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나는 그다지 행복한 아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찢어지게 가난해서도 아니었고, 공부를 못해서 비관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단 부모님이 자주 다투셨다.
다툰다는 것은 쌍방의 기세가 대등할 때의 이야기니까, 보다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어린 자식들 눈에는 경제권을 거머쥔 힘 있는 아버지 단독의 횡포와 폭언으로 보였다. 그러나 우리 엄마가 일방적으로 아빠한테 당하셨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상대의 말을 눙치고 무시하여 상대의 혈압이 상승하도록 하는 말하기 방식이 아빠에게 대항하는 엄마의 무기였다 할까. 엄마가 아빠보다 소리없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는 지점 또 하나는 엄마는 아빠의 모진 언어 폭력에도 한번도 우리에게 죽고 싶다거나, 살고 싶지가 않다 라거나 우시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부모님은 방학이 되면, 우리들 중, 둘 정도는 친척집으로 보내셨다. 외가 아니면 친가이다. 외가는 서울이었고, 친가는 태안이었다. 엄마는 형제가 딱 남매이다. 그래서 외가라고 하면, 엄마의 남동생인 외삼촌 가족과 외할머니가 살고 계신 곳이다. 외가에 가면 방학 동안 두서너 벌의 예쁜 원피스와 그에 깔맞춤한 머리끈, 방울 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오죽했으면, 우리들이 갖고 있는 옷중에 괜찮은 옷은 여름옷과 겨울옷밖에 없다 할 정도. )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이나 63빌딩, 남산 타워 등속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관광지에 갈 수 있는 문화 충격이자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의 수준이 달랐다.
친가는 할머니가 큰아버지식구들과 사셨다. 큰아버지와 큰엄마 모두 일을 다니셔서,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 먹고, 화투치러 오시는 할머니 친구분들 틈에서 놀며 지냈다. 재미라면,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면, 사촌들과 학교앞 문방구로 달려가던 일. 거기서 파는 색소가 많이 들어가 알록달록한의 군것질거리를 사먹거나, 종이 딱지를 사거나 하는 일.
할머니는 카리스마가 있으신 분이었다. 할머니보다 더 연배이거나 더 나이가 적거나를 막론하고 동네 할머니들이 모두 우리 할머니에게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가끔 거친 욕도 하시고, 우리에게 막걸리 받아오라는 술심부름도 자주 시키셨지만, 우리에게 제철 과일이며 꼬막이며 맛있는 것 먼저 먹이시려 하셨던 할머니에게는 무섭기는 하지만 따르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런 할머니가 이 세상의 모든 한과 설움을 다 짊어진 자처럼 보일 때가 있었는데, 막걸리를 드시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목소리도 한껏 허스키해져서는 목을 놓아 우셨다. 살아서 무엇하냐, 죽고 싶다, 같은 말들을 하시며 우시면, 곁에서 같이 울었다. 막걸리 한방울 안 마시고도 할머니의 낮고 긴~~~울음에 스며들었다.
조금 커서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슬하에 5남 2녀를 두셨다. 나는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삼형제만 봤지만 말이다. 집에서 집안의 기대주처럼 가장 촉망받던 막내 삼촌이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서른 살 미혼의 둘째형(우리아버지)가 근무처인 서울로 데리고 와서 학교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삼촌이 중학교 3학년 때 연탄 가스를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이듬해 아버지 바로 아래 삼촌이 월남전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고, 사회 부적응기를 거치다가 알콜 중독이 원인이 되어 비명횡사하셨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의 '사는 게 싫어진다'는 말엔 가슴이 철렁한다. 그가 느끼는 불행을 내가 조장하지는 않았던가 시키지 않았는데 살피게 된다.
여자로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보니, 어릴 적 비교적 가까이에서 보아왔던 여성들(양쪽 할머니, 엄마와 또 외숙모)의 삶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다시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