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가는 길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멜론 조각 같은 목소리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무르고 달콤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향기같은 것.

귀가 아니라 몸 안으로 퍼진다는 음악의 촉각을 떠올려본다. 시간을 유리병에 담을 수 있다면, 으로 시작하는 짐크로스의 음악을 들었을 때(그것은 엑스맨의 퀵실버 테마 쏭이다), 기타 선율이 몽글몽글하여 시간을 유리병 바깥에 맺혀 떨어지는 물방울처럼(애석하게도) 느낀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알맞은 순간에 내게 도달한 어떤 음악들은 언제나 공감각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아니었더라면, 음악을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아🤭, 이런게 소설이 주는 간접 경험이라는 건가. 간접 경험이라. 지금까지 난 그걸 그냥 국어 시간에 글로 배운(ㅋㅋ) 소설의 기능 같은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감정 이입은 할 수 있어도 간접 경험🤔? 종종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을 따라 ‘간접 모험’을 떠나기는 해도, 이 정도(!)의 수준에서 간접적으로 ‘경험(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본 소설은 정말인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마지막 결혼식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데, 식장에서 나오는 음악이 온몸에 퍼지는 것 같더라니까. 정작 그 음악이 뭔지도 모르면서...말이다. 뭐냐, 이게 정말로 레알루다가 잘 쓴 소설이 줄 수 있는 뭐 그런 쾌감인가? (버뜨, 막상 소설의 서사는 잘 따라가지 못함)


해가 떠 있을 때 더 멀리 퍼진다는 커피 냄새를, 전차에서도 건물의 오층에서도 열려있는 창문만 있다면 함께 맡아볼 수 있는 갓 구운 빵의 냄새를.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읽었는 데. 


“(33)눈이 먼 상태는 영화와 비슷하다. 눈이 코 위에 양쪽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이끄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읽었을 뿐인데, 정작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플레이되는 미각, 청각, 촉각, 후각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것은 시각. 신기하다. 문자로 이루어진 그것들을 모두 느꼈지만 왜 ‘본 것’만 같았던 것일까. 재밌는 것은 이것들을 ‘보여’주는 소설 속 ‘나’는 파랑색과 흰색이 섞인 근사한 넥타이를 한 맹인이었다는 거고. 더 재밌는 것은 이 소설을 쓴 ‘존 버거’를 나는 그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는 미술 비평으로 만났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논픽션도 인상적이었는 데, 와. 픽션으로 다른 방식을 ‘보여줘’버리다니. 존 버거 천재네.

“(11) 렘베티카에 맞춰 춤을 출 때면 음악이 만들어내는 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음악의 리듬은 울타리가 있는 동그란 우리가 된다. 거기서 당신은 한때 그 노래를 살았던 남자 혹은 여자를 앞에 두고 춤을 춘다. 춤을 통해 당신은 음악이 뿜어내는 그들의 슬픔에 경의를 표한다. ”


보이지 않는 화자를 내세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도록 썼다. 음악이 들렸고, 아니 보였고, 냄새를 맡았고, 아니 보았고…, 그리고 나는 이 길지 않은 소설을 읽으면서 아주 아주 새삼스럽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더란다.

“(18)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 -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2022년 소설왕(두둥-)을 목표로 하는 내게 <결혼식 가는 길>을 통해 만난 소설 읽기의 경험은 퍽 특별했다. 이만하면 순조로운 출발이다. 뭐,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다음에 읽을 책은 필립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이고, 그 다음으로 카슨 매컬러스 <결혼식 멤버>를 빼뒀다. 어쩌다보니 1월에는 결혼들과 함께할 예정인데 절대 결혼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님🙄 


참. 나의 라스콜니코프는 방금 막 도끼로 할머니를 내려친 참이다. 녀석 이번에는 좀 죄도 뉘우치고 그래야할텐데… 내 라스콜니코프는 언제나 살인만 하고 봉인된단 말이지…ㅋㅋㅋㅋ 내일은 밖에 안나가고 방바닥에 딱 붙어서 <죄와 벌>부터 조져야지.


댓글(28)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01-14 07: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소설왕 공쟝쟝님도 추천하는 이 책 완전 재미있을거 같아요~!! 천재 존 버거라니 ㅋ 작가 이름이 별로(?)여서 관심이 없었는데 ㅎㅎ
주말은 <죄와 벌>과 함께 정신분석학 세계에 빠지시겠군요^^

공쟝쟝 2022-01-14 08:10   좋아요 3 | URL
소설왕 새파랑님께 ㅋㅋㅋ 소설왕이라니 송구송구하외다 ㅋㅋㅋ 새파랑 왕이시여 제발 제가 딴 데로 안새고 도끼옹 전집 산 보람을 느끼게 해주소서!

새파랑 2022-01-14 08:24   좋아요 2 | URL
감히 저같은 놈이 어찌 소설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도끼옹 전집 보람 확신합니다~!! 집에서 못나가실듯 ㅋ

공쟝쟝 2022-01-14 08:29   좋아요 2 | URL
왕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작년 결산 페이퍼에서 끝없이 스크롤이 밀려나던 그 충격을 잊을 수 없읍니다...ㅋㅋㅋㅋㅋㅋㅋ 심지어 일하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단해 ㅋㅋㅋㅋㅋㅋㅋㅋ 짝짝짝ㅋㅋㅋㅋㅋ

물감 2022-01-14 07: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니까 음청 재밌다는 거죠?
아.. 갑자기 버거킹 땡기는데 왜죠?
쟝쟝님 정답을 알려줭ㅋㅋ

공쟝쟝 2022-01-14 08:13   좋아요 3 | URL
세상엔 많은 버거들이있고 버거의 왕은 역시 버거킹 아니겠숩니까? ㅋㅋㅋㅋ
전 아름답게 읽었어요! 재밌는 책은 아님 ㅋㅋㅋㅋ 다락방님은 딱 보면 척이던데 물감님 취향에 맞으실진 전혀 모르겠어욬ㅋㅋㅋ 감도 안오네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1-14 08: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뻐서 빌렸다가 ㅋㅋㅋㅋ 시작도 못하고 반납했던 책인데요. 돌아봐야겠어요. 소설 읽는 쟝쟝님이라니!! 소설까지!! 욕심쟁이~~~

공쟝쟝 2022-01-14 08:16   좋아요 2 | URL
알라딘의 골드문트님의 추천작이고 얇고 이뻐서 저도 빌렸답니다! 소설이 직선적으로 쭉 씌어있지는 않아요. 호흡 놓쳤으면 완독 못했을 듯? 근데 문장들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댓글 적으면서 쭉 순서대로 쓰였으면 어땠을까? 했는데 완전 별 내용없는 소설 이 됐겠네요. 뭔가 교차편집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음 ㅋㅋ

다락방 2022-01-14 08: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후훗. 저는 이거 좋다는 소문에 오만년전에 중고로 구매해놨지요. 구판을... 안읽고 꽂아두고만 있었는데 개정판 나와서 갈등..(하지마!)

너무 좋다. 쟝님 진짜 소설 잘 읽는 사람이라니까. 존 버거 다른 책을 좋게 읽긴 했지만 내가 이 책을 읽는다면 쟝님처럼 훌륭하게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세상에 읽을 책 너무 많아서 싫고 좋다.
아니 라스꼴리니코프 도.. 다시 읽고 싶네요. 이것도 책이 있지롱내가. 열린책들과 문동으로... 내가 없는 건 뭐냐.........

공쟝쟝 2022-01-14 09:16   좋아요 1 | URL
시대의 명저 독서공감에서 저토록 소설예찬을 하신 분께 훌륭한 소설 독자라는 이야기를 듣다니…. 영광이다…💕 은혜받았사오니 오늘은 진짜 부지런히 죄와벌 하겠사와요😆

책읽는나무 2022-01-14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가 봐도 공쟝님은 소설 매니아감!!!
감성이 소설과 에세이 감성!!^^
리뷰 몇 편 읽었을 때 공쟝님 쵸코 브라우니 같은 사람!!!!!
(아...갑자기 먹고 싶네??^^)
근데 뇌과학도 읽고...다재다능 재주꾼이셔요^^
나는 문,이과 다 왔다,갔다가 가능한 사람을 존경하고 있어요!!!!ㅋㅋㅋ

공쟝쟝 2022-01-14 11:24   좋아요 2 | URL
초코 브라우니 라니 고런 달달한 것이 저랑 어울린단 말인가요? 그럼 카카오 99.8% 브라우니로다가 ㅋㅋㅋ 👊👊👊 저는 이제 구구단도 헤깔리는 문과생입니다…. 나눗셈을 어떻게 하는지 잃어버렸어…

mini74 2022-01-14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분 초상들 이라고 예술이론 책으로 첨 알게됐어요. 소설도 쓰셨군요. ~~ 공감각적 소설이라니 ~ 저도 찜 해봅니다 ~

공쟝쟝 2022-01-15 01:01   좋아요 3 | URL
ㅋㅋㅋ 저도 다른 책들 더 좋은 거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버거 찜!해뒀어요.

그레이스 2022-01-14 18: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존 버거 소설 특이한데 잘 쓴다는 생각입니다. 몇페이지 안읽었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구요

공쟝쟝 2022-01-15 01:02   좋아요 3 | URL
몇 페이지만에 그레이스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버린. 존 버거버거버거버거버거!_! 아직까지는 올해의 발견! 이네요?!ㅋㅋㅋ

mini74 2022-02-10 17: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만큼 댓글도 재미있는 쟝쟝님 글 ㅎㅎ 축하드립니다 *^^*

그레이스 2022-02-10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2-02-10 18: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축하드립니다!

가필드 2022-02-10 18: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일고싶어지게 쓰셔요 ^^ 공쟝쟝님 추카드립니다 💐

이하라 2022-02-10 18: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2-02-10 22: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독서괭 2022-02-10 2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엇 쟝쟝님 저 이 글 못 봤었네요. 존 버거 이 책 좋다고 많이 들어는 봤는데.. 여러 감각으로 느끼게 쓴 소설이라니 궁금해지네요. 근데 결혼시리즈는 다 읽어가시나요? ㅋㅋ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지난 여수세자매 유튜브에서 가져간다고 하셨는데 다 보셨나요? 그때 엄마가 이거 보면 ˝차라리 결혼하지 마라˝ 할 것 같아 가져왔다 하셔서 빵 터졌었는데요 ㅋㅋ
암튼 당선 축하드립니다^^

공쟝쟝 2022-02-13 15: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아!! 그 책 (안읽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집에서 아무리 펼치고 있어도 제가 뭐 읽는지 궁금해하지 않으시더라고요? ㅋㅋㅋㅋ 대신 엄마가 자꾸 시집가 공격해서 목욕탕가서 동네 아줌마들 혼내고 왔어요!! 아줌마, 아줌마가 자꾸 저 시집가라고 그러세요? ㅋㅋㅋㅋ 당선~ 축하 감사드립니다!

scott 2022-02-10 2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쟝님은 분명 멜론 조각 같은 목소리로 홈즈를 부르 실것 같습니다

장쟝님 여수 밤바다 공기 잔뜩!
이달의 당선 축! ՞•・•՞🐾

공쟝쟝 2022-02-13 15:19   좋아요 1 | URL
홉스야.... 크크 아이거 🐾 냥이 발바닥 어뜨케하는 건지 궁금해요. (일단 복붙해본다) ㅋㅋㅋ 여수에서 돌아왔습니다. 스콧님 잘 지내셨쥬?

러블리땡 2022-02-11 00: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공쟝쟝님 닉 보자마자 여수 생각났는데 ㅎㅎㅎ 위에 scott님이 쓰셨네요 ㅎㅎ

공쟝쟝 2022-02-13 15:20   좋아요 0 | URL
어쩌다보니 여수 대표가 되었습니다. ㅋㅋㅋ 헤헷 럽땡님 귀여운 프사로 바뀌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