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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37 수행법 - 티벳어본 보현행원품
톡메 상뽀 지음, 정공 옮김 / 하늘북 / 2010년 12월
평점 :
"스님은 어느 불국토에 왕생하시겠나이까?"
"나는 지옥에 가서 지옥 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위의 대화는,《보살의 37 수행법》이란 이 책의 저자이신 톡메 상뽀 스님께서 75세를 일기로 입적하시기 전의 일화를 역자인 정공스님께서 서문에 전해주신데서 마지막 대화를 옮겨 보았습니다.
① 톡메 상뽀 스님의 일화를 정공 스님 서문에서 더 인용해 전하자면 14세 출가하신 톡메 상뽀 스님의 30대 때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님께서 절문 밖에 이가 득시글거리는 걸인에게 매일 자신의 음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걸인이 불결하다고 여긴 다른 스님들이 걸인에게 절문 앞에 있지 말고 떠나라고 했다고 하네요. 걸인이 사라지자 다른 스님들에게 상황을 전해들은 톡메 상뽀 스님께서는 떠나간 걸인을 다시 찾아 자신의 처소에 머물게 하셨다고 합니다. 또 걸인의 이가 득실거리는 옷을 벗기고 자신의 외투를 입혀주셨다네요. 다만 여기서부터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숭고함도 느낄 여지가 없을만큼 보편성을 넘어선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걸인이 벗은 그 외투에 득실거리는 그 이가 불쌍하다고 스님께서는 이를 구제하려고 자신이 그 걸인의 버린 옷을 걸쳤다고 합니다. 그러다 병이 옮아 시름시름 앓게 되시자 이제 그만하시라고 다른 스님들이 말리는 지경까지 갔다고 하네요. 그러다 16일이 지나자 이들이 모두 죽었고 그 죽은 이들을 화장해 주시며 염불과 기도로 천도하셨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판타지급 성자이신 겁니다. 이건 자이나교 수행자분들 중 일부 수행자분들이 풀한포기의 생명도 해칠 수 없다며 채식 마저 마다하다가 굶어 죽는 경우와 같은 수준의 성스러운 행위셨다고 봅니다. 저는 예수님의 죽음도 자이나교 수행자분들의 죽음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긴 하셨습니다만 하나의 역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누구나가 모두 그와 같이 자신을 해치는 이들 마저 용서 하며 죽임을 당하고, 풀한포기에 마저 연민을 갖는 분들은 모두 죽어 버리는 극단적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그렇게 숭고한 분들은 모두 사라져가고 세상엔 자기 이익을 위해 또 지가 보기에 만만한 이들은 모조리 짓밟고 죽여도 된다고 믿는 이들만 살아남는 상황이 거듭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끝내 이곳은 지옥이 될 뿐입니다.
이곳이 지옥이지 않으려면 그런 사랑과 자비로 가득찬 분들이 살아가는 세계여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탐욕과 분노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의 마저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 이들을 치유하려 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다행히 톡메 상뽀 스님께서는 1294년 태어나셔서 75세를 일기로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동안 자비와 헌신을 실천하는 불가의 보살행을 펼치시며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모범을 보이다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께서도 보살의 삶을 살다간 이들의 본보기를 들고 싶을 때 톡메 상뽀 보살이 떠오른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마만큼 한결같은 귀감이 되고 계신 것이지요. 이런 본받고 따라야 할 분들께서 우리 곁에 때때로 계셔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개인적 성취만 추구하는 것을 사람이라 당연하다 여기는 것만이 상식이 되버린 사회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일 겁니다. 개인의 성취만 부각된다는건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이타심과 이기심 중 이기심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현시대의 논리를 더욱 강화할뿐이니까요.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두드러지는 사이코패스 성향은 역사 속에서 쉬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이 외국에서 전혀 연고도 없던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 마저 버리는 이타성을 간혹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이기심만으로 분노만으로 이해타산만으로 누구든 얼마나 많은 생명이든 해치고도 남는 흉물임에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은 위험 속에 던져진 낯 모르던 단하나의 생명을 구하려 자신의 생명도 내던지는 숭고한 성자일 수 있는 이들입니다.
사회가 온통 인간의 이기심에만 주목하도록 몰아갑니다. 너 자신이나 생각하며 살면 된다고 세뇌하는 듯 합니다. 이기심에만 주목하도록 하여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윤추구를 위해서 또 개인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타인의 안정은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관점에서도 불합리한 논리일 뿐입니다. 계층의 격차가 커지고 부의 편중이 심화 될 수록 사람들 사이에 박탈감과 저항의식에 뿌리 삼는, 근거있는 분노가 커갈 것입니다. 게다가 생계가 불안정하고 특권층이 모든 부를 빼앗아가며 착취해서 그렇다는 편향을 갖게 된다면, 사회에 폭력과 갈등의 여지만 깊어지고 범죄 발생율만 상승할 겁니다. 그런 분노와 폭력이 팽배한 세계, 갈등과 충돌만 커가는 불안정한 나라, 언제나 범죄 피해 소식이 잇다르고 그 피해의 대상이 내 가족과 나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사회... 이기심만으로 살아가다 맞이할 것은 이런 세계, 이런 나라, 이런 사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나만을 보는 눈이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를 아울러 보는 눈을 뜨려 노력해야 합니다. 알고 보면 이기적인 눈도 길고 긴 시간 사회와 제도를 통해 그런 노력을 하고 하고 또 해서 갖게 된 것이지 않나요?
-요즘은 성적도 절대평가라며 자기가 무슨 과목을 잘하고 무슨 과목이 부족한지 알려주는 형식이라더군요. 이렇게 좀더 나아지고 있는건지 모르겠으나 아직도 일등이니 명문대니 상위 1%니 특권층이니 기득권층이니 하는 계층화하는 성향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치우친 관념들이 사람에게 이겨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올라서야 한다는 관점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중 이기적인 성향만을 키우는 것을 합리화하게 하는듯 합니다-
한측으로 치우친 관점을 깨려는 노력과 이기적인 눈 만큼이나 아울러 보려는 노력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자면 사고력을 계발하고자 학업에 열중하는 시간 만큼 공감할 줄 아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해타산 따지는 딱 그만큼만이라도 내가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줄 알았던가 돌아보아야 할 겁니다.
② 본서는 보리심 또는 보살심으로 불리우는, 慈悲의 마음으로 모두를 대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복에 미소 지어지고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본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보리심이라고 하던 보살심이라고 하던... 뭐라던 간에 그 이름이 가르키는 숭고하면서도 당연한 그 심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짧은 주석에서는 불가와 요가 체계에서 쓰이던 다른 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이르는 어휘를 한자로 번역한 慈를 자애로 다시 재번역했고, 다른 이의 고통을 안타까워 하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파 하는 심정을 번역한 悲를 자비로 옮기고 있습니다-
본문의 몇몇 구절을 옮겨 봅니다.
#4 ...전략... 몸이라는 숙소를 의식이라는 손님이 버리고 떠나야 하나니, 이 생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 불교와 인도 철학 체계가 주장하듯, 현실은 실상이 아닌 하나의 꿈과 같으니 육신에 집착해 꿈 속에서 좋아라 하고 아프다 하는 헛소동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몸이 나라는 집착에서 부터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불교에서는 애초에 나라는 것이 어디서도 근거를 찾을 길 없는 그저 파도가 칠 때 일어나는 물거품 같이 금새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현상'이라 말합니다. 그런 나를 몸에서 찾자고 해 보았자 그저 잠시 뒤 떠나야 할 경유하는 곳일 뿐이란 거겠지요. 그저 아주 잠시 스쳐 지나는 곳에 무슨 미련을 갖고 집착을 할 것이냐? 이것 부터 깨닫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는 말씀입니다.
#9 삼계의 행복은 풀잎의 이슬과 같아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성질의 것이니...후략...
(삼계: 욕계,색계,무색계 -이 가로 안의 '주'도 역자이신 정공 스님께서 남기신 것을 옮긴 것입니다-)
+삼계는 불교의 윤회관에서 생명(중생)이 환생하는 여러 차원 중 인간계와 그 상위 차원들을 이르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을 통한 사마디의 수준을 설명하며 이 용어로 사마디의 단계-색계도 무색계도 다시 세부화해서 여러 단계의 사마디를 설명하기도 합니다-를 정의하기도 합니다만 세세히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스킵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구속도 한계도 덜한 행복하다는 차원의 환생을 한다해도 그 모든 것이 한순간 꾸고 깨어야 할 꿈처럼 덧없는 거라는 말씀인가 봅니다.
#10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우리에게 자애로왔던 모든 어머니들이 고통 속에 있는데 자신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가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보리심 bodhicitta : 일체 중생을 위해 내가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큰 발심을 말한다)
-어느 성현의 가르침이던 공감에서 시작하실 때 가장 마음 안에서 울립니다. 입보리행론을 10년 전에 읽었었는데 내용이 거의 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수한 환생을 해오며 셀 수없는 어머니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라 살았었기에 그 셀 수도 없는 어머니들이 이 세계 환생하셔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로 살아가시니, 이 세계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거란 식의 내용이 있었던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사람이면 더우기 심리학자 애들러 씨 처럼 자신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의 경우 어머니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살아가는게 남녀 누구나의 보편적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고아로 자라 어머니 얼굴 마저 희미하게 기억 안난다는 이더라도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에 더욱 입보리행론의 접근방식이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그럼 그 고마움과 그리움의 대상이신 어머니를 거듭되는 생에서의 무수한 어머니들로 확장하고 그 어머니들이 이 세계 모든 생명들로 환생하신거라 재차 확장해 그 무수한 생 동안의 어머니들께서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의 대다수가 슬픔을 느끼며 안타까움과 함께 반드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리란 결심이 일게 되겠지요.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리라는 결심도 말입니다. 어머니가 고통 속에 있단걸 알면서도 행복에 겨울 수 있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11 모든 고통은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는데서 생겨나고 원만하신 부처님은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셨으니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바꾸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 고통의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는 것도 극단적인 수준의 과대 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를 돌보지 않으면서도 타인만을, 세상만을 위해 살아가던 이들 마저 중상모략에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름 건실하게 살아오던 사람이 다른 이의 위증에 의해 무고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내 탓을 하는게 낫다며 타인들의 비난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에게 끝도 없는 모욕과 멸시가 계속 되기도 합니다. 이 순간에 내적 수양을 하라는 둥 불교적으로 인욕바라밀 수행의 기회를 줬으니 감사하라는 둥 한다는 것도 미친게 아닌가 싶군요. 그 정도의 의식 수준이라면 이미 수행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의 성자인 겁니다.
타인에게 무슨짓이던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행위로 고통스러워 하는 그를 보고 "그건 니가 너 자신의 정서를 통제 못하고 괴로워 하니 너 자신의 탓이다." 말한다면 또라이가 명백합니다. 그와 같이 자신의 고통의 탓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모두 자기 탓만 하는 것도 스스로 모든 상황과 자기 감정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과대 망상인 겁니다. 건널목(횡단보도)에서 파란 신호등을 보고 건너는데 교통법규를 위반하고 나를 덮치는 자동차에 의해 사고를 당한다면, 이 상황에서도 모든 상황을 통제 못한 자신을 탓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정신적인 테러나 물리적 테러를 당하면서도 자기에게서만 원인을 찾아야 할까요? 거듭 그렇게 모든 원인은 내게 있다며 내적 수양을 갖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날들이 멈추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내면의 분노와 억울함으로 수양을 안하던 날들만도 못한 트라우마 상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고통과 바꾸겠다는 잡도리가 진심이 되려면 내면의 응어리나 정신적 혼란 등 트라우마가 거의 치유되고 완화되는 것이 전제일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단계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공감하고자 마음을 여는데서 부터 접근해 가야 할 것입니다.
역자인 정공 스님은 37수행법 중 이 11번째 본문에 대한 주석에 『자타교환법』이라며 날숨에 자신의 행복을 세상 모든 생명들에 나눠주고 들숨에 세상 모든 생명의 고통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수행을 간략화하여 주석을 다셨습니다. 이는 12세기 티베트 보살 케세체가와의 《마음수행의 일곱가지 요점》에 대한 여러 주석서들을 참고하면 실수행으로 삼기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트라우마 상태로 치달을 정도로 울분과 슬픔과 상실감과 박탈감, 체념에 빠진 상태라면 이 수행은 할 수 없습니다. 하려는 심정 자체가 들지 않고 하려 한다해도 억울함만 가득해 질 수 있습니다. 단계를 거쳐 내면의 부조화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울분과 억울한 심정 등을 모멸감과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머리로만이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너와 나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 네가 네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닫기 위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살의 37 수행법》 낱낱의 법문 대부분이 수긍도 가고 공감 속에 실천 가능한 가르침들입니다만, 사람으로서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해도 쉬이 실천할 수 없을 항목들은 #12~#18 까지의 법문들입니다.
-간략히 의미만 담아 옮기겠습니다-
#12는 탐욕스런 사람이 나의 재산을 모조리 앗아가도 자신의 몸과 재산, 전생부터 현생까지 그리고 미래생까지 행할 자신의 모든 선한 행위의 보답 마저 그에게 돌아가도록 기도하고 바라라는 것입니다.
#13은 누군가 나를 살해해도 그의 그런 악행의 댓가 마저 내게 돌아오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14는 남들에게 나를 욕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비방하더라도 그의 공덕을 칭찬하라는 말씀입니다.
#15는 남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나의 허물들을 들춰내고 수치스럽게 만들더라도 그에게 가르침 받는다 여기라는 것입니다.
#16은 내가 그(그녀)를 마치 자녀 처럼 소중히 여기며 사랑과 정성을 다했던 이임에도 나를 원수 보듯 할 때 실망도 원망도 하지 말고 그(그녀)를 아픈 자녀 대하듯 측은히 여기며 더 큰 사랑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17은 나와 비슷하거나 나 보다 부족한 사람이 지가 잘났다며 나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라도 스승과 같이 공경하며 나의 정수리에 모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수리에 모시라는건 티베트의 심상화를 기반으로한 스승을 공경하는 명상 체계를 연상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이 마저 공경하는 과정을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다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도 더이상의 수행이 필요없을 인격의 최고 경지일텐데 열여덟번째는 과히 성자를 넘어선 경지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18 비록 생활이 가난하고 항상 남의 멸시를 받으며 중병에 걸리거나 악귀에 시달리더라도 모든 중생의 악업과 고통까지 내가 대신 받으며 결코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네.
-열여덟번째는 뜻으로 옮기지 않고 전문을 그대로 받아 옮겼습니다. 궁핍한 환경으로 어렵더라도 매순간 타인들이 같잖게 보고 모욕하며 모멸감을 주더라도 낫기 힘든 병에 걸려 고통 속에 허덕이고 악령에 씌여 제 정신을 못차리겠는 순간에 마저 온세상 뭇생명들 전체의 악행의 댓가와 그들의 고통을 모조리 내가 감당하겠노라 결심하고 그리 고통과 징벌 같은 삶 속에서도 용기를 내며 살아가라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쯤이면 이미 수행이 더이상 필요도 없는 인격의 궁극에 이른 성자인 겁니다. 이 정도 수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는건 벌써 득도를 너머 깨달음의 경지란 말 아닙니까?
대개 수행은 의식과 영적 성장을 바라며 다가섭니다. 즉, 마음을 닦는다고 여기며 수행의 길로 들어서지요. 하지만 이 시대에 이 정도 경지의 가르침이라면 '이런 분들이 실제 했을까?' 의문이 일면서 만약 '예전엔 있었겠지' 수긍을 한다해도 자신이 실천하기에는 엄두가 안날 수준입니다.
수행법문을 보고 실천할 수 있으리라는 열의가 솟아야지 그저 '듣기 좋은 이상적인 소리들만 나열했네' 정도의 감상으로 지나쳐버리고 말게 된다면 수행법문들이 대중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게 궁극에 가까운 가르침들로 나아가기 전까지 사람의 마음 속 상처를 보듬고 치료해줄 체계들이 필요한 겁니다. 인지심리학 아동심리학 정신분석학 부터 분석심리학을 거쳐 자아초월심리학 등등과 실존치료 예술치료 기법들을 포함한 심리치료기법들까지 심리학과 심리치료 전반을 체계를 갖추어 교육과정에 도입해야만 합니다. 심리학 전반만이 아니라 세계 다양한 명상 체계와 수행체계도 교육과정에서 지식을 머리에 쌓는 것 보다 비중있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 속에 상처와 아픔만 응어리진채 방치된 아이들이 자라나 범죄자로 성장하면 처벌만 하겠다는 사회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합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가해나 방치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도 편견과 독선과 아집에 차 자라나서는, 자기 스스로도 추스리지 못하면서 지가 갑이라는 의식만 가득해 특권층이 되면 어떤 사회가 되는지 다들 충분히 넘치게 경험하며 살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더 이런 세계를 외면할 일도 아니고 버려둘 일도 아닙니다. 교육학자들과 다양학 심리학자들, 세계 각 수행체계의 명상가들과 명상의 효과를 연구한 뇌과학자들이 모두 새로이 교육과정을 다시 갖추려 논의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과정 전반을 새로운 커리큘럼을 완비해 실제 초중고 교육과정 전체에 적용해야 합니다. 전인교육이라고 말만 해왔지 입시위주의 교육만으로 인격은 학교나 학원 취미활동 등의 사회생활로 저절로 갖춰지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교육체계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만들어 가고 있기에, 연일 신문과 뉴스의 사건사고가 모질대로 모진 사람들의 흉한 이야기로 가득한 겁니다. 그 사람들이 알고 보면 유아시절 자신의 아이스바를 뺏어가 자신을 울리고만 거지아저씨한테 다음날 빵을 가져다 주던 그런 아기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아기들이 그 심정 그대로를 간직한 채 자라날 수 있도록 이젠 상처는 추스려주고 아픔엔 귀기울여 주는 제도적 지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교육체계 전반을 입시가 아닌 심성을 갖추는 체계로 자리잡을 수 있게 누구나 관심과 지원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세계 다채로운 종교들 전반과 무신론 또한 포함시켜 그 장점과 단점, 폐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급진이슬람 테러단체들의 확장으로 중동뿐 아니라 세계 다수 지역이 어지럽습니다. 각국에 과도히 유입된 이슬람 난민들과의 취업경쟁이나 그들로 인한 복지비용부담과 복지혜택 축소를 경험하며 난민 수용국가들 원거주인들의 이슬람 유입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커갈 수 있습니다. 일부 이슬람 사람들로 인해 야기될 사회 불안 요소들을 근거로 난민수용국가 원거주민들이 이슬람 이민자들에게 적대감을 더이상 숨기지도 않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그것을 차별이라 여기며 생활하게 될 무슬림들이 끝내 급진 이슬람 테러단체 추종세력으로 변모할 우려가 큽니다.
-이 상황을 원천 차단하려 했다면, 애초에 난민 수용이 아니라 아프리카 등에 조차지를 조성하거나 대서양에 인공섬을 만들어 이슬람 난민들을 이주 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을 겁니다. 어차피 난민수용으로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로봇과 인공지능 도입이 목전인 상황에서 헛소리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역설었으니까요.-
그러니 자기 종교의 폐해도 속속들이 배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맹목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인종적 지역적 관행적 종교 추종이 아니라 합리적인 분석을 통해 자기 종교의 폐해와 단점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추종할 가치가 진정으로 있는 것인지 판단하도록 또 자기 종교의 페해는 바로 잡으려 그들 스스로가 노력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리되면 옛 성인들과 현인들 가르침이, 그저 넘사벽의 실천 불가능한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넉넉히 실천할 수 있다 자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