가시는 
눈물이래요


☆ 그래도 물 한 모금의 안식도 없이 가시뿐이라면
선인장도 목타고 아플거야




먼지

사이조 야소


눈으로 먼지가 들어갔네.
암만 비벼도 안 나오네.

뒷담에 기대섰는데
옆집 아저씨 하는 소리,
"아가, 아빠한테 꾸중 들었니?"

큰길로 나왔더니
앞집 누나 하는 소리,
"아가, 어떤 사람이 때렸니?"

아무도 모르는 눈 속의 먼지
암만 비벼도 안 나오네.

☆ 언젠가 자라나 늙고 
먼지로 돌아갈 날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눈 속의 먼지 그 작은 하나에도 
따스함이 깃들던 시절이 있었음을 담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는 길이 서늘하지만은 않겠네...




하얀 눈과 
마을과

박두진


눈이 덮인 마을에
밤이 내리면
눈이 덮인 마을은
하얀 꿈을 꾼다.

눈이 덮인 마을에 
등불이 하나
누가 혼자 자지 않고
편지를 쓰나?
새벽까지 남아서
반짝거린다.

눈이 덮인 마을에 
하얀 꿈 위에
쏟아질 듯 새파란
별이 빛난다.
눈이 덮인 마을에
별이 박힌다.

눈이 덮인 마을에
동이 터 오면
한 개 한 개 별이 간다,
등불도 간다.

☆ 눈이 그저 하얀 쓰레기가 되어버린 순간 깨달아야 했어
하얀 꿈에 짧게나마 물들던 시절로도
반짝거리는 그리움이던 시절로도
그리고 그런 시절을 가져다 주었던 낮과 밤으로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그 눈이 덮인 마을엔
하얀 꿈 위로 쏟아질 새파란 별들로
아름다운 밤이길 바란다

그 마을, 동이 터온다해도
하늘로 돌아가 별들은 거세게 빛날거라 기도하며...


무지개 뜨면
좋겠다

유강희

남쪽 마을과
북쪽 마을을 잇는
무지개 뜨면 좋겠다

토라진 네 마음과
내 마음 사이에
무지개 뜨면 좋겠다


☆ 무지개 같은 건 
무지 개 같은 건
곧 사라지고 마는 걸...

토라진 내 마음이
네 마음을 원망하는 건
아마도 내 마음 속
네 마음을 바란 
바람이 빛났던 
때문이겠지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어디가 풀잎이고
어디가 꽃잎인지

어느시절엔
정말 꽃이기라도 했던건지

상처투성이로
해체되어 버리면

그 향기는 시릴뿐
향기롭길 기대한들

아릿하고 시큰하게 흩어져 버릴 것을...




뒷걸음질

남진원


뒷걸음질하면
멀어지겠지

뒷걸음질하면 
네가 점점 작아 보이겠지

뒷걸음질하면
나중엔 네가 안 보일지도 몰라

그러나 발자국은
여전히 네게로 향해 있지


☆ 뒷걸음질하며
널 향하던 발자국을 짚어본다

그 걸음이 길게 이어질 수록 깨닫는다
난 한순간도 네게 가닿았던 적 없었음을

그리고 이 순간 흐르는 아릿한 눈물도
결코 네 손끝에 닿지 않을 것임을



아침 버스에서

권영상


추운 날 아침
아침 버스의
차가운 좌석에 앉다가

뜻밖에도
따스하게 밀려오는
그 누구인가의 체온을 느낀다.

이 자리에 앉았다가
따스한 체온만을 남겨 두고
내린 사람은 누구일까.

추운 겨울의
한 모퉁이를 녹여주는
이 의자에 앉아

나는
다음 사람을 위해
더 따스한 자리를 만든다.


☆ 누군가의 따스함이 데워둔 자리
추운 겨울의 한 모퉁이를 녹여준다는

겨울만 이어지는 이들을 위해
그 데워둔 따스함을 지고가 들러야 할까?

다들 그러려 할까?

그렇게 외쳤는데도 속삭임이라던데
넓은 들 어딘가 누군가
듣기는 했을까?

이러다 그 따스함
다 식어버리지 않을까?

할 수 있는게 
누가 속삭임이라는
외침뿐인데 

소리치다 잠겨버린 목으로

따스함 따라 
나도 식어 간다



꼬마 장갑

박목월


아기 손은 꼬마손
꼬마 장갑 껴야지

빨간 털실 한바람
살살 풀어서
하얀 털실 한바람
살살 풀어서

우리 아기 자는 틈에
한 코 짜고
우리 아기 노는 틈에
한 코 짜고

꼬마 장갑 꼬마 장갑
이내 짠다.


☆ 이봐! 꼬마 장갑이라도 짜보지 그래?




그러고 보니 도서의 커버에 감싸인 한켠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울고 싶은 날, 힘내라는 위로의 말 대신' 김용택 시인이 당신에게 보내는 101편의 동심'이라는 카피는 그냥 마구 지은 광고 문구가 아니었네요. 힘내라는 식상한 말 보다 누군가 어떻게든 공감해 주는 순간이 있어야만 할 겁니다. 누구 하나 진정으로 공감하는 이 없다면, 그 어디서든 어느 계절이든 날카론 바람이 시리게 뼛속까지 부수고 스며들테니까요. 

자신이 어른아이인 걸 잊어버린 채 참고 참던 인내가 언젠가 부터 괴팍하게 강퍅하게 세월을 겪어가게 한다면, 끝내 성탄절 밤이 절실할 스크루지 같은 노인네나 되어야 할테죠. 그런 날이 올까봐 두려운가요? 그렇다면 '내가 아주 작았을 때'란 이 동시필사집을 만나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마도 101번의 크리스마스 유령과의 만남을 어느 계절에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가져다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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