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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 (리커버) -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기 위하여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5년 8월
평점 :
나는 아침(도 아니다!) 새벽 5시 5분 정도가 되면 어김없이 강제로(?) 눈이 떠진다. 그렇게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면서 1시간을 누워 있는다.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그만큼 깊은 잠이 들기를 바라지만 어림도 없다. 이 세상에서 혼자만 일을 하는가? 요즘의 나는 유난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엄청 야근을 해대고 있느냐? 도 전혀 아니고, 되려 시차 출퇴근제를 하고 있는 나는 5시면 퇴근해도 되는 상황이라 5시 20분쯤이면 회사를 나선다. 정말 재밌는 일은 참고할 책이라든지 출력한 원고 따위를 보조가방에 챙겨가지고 퇴근할 때 회사를 나온다는 것.
가끔 아주 가끔 저녁을 먹은 다음에 출력을 펴놓거나 자료를 한장씩 넘겨 들출 때도 있으나 대부분은 퇴근할 때 가져온 것 그대로 다음날 출근할 때 들고온다. 뭐 아령 같은 것도 아니고, 날마다 이사를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문제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잠이 깨는 그 순간 잠을 자면서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대개는 어디어디에 모범 답안(이상적인 학습 활동 원고 샘플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 헤매거나 노하우가 나와 있는데, 내가 숙지를 못하는 상황 등을 반복한다.
제발, 꿈 속에서 일 비슷한 것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반복적으로....도피처이다. 이 시인의 이 책은 나의 청정한 도피처.
이 시인의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겠다. 긴 호흡은 시집이 아니고 그녀가 쓴 에세이인데, 자연으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고, 그런 자연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좋다. 문장들도 참 좋다.
14쪽~16쪽
나는 적어도 세 개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과거의 어린아이가 있다. 물론 나는 더 이상 그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목소리를 멀리서, 가끔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을 수 있다. 그 아이의 희망 혹은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기억 속에서, 혹은 수증기 자욱한 꿈들의 강에서 아이는 강력하고 이기적이며 암시적인 존재를 드러낸다.
다음으로 세심한 사회적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미소 짓는 문지기다. 시계태엽을 감고 삶의 일상성을 헤치고 나아가며, 지켜야 할 약속들을 마음에 새겼다가 꼭 지킨다. 이 자아는 천가지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루의 시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그 움직임 자체가 과업의 전부인 것처럼 여긴다. 움직이면서 지혜나 기쁨의 나뭇가지를 줍든 아무것도 줍지 못하든, 그런 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자아가 밤낮으로 듣는 건, 그리고 그 어떤 노래보다 사랑하는 건 시곗바늘의 끝없는 전진, 그 엄격하고 발랄하며 확신에 찬 리듬이다.
시계! 그 열두 숫자 달의 얼굴, 그 흰 거미의 배! 그 세선세공 바늘은 얼마나 침착하게, 얼마나 꾸준히 움직이는가! 열두 시간, 또 열두 시간, 다시 시작하고 먹고 말하고 자고 길을 건너고, 설거지를 한다!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린다. 모든 시야가 탁 트여 있고 규칙적이다. (이 단어에 주목하라.) 날마다 주어지는 열두 개의 작은 통들이 무질서한 삶을, 그리고 그보다더 무질서한 생각을 정리해준다. 마을의 시계가 울부짖고, 모든 손목 위 얼굴들이 콧노래를 부르거나 반짝인다. 세상이 스스로와 보조를 맞춘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규칙적이고 평범한 하루.
당신이 비행기 표를 구입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간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조종사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단언컨대 당신은 조종사의 자아가 규칙적이고 평범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가 그저 차분한 즐거움을 느끼며 일에 임하기를, 멋지거나 새롭기를 원하진 않을 것이다. 그가 일상적으로 자신이 할 줄 아는 것, 그가 공상에 젖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가 어떤 흥미로운 생각의 미로로 접어들지 않기를, 그 비행이 색다르지 않고 평범하기를. 외과 의사 앰뷸런스 운전사, 선장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자기 일에 대한 자신감을 주는 익숙함 속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면 된다. 그들의 평범성은 세상의 확실성이 된다.
나 또한 이 평범한 세계에 산다. 나는 이 세계에서 태어났다. 사실 내가 받은 대부분의 교육은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 그 계획이 실패했는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 실패들은 일어나게 마련이며 모든 일이 그렇듯 실패 또한 세상에 이들이 된다. 세상에는 몽상가도 필요하니까.
예술가들이 하는 모든 종류의 창작은 세상이 돌아가도록 돕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그것은 평범함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작업은 다른 관점을 다른 우선순위들을 필요로 한다. 분명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어린아이도, 시간의 종도 아닌 자아가 존재한다. 세번쨰 자아. 이 자아는 평범성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시간에 대한 사랑도 식었다.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지녔을 뿐이다.
지적 작업은 가끔, 영적 작업은 확실히, 예술적 작업은 늘 이 자아의 지배 아래 있다. 이런 작업들의 힘은 시간의 영역과 습관의 속박을 넘어 작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 작업이 삶 전체와 확실히 구분될 수는 없다. 창조적인 사람은 중세 기사처럼 다가올 일에 대비하여 정신적, 육체적 준비를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가 할 모험들은 모두 미지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작업 자체가 모험이다. 예술가는 비범한 에너지와 집중력 없이는 작업을 시작할 수 없으며 시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예술은 비범함에 관한 것이다.
창조의 장치는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창조력을 갖고 일해야 한다. 창조력 없이 일한다는 건 창조에 대항하여 일하는 것이다. 예술에는 영적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립지대가 없다. 특히 시작 단계에서는 고독과 집중뿐 아니라 규율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젊은 작가들에겐 집필 스케줄이 좋은 제안이다. 말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모든 의식적 규율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형상의 아이디어들이 때가 되면 힘찬 날갯짓으로 무질서하고 무모하게, 가끔은 열정처럼 다루기 힘드게 찾아올 것이니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18~19
비범함이 어디서 일어나고 어디서 일어나지 않는지, 그 장소들의 목록을 만든 사람은 아직 없다. 하지만 지표들은 있다. 군중 속이나 응접실, 평화로움이나 안락함, 즐거움 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범함은 야외를 좋아한다. 집중하는 정신을 좋아한다. 고독을 좋아한다. 모험가를 가까이한다. 그렇다고 안락함이나 세상의 정해진 일상을 얕보는게 아니라, 관심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이다. 비범함은 가장자리에, 가장자리 너머의 무정형에서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 관심을 보인다.
창작은 중력에 대한 물의 충실성 만큼 완전한 충실성을 요한다. 이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걸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창조의 황야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은 길을 잃는다. 영원이라는 그 지붕 없는 장소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집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고, 쓸모 있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할 수는 있으나 예술가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오직 반짝이는 한 순간을 위한 시기적절한 야망, 완성된 작업과 더불어 사는 게 낫다. 그런 사람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게 낫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멍하고, 무모하고, 사회적 관습들과 의무들을 소홀히 한다는 인식이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는 세번째 자아가 통치자다. 예술의 순수성은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과는 다르다. 어린아이의 삶은 격렬하고 광범위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날개 달린 말을 위한 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날카로운 이빨에 잘 씹혀야 한다. 과거의 우화들을 인정하고 살펴보는 것과 마치 그것들이 예술에 적합한 어른의 형상인 것처럼 꾸미는 것 사이엔 양립 불가능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작업에 집중하는 예술가는 자신으로부터의 방해를 거부하고 작업에 몰두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그래서 그 작업에 대한 책임을 지는 어른이다.
어느 날 오전이나 오후에 불쑥 찾아오는 심각한 방해는 타인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시의적절하고, 쾌활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방해가 아니다. 심각한 방해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전지는 주의 깊은 시선에서 온다. 거기에 화살을 과녁에서 벗어나게 하는 타격이 있다. 거기에 우리가 자신의 의도에 던지는 그물이 있다. 두려워해야 할 방해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애석한 사람들은 창작에 사명을 느끼고 창조력이 안달하며 솟구치는 걸 감지하면서 거기에 힘도 시간도 들이지 않는 이들이다.
36쪽
젊었을 때 나는 슬픔에 매료되었다. 슬픔이 흥미로워 보였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줄 에너지 같았다. 늙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 나이 든 나는 슬픔이 싫다. 나는 슬픔이 자체의 에너지가 없이 내 에너지를 은밀히 사용한다는 걸 안다. 슬픔이 납처럼 무겁고 숨 막히며, 반복적이고,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안다.
38쪽
버지니아 울프가 쓴 많은 글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였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
39쪽
나는 시간의 정수를 짜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사실 : 우리는 그것을 집어들고 읽고 내려놓으면 끝이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집어 들고, 숙고하고, 반대하고 확장하고 그러다 보면 즐거움 속에서 오후가 다 지나간다.
42쪽
시를 읽는 사람들이 너무 적은 것은, 이 겁에 질리고 돈을 너무 사랑하는 세상에서 시의 영향력이 너무도 미미한 것은, 시의 잘못이 아니다. 결국 시는 기적이 아니다. 개인적 순간들을 형식화하여 그 순간들의 초월적 효과를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시는 우리 종의 노래이다.
44쪽
우리 -개와 나-는 푸른 어스름 속에서 오솔길을 걷고 있다. 이제 젊지 않은 나의 개는 빙판길을 조심조심 걷다가 여우 냄새를 맡는다. 이 아침에 여우는 얼어붙은 연못 위로 도망치고 나의 개는 쫓아간다.
45쪽
어른들은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고, 아이들은 그럴 수 없다. 아이들은 무력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그들을 둘러싼 모든 슬픔과 불운, 분노의 제물이 된다. 그런 것을 전부 느끼면서도 어른들처럼 그것들을 바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건 하나의 위안, 하나의 축복이다.
나는 그런 축복 두 가지를 신속히 찾아냈다. 자연계 그리고 글의 세계인 문학, 이 둘은 내가 고난의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문이 되었다.
첫번째 축복인 자연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자연은 아름다움과 흥미로움, 신비로 가득했고, 행운과 불운은 있었지만 남용은 없었다. 두번째 축복인 문학의 세계는 형식의 즐거움을 준 것 외에는 감정 이입(키츠가 부정적 능력이라고 부른 것의 첫 단계)이라는 자양분을 제공했고, 나는 그걸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 안에서 휴식을 취했다. 기꺼이, 기쁘게 모든 것-- 다른 사람들, 나무들, 구름들--의 대역을 맡았다. 그로 인해 다름 속에 서게 되면서, 세상의 다름은 혼란의 해독제임을 깨달았다. 바깥의 들판이나 책 속 깊은 곳에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가, 최악의 아픔을 겪은 마음에 고귀함을 되찾아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46쪽
나는 책꽂이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내 방에 책들을 들여 주위에 빽빽하게 둘러놓았다. 낮부터 밤까지 책을 읽었고 완전성, 자연신론, 형용사들, 구름들, 여우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안에서 방문을 잠그고, 낮이든 어둠 속이든 지붕에서 뛰어내려 숲으로 갔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기술을 연마하고 확실성을 얻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다.
49쪽
나는 언어를 자기 기술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지나가는 문-천 개의 열린 문들!-이라고 생각했다. 주목하고, 사색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그리하여, 힘을 갖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책 속에는 진실, 용기, 온갖 종류의 열정이 들어 있었다. 내 개인적 세계의 잔물결 이는 개울에서는 맑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감정이 흐르지 않았다. -- 정말이지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와 시에서 속박되지 않은 건강한 열정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들이 내가 읽은 모든 책의 가장 명료하고 맛깔나는 서술에서 항상 발견되었던 건 아니고, 심지어 흔히 발견되지도 않았다. 척추를 굴렁쇠처럼 구부리고 책을 들여다봐야 하는 긴 노동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조금 하는 것, 진정한 노력이라는 구원적 행위의 차이를 보았다. 읽고, 그 다음엔 쓰고, 그 다음엔 잘 쓰기를 열망하는 것, 그 가장 즐거운 환경(일에 대한 열정)이 내 안에서 형태를 갖추었다.
50쪽
나는 깊은 숲속에서 네 발로 걷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덤불 사이를 지나고, 들판을 가로지르고, 크랜베리 습지로 내려갔다.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녹초가 되고 여기저기 아팠지만 풀들, 새로 돋아난 나뭇가지들, 내리막들, 덩어리들, 비탈들, 개울들, 깊이 갈라진 틈들, 공터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았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숨 쉬고, 절름 거리고, 마침내 늪 가장자리의 소용돌이와 지그재그를 이룬 나무들 아래 눞는 한 마리 늙고 느린 여우였다.
69쪽
우리는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럼에도 시간은 즐겁게 흘러갔고, 우리는 물에게서 펄떡거리는 형상을 빼앗지 않은 걸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우리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즐거움의 일부가 되었다. 물은 깊고, 반짝거리고, 계속 움직였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아무리 단순한 육신을 가졌을지라도 생명체에게서 마지막 한 조각 숨을 빼앗는 것보다는 느리고 긴 상념에 젖기에 더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책 뒷면에서 옮김.
"자연의 경이를 예찬하는 그녀의 문장은 소박하지만 아주 직관적인 영성의 언어인데 그것은 메리 올리버가 아주 오랫동안 자연의 충일한 관찰자로서 광대한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그 자신의 문장,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치열하게 실천하고 실현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둑어둑한 박명의 순간에 한쪽 어깨에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얹고 또 다른 어깨에는 창백한 달은 얹은 채로 천천히 천천히 홀로 바다로 나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을 느낀다. 확신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 시간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는 슬픔 속에서, 반복해서 찾아드는 후회와 수치와 불안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굳건한 정신의 걸음. 메리 올리버의 문장은 도저한 정신으로 쓰인, 경탄할 만한 세상 쪽으로 나아가려는, 우주 본래의 긍정적인 기운에 가닿으려는 의지의 기록이다. 매일 아침 하나의 경전처럼 이 책을 펼쳐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이제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