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크릿이나 마음의 힘을 논하는 저작들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심리학 이론서들이 양육환경이나 애착관계에서도 아이 역시 상호작용을 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것은 너무 지나친 일반화이며 무성의한 통론이 아닐까 싶다. 


세상 모든 부분에서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관점은 세상을 너무 편협하게 보는 시각이 아닌가 한다. 


그 주장대로라면 유아성폭행을 당하는 아기, 맞아죽은 아이 역시 그런 상황을 끌어당기고 불러들였다는 논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솔직히 성인 부터도 경찰을 부른 상황에서도 침입자로부터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 집에서 쉬고 있다가 침입자에게 성폭행 당하는 치매 노인도 있다. 모두 한국 최신 뉴스에서 든 사례이다. 이런 상황을 다 본인이 끌어당기고 불러들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부모가 보낸 유치원에서 폭행 당하는 아이들이 무슨 폭행 당할 상황을 불러왔다는 말인가? 


현재의 상황만 보더라도 코로나19를 누가 불러들였으며 백신 접종으로 사망할 상황을 누가 끌어당겼다는 말인가? 이 두 가지의 경우는 이제 와서는 자신의 선택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게 되었다지만 전파 초기 상황을 보자면 대중이 코로나 19를 끌어당겼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국가가 각국 정부가 주도하고 적극 권장하고 있는 백신 접종의 경우도 접종 후 사망의 경우 그 죽음을 본인이 끌어당겼다는 주장은 공감이 불가능한 주장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가 당한 사고나 재난에 마저 자신에게 통제권이 있었다고 믿어야.. 그런 합리화가 되어야 안심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 같은데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인간이 그런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한 사례 외에 넓은 시야로 볼 때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의 침공으로 성노예가 된 여성들이나 그 상황을 막으려고 저항하다 죽는 가족들이나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학살을 당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누구 하나 그런 상황을 끌어당기고 끌어들인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역사 앞에 놓인 저항할 수 없는 경우뿐만이 아니라 양육 과정에 노출되는 아이들 누구나가 자신이 처하는 현실을 선택할 권한이 주어진 적이 없다. 양육 과정에서 애착관계가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애착관계가 평생의 호불호와 세계관, 자기인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절대적인 운명의 힘 앞에 놓이는 경우를 생의 초기에 겪을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생의 초기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경우나 압도적 무력(권력) 차이 같은 것 앞에서는 언제든 절대적인 피권한자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아니다. 우리는 상호작용하는 것이 맞다. 아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호교류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생각해 보라. 아이가 상호교류하며 자기만의 관점과 성향의 특질을 지니게 된다고 해도 다른 자극원(환경)이 주어졌다면 그 아이는 다른 반응을 하며 자라났을 것이며 결국 다른 인격체로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인격체로 자라날 수 있었을 기회비용이랄까 여러 가능성 중 지금의 이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 자라날 환경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져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런데도 이것이 운명이 아니라고만 갑갑하게 주장할 수 있는 걸까?


주어진 모든 영향력을 자각하고 그것을 깨려고 노력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이 3가지의 경우를 하나씩 마주하는 경우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겠으나 그러기 전에는 운명이란 수레바퀴 앞을 가로막고 선 사마귀 같은 처지가 인간의 생에서 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일 수도 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모든 것은 다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라는 관점에만 빠져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절대적인 운명의 흐름 앞에 놓여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일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지적이던 인물이 완전히 와해되어버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운명의 힘을 인정해야 운명을 감내하고 운명을 이겨내려 힘을 낼 수가 있다.


자기통제력을 과신하는 사람보다 어쩌면 운명을 믿는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좀 더 유연히 대처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폭넓게 관찰해 봐야 인정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상처받은 아이는 외로운 어른이 된다 -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 관계를 치유하는 시간
황즈잉 지음, 진실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내면 아이를 치유하고 내 아이는 외로운 어른으로 만들지 않고자 한다면 필독해야 할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받은 아이는 외로운 어른이 된다 -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 관계를 치유하는 시간
황즈잉 지음, 진실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패턴을 알아차리면 그때부터 변화가 일어난다"


'대인 과정이론에서 개인의 특질이나 개성, 인격은 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달한다고 보며, 대처 전략을 조정하면 운명을 바꾸고 대인 관계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변화의 열쇠는 굳어진 대처 전략을 알아차리는 것... 늘 같은 유형의 인간관계에서 좌절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알아차림의 시작이다.'


"... 우리는 가정 안에서 자기 역할을 설정하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특정 생존 전략을 끊임없이 반복 사용한다."


"어른이 된 당신은 자신의 대인 관계 패턴을 인지할 수 있고 타인이 자신을 그 패턴대로 대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이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우리는 상대방에게 불평하는 동시에 관여하고 있으며 자신을 그렇게 대하도록 단련시키고 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이유는 지나치게 경험에 의존해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상상 속의 전략을 반복해서 되풀이하다 보니 원치 않는 역할을 또다시 맡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느냐?"라고 원망할 때는 반드시 스스로 그 상처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직면해야 한다."


"자신의 대인 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알아차리고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인생에서 반복되는 드라마와 패턴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기 몫을 기꺼이 책임지려고 한다. 


"변화는 자신에게 몰두할 때 조용히 일어난다.


여기까지가 추천의 글과 서문에서 인용한 본서의 특징과 주제이다. 흔히 말하는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방식을 다룬 많은 저작들이 그렇듯 본서도 문제의 인식을 치유의 시작으로 본다. 내면아이의 상처를 트라우마라는 관점에서 다룬 많은 저작들이 있는데 본서는 대인 과정이론이라는 심리학 이론을 다룬 저작으로서는 처음 대하는 책이었다. 


본서가 현재의 문제는 어린시절에 있다고 해석하도록 인도하는 제목을 갖은 것은 보호자의 양육 방식과 부모와 본인 사이의 애착 관계 유형이 인간의 정서적 관계적 특질을 이루는 압도적인 힘을 인식하기에 그런 것이리라 판단된다.


보호자의 양육 방식을 통해 아이는 세계관이 형성된다. 세계를 대하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자존감이랄까 자기인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말하듯 어린시절에는 어른들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생존의 길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살만한 안전한 곳으로 인식할지 투쟁하고 쟁취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할지 불안하고 위험하니 회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할지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는지는 모두 영유아 시절의 경험과 해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영유아 시기의 아이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각기 다 다르다고 할지라도 자극원이 전혀 달랐다면 그 아이는 전혀 다른 반응양식을 가지고 자라났을 것이다. 그렇게 자극원이 달랐다면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되었을 것이다.  


저자와 관련 분야 심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대체의 거의 모든 심리학자들은 인간관계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니 아이들의 경험도 결국에는 아이들의 영향력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결국에는 씨크릿이나 마음의 힘을 논하는 저작들에서처럼 끌어당김의 법칙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자신이 끌어들인다는 표현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절반의 진실이고 다른 절반에 있어서는 유사 진실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아 성폭행을 당하는 아기가 그런 현실을 끌어당기고 그런 가해자를 끌어당겼다는 것인가? 아동이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다 맞아 죽었다면 맞아 죽을 짓을 했으니 그렇게 됐다는 말인가? 성인의 현실이라고 해도 급진 이슬람 폭력단체가 습격하고 공략한 지역에서 성노예가 되어버린 여자들이나 내 딸은 안된다며 맞서다 죽어간 가족들이 그런 상황을 끌어당기고 그런 가해자들을 끌어들였다는 말인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집단 학살을 당하거나 참수 당하는 사람이 정말 그런 현실을 끌어당기고 그 사람들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가 말이다. 먼 이슬람 지역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자기 집에 쉬다가 침입자에게 강강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그런 현실을 끌어당기지도 그런 사람들을 끌어들이지도 않았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었다고 내가 잘 대처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권한이 자기에게 있었다고 합리화할 수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듯하다. 자신에게 전혀 아무런 통제권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느끼고 저항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었던 상황도 존재한다.


아이의 숨소리만 들려도 시끄럽다면서 위협하고 언제 폭행할지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아이가 무슨 맞을 짓을 할 수 있을까? 아이도 이쁜 짓을 한다며 다 제 할 탓이라는 부모들도 있다지만 어느 아이든 자폐스펙트럼만 아니라면 부모의 환심을 살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미운 짓을 하는 아이 역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모의 무관심을 받느니 꾸지람이라도 들으며 관심을 받아보려는 심리가 있다는 말이다. 저자 역시도 나쁜 아이가 무시당하는 아이보다 낫다고 진단하고 있다. 나쁜 아이라는 것도 아이의 생존 전략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맞다가 죽을 지경이 되는 아이들은 그런 생존 전략을 선택할리 없다. 관심과 무관심의 문제를 떠나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폭력 속에서 폭력을 불러오는 전략을 선택할 아이는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지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아이에게 정신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선택하는 인간을 아이가 맞을 짓을 했을 거라며 이해하겠다는 인간들은 단 한 번도 생존의 위협을 경험해본 적 없는 이들일 것이다. 


본서에서는 많은 주제와 관점들을 이론적 바탕 위에서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론들을 전하는 종결 대목에 원가족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그를 통해 갖게 되는 습관이 어떤 특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질은 또 다른 상호관계 속에서 때론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특질, 관계에서의 특징을 인식하고 새로운 특질을 형성하면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는 진단을 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양육자들의 양육 방식과 그들과 자신 사이의 애착 관계에서 갖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라 문제가 되면 스스로 풀어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쉽게 들리지만 사실문제 해결의 실마리 정도가 아닌가 한다. 이 내면 아이의 문제가 실마리만 있으면 쉽게 풀리는 문제였다면 사회가 안고 있는 그 수많은 난제들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유교 가르침인 군군 신신 부부 자자 君君 臣臣 父父 子子를 논하며 이러한 위계질서 속에서 자녀는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며 정서적 안정감을 찾는다고 말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누구에게나 청소년 시절부터 상식인 그대로 결국에는 부모가 부모 다울 때라야 자식이 자식 다운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정서적으로 결핍된 부모에게서 오히려 안정적인 든든한 자녀로 자라나는 역기능이 일어나는 경우도 물론 없지는 않으나 부모가 정서적인 안정성을 갖고 관계적으로 원활할 때 자녀에게서 그 순기능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본서는 자신의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데도 물론 유용하겠지만 자신의 문제를 세습하고 싶지 않은 부모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저작이 아닌가 싶다. 중반부터 자잘한 오탈자가 지속적으로 출현해 거슬릴 때가 있지만 그건 중쇄를 하며 교정하리라 본다. 저작 자체만의 가치를 논하자면 소장하고 거듭 보는 것이 상당히 유익하리라 생각되는 책이다.


본서에 등장하는 31가지 사례 속에서 자신의 유형을 거듭 찾게 되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밑줄을 그으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 아이를 치유하고 자신의 자녀에게 부정적 특질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읽어봐도 좋을 책이라고 권하고 싶다.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애들 - 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
앤 헬렌 피터슨 지음, 박다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제제기만 있지 해결안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무엇보다 양자컴퓨터와 AI가 결합해 스스로 하드웨어를 개선하고 재설계하고 AI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하여 이전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술 혁신이 초단위로 일어나는 초대량 실업시대에 m세대는 다음세대에게 같은 질문을 듣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2


다영이 침대에 누운 자신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파란빛이 은은히 비치며 지현이 나타났다.


-뭘 하려는 거야?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그런 억지 부리지 마. 깨어나는 것과 지금이 뭐가 달라? 오히려 지금의 네게 구속도 한계도 덜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래도 이건 실제가 아니잖아?


-왜 실제가 아니야? 네게 주어진 그대로 니가 창조하는 그대로가 현실이고 실제인 거지.


-난 진짜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어, 오빠. 내가 그려내는 가상의 부모님이 아니라. 그리고 난 이제 막 대학생활을 앞두고 있었어. 이렇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현실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네가 의식만 바꾸면 무한한 자유가 여기 있어. 물리적 제한, 감각적 제한을 넘어선 자유가 있다고. 네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들이 널 구속하던 세계, 늙고 병들고 다치고 한계뿐이던 세계가 돌아갈 가치가 있는 세계라고 생각해?


-그래도 나의 진짜 모든 건 그 세계에 있어. 오빠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구속과 한계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의미를 안겨주던 세계가 그곳이야. 아니 이젠 여기지.


다영은 그리 말하며 자기 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지현은 안타까워하는 몸부림처럼 그런 다영을 향해 한 팔을 뻗었지만 끝내 그녀는 깨어났다.


-하악!


침대 위의 다영이 반쯤 상체를 일으키다 다시 누웠다. 다영 옆의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의 엄마가 놀라 일어섰다. 다영을 보며 얼굴을 기울여 안으며 소리쳤다.


-다영아! 다영아! 엄마야, 엄마. 깨어날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구.



23


-다영아! 학교 가야지. 얼른 일어나.


-엄마는 오늘 오전엔 강의 없단 말이야. 뭐 이렇게 일찍 깨워.


-오늘 금요일이야. 왜 오전엔 강의가 없어?


-뭐 오늘 목요일 아니었어? 


-얘가 어제를 두 번 살려고 하네. 얼른 일어나 밥부터 먹어. 이러다 늦는다.


다영은 이불을 잡아당기던 엄마와 실랑이를 하다가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인 걸 깨달았다. 어제 술을 과하게 마셔서 조금 부스스한 머릿결을 하고는 깨어난 다영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렇게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24


강의실에 앉아 여름과 다원과 수다를 떨고 있던 다영은 문득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 너머 구름 한줄기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이 순간 익숙하던 누군가가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금인데 너 오늘 또 약속 있다고 할 거지?


-얘 도대체 뭘 몰래 하고 있길래 맨날 약속이라면서 금요일마다 사라져?


여름이 금요일마다 약속이 있다는 다영이 못마땅해서 한마디 하자 다원도 거들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야. 금요일은 정말 시간이 없어. 미안해.



25


비둘기 한 마리가 산수유 열매 하나를 물고는 병원 옥상으로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날아 한 병실의 창가를 지나쳐 간다. 병실에는 한 남자가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있고 그 옆으로 다영이 앉아 있다. 


-오빠, 어제는 재원이에게 고백한다던 다원이가 계속 술만 마시는 거야. 그러더니 재원이한테 뭐라는 줄 알아? "야 너 왜 고백 안 해. 니가 이러니까 내가 고백하게 생겼잖아." 이러더라구. ㅎㅎ


다영은 언제나처럼 자기 일상을 의식 없는 지현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다영이 깨어나던 날, 다영은 의식을 차리고는 자기 옆 병실에 있다던 지현의 말이 떠올라 제일 먼저 찾아보았다. 그날 이후 매일 지현의 병실에 머물렀다. 그러다 퇴원한 이후에는 매주 금요일이면 지현을 찾아왔다. 


콤마 상태의 지현은 늘 무표정하고 말이 없었지만 가끔씩 다영이 돌아서 나가려 할 때면 바이탈 싸인이 급격하게 변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 다영은 지현의 문병을 빼먹을 수 없었다.


-오빠, 나 자주 오빠가 보고 싶고 가끔 오빠를 생각하면 미운 마음도 들었어. "왜 내가 깨어나려 할 때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말이야. 하지만 오빠 없는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그 심정을 알게 되는 것 같았어. 나도 오빠랑 너무 함께이고 싶어. 그러니까 오빠. 오빠가 내 곁으로 오면 안 될까? 나 너무 오빠가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다영은 지현의 손을 잡았다. 다시 놓지 않고 싶다는 심정으로. 지현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 포근함이 다영의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러다 다영은 병실을 떠났다.


창가 아래로 그녀가 다시 지현의 병실을 올려다보고 가는 것이 비친다. 창가엔 잠시 전 비둘기가 떨어뜨리고 간 산수유 열매가 놓여있었다. 


-하아아아!


지현이 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고 그의 감은 눈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