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영이 침대에 누운 자신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파란빛이 은은히 비치며 지현이 나타났다.


-뭘 하려는 거야?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그런 억지 부리지 마. 깨어나는 것과 지금이 뭐가 달라? 오히려 지금의 네게 구속도 한계도 덜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래도 이건 실제가 아니잖아?


-왜 실제가 아니야? 네게 주어진 그대로 니가 창조하는 그대로가 현실이고 실제인 거지.


-난 진짜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어, 오빠. 내가 그려내는 가상의 부모님이 아니라. 그리고 난 이제 막 대학생활을 앞두고 있었어. 이렇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현실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네가 의식만 바꾸면 무한한 자유가 여기 있어. 물리적 제한, 감각적 제한을 넘어선 자유가 있다고. 네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들이 널 구속하던 세계, 늙고 병들고 다치고 한계뿐이던 세계가 돌아갈 가치가 있는 세계라고 생각해?


-그래도 나의 진짜 모든 건 그 세계에 있어. 오빠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구속과 한계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의미를 안겨주던 세계가 그곳이야. 아니 이젠 여기지.


다영은 그리 말하며 자기 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지현은 안타까워하는 몸부림처럼 그런 다영을 향해 한 팔을 뻗었지만 끝내 그녀는 깨어났다.


-하악!


침대 위의 다영이 반쯤 상체를 일으키다 다시 누웠다. 다영 옆의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의 엄마가 놀라 일어섰다. 다영을 보며 얼굴을 기울여 안으며 소리쳤다.


-다영아! 다영아! 엄마야, 엄마. 깨어날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구.



23


-다영아! 학교 가야지. 얼른 일어나.


-엄마는 오늘 오전엔 강의 없단 말이야. 뭐 이렇게 일찍 깨워.


-오늘 금요일이야. 왜 오전엔 강의가 없어?


-뭐 오늘 목요일 아니었어? 


-얘가 어제를 두 번 살려고 하네. 얼른 일어나 밥부터 먹어. 이러다 늦는다.


다영은 이불을 잡아당기던 엄마와 실랑이를 하다가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인 걸 깨달았다. 어제 술을 과하게 마셔서 조금 부스스한 머릿결을 하고는 깨어난 다영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렇게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24


강의실에 앉아 여름과 다원과 수다를 떨고 있던 다영은 문득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 너머 구름 한줄기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이 순간 익숙하던 누군가가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금인데 너 오늘 또 약속 있다고 할 거지?


-얘 도대체 뭘 몰래 하고 있길래 맨날 약속이라면서 금요일마다 사라져?


여름이 금요일마다 약속이 있다는 다영이 못마땅해서 한마디 하자 다원도 거들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야. 금요일은 정말 시간이 없어. 미안해.



25


비둘기 한 마리가 산수유 열매 하나를 물고는 병원 옥상으로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날아 한 병실의 창가를 지나쳐 간다. 병실에는 한 남자가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있고 그 옆으로 다영이 앉아 있다. 


-오빠, 어제는 재원이에게 고백한다던 다원이가 계속 술만 마시는 거야. 그러더니 재원이한테 뭐라는 줄 알아? "야 너 왜 고백 안 해. 니가 이러니까 내가 고백하게 생겼잖아." 이러더라구. ㅎㅎ


다영은 언제나처럼 자기 일상을 의식 없는 지현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다영이 깨어나던 날, 다영은 의식을 차리고는 자기 옆 병실에 있다던 지현의 말이 떠올라 제일 먼저 찾아보았다. 그날 이후 매일 지현의 병실에 머물렀다. 그러다 퇴원한 이후에는 매주 금요일이면 지현을 찾아왔다. 


콤마 상태의 지현은 늘 무표정하고 말이 없었지만 가끔씩 다영이 돌아서 나가려 할 때면 바이탈 싸인이 급격하게 변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 다영은 지현의 문병을 빼먹을 수 없었다.


-오빠, 나 자주 오빠가 보고 싶고 가끔 오빠를 생각하면 미운 마음도 들었어. "왜 내가 깨어나려 할 때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말이야. 하지만 오빠 없는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그 심정을 알게 되는 것 같았어. 나도 오빠랑 너무 함께이고 싶어. 그러니까 오빠. 오빠가 내 곁으로 오면 안 될까? 나 너무 오빠가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다영은 지현의 손을 잡았다. 다시 놓지 않고 싶다는 심정으로. 지현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 포근함이 다영의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러다 다영은 병실을 떠났다.


창가 아래로 그녀가 다시 지현의 병실을 올려다보고 가는 것이 비친다. 창가엔 잠시 전 비둘기가 떨어뜨리고 간 산수유 열매가 놓여있었다. 


-하아아아!


지현이 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고 그의 감은 눈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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