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작년엔 회사와 담배와 연애를 끊(게되)었다. 올해는 절대 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혼술’을 끊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갑자기 바틀비가 생각난다… 이러다… 나… 생을 …?
나쁜 관계를 끊어내면 자연스럽게 좋은 관계가 생겨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쁜 관계들을 움켜 잡았던 내 안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끊어낸 것들 때문에 비어진 시간 동안에 그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술 없이, 마취 없이 생각하니까 힘들었다. 나 자신에게 자신이 없어지는 날이 많았다. 나쁜 관계와 좋은 관계 사이에는 디딤돌 처럼 나 자신과의 좋은 관계가 있었다. 비어있는 곳에 그런 것들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정말로는 나 자신을 돌볼 줄 몰랐구나 하는 걸 거듭거듭 알게 되는 날들였다.
쓰면서 끼어든 생각인데, 좀 웃긴 일이지만… 내년 나의 목표 중에 하나는 무선 청소기를 사는 것이다. (아…. 하지만 역시 혼자 사는 자취방에 무선 청소기란 사치품 같다. 과연 나는 살 수 있을까?ㅋㅋㅋ 부엌 칼과 무선 청소기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보겠다. 몇 년째 사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무선 청소기는 좀 농담이고, 아무튼 내년의 나의 목표는 *술을 마시지 않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좋은 관계. 좋은 관계. 물론 좋은 관계들은 지금도 있다. 하지만 중학교 동창들 빼곤 다 술 마시고 사귄 친구들이라서 ㅋㅋㅋ 술 안마시고/ 새로운 / 좋은 관계 ㅋㅋ
2022년 가장 잘한 것은 지옥(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열심히 일을 잘 해왔기 때문에 하반기 부터는 안정적인 거래처가 몇 군데 생겼다. 올해 중반 까지는 본업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아서, 부업으로 유튜브라도 하고 있어야 하나(한다고 될 거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잖아요?ㅋㅋㅋ 나 일도 불안한 데, 전업 유튜버되야하는 건가 한동안 되게 진심이었음ㅋㅋㅋ) 굉장히 고민을 했는 데, 결국 본업이 잘 풀리게 돼서 유튜브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생각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종종 취미로 하는 걸로. 얼굴도 까버렸어. 젠장.
원래 좀 더 느긋하게 읽고 쓰고 싶어서 퇴사를 했다. 사업 일케 어려운 건 지 몰랐. 아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안 폭격 때문에 유튜브 한다고 깝치지만 않았으면 올해가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ㅋㅋㅋㅋ 결론적으로 그 모든 것을 해봤다는데 의의를 둔다… 😂 다 미래의 나가 고마워 할 것이여. 어쨌든 회사마저 걷어차고 나온 단독자의 삶… 2년 차.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날은 고양이의 털온으로 대체하며, 외로워서 혼자 친 사고…들은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이불킥을 하며, (다행이 친구들이 나를 버리진 않아서🥲) 아직까진 잘 삽니다.
📚읽는 나로서는 달리다가 주저 앉은 것 같은 한 해
뭔가 좀 더 어려운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나의 독서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거저 먹으려고 해선 안되지. 글씨를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그걸 공부라고 하는 거고, 그걸 하는 직업이 따로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책 앞에서 겸손해졌어야했는 데 쓸데 없는 호승심이 들었다. 결과는 패배 패배 패배 😫 읽으려 드니 다른 읽고 싶은 것들만 자꾸 생겨나서 종래에는 모두 지침.
📚 쓰는 나로서는, 쓰는 자아가 생겼다.
어떤 글은 쓰고 나면 몸이 아팠다. 별로 안 보고 싶은 과거의 나들이 올라왔다. 어떤 날은 정말 지쳐서 일을 할 기력조차 사라졌다. 진지하게 읽고 쓰는 나를 포기할까? 자문해 봤다가 그걸 안 하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만든 여러 가지 페르소나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는 ‘알라딘 서재 하는 나’라는 걸 좀 알았다. 난 여기서 배운 페미니즘과 여기서 추천받은 책들 덕분에 온 사회가 없애라고 가스라이팅 하는 “질문하는 나”를 복구해낼 수 있었다. 질문하는 내가 있으면 혼자건 둘이건 여럿이건 상관없이 조금은 다르게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나를 심문하고 얻어낸 나의 세계관, 나만의 윤리를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을 세상은 작가라고 철학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이 곳에는 그런 여성들이 있었고, 그녀들이 난 좋았다. 그녀들을 닮고 싶어졌고, 배우고 싶었다. 아직 나의 세계관은 그들 처럼 견고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질문하는 나”를 뒤져서 찾아냈음에 감사하며… 조금 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참, 나 꽤 견고한 무신론자인데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는 사람이 알라딘에 많아져서 (흠…) 여전히 무신론자이지만 ㅋㅋㅋㅋ 뭐 기도 좋은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
📚 올해의 소설 :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특히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이 소설이 막장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다면 … 난, 당신이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 아니, 당신의 평안한 삶에 감사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난 1권 보다는 2권이, 2권 보다는 3권이 좋았는 데… 누구라도 이 소설을 3권까지 읽은 여성이라면, 긴박하게 이입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기본적으로 참혹하다. 특히 돈 없는 여자의 삶이란 조금만 헛발을 내디뎌도 긴박하게 참혹해질 수 밖에 없어진다. 하지만 가진 것이 있어도 여자라면 마찬가지다. 똑똑한 여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그 똑똑한 여자들이 모두 헛똑똑이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무슨 말이냐면, 삶은 불공평하게 어렵다. 어렵다는 것에서는 같다. 남자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은 명확한 여성서사다.
📚 올해의 에세이 :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이 책 속 문장들의 56% 정도는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입이 아니다. 이해다.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문장들.
“(22) 뉴욕(서울)에서의 친구 관계는 우울에 몰두하는 일과 표현하는 능력에 매혹되는 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내게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좀 더 높은 수준의 균형 상태에 도달하는 일.”
“(77) 내 주의력이 얼마나 끊임없이 갈가리 찢기는지, 그래서 내 내면의 명석함이 어떻게 나의 동반자였던 불안으로 알알이 굳어지는지, 나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을 돌아보았고, 내가 혼자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배운 것들은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고통이 지나갈 때 까지 누워 있고, 회피하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일이었다.”
“(193) 반응의 부재는 내 삶에서 하나의 존재로 변했다. 이 존재에서는 고립의 감각이 흘러나왔고, 그 감각은 점점 더 꾸준하게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그 스며듦에서 하나의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그 진공 상태 속에서 나는 외로움뿐 아니라 내가 단절되었음을, 피해야 할 인간 본연의 상태가 됐음을 느꼈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는 극심한 욕구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 생각해왔던 것보다 한층 더 즉각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나는 내면의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그 균형의 불안정함은 나를 놀라게 했다.”
올해의 나는 이런 감각들을 취하지 않은 채로 마주 보았고, 지금은 균형을 찾고 있다.
📚 올해의 인물 : 한나 아렌트
적어도 ‘2022년 올해’ 알라딘에 불었던 한나 아렌트 열풍의 시초는 저였다고 수줍게 고백해 봅니다. 훗. 앞으로 계속해서 공부할 생각이라 부연하지 않겠다. 참고로 작년에는 푸코였다.
📚 올해의 영화 : 헤어질 결심
정서경과 박찬욱이 잘못했음. 페미각성한 헤테로 중년 여성의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어버리는 로맨스라니. 그러나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다. ㅋㅋㅋ (응? 뭐래?) 덕분에 각성(?)해서 포기했던 이성애를 열심히 공부하게 해 주심ㅋㅋㅋㅋ “해준 씨처럼 바람직한 남자는 나랑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나를 울린 대사. 이성애와 계급. 섹스와 사랑. 품위와 외국인 여성 노동자. 무한하게 나를 찌를 수 있는 주제들이 엉켜 흐르는 영화이지만 가장 좋았던 건. 대사로 알라딘에서 놀면서 쳐댔던 말장난. 각본집을 괜히 산 게 아니라고.🤣
📚 올해의 책 : 거다 러너 <가부장제의 창조>
마르크스가 그런 말을 했다.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맞다. 그런데 괄호가 빠졌다. 모든 사회 역사는 (남성) 계급 투쟁의 역사다. 남성 지배 체제는 생산수단 뿐 아니라 ‘개념’과 ‘언어’를 독점하고 활용해서 여성을 체계적으로 ‘역사’로부터 배제시켜왔다. 계급/계층/신분으로 분화되어 자기들끼리의 투쟁을 해야 하는 남자들에게 여자는 전리품이고 트로피였을 뿐이다. 즉, 역사에 여자는 없었다. 원래. 이 책은 그 기원을 알려준다. 명확하다. 여성. 한 번도 각성한 적이 없는 최초의 노예계급.
맑스가 밝혀냈 듯 노동의 서열화(여기에는 자연화된 여성의 노동 + 성별 분업도 포함된다)는 자본주의의 원리고, 20세기 말… 자본주의는 승리했다. 지구는 이제 하나의 시장이 되었다. (중간에 사회주의의 도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잠깐 자본주의가 미쳐서 임금의 가부장제를 실현했다고 하는 데… 그건 식민지 착취의 경험이 있는 선진국들이나 하던 거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원래 아니었다. 그냥 그런 환상이 있다는 걸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식민지 남성성이 있었을 뿐.) 신자유주의… 걔가 플랫폼을 만났다. 이제 노동법은 무효화 되다 시피하고 자본가들은 생산 수단을 갖지도 않는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생산 수단이 없이 노동을 하는 여성 1인 사업가다. (생계형 엔잡러…) 여성의 노동은 부업으로 후려치는 가격을 부르는 한국 사회에서 내 존재 자체가 이 모든 분열의 총체이므로… 내가 올해 겪어낸 돌아버리겠슴을… 알라딘에 잘 써왔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고마운 신자유주의 덕분에 계급 투쟁은 성별을 따지지 않고 이루어지며 개념도 언어도 여자들이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걸 남자들이 모르는 것 같다.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도태남들은 일베 이번남이되고, 상층 계급 남자들은 여전히 트로피를 자랑하는 가운데(그들만의 계급 투쟁에 트로피 혐오를 끌어들이는 정치를 제발 멈추라고 말하고 싶지만)… 남자들의 계급투쟁이야 내 알바 아니고. 트로피 될 의향과 능력도 없는 여자 도태녀인 나는 돈을 벌 *수* 라도 있음에 감사하며…!!! 한 때 잠시 한국 사회에서 규범으로 작용했던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제는 정말로 능력자들의 것(일부 여성들에게는 자포자기)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다.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와 결혼해주지 않는다. 명확한. 명확하다. 난, 명확한 게 좋다.
덧붙임. 올해 나는 책 <포르노랜드>를 통해 남자들이 본다는 포르노를 찾아서 시청해 보았다. (한번 봐보세요) 전 세계의 15살 남자 청소년들이 평균적으로 1400편의 포르노를 보면서 사회화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 0편을 본다면 누군가는 2800편을 본다는 소리인데. 젊은 여자들의 “살아 남았다”라는 목소리를 챙겨들어야 겠다고 한번 더 생각한다. 여자들에게서 “좋은 남자 만날거야”나 “그만하면 좋은 남자지”라는 말을 20대 내내 들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신자유주의 바닥의 룰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요컨대 내가 나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능력’이 있다면 남자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그게 능력주의 담론에 편승하는 것이며 남성혐오인가? 그렇다면 나는 신자유주의자에 남성혐오자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