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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289-300쪽
아주 어릴 때부터, 아마도 대여섯 살때부터 나는 내가 커서 작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스물네 살 때까지는 그 생각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게 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며 조만간 차분히 앉아 책 쓰는 일을 해야 하리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외로운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이야기를 지어내고 상상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갖게 됐는데, 애초부터 나의 문학적 야심은 고립됐고 과소평가됐다는 느낌이 뒤섞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에게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나날이 겪는 실패를 앙갚음할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통틀어 써낸 심각한 글은 대여섯 페이지밖에 되지 않았다. ...학교 잡지들은 더없이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이었고, 지금으로 치면 제일 싸구려 저널리즘에 들일 수고보다 훨씬 공을 덜 들이고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과 더불어, 나는 5년 남짓 동안 꽤 말하나면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일기 비슷한 것을 계속해서 꾸며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공통된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릴 때 나는 나 자신을 이를테면 로빈 후드라 상상하곤 했고, 짜릿한 모험을 하는 영웅으로 그려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이야기는 어느새 조잡한 자아도취적 분위기를 벗어나더니 갈수록 내가 겪은 일이나 본 것에 대한 단순한 묘사가 되어갔다.(...)
글의 주제는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물론 그는 마땅히 자신의 기질을 다스려야 하고, 미성숙한 단계에 고착되거나 비뚤어진 심기에 매몰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일찍이 받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 자체가 없어져 버릴 것이다. 나는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동기들은 작가들마다 다 다른 정도로 존재하며 한 작의 경우에도 시기별로나 시대 분위기별로나 그 정도가 다를 것이다.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작가의 이런 특성은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요컨대 최상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성이다.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뿐이다. 그런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나는 진지한 작가들이 대체로 언론인에 비해 돈에는 관심이 적어도 더 허영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소중하여 차마 놓치고 싶지가 않다. 미학적인 동기가 상당히 야한 작가들도 많긴 하지만, 팜플렛이나 교과서를 쓰는 저자라 해도 비실용적이지만 매력과 애정을 느끼는 낱말들과 문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글꼴이나 여백 같은 것들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는 수가 있다. 철도 안내책자 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떠 책도 미학적인 고려로부터 딱히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하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나는 천성적으로(여기서 말하는 천성이란 막 어른이 되었을 때의 성격이라고 하자.)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네번째 동기를 능가하는 사람이다.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책을 썼을지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종의 팜플렛 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나는 안 맞는 직업을 택하여 5년을 지냈고 그뒤로 빈곤과 좌절을 겪었다. 그로 인해 타고난 나의 권위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고 처음으로 노동 계급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험들만으로는 정확한 정치적 지향을 갖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다 히들러가 등장하고 스페인내전이 발발하는 등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 나는 7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만간 또 하나의 소설을 쓰고 싶다. 그것은 실패작이 될 게 뻔하고 사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다. 단,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쓰고 싶어 한지 꽤 분명히 알고 있다. (...)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마구 울어대는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