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주는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 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양귀자 <모순>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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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7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8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0-07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붉은 신호등에 비유한 구절이 멋집니다. 저도 언젠가 그 신호등을 만나고 싶습니다.^^

잉크냄새 2007-10-08 13:0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엘신님.
서재곳곳에서 자주 뵈었는데. 전 붉은 신호등 비유도 좋지만 굵게 칠한 서술형 부분이 더 맘에 들더군요. 걸음을 멈추고 한없이 빙빙 도는 모습에 고마워하잖아요.ㅎㅎ

2007-10-08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8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짱 2007-10-2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지 마음이 아파오는 글이네요..

잉크냄새 2007-10-23 12:44   좋아요 0 | URL
네,아마 저런 식의 사랑은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저런 사랑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망각의 저편에 있던 기억 한조각이 불현듯 다가오는 때가 있다. 그것이 잊지못할 추억이라는 이름이라도 품고 있다면 그려러니 하겠지만 전혀 쌩뚱맞은 기억이라면 그 기억 자체가 궁금해지곤 한다. 도대체 발자국 한걸음도 찍지 않은, 손길 한번 쓰다듬지 않은 장소가 이토록 강렬하게 떠오르다니. 수구지심이란 사자성어에 홀린듯 차를 끌고 다녀온 곳은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다.



<그림 출처 : 네이버 블로그-치앙마이님  >

사실 배다리 골목은 한치의 기억도 없던 곳은 아니다. 대학을 버스로 등하교하던 시절, 동인천을 휘감듯 돌아다니던 41번 버스의 창밖으로 골목 언저리가 잠시 스치듯 보이던 곳이었고, 배다리의 '배'자가 주는 인상은 어촌 출신인 나에게 향수처럼 스며들곤 하여 그곳을 지나며 배다리 표지판이 보이면 나도 몰래 "배~~"하고 길게 읊조리고 하였다. 그렇게 잦아들던 기억이 알라딘에서 인천과 헌책방에 인연이 깊으신 된장님과 파란여우님의 페이퍼를 통하여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내가 가진 기억외에 <아벨서점>으로 대표되는 헌책방의 기억이 더하여진 것이다. 더하여진 것이 아니라 헌책방의 기억은 내 기억위에 무의식적으로 각색된 것이다.

 

<그림 출처 : 네이버 블로그-치앙마이님>

고즈넉하고 적막했다. 아벨서점을 필두로 한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의 헌책방만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원래의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산업화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풍경인지는 알수 없었다. 어쩌면 아벨서점에 붙어있던 산업도로 관련 글들이 주는 이미지와 다른 기억속의 배다리에 얹혀진 각색된 또 다른 기억의 과장 때문일지도 모른다. 골목 이곳저곳을 한참을 걷다 아벨서점으로 향하였다. 오래된 책과 자그만한 공간이 풍기는 향기속에서 2시간여를 서성거렸다. 삼십여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곳 서점 이 자리에서 누군가 또 그렇게 서성거렸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장 그르니에의 <섬><까뮈를 추억함>를 들고 돌아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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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0-04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헌책방의 기억은 동대문일대와 서울역에서 조금 내려오면 있었던 고래서점이 전부인데. 인천에는 왠지모를 고풍스런 헌책방이 존재하는군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10-0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저 아벨서점이 주인아저씨가 무지 사람 좋으시다는 그 헌책방인가요?
친구가 싸이에서 헌책방 모임에 나가는데,
인천에 있는 한 헌책방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가면 대접을 너무 잘 받아서,
이집이 이러다가 망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면서요. :)

잉크냄새 2007-10-0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차장님 / 된장님의 서재에 가시면 헌책방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들을 볼수 있습니다.

마음님 / 땡!!! 아벨서점 주인은 아저씨가 아니고 아줌마입니다.^^ 마음님이 말씀하시는 분의 이야기도 된장님 페이퍼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나네요.

겨울 2007-10-0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곳 주변의 헌책방들은 거의 창고나 책들의 무덤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작년에 작심하고 찾아갔다가 허탈해서 돌아왔는데, 불현듯 다시 찾고 싶네요.

잉크냄새 2007-10-05 13:25   좋아요 0 | URL
전 고등학교때 참고서를 헌책방에서 산 이후 처음 가보았어요. 다른 분의 기억에 동화되어 찾아가본 곳이랍니다.

icaru 2007-10-0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배다리...
전, '배바지'로 읽었네요.
배바지와 잉과장님과 얽힌 사연 좀 들어보자고! 왔네요.

근데근데...찌찌뽕야~ 저도 최근에 카뮈를 추억하며.. 를 샀고만요~
두번쨰 사진에 커피 자판기가 무지 인상적이네요. *.*

가시장미 2007-10-0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오래된 서점이네요. 갑자기 잉크님의 연륜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ㅋㅋ
생각해보니, 전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책과의 인연이 깊었던 것 같지는 않네요. 생각나는 서점 한 곳이 없는 것을 보니.. -_-

영화 속에 한 장면을 장식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풍경이네요..

잉크냄새 2007-10-07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아쉽게도 배바지에 대한 추억은 없네요. 서점에 장 그르니에의 전집이 있던데, 나중에 가면 한권 두권 사보려고요.^^

장미님 / 가끔 저런 고풍스런 거리를 걷다보면 흘러간 시대의 어디쯤을 걷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춤추는인생. 2007-10-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저도 이페이퍼 보고 헌책방에 다녀왔답니다. 이곳에 이사온지 얼마 안된터라.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다녀왔는데. 새책못지않게 깨끗한책은 좋았지만. 대형서점분위기라 아쉬웠어요 저한테 헌책방은 그런곳이예요. 가게라고 하기보다는 `전방`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곳에 등이 구부러지신 할머니한분이 늘 물속에 푹 담근 마늘을 까고 계셨고 손톱이 까만 그손으로 500원 거스름돈을 남겨주시던... 스물한살에 마지막으로 가보고 다녀오지 못했으니. 할머님도 잘 지내셨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잉크냄새 2007-10-11 12:46   좋아요 0 | URL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장소가 있나봅니다. 전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뭐랄까요 아주 오래전에 다녀온, 그래서 내 추억이 조금이라도 묻어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아는 한 팀장은 잘 생긴 외모와 호탕한 기질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노는 것도 무지하게 좋아하여 회사에서 워크샾을 가면 팀원들을 이끌고 나이트에 부킹을 하러 다니곤 한다. 그러던 팀장이 어느날부터 나이트 부킹을 끊더라. 남자의 변신은 무죄이던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최근에 알아낸 결정적 사건은 이러이러했다.

어느날, 모팀장은 워크샾 종료후 예전과 같이 팀원들을 이끌고 모시내 나이트 클럽으로 직행했다. 역시나 출중한 외모와 능수능란한 솜씨로 부킹에 성공하였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좌중의 부킹녀들에게 한마디 했단다.

모팀장 : (느끼하게) 아, 사모님들...어찌하여 가정을 버리고 방황하시나이까?

사모님 A : (기쁨에 겨워) 아, 제 남편이 워크샾 갔거든요.  

모팀장 : ..................... ☎

그날 이후로 워크샾후 나이트 부킹의 신화는 저물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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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9-0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하하...인과응보..사필귀정..!!

비로그인 2007-09-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웃었어요 잉크냄새님 :)

고맙습니다. 진짜
덥석 손이라도 잡고 싶네요.....

마늘빵 2007-09-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하하하. 근데 딴소리지만 저도 부킹이란거 한번 해보고 싶군요. -_- 아직까지 나이트를...

2007-09-06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6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7-09-0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차장님/체셔냥/아프님/정아무개님 / 저도 며칠전 출장가다 들은 이야기인데, 저 타이밍이 어찌나 절묘하던지요. 왜 썼냐면 그냥 웃지요.^^

마노아 2007-09-0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찐한 여운을 주는 일화군요^^ㅋㅋ

은비뫼 2007-09-06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핫. 재미있어요. 인과응보 제대로군요. :)

잉크냄새 2007-09-0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은비뫼님 / 제대로 된 인과응보 펀치를 맞으면 정신차리나 봅니다.

춤추는인생. 2007-09-1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제대로 펀치맞은 팀장님 얼굴한번 보고싶네요ㅎㅎ 근데 써놓으신 대화내용이 너무 리얼해서. 자꾸 잉과장님이 팀장님이 아니실까. 의심되는걸요?ㅎㅎ

가시장미 2007-09-1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근데, 생각보다 순진한 분이시네요. 보통 사람은 저런 말에 눈하나 깜짝 안 하지 않을까요? 아내분을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건가? 아니면, 가정을 지키고 싶어서? 으흐

잉크냄새 2007-09-1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인생님 / 어허,어찌 그리 엄한 생각을 하시나이까.^^
장미님 / 의외로 밖에서 대범한 분들이 안에 들어가면 얌전해지나봐요.

icaru 2007-09-1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화 이모티콘 마저도 우껴요.

가시장미 2007-09-1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갑자기 궁금하네요. 잉크님도 결혼을 하셨는지요? ^^

잉크냄새 2007-09-19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오랫만이네요. 웃겨드릴테니 자주 오세요.ㅎㅎ
장미님 / 전 결혼이랑 인연이 없어서요.....

가시장미 2007-09-20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요? 저랑 비슷하시네요 ㅋㅋㅋㅋ 전 독신주의자예요!!!! -_-a (당분간!ㅋㅋ)

잉크냄새 2007-09-20 12:29   좋아요 0 | URL
바람이 불면 부는데로...인연이 없으면 없는데로...ㅎㅎ

2007-09-21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3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1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3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짱 2007-10-22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베푼 만큼 받는군요... 삶은 왜 이런 건지.. 사람이 그런 건지..

잉크냄새 2007-10-23 12:46   좋아요 0 | URL
음, 사필귀정이죠.
삶도, 사람도 사필귀정이죠.
 

식당食堂에 딸린 방房 한 칸

김중식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 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할 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앞인데
거기보다도 우리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 배달을 나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 타는 아가씨는 명순씨氏
홍등紅燈 유리방房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은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소풍 갈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에다
쌍꺼풀 수술 자국이 터진 만두 같은 명순씨氏가 지저귀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식당食堂에 딸린 방房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 못 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강원연탄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 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가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날 보고는 뒤돌아서서 내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대학씩이나 나온 녀석이 놀구 먹구 있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공장에서 날아오는 연탄 가루 때문에 우리집 빨래가
햇빛 한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말려진다는 걸
모르고, 놀구 먹기 때문에 내 살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 하고 싸울 일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
절정은 아니고 없는 적敵을 만들어 창槍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들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번 없는 안동김가安東金哥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공원公園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 지인知人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서 묻혀 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고까지만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며 화물 트럭과 맞부딪치면
여자처럼 드러눕는 기관차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걷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서해西海가 있고
더 멀리 가면 중국中國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인도印度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

홍등가
- 대학을 버스로 등하교한 내가 항상 지나가는 길이 홍등가 앞이었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자 두명이 어깨를 겹치고 걸어들어가야 하는 너비의 골목길이 비스듬히 바라보이는 곳에 버스가 정차하곤 했다. 번호판이 어깨동무하듯 겹치어 보이고 가끔 하얀 반바지 차림의 여자들이 바로 옆 약국으로 들락날락거리는 모습이 눈에 띌뿐 알수없던 묘한 붉은 기운을 품던 그곳은 늘 적막했다. 

강원 연탄
- 홍등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강원 연탄, 화창한 날에도 늘 우중충한 기분이 들던 그곳은 강원도 태생인 내게 묘한 편안함을 주곤 했다. 타지 생활이 처음인 나에게 일종의 위안을 주었다고 할까. 늘 날아드는 검댕으로 차창을 꼭꼭 달아걸던 인천 사람들과 달리 난 늘 그 검댕의 냄새를 느끼곤 했다.

화물 철로
- 시인이 말한 큰 길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철로가 있었다. "땡~땡~" 경적을 울린다. 나처럼 홍등가의 여인들도 멍하니 그 화물기차를 바라보았을까. 언젠가 술이 취해 그 길을 걸어 집까지 돌아왔다. 새벽녘, 4시간의 기찻길 도보 여행.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무엇인가를 시인처럼 나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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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3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되게 슬프고 살풍경한 시네요. 그게 현실이긴 하지만요.

플레져 2007-08-3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없이 말없이 추천누르오리다...

겨울 2007-08-3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 보니 방 한 칸에 대한 기억이 은근히 많네요.
그리운 추억도 뭣도 아닌 쓰디 쓴.

파란잉크 퍼럴럭 여우 2007-08-3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의 저 거리에 41번, 6번, 3번, 10번, 27번 버스가 다녔지요.
탈색되어 허옇게 바탕색이 드러나는 로타리 작은 분수대 얘기는 왜 뺐어요?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뻗치는 날엔 그나마 개안(開眼)이 될 지경이었지요.
당신이 41번을 타고 다녔던 로타리 근방은 지금 대형갈비집이 성황중입니다.
갈비 맛있어요. 친절하고요. -모냐, 시 야그는 쏙 빼고 갈비타령만!-

가*동은 아파트 밀림으로 변했고, 용*동도 재개발로 싹 변했다우. 알긴 알우?

잉크냄새 2007-08-3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냥 / 그의 절망적인 서술이 학창시절 지나다니던 기억속의 로타리 근처 풍경을 너무나도 절절하게 그리고 있기에 몇자 적어 봤습니다.

플레져님 / 말하고 가세요. 플레져님이 올리시던 시집 리뷰들이 생각나네요.

우몽님 / 아, 저도 어린시절 재개발로 집이 철거되고 다음해 봄까지 임시가옥 단칸방에 살던 기억이 납니다. 님 말씀처럼 쓰디 쓴 것이 어디 고개를 내밀고...

여우님인걸 알아요 / 제가 4년동안 타고 다닌 버스가 41번이죠. 거북시장부터 독쟁이고개까지의 40여분 거리. 인천 시내를 휘돌아 다니던 버스를 탄 덕에 버스 창가에서 인천 시내 구석구석을 참 많이도 보았답니다.
로타리 분수대 이야기를 뺀 것은 홍등가 주변의 적막한 기운과는 달리 로타리 우측의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가 왠지 조화롭지 못하다는 기분이 들어서입니다.
아파트 밀림, 재개발...그 지역으로 가본지 1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라 알리가 없지요.ㅎㅎ

라로 2007-08-3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네요,,,
제목은 참 아련하기까지,,,,

2007-09-01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비뫼 2007-09-01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시를 쓰는 이들이 참 부럽네요.
눈물겹습니다.

프레이야 2007-09-0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동네에 쓰러져가는 홍등가 집들이 나란히 있는 골목길이 있었고
철로가 가로로 길게 뻗어 기차소리 덜커덩거리던 기억이 살아있어요.
철로엔 툭하면 사고로 사람이 죽기도 하고 홍등가를 지날때면 붉고 야사시한 불빛이
어른거렸어요. 그 앞에 의자를 내어놓고 앉아있는 여자의 붉은입술 드러난 허벅지..
기차길 옆 단칸방에 사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아이 집에 놀러가면... 기적소리
가까워지고 곧이어 집이 통째로 흔들거렸어요. 귀를 찢는 것 같은 소리에 귀가 먹먹
했지만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지요. 눈물나는 풍경들, 생활의 풍경입니다.
그친구는 지금 어디서 살고있는지..
잉크냄새님, 9월입니다. 바람이 시원해요^^

가시장미 2007-09-03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의 가혹함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에 어떤 상황에 처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쉽게 비난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되었더라도, 나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자신하지 않은 것은 아니죠.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때로는 위안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가진 짐이 작다고 해서, 누군가가 등 뒤에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해서 그것이 나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때로는 그들에게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을 느껴왔다는 것. 생각해보니 조금 부끄럽네요. 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인간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깊이 생각하면.. 모두 다.. 부끄러우니...이거 원..

한 주가 시작되었네요. 출근 잘 하셨죠? 주말에는 감수성이 막 풍부해지더니, 출근을 하니 다시 정신이 번쩍드네요. 으흐 좋은 한 주 되시길! ^-^

잉크냄새 2007-09-0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님 / 네, 저도 삶을 빙 둘러가는 시보다는 아프더라고 콕 찍어 이야기하는 시들이 좋더군요.

속삭님 / 외면은 눈을 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겁니다. 애틋한 가슴과 눈이 없는것이 외면이 아닌가 싶군요.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조심스럽게 헤아리는 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은비뫼님 / 그러게요. 이렇게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 가슴의 웅어리를 풀어내는 것도,,,시인의 눈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혜경님 / 눈물나고, 서글프고, 외면하고 싶던 풍경들,,,그러나 삶에서 한발짝 비켜나 바라볼수 없는, 그 속에 온전히 녹아들어야 보이는 삶의 풍경들인가 봅니다.

장미님 / 남의 슬픔에 기대어 눈물 한방울 찔끔 흘리는 카타르시스, 하지만 그 속에는 내 슬픔이 아니라는 약간의 안도감도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도 삶의 한 부분이지요. 다만 그 슬픔을 좀더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수 있는 가슴을 잃지 않는것, 그것이 우리의 최소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시장미 2007-09-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댓글이..... 너무 멋지삼! ㅠ_ㅠ

잉크냄새 2007-09-07 12:54   좋아요 0 | URL
장미님 / 댓글이...너무 띄우주삼!ㅠ_ㅠ
 

문득

-정호승-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

기억을 실핏줄처럼 감싸고 돌던 전화번호가 잊혀지고
기억을 대신하던 손의 감각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문득 잊혀지는 것들 하나 살며시 추억해보는 것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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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7-08-2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혀진다는 거.. 어떤 사실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요. 요즘요...
그 감정과 기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을 때, 느끼는 그 허무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드래요.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간사하고, 내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문득 문득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바보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깐요. ^-^;

잉크냄새 2007-08-2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더듬고 간 흔적과 향기로 오후내내 행복한 시간이 되었네요.

가시장미님 / 사람이 미치지 않고 살아갈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망각일 겁니다. 과거를 잊음으로써 미래로 나아갈수 있으니까요. 과거를 망각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미래를 망각하게 될겁니다. 그래도, 어느날 문득 슬며시 꺼내볼 추억 한자락 망각의 샘에서 건져올리는 것도 삶이겠지요.

2007-08-29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07-08-2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문득이란 말을 좋아해요,,,,그래서 가끔 문제일때가 있지만서도,,,

잉크냄새 2007-08-3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님 / 문득 떠오른다는건 기억 저편에 살아있다는 뜻일겁니다.

춤인생님 / "우리네 인생일까요" 라고 구태여 묻지 않으시더라도 쓰신 글속에 조금씩 한걸음씩 나아가는 님 삶의 모습이 보이네요. 그 어떤날의 말할수 없는 허전함, 또한 희미해지고 잊혀져가지요. 먼 훗날 문득 돌아보면 그저 쓴웃음 한번 지울수 있는 추억이면 족한거고요.

프레이야 2007-08-30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며칠 자꾸 추억을 곱씹어보게 되네요.
이게 다 가을바람 탓이에요^^

2007-08-30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7-08-3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은 어쩜.. 이리도 멋진 말만 골라서 하시나요? 댓글도 예술이시네요!!! +_+
너무 멋지신거 아니세요? 잉~~

잉크냄새 2007-08-3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올 가을은 산뜻하게 다가오지 않나 봅니다. 이리 우중충한 날이 계속되니...

속삭님 / 음,,,용기...삶이든 사랑이든 가장 큰 미덕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어디 전화기 붙잡고 여기저기 흐르는데로 때려볼까요?ㅎㅎ

장미님 / 이런 과찬의 말씀을...ㅎㅎ 그냥 가끔 느끼는 일상의 말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