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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 최인아 대표가 축적한 일과 삶의 인사이트
최인아 지음 / 해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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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의미'와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기'에 관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된 화두일 터다.

이 글의 저자 최인아 대표는 본문에서 그런말을 한다. 마흔부터10년간 고민을 했다고 한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꺼며 일을 그만둔 이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하는, 마흔으로부터 10년 가까이 보낸 끝에 퇴직을 할 때는 '앞으로 내 인생에 일은 없다. 더는 일하지 않겠다'라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퇴직 후 2년쯤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일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올라왔다고. 텍스트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뭔가를 새로 알게 되거나 희미하게 알던 것들이 책 속의 한 대목과 만나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순간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지적 호기심이 아직 살아 있었다고.

광고 계통에서 일한 사람들은 대학원에 갈 때 대개 마케팅이나 브랜딩, 커뮤니케이션 같은 업무 관련 전공을 택하는데, 자신은 역사를 공부하기로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드라마 미생을 보고 있을 때, 주인공 장그래가 속한 오 차장 팀이 예전에 중단했던 요르단 사업을 재개해 보겠다며 대표이사와 전 임원들 앞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대목을 보는데, 몇 차례나 방향을 바꾸고 콘셉트를 수정하고, 또 초조하게 시간에 쫒기며 그들이 준비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맥박이 두근부근 크고 빠르게 뛰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 안쪽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어? 나 저거 해야 되는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결국은 자신이 잘 하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맥락이었다.

나 자신은 어떤가?

사실 그냥 하는 것이지 잘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자아 실현을 해봤습니다. 라고 하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매순간 자아 실현을 경신해야 하는 것일까?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 고민은 70대가 되어서도 할지 모른다.

내 주변 가까이 어머니 연배의 어르신 또한 힘들고 피곤하시단 말을 반복하지만 꿋꿋하게 가게를 꾸려 가며 사회 생활을 하고 계시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피곤죽이 되었다가도 어머님 이하 어르신들을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곤 한다.

사람이란 왜 자꾸 자신의 길을 확신하지 못해서 주변을 쭈뼛거리며 회피나 변명을 삼을 만한 롤모델을 구하려 하는 걸까? 유퀴즈에 나온 방영 내용을 찾아보기까지 하였다! 잘 몰랐었는데 선구자적인 직장 여성의 모델이었던 것 같다. 대중들에게는.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는 자기 주도권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자신을 입증해 보인 사람만이 누리는 권리요, 권한이다. 특히 일터에서는 말이다. 맡길 만해야 맡기는 거고 잘 해내야 계속 맡길 수 있다."


이런 회사 오너 같은 죽비소리 말이 되게 듣기 싫을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데, 

보통은 이분의 에세이가 피와 살이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확신 못하겠고 대다수 대부분의 날들이 아마 그럴껄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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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06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원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고 산다는 건 참 축복받은 인생이구나 싶어요.

icaru 2025-09-07 08:51   좋아요 0 | URL
그죠,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마저도 그 입에서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표현들이 종종 나오기도 하지만요 ㅎ
 
긴 호흡 (리커버) -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기 위하여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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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도 아니다!) 새벽 55분 정도가 되면 어김없이 강제로(?) 눈이 떠진다. 그렇게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면서 1시간을 누워 있는다.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그만큼 깊은 잠이 들기를 바라지만 어림도 없다. 이 세상에서 혼자만 일을 하는가? 요즘의 나는 유난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엄청 야근을 해대고 있느냐? 도 전혀 아니고, 되려 시차 출퇴근제를 하고 있는 나는 5시면 퇴근해도 되는 상황이라 520분쯤이면 회사를 나선다. 정말 재밌는 일은 참고할 책이라든지 출력한 원고 따위를 보조가방에 챙겨가지고 퇴근할 때 회사를 나온다는 것.

가끔 아주 가끔 저녁을 먹은 다음에 출력을 펴놓거나 자료를 한장씩 넘겨 들출 때도 있으나 대부분은 퇴근할 때 가져온 것 그대로 다음날 출근할 때 들고온다. 뭐 아령 같은 것도 아니고, 날마다 이사를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문제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잠이 깨는 그 순간 잠을 자면서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대개는 어디어디에 모범 답안(이상적인 학습 활동 원고 샘플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 헤매거나 노하우가 나와 있는데, 내가 숙지를 못하는 상황 등을 반복한다.

제발, 꿈 속에서 일 비슷한 것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반복적으로....도피처이다. 이 시인의 이 책은 나의 청정한 도피처.

 

이 시인의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겠다. 긴 호흡은 시집이 아니고 그녀가 쓴 에세이인데, 자연으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고, 그런 자연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좋다. 문장들도 참 좋다.

 

14~16

 

나는 적어도 세 개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과거의 어린아이가 있다. 물론 나는 더 이상 그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목소리를 멀리서, 가끔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을 수 있다. 그 아이의 희망 혹은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기억 속에서, 혹은 수증기 자욱한 꿈들의 강에서 아이는 강력하고 이기적이며 암시적인 존재를 드러낸다.

다음으로 세심한 사회적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미소 짓는 문지기다. 시계태엽을 감고 삶의 일상성을 헤치고 나아가며, 지켜야 할 약속들을 마음에 새겼다가 꼭 지킨다. 이 자아는 천가지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루의 시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그 움직임 자체가 과업의 전부인 것처럼 여긴다. 움직이면서 지혜나 기쁨의 나뭇가지를 줍든 아무것도 줍지 못하든, 그런 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자아가 밤낮으로 듣는 건, 그리고 그 어떤 노래보다 사랑하는 건 시곗바늘의 끝없는 전진, 그 엄격하고 발랄하며 확신에 찬 리듬이다.

시계! 그 열두 숫자 달의 얼굴, 그 흰 거미의 배! 그 세선세공 바늘은 얼마나 침착하게, 얼마나 꾸준히 움직이는가! 열두 시간, 또 열두 시간, 다시 시작하고 먹고 말하고 자고 길을 건너고, 설거지를 한다!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린다. 모든 시야가 탁 트여 있고 규칙적이다. (이 단어에 주목하라.) 날마다 주어지는 열두 개의 작은 통들이 무질서한 삶을, 그리고 그보다더 무질서한 생각을 정리해준다. 마을의 시계가 울부짖고, 모든 손목 위 얼굴들이 콧노래를 부르거나 반짝인다. 세상이 스스로와 보조를 맞춘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규칙적이고 평범한 하루.

 

당신이 비행기 표를 구입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간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조종사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단언컨대 당신은 조종사의 자아가 규칙적이고 평범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가 그저 차분한 즐거움을 느끼며 일에 임하기를, 멋지거나 새롭기를 원하진 않을 것이다. 그가 일상적으로 자신이 할 줄 아는 것, 그가 공상에 젖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가 어떤 흥미로운 생각의 미로로 접어들지 않기를, 그 비행이 색다르지 않고 평범하기를. 외과 의사 앰뷸런스 운전사, 선장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자기 일에 대한 자신감을 주는 익숙함 속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면 된다. 그들의 평범성은 세상의 확실성이 된다.

나 또한 이 평범한 세계에 산다. 나는 이 세계에서 태어났다. 사실 내가 받은 대부분의 교육은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 그 계획이 실패했는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 실패들은 일어나게 마련이며 모든 일이 그렇듯 실패 또한 세상에 이들이 된다. 세상에는 몽상가도 필요하니까.

예술가들이 하는 모든 종류의 창작은 세상이 돌아가도록 돕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그것은 평범함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작업은 다른 관점을 다른 우선순위들을 필요로 한다. 분명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어린아이도, 시간의 종도 아닌 자아가 존재한다. 세번쨰 자아. 이 자아는 평범성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시간에 대한 사랑도 식었다.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지녔을 뿐이다.

지적 작업은 가끔, 영적 작업은 확실히, 예술적 작업은 늘 이 자아의 지배 아래 있다. 이런 작업들의 힘은 시간의 영역과 습관의 속박을 넘어 작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 작업이 삶 전체와 확실히 구분될 수는 없다. 창조적인 사람은 중세 기사처럼 다가올 일에 대비하여 정신적, 육체적 준비를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가 할 모험들은 모두 미지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작업 자체가 모험이다. 예술가는 비범한 에너지와 집중력 없이는 작업을 시작할 수 없으며 시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예술은 비범함에 관한 것이다.

창조의 장치는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창조력을 갖고 일해야 한다. 창조력 없이 일한다는 건 창조에 대항하여 일하는 것이다. 예술에는 영적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립지대가 없다. 특히 시작 단계에서는 고독과 집중뿐 아니라 규율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젊은 작가들에겐 집필 스케줄이 좋은 제안이다. 말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모든 의식적 규율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형상의 아이디어들이 때가 되면 힘찬 날갯짓으로 무질서하고 무모하게, 가끔은 열정처럼 다루기 힘드게 찾아올 것이니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18~19

비범함이 어디서 일어나고 어디서 일어나지 않는지, 그 장소들의 목록을 만든 사람은 아직 없다. 하지만 지표들은 있다. 군중 속이나 응접실, 평화로움이나 안락함, 즐거움 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범함은 야외를 좋아한다. 집중하는 정신을 좋아한다. 고독을 좋아한다. 모험가를 가까이한다. 그렇다고 안락함이나 세상의 정해진 일상을 얕보는게 아니라, 관심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이다. 비범함은 가장자리에, 가장자리 너머의 무정형에서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 관심을 보인다.

 

창작은 중력에 대한 물의 충실성 만큼 완전한 충실성을 요한다. 이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걸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창조의 황야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은 길을 잃는다. 영원이라는 그 지붕 없는 장소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집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고, 쓸모 있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할 수는 있으나 예술가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오직 반짝이는 한 순간을 위한 시기적절한 야망, 완성된 작업과 더불어 사는 게 낫다. 그런 사람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게 낫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멍하고, 무모하고, 사회적 관습들과 의무들을 소홀히 한다는 인식이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는 세번째 자아가 통치자다. 예술의 순수성은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과는 다르다. 어린아이의 삶은 격렬하고 광범위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날개 달린 말을 위한 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날카로운 이빨에 잘 씹혀야 한다. 과거의 우화들을 인정하고 살펴보는 것과 마치 그것들이 예술에 적합한 어른의 형상인 것처럼 꾸미는 것 사이엔 양립 불가능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작업에 집중하는 예술가는 자신으로부터의 방해를 거부하고 작업에 몰두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그래서 그 작업에 대한 책임을 지는 어른이다.

어느 날 오전이나 오후에 불쑥 찾아오는 심각한 방해는 타인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시의적절하고, 쾌활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방해가 아니다. 심각한 방해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전지는 주의 깊은 시선에서 온다. 거기에 화살을 과녁에서 벗어나게 하는 타격이 있다. 거기에 우리가 자신의 의도에 던지는 그물이 있다. 두려워해야 할 방해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애석한 사람들은 창작에 사명을 느끼고 창조력이 안달하며 솟구치는 걸 감지하면서 거기에 힘도 시간도 들이지 않는 이들이다.

 

36

젊었을 때 나는 슬픔에 매료되었다. 슬픔이 흥미로워 보였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줄 에너지 같았다. 늙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 나이 든 나는 슬픔이 싫다. 나는 슬픔이 자체의 에너지가 없이 내 에너지를 은밀히 사용한다는 걸 안다. 슬픔이 납처럼 무겁고 숨 막히며, 반복적이고,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안다.

 

 

 

38

버지니아 울프가 쓴 많은 글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였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

 

 

39

나는 시간의 정수를 짜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사실 : 우리는 그것을 집어들고 읽고 내려놓으면 끝이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집어 들고, 숙고하고, 반대하고 확장하고 그러다 보면 즐거움 속에서 오후가 다 지나간다.

 

 

42

시를 읽는 사람들이 너무 적은 것은, 이 겁에 질리고 돈을 너무 사랑하는 세상에서 시의 영향력이 너무도 미미한 것은, 시의 잘못이 아니다. 결국 시는 기적이 아니다. 개인적 순간들을 형식화하여 그 순간들의 초월적 효과를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시는 우리 종의 노래이다.

 

 

44

우리 -개와 나-는 푸른 어스름 속에서 오솔길을 걷고 있다. 이제 젊지 않은 나의 개는 빙판길을 조심조심 걷다가 여우 냄새를 맡는다. 이 아침에 여우는 얼어붙은 연못 위로 도망치고 나의 개는 쫓아간다.

 

 

45

어른들은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고, 아이들은 그럴 수 없다. 아이들은 무력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그들을 둘러싼 모든 슬픔과 불운, 분노의 제물이 된다. 그런 것을 전부 느끼면서도 어른들처럼 그것들을 바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건 하나의 위안, 하나의 축복이다.

나는 그런 축복 두 가지를 신속히 찾아냈다. 자연계 그리고 글의 세계인 문학, 이 둘은 내가 고난의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문이 되었다.

첫번째 축복인 자연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자연은 아름다움과 흥미로움, 신비로 가득했고, 행운과 불운은 있었지만 남용은 없었다. 두번째 축복인 문학의 세계는 형식의 즐거움을 준 것 외에는 감정 이입(키츠가 부정적 능력이라고 부른 것의 첫 단계)이라는 자양분을 제공했고, 나는 그걸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 안에서 휴식을 취했다. 기꺼이, 기쁘게 모든 것-- 다른 사람들, 나무들, 구름들--의 대역을 맡았다. 그로 인해 다름 속에 서게 되면서, 세상의 다름은 혼란의 해독제임을 깨달았다. 바깥의 들판이나 책 속 깊은 곳에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가, 최악의 아픔을 겪은 마음에 고귀함을 되찾아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46

 

나는 책꽂이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내 방에 책들을 들여 주위에 빽빽하게 둘러놓았다. 낮부터 밤까지 책을 읽었고 완전성, 자연신론, 형용사들, 구름들, 여우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안에서 방문을 잠그고, 낮이든 어둠 속이든 지붕에서 뛰어내려 숲으로 갔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기술을 연마하고 확실성을 얻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다.

 

 

49

나는 언어를 자기 기술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지나가는 문-천 개의 열린 문들!-이라고 생각했다. 주목하고, 사색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그리하여, 힘을 갖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책 속에는 진실, 용기, 온갖 종류의 열정이 들어 있었다. 내 개인적 세계의 잔물결 이는 개울에서는 맑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감정이 흐르지 않았다. -- 정말이지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와 시에서 속박되지 않은 건강한 열정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들이 내가 읽은 모든 책의 가장 명료하고 맛깔나는 서술에서 항상 발견되었던 건 아니고, 심지어 흔히 발견되지도 않았다. 척추를 굴렁쇠처럼 구부리고 책을 들여다봐야 하는 긴 노동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조금 하는 것, 진정한 노력이라는 구원적 행위의 차이를 보았다. 읽고, 그 다음엔 쓰고, 그 다음엔 잘 쓰기를 열망하는 것, 그 가장 즐거운 환경(일에 대한 열정)이 내 안에서 형태를 갖추었다.

 

50

나는 깊은 숲속에서 네 발로 걷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덤불 사이를 지나고, 들판을 가로지르고, 크랜베리 습지로 내려갔다.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녹초가 되고 여기저기 아팠지만 풀들, 새로 돋아난 나뭇가지들, 내리막들, 덩어리들, 비탈들, 개울들, 깊이 갈라진 틈들, 공터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았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숨 쉬고, 절름 거리고, 마침내 늪 가장자리의 소용돌이와 지그재그를 이룬 나무들 아래 눞는 한 마리 늙고 느린 여우였다.

 

69

우리는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럼에도 시간은 즐겁게 흘러갔고, 우리는 물에게서 펄떡거리는 형상을 빼앗지 않은 걸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우리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즐거움의 일부가 되었다. 물은 깊고, 반짝거리고, 계속 움직였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아무리 단순한 육신을 가졌을지라도 생명체에게서 마지막 한 조각 숨을 빼앗는 것보다는 느리고 긴 상념에 젖기에 더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책 뒷면에서 옮김.

"자연의 경이를 예찬하는 그녀의 문장은 소박하지만 아주 직관적인 영성의 언어인데 그것은 메리 올리버가 아주 오랫동안 자연의 충일한 관찰자로서 광대한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그 자신의 문장,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치열하게 실천하고 실현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둑어둑한 박명의 순간에 한쪽 어깨에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얹고 또 다른 어깨에는 창백한 달은 얹은 채로 천천히 천천히 홀로 바다로 나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을 느낀다. 확신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 시간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는 슬픔 속에서, 반복해서 찾아드는 후회와 수치와 불안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굳건한 정신의 걸음. 메리 올리버의 문장은 도저한 정신으로 쓰인, 경탄할 만한 세상 쪽으로 나아가려는, 우주 본래의 긍정적인 기운에 가닿으려는 의지의 기록이다. 매일 아침 하나의 경전처럼 이 책을 펼쳐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이제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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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9-05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메리 올리버는 한 권도 안 읽어봤는데 인용해주신 문장들이 참 좋네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문장이 특히 좋구요~~

전 5시 50분에 일어납니다 ㅋㅋㅋㅋ티엠아이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icaru 2025-09-05 22:22   좋아요 1 | URL
메리 올리버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서 인생의 큰 위안을 얻었어요. 저도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문장은 이 분의 탁월한 통찰을 보여 주는 거 같아요. 필사할 때 정화되는 느낌을 주는 몇 안되는 작가인 거 같아요. 그나저나 5시 50분 내가 원하는 그 시간인디... 완전 수 5시 50분... 티엠아이 아니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분들의 그런 부분 몇 시에 일어나시고 무슨 반찬을 좋아하고 이렇거 묻고 싶어서 근질대는데, 참 여쭐 수 없고 그러하거늘 먼저 기상시간 오픈해 주셔서 히죽히죽하고 있습니당

잉크냄새 2025-09-05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에 읽었어요. 36쪽은 저도 밑줄 그은 부분이네요. ^^

icaru 2025-09-05 22:24   좋아요 1 | URL
메리올리버하고 잉크님 어쩐지 잘 어울려요. 공감의 아이콘 같은 느낌. 그런데 이 작가 알고 계셨었구나!

2025-09-07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7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7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르헤리치의 말 - 삶이라는 축제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마르타 아르헤리치.올리비에 벨라미 지음, 이세진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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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음악가를 개인사 차원에서 부각해 보는 것은 그닥 적절한 접근법은 되지 못하겠지만, 아버지가 다른 세 딸을 슬하에 둔 것,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힘찬 연주, 그녀의 체격 등을 미루어 보건대, 참으로 시시하는 바가 많은 사람인 듯 하다. 프랑스의 음악전문지 마르타 아르헤리치 전문 여기자가 아르헤리치의 장년 시절부터 꾸준히 인터뷰해 온 것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뒷부분에는 아르헤리치가 쓴 짧은 에세이도 나온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인간관계에 관심이 많고, 남의 재능을 찾아주고 응원하기를 좋아하며(그래서 연주자가 아니라 연주자 메니지먼트를 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과 함께 살다가 헤어진 남자들에 대해서 한없이 관대하고, 늙어서도 다른 음악인들과 모여서 살기를 꿈꾼다.

5월 1일 월요일 노동절 아침에 이 책을 손에 붙들고, 노안으로 힘든 눈을 하고 앉은 자리에서 독파하다. 다음날 화요일은 출근이었고, 그 다음날은 회의가 있었다. 디자인과 이사님 참관 실무회의 등으로 참으로 잠못 이루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지나온 날들은 정말 기적과도 같다. 굴욕적인 날들도 있고, 뭐라도 된 듯 들뜬 날들도 있다.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회사에서 싸갖던 일거리들을 들춰보고 있었어야 했는데, 이틀 후가 회의날이니까 회피하는 심정으로 잡은 책이 의외로 술술 읽혀서 나 아직 독서 할만한가 보다 라면서 작은 위로를 얻었던 독서 경험이었다.


"음악이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아요. 루틴에 빠질 수도 있어요. 자기 모방을 추구할 수도 있고요. 자기 모방은 유혹적이죠. 특히 일전의 연주가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처럼 하고 싶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매일 다시 시작되는 하루도 그날그날이 다르잖아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뭐 하러 살아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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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9-05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리즈 다 좋아해요~ 다 읽은 건 아니지만요 ㅋㅋㅋ 나란히 꽂아두면 또 그렇게 폼이 나는^^

icaru 2025-09-05 22:26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 다 좋아하신다구욧?? 끗발이 다른 분이시다 ㅎㅎ 나란히 두면 폼 좀 많이 날 거 같은데요 시리즈 다른분도 탐색 들어갑니다~

단발머리 2025-09-05 22:27   좋아요 1 | URL
아니 에르노가~~ 예쁩니다. 아하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치의 의심도 없어요!!

icaru 2025-09-05 22:32   좋아요 0 | URL
아니 에르노 오오오~~~ 너무 땡깁니다!!!!
 
외사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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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것이 2001년이라는 것이다. 99년부터 2000년까지 신문에 연재한 것을 엮어서 낸 소설. 현재 발표되었다고 해도 손색없는 주제 의식을 지닌 작품을 20년도 전에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

1985년부터 작품을 발표했다는 이 작가는 한국에 꽤나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다. 나의 독서 인생 가운데 일본 추리 사회파 소설들을 즐겨 읽던 시기가 있기는 했었는데 07~09년의 시기이다. 이때 레몬, 용의자 X의 헌신, 방황하는 칼날, 호숫가 살인 사건을 읽었다.

본격 미스터리에서 사회파 미스터리로 무게 중심을 옮겨온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에서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성정체성과 30대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고 있다. 58년생인 작가가 마흔 초반에 30대에 관한 이야기를 쓴 것이므로 작가 동년배의 생각과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니시와키 그 때도 즐거웠어. 왜 인간은 변하고 마는 걸까? 게다가 나쁜 쪽으로. 성공하면 오만해지고, 실패하면 비굴해지지. 나는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부잣집 딸과 결혼해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길을 선택했어. 그런 자기혐오 때문에 사가 일행과 젠더 문제에 맞서는 데 열중했지. 하지만 그건 자기만족이었고 현실 도피에 불과했어. 그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릴 생각만 했던 때가 그리워.”

그 밖의 밑줄

“정말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얘기를 떠드네. 아무리 지나도 나는 그 필드골 얘기를 들을 거고, 너는 마지막 패스 얘기를 들을 거야. 우승을 놓친 것은 나도 분하지만, 벌써 13년 전 일이야. 보통은 잊지 않나?” 스가이가 말했다. 데쓰로는 잠자코 웃었다. 안자이와 마쓰자키가 진심으로 그 일에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안다. 그들은 무언가를 되찾고 싶어 과거 이야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 p.16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변하리라 생각했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 오히려 육체와 정신의 갭을 의식하게 되고 말았지. 나름 노력도 했어. 줄곧…… 계속 연기했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연기가 아닌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하지만 소용없었어. 마음은 얼버무릴 수 없었지.”

--- p.45

“나는 말이야…….” 리사코도 목소리를 높인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미쓰키를 봤다. “미쓰키의 인생을 어정쩡하게 끝내고 싶지 않아. 네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야. 이대로 교도소에 들어가면 어떤 답도 낼 수 없어. 아니면 철창 안에서 나는 남자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만족해?”

“그럼 어쩌란 거지? 무책임한 소리 좀 그만해.” 데쓰로가 의자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리사코는 등을 꼿꼿이 펴고 미쓰키를 곁눈질하면서 몸만 데쓰로 쪽으로 살짝 틀었다.

“책임은 내가 질게. 그럼 되지?” 선언하듯 말했다.

“책임이라니…… 어떻게?”

“미쓰키를 경찰에 보내지 않을 거야. 누가 뭐라든.”

--- p.73

“여자의 몸을 지님으로써 미쓰키가 품은 초조함과 분노는 많든 적든 여성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 마음이 여자라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고. 그저 익숙할 뿐이지. 그리고 포기하고 살 뿐이야.”

리사코는 하고 싶은 말은 끝났다고 마무리하고 소파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의 담배를 들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녀가 토해낸 연기가 너울너울 공중을 맴돌았다. 전원의 마음을 표현하듯 공기는 하얗고 뿌옇다.

“리사코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었어. 내 모습을 보는 것은 타인만이 아니야. 이 세상에는 거울이라는 게 있어.” 미쓰키가 말했다.

“그 거울을 보는 눈도 왜곡되었다는 생각은 안 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어.”

--- pp.124~125

“분명하게 말하지. 나는 너희들 편이 될 수 없어.”

하야타의 말은 데쓰로의 온몸을 관통했다. 무슨 소리냐는 말을 하려 했으나 입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아직 아무것도 쥔 게 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너희들은 뭔가 알고 있어. 알고 있고, 그것을 숨기려 해.”

(…)

“알고 있겠지만, 내 일은 숨겨진 것을 폭로하는 거야. 그것이 어떤 인간에게 상처가 될 것인지는 일단 생각하지 않아.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이 숨기려 하는 것도 폭로할 수밖에 없어.”

데쓰로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만드는 무언가가 하야타의 말에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하야타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표적으로 삼지는 않을 거야. 너와 네 주위에서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겠어. 완전히 다른 경로를 통해 사건을 쫓을 거야. 그 결과 어디에 도착할지는 모르겠어. 무엇을 잃을지도 생각하지 않을래.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할 거야. 이게 내 방식이니까. 공정하게 싸우자고.”

--- pp.188~189

“됐어. 알아. 다 내 만족이고 혼자 난리인 거지. 영원한 짝사랑이라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소중해.”

영원한 짝사랑, 이라……. 데쓰로도 그 마음이 왠지 이해됐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착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 누구나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미쓰키의 마음이 남자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p.213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 띠의 앞뒤와 같아요.”

“무슨 뜻이죠?”

“일반적인 종이의 경우 뒤는 언제나 뒤죠. 앞은 영원히 앞이고요. 양쪽이 만날 일도 없어요. 하지만 뫼비우스 띠는 앞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면 어느새 뒤가 나와요. 즉, 양쪽은 연결되어 있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뫼비우스 띠 위에 있어요. 완전한 남자도, 완전한 여자도 없어요. 또 각자가 지닌 뫼비우스 띠도 하나가 아니에요. 어떤 부분은 남성적이지만, 다른 부분은 여성적인 것이 평범한 인간이에요. 당신 역시 여성적인 부분이 얼마든지 있어요. 트랜스젠더라 해도 똑같지는 않아요. 트랜스섹슈얼도 다양하고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어요. 그 사진 속 인물도 육체는 여자인데 마음은 남자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다 담을 수 없어요. 내가 그러하듯.”

--- p.421

번역자 인터뷰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양한 주제로 여러 작품을 써온 작가입니다.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번역도 다수 해오셨는데, 이 책 『외사랑』이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과 비교해 특별한 점이 무엇일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본격 미스터리부터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모든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죠. 또 작품의 주제도 아주 다양합니다. 대체로 본격에서 사회파로 천천히 무게 중심을 옮겨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외사랑』 역시 굳이 분류하자면 사회파 미스터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다른 사회파 미스터리가 사회적 주제를 품고 있으나, 살인이라는 미스터리 요소를 중심으로 가져가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슬며시 넣은 데 반해, 『외사랑』은 오히려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그 속에서 우정과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사회파 미스터리이면서 휴먼 드라마의 요소가 아주 짙은 작품입니다.

『외사랑』을 번역하실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번역하셨나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작품 속에 나오는 젠더 문제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을 어떻게 정리할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이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들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청춘을 구가할 때 서로에 대해 샅샅이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이 사회에 나가 저마다의 세월을 보내고 다른 직업과 처지에 놓이게 된 상태에서 사건에 얽히면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각자의 세계관을 드러냅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일을 종종 겪기 마련이죠.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한 친구가 나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순간들이요. 그럴 때 낙담하면서도 과거에 맺은 강한 연대감에 그에게서 쉽게 등을 돌리지 못하도록 할 때가 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다른 처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듯하나 역시 과거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지도 못합니다. 그런 애틋하면서도 씁쓸한, 그러면서도 푸근한 감정을 문체 속에서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외사랑』을 번역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앞의 질문과 이어질 것 같네요. 『외사랑』은 젠더 문제를 20년도 전에 다룬 작품입니다. 오늘날 젠더 문제는 엄청나게 활발한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 늘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생기고 복잡한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다양한 개념을 제가 다 알 수 없다는 게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쓰이는 젠더 용어들이 지금도 동일하게 쓰이고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혹시, 그 용어들에 또 다른 편견을 담는 게 아닌지도 고민했죠. 교정을 거치면서 담당 편집자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이 단어는 올바르지 않다, 다른 단어로 사용하자. 조언과 제안을 나누며 하나씩 정해나갔습니다. 혹시 잘못된 용어 사용이 있다면 너그럽게 봐주시고 또 적극적으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외사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구절은 무엇인가요?

691페이지의 '어이! 뭐 하는 거야!'라는 구절입니다. '에이, 그게 뭐야!'라고 생각하시는 독자분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제게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경찰에 들킬 위기에 놓인 주인공들에게 기자인 하야타가 건네는 말입니다. 주인공들이 범죄를 저지른 동창을 어떻게든 구하려고 하는 데 반해 하야타라는 인물은 작품 초반부터 자신의 직업관을 지키겠다며 반대 입장에 섭니다. 주인공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죠. 그런 그가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우정'을 선택하는 장면입니다. 이제는 놓아야 하는 과거이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애절한 마음, 정체성이나 사회적 처지보다 앞서는 인간으로서의 마음, 함께 했던 우정에 끝내 손을 내미는 장면이라 좋아합니다.

번역가님께서 생각하시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새삼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하는 일은 독자 여러분께 성가신 일일지 모릅니다. 그만큼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작가가 되었죠. 그러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번역가 입문 초기 히가시노 게이고는 제게 과학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가장 현대적인 주제를 본격 미스터리로 완성할 수 있음을 알려준 작가입니다. 이후로도 꽉 짜인 미스터리 구조 속에 정말 다양하고 묵직한 주제를 아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는 점, 여기에 휴먼 드라마로서의 감동까지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장르 문학 작가의 모델이 아닐까 싶습니다.

『외사랑』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외사랑'이라는 제목 때문에 혹여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학원 미스터리로 오해하실까 걱정했습니다. 어렵게 여겨지기 쉬운 젠더 문제를 절절하게 풀어낸 작가의 깊은 계산이 『외사랑』이라는 제목에 담겨 있으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하필 제목을 『외사랑』이라고 지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며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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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05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단일 작가로 가장 많은 책이 구비된 작가일걸요. 미스터리가 별로인 저랑은 친하지 않지만요.ㅎㅎ

icaru 2025-09-05 22:31   좋아요 1 | URL
이 작가 역시 한국에선 그랬구먼요 이 작가는 과거 추리의 여왕이신 물만두 님 계시던 시절 많이 접하게 되었던 작가예요. 어허 라떼는 말야 처럼 그 시절 댓글 굴비엮던 복돌이 언니나 여러 서재마을분들이 떠오르네요 ㅎ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 앨리스 닐, 도리스 레싱, 어슐러 르 귄, 오드리 로드, 앨리스 워커, 앤절라 카터… 돌보는 사람들의 창조성에 관하여
줄리 필립스 지음, 박재연 외 옮김 / 돌고래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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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창의성과 예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동시에 가장 답하기 힘든 질문들이기도 하다. 앨리스의 모성이 그녀의 예술을 더 훌륭하게 만들었나? 많은 창작자 엄마들은 아이들과의 관계가 그들의 감수성을 심화시키고 한계를 넓히며 어슐러 르 귄의 표현대로 아이들과 뼛속까지 더 가까워지게만들었다고 주장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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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실천에는 영웅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외롭고 위험하며 무자비한 작업이다. 모든 예술가에게는 도덕적 지지나 연대, 인정이 필요하다.” -어슐러 르 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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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와 마찬가지로, 도리스 (레싱) 역시 페미니스트로서가 아닌 사회주의적 통찰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기 바랐다. 그녀는 페미니즘의 교조적 측면과 감정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방식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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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오드리 로드)는 숨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평생 용감하게 그에 맞서 싸웠다. 두려움을 알면서도 목소리 내는 법을 배웠다. 거짓말에 속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관해 진실을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혼자라고 느끼면서도 자기 주변에 조력자들을 두었고, 자기 삶에서 기쁨을 느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평에  썼듯이 "스스로 나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들 속으로 짓이겨져 산 채로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





도리스 레싱은 인간의 모순과 사회 문제를 깊이 파헤쳤고, 수전 손택은 예술과 정치, 문화를 넘나들며 사유의 지평을 확장한 비평가, 어슐러 K. 르 귄은 과학소설을 통해 성별과 사회,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펼쳤다. 이외에 오드리 로드(Audre Lorde, 1934~1992)

흑인 시인이자 활동가. 스스로를 흑인, 여성, 레즈비언, 시인, 전사라 칭하며, 차별과 억압에 맞선 글쓰기를 실천. 그녀의 시와 에세이는 분노와 사랑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시적 무기로 변환시킨 작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 1944~ ) 컬러 퍼플의 저자.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문학의 중심에 세운 인물. 여성, 특히 흑인 여성의 삶과 고통, 그리고 그 회복력을 소설과 에세이 속에 깊이 담아냄. 그녀는 또한 여성적 글쓰기(feminist writing)’의 전형을 제시한 작가.

앤절라 카터(Angela Carter, 1940~1992) 영국의 소설가로, 기이하고 매혹적인 상상력으로 잘 알려짐. 피의 방(The Bloody Chamber)같은 작품에서 옛날이야기와 신화를 새롭게 비틀어, 여성의 욕망과 권력, 억압을 환상적으로 드러냄.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카터의 서사는 페미니즘 문학의 중요한 지점으로 평가.

앨리스 닐(Alice Neel, 1900~1984) 화가.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문 인물화의 대가’. 사회적 약자, 소외된 이들, 예술가와 지식인의 초상을 솔직하게 그려냄. 그녀의 초상화는 단순한 얼굴 묘사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 존재를 증언하는 기록이기도 함.

위의 작가들을 조명하면서, 그들의 글쓰기와 삶 속에 늘 아이를 키우는 일이라는 현실이 개입해 있었다는 점에 주목.

아이는 이들에게 시간을 빼앗고, 창작을 방해하는 존재, 동시에 아이는 새로운 사유와 감각을 열어 주는 존재이기도 하며, 모성(母性)과 창작의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

 

여성이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회가 부과한 왜곡되고 비인간적인 모성상을 자신의 내면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일에 필수적인 지식과 통찰력을 제공한다. 엄마가 되거나 되지 않길 선택한 여성, 여성을 존중하는 삶을 모색 중인 남성, 출산과 양육이 사회가 정한 규준에 따라 획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들 모두가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정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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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9-05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하하! 두껍고 예뻐서~~ 제가 좋아하는 책! 아직 안 읽은거 안비밀입니다.
요즘 폭풍독서하시는 건가요? icaru님? ㅎㅎㅎㅎ

icaru 2025-09-05 22:13   좋아요 1 | URL
헉스~~ 저도요 이 책 예뻐서 좋아하는 것도 있어요. 얼핏 보면 예쁘고 견고한 양장 다이어리인 줄요~~ 예전에 어언 10년전에 올해의 서재의 달인 엠블럼 부상으로 알라딘에서 주던 그 재질이어요 겉은..

icaru 2025-09-05 22:18   좋아요 1 | URL
알라딘 안 오던 1~2년 동안 어딘가에 끄적여놨던 감상평을 몰아서 올려놨는데,, 보니까 제가 유독 힘들었던 시간들을 서두에 징징대며 기록한 게 있어서 삭제하고 올릴까 하다가 그냥 두는게 맥락상 맞을 거 같아서 그렇지만 다시 읽어도 좀 그러네용 ㅋ

책읽는나무 2025-09-07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제목이 예뻐서 사다 두고….
사다 두기만 했어요.^^

2025-09-07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7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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