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비용 데버라 리비 자전적 에세이 3부작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백수린 후기 / 플레이타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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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통합 도서관에 딱 한 권 밖에 없던 책을 빌렸던 터라 더 감질났던 거 같다. 드물게도 빌려 읽고 그냥 한 권 다시 구매한 책이다. 두께도 얇아서 마음에 쏙 든다.

작가는 이혼을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내는 일에 빗댄 다음 자신이 자아를 찾아 가는 과정이 동화 벽지"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퍼붓는 비를 맞아 가며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오르던 길에 그만 가방이 열려 장 봐 온 닭이 로드킬되는 걸 목격해야 했던 작가는 비에 쫄딱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그토록 피곤한 날에도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소 자조적으로 말한다. "나는 혼자였고 나는 자유였다. 관리되는 것도 거의 없고 수도나 전기 같은 기본 시설마저 수시로 끊기는 집에 따라붙는 막대한 관리비를 지불할 자유가 내게 있었다.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다해 가는 컴퓨터에 글을 쓸 자유가 내게 있었다."

기묘한 유의 수동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일터에서 더 많은 직무를 맡기 시작했다. 집에서 남편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한 것이다. 두 사람은 한집에 살면서도 별도로 생활하고 잠도 각방에서 잤다. 일터에서 까다롭고 보람찬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을 때 함께 영화를 보며 저녁 시간을 보낼 사람이 있음에 여자는 만족스러워했다.

현대 가정을 둘러싼 변덕스런 정치가 한층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 터였다. 내가 아는 혅대적이고 외관상 힘있어 보이는 여자 중의 다수가 다른 이들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도 보금자리에서 느껴야 마땅할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보다 사무실이나 다른 형태의 작업 공간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후자에선 그나마 누군가의 와이프 이상의 지위를 누리기 때문이었다.

라고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내 인생에 대입해 본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눈치를 보는 인생인 것이다. 휴식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나로 존재하는 이 삶이 수고로워 죽겠는데,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생각이 많아지는 나.

가부장제 바깥에서 다 형태의 공동체를 꿈꿀 자유, 누구누구의 아내나 엄마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존재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내가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다가 작은 구리 주전자에 터키 커피를 끓여 그 잔에 붓고 은 뚜껑을 덮곤 한다는 얘기를 하직 가게의 막내 형제에게 털어놓지는 못했다. 이건 내 글쓰기 일과의 작은 의례가 되었다. 자정부터 다음 날 이른 시간까지 진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지면에서도 어김없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글쓰기용 의자에서 한 발도 안 움직이고 밤을 거니는 방랑자가 된다. 낮보다 부드럽고 조용하고 슬프고 차분한 밤, 그리고 그 밤을 채우는 소리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배관에서 올라오는 소리,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삐그덕대는 바닥 마룻장과 유령처럼 오가는 야간 버스 소리"

백수련 님의 에필로그


"손재주가 아주 좋았고, 집 안을 누구보다 깨끗하게 정리했고, 식혜나 고추장 같은 음식을 맛있게 만들었지만 할머니는 내겐 그런 것들을 조금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작가가 된 후 새벽까지 거실에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앉아 있을 때가 많았는데,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로 나온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아직도 그러고 있냐"하며 안쓰러워했다. "얼른 가서 자라, 병 날라"하지만 졸음 섞인 할머니의 목소리에 당신이 감히 꿈꿔 볼 수 없었던 어떤 고귀한 일을 하는 손녀딸을 기특해하는 마음이 한밤의 꽃향기처럼 비밀스럽게 배어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것밖에는 몰랐던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물질적인 삶'과는 다른, 할머니의 눈에 보다 숭고해 보이는 정신적 세계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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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06-1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님 , 정말 오랜만. 잘 지내셨지요?

icaru 2023-06-14 14:50   좋아요 0 | URL
우아 나인님 너무나 반갑고 궁금한 아이디예요!!
잘 지내시죠? 아드님은 이제 성년이 다 되었겠어요!!
저 종종 들어가서 사진과 페이퍼를 본답니다~

최근에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 격조하였지만 ㅎㅎ

icaru 2023-06-14 14:51   좋아요 0 | URL
나인 님이 유튭으로 올리셨던 피아노 연주도 가끔 생각하는데요 저는 ㅋㅋ

책읽는나무 2023-06-1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드디어!!
마침내!!!^^

icaru 2023-06-16 16:13   좋아요 1 | URL
ㅋㅋㅋ 또 이 책하면 책나무님!!!

2023-08-04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23-08-0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아공 ㅎㅎㅎ
 
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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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궤적>을 읽으며 지난날 나를 거쳐 갔던 한때 친구라고 불렀던 이들을 떠올려 보는 시간- ‘참회도 아니고, ‘고운 추억도 아닌 감정의 실타래들을 가늠해 보았다.

는 서른 초반의 나이에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간다. 주변에선 모두들 그런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모두가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에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다가는 결국 낙오자가 될 거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은 최초의 한국 사람이 바로 그 언니였고, ‘는 그런 언니가 좋았다. 그러나 모든 인연이 그렇듯 특수한 (프랑스) 상황에서의 인연은 맥락이 달라지면 입장도 달라진다. <여름의 빌라>도 그렇고 그런 결을 모두 잘 살려낸 작가의 문체가 나는 참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그랬다. 좋았다는 점을 이렇게 강조를 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데, 부모독서동아리에서 이 책을 추천하고 함께 읽었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조심스러워하는 특유의 문체가 자신들과 잘 맞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찡해져서 중간중간 멈추기를 여러번 했구만. 독서모임 2년만에 처음으로 이 모임에 대해 회의적인 마음이 들었;;; 이 작품은 이러이러해서 요러요러한 부분이 마음에 쏘옥 들어오더라고요 등등 말하고 있는데 혼자만 열을 올리고 다른 이들의 냉담함이 느껴졌달까! 줌이라서 공기를 못 읽었을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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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7-08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백수린 작가님 여름의 빌라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작가님 심성이 엿보여 작가님 더 좋아졌던 책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감수성이 돋보였던 걸로 기억됩니다.
<시간의 궤적>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생각났던 작품이었어요. <여름의 빌라>도 그렇고...
한 알라디너님이 알려 주시던데 백 작가님은 베이커리도 잘 하신다더군요? 그래서 더 좋아하기로 했어요ㅋㅋㅋ
서로 책 취향이 다를 수 있긴한데, 백수린 작가는 다들 좋아할만한 작가님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군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이카루님 살짝 섭섭하셨을 것 같은 마음 조금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래도 2 년이면...짧은 시간은 아녔네요^^

icaru 2022-07-08 14:42   좋아요 1 | URL
이런 저의 감성과 잘 맞는 좋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순전 책나무님 덕분이어요!
부독넷 모임은 음. ㅎㅎㅎㅎ 책 취향은 다른데 사람들이 좋아서 계속 나가고 있었더랍니다. 아이 중학교 동급생 혹은 선배 엄마들 저 포함 아홉명으로 이루어진 모임인데요.
결정적으로 한분이 책 리뷰 나눌 때, 이런 문체가 재수없다고 하셔서 원래 직설하시는 분이지만, 괜히 제 마음에 비수가 찔린듯 흐흑 ㅋ 아무튼 말이죠~ 그 전 모임에서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라는 만화 에세이 이야기 나누면서, 제가 이해 못하겠다, 어쩌다 도리질 하며 시종 했던 게 그제야 떠오르면서, 하핫..
생각해 보니, 전 이 책도 그렇고, <친애하고 친애하는>도 그렇게 작가에 대한 이미 호감 100%를 갖고 독서를 했던 거 같긴 해요. 살림비용 이라는 책에서 추천글도 얼마나 백수린 작가가 잘 썼게요~

책읽는나무 2022-07-08 15:53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나요?
영광입니다^^
혹시 <문맹> 읽어보셨나요?
그 책도 백작가님 번역하셨던데 번역 후기문도 참 좋더군요.
찾아 보니 뒤라스 책 한 권도 번역했더라구요? 똑똑하기까지 한 백자가님인데!!!!ㅋㅋㅋ
근데 전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찾아서 읽어봐야 겠군요. 근데 읽었던가? 싶기도 한데요..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네요? 제목은 친근한데 말입니다.
전 <나의 할머니에게>의 백작가님 단편이 참 좋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 예전에 세월호 피해자 부모들의 심정을 기록한 책을 읽었을 때, 그 책 읽었다니까 책 좀 읽으시는 지인이 왜 그런 책을 읽느냐고 해서 좀 놀랐던 적이 기억 나네요.
한 번씩 나더러 책을 읽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고 해서...그런가? 싶다가도 알라딘 들어 오면 그래도 전 제가 좀 너무 쉽고, 흥미 위주의 평범한 책을 읽는 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알라딘 세상은 수준 높고, 읽기 쉽지 않은 책 읽으시는 분들 많잖아요?
근데 저는 오프라인에선 좀 이상한? 책 읽는 사람 취급 받아서 좀 뭐랄까??? 내가 독특한가? 좀 그런 생각 종종 하긴 합니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조금 위안을 받기도 하구요ㅋㅋㅋ
지금 책 한 권을 앞부분 조금 읽었는데 충격으로 확 몰입하여 읽었는데요. 6월 여성주의 책인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제목인데, 아마도 제 지인은 제목만 보고서도 왜 그런 책을 읽느냐고 그럴 것 같네요.
ㅋㅋㅋ
다른 면에선 나와 취향이나 성향이 정말 잘 맞는데 책 취향이나 드라마 취향이 많이 달라서 그냥 하회탈 표정 지음서 얘기 들어주기만 하고 있어요ㅋㅋㅋ
이카루님 독서클럽 얘기를 하시니 저도 갑자기 제 주변 지인 생각이 나서 몇 자 적는다는 게...그만^^

icaru 2022-07-11 21:55   좋아요 1 | URL
ㅋㅋ 하회탈 표정
저 문맹 읽었어요 책나무님 서재에 댓글도 달았었조 ㅋ 언어에 대한 절박함이랄까! 열심히 살아가는 작가에 대해 저절로 존경심이 차오르더라고요! 친애하고 친애하는 에도 할머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아무튼 백수린 작가를 알게 된 건 좋은 친구를 새로 사귄 느낌이랄까요 ㅋㅋㅋ

기억의집 2022-07-08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책표지가 매력적이라.. 읽을까 했던 작품이네요. 이십대 친구중에 이십대 후반에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고 하더니.. 착착착 준비해서 가더라고요. 알바해서 안 먹고 안 사 입고 하더니 천만원을 모아 갔는데, 그 친구가 형편이 안 좋아 제가 패딩 줄테니 그거 가져가 하고 나선 그 패딩을 약속 날짜에 못 줬어요. 그 친구 화가 나서 연락 없이 프랑스로 떠났다 했는데.. 그게 이십년이 넘는데 프랑스에서잘 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단편 소개 읽으니 그 때 그 일 생각 납니다.

icaru 2022-07-11 21:47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저도 표지가 맘에 들더라고요 ㅎㅎ 아이코 그런 사연이 있으시군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저는 문체랄까 하는게 딱 마음에 들었거든요 근데 다들 제맘같지는 않은지 ㅎㅎㅎ
긍데 저도 갑자기 기억님의 그 친구분 근황이 무척 궁금해지는데요~~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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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의 기원>이라고 쓰고, <악의 기원>이라고 읽는다.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로 먼저 만난 <7년의 밤>을 통해서는 ‘이 작가다’라는 확신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훗날 듣기로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들 하긴 했지만.) 그러던 내가 정유정의 작품 <완전한 행복>을 읽고, 나서야 눈빛을 빛내며 작가가 천작한 사이코패스 악인의 심리 세계로 함께 걸어 들어갔다. 작품을 다 읽고, 흡사 습작일기와도 같은 작가의 말을 읽고 나니,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라는 부분이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을 세 번을 다시 썼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대작가가 세 번째 다시 쓸 때는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작가인 ‘내’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인류의 2~3퍼센트는 이 사이코패스에 속한다고 한다. 물론 주인공 유진은 상위 1프로에 속한다. 이 책 속 유진처럼 폭발이 되려면 학대나 범죄 환경에 놓여 유전적 기질이 상호작용을 이룬다고 한다. 이 책의 영향이었는지 뭐가 먼저였는지 몰라도 읽으면서 금쪽 같은 내새끼의 역대급편을 몰아보기도 했다. 김혜수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소년심판을 보기도 했다. 악의 씨앗은 따로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답은? 아니 나도 아직은 모르겠다 이다. 그러나 작가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해주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가 인간의 악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본성 안의 ‘어두운 숲’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203~206쪽

불길 같은 흥분이 신경절을 타고 온몸으로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현기증이 났다. 내가 칼을 쥔 게 아니라 칼이 내 손을 거머쥐고 여자 안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저항이 용납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장력이었다. 눈앞이 와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이 저릿저릿해왔다. 음속을 돌파하는 듯한 충격이 몸을 덮쳐왔다. 머릿속 어디가에선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실낱같이 열려 있던 이쪽 세상과의 통로가 닫히는 소리였다. 나는 내가 다른 세상의 국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도, 돌아갈 의지가 없다는 것도.

이런 순간을 상상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나를 제어할 자신도 있었다. 정말로 이런 순간이 오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도 머리도, 오로지 교감 신경의 지시에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너무도 쉽고 빠르게 상상의 경계를 넘어버렸다.

세상이 사라졌다. 위장에서 요동치던 불길이 성욕처럼 아랫배로 방사됐다. 발화의 순간이었다. 감각의 대역폭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내 안의 눈으로 여자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전지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전능의 순간이었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다.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에 와서야 나는, 내가 살인을 저지르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기에 하구언 길의 위험한 놀이를 그만두라고 스스로 경고했겠지. 그런데도 계속했던 건, 상상의 경계를 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 사회적 자아가 견고하다고 믿었다. 즐거운 한때와 인생을 맞바꿀 만큼 분별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에 대한 과대평가, 나를 제어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어젯밤 운명의 손에 내 목을 내주게 만든 것이었다.



나는 다음 책은 <진이, 지니>로 정해 두고 대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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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6-20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이카루님!!♡
너무 반가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을 뻔~~ㅋㅋㅋ
또 이렇게 정유정 작가님 책을 들고 오셨군요?
전 ‘7 년의 밤‘ 소설 읽고, 궁금해서 영화를 찾아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또 소설은 읽으려고 사다 모으기만 하고, 그 중 ‘완전한 행복‘ 읽으려고 했었는데 말들이 많아 읽는 것을 계속 미루고 있었어요.
그러다 잊고 있었는데 이카루님 글 읽다 보니 정유정 작가님 소설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년 심판‘도 평이 좋던데~^^
암튼, 더워진 날씨에도 잘 지내고 계신 거죠?^^

icaru 2022-06-21 08:19   좋아요 1 | URL
오모낫!!! 이리도 반겨 주시공~~ !! 역시 구관이 명관입니당~~ 좀 이따 책나무님 서재도 마실가야겠습니당~ 뜸하게 와도 한결같은 곳은 이곳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정유정 님의 작품은 한번 꽂히니까 우아 가독성이 장난이 아니어요!! 쭉쭉 읽히더라고요!! ㅋㅋ 저도 작년에야 이 대열에 들어섰습니당 ^^

프레이야 2022-06-23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년의 밤으로 정유정 작가를 처음 읽었는데 당시 너무 충격적이라 밤새 읽었어요. 영화도 보았지만 소설이 더 무서웠어요. 이후 종의 기원은 낭독녹음도 한 도서에요. 대사 읽을 때 간접체험인 듯 묘한 흥분이 일더군요. 반가워요 이카루님 오랜만이죠^^

icaru 2022-06-23 21:58   좋아요 1 | URL
우아 종의 기원도 낭독하셨구나! 1인칭 주인공 내레이션인터라 더 뭔가 실감나셨겠어요 우아!! 묘한 흥분의 정체를 잘 알것같아요 ㅋㅋㅋ
 
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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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에 이르고자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노력한 어느 병적인 나르시스트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되려고 그런 것이겠지만, 고유정을 연상시키는 작품 속 주인공 신유나는 실제 모델이 아니며, 병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환자이다. 환자의 이야기를 읽은 것이다. 환자의 가족들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고, 조금은 늦었지만 극복해 나가는지를 보여 주는 소설.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겠다. 신유나의 광기의 시작은 어릴적 일시적인 가정환경에 의해 가족을 떠나 조부모님 댁에서 지내야 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핏줄이지만 내가 아닌 남이자 경쟁상대였던 언니와 달라던 처지에서 상대적 박탈감과 비극이 시작된 것.

원래 완전한 행복의 지침서에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나온다. 요즘 사회와 시대는 이 맥락을 잘못 읽어, 수상쩍은 징후들이 포착되는데 그것은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일 것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 믿는 순간 개인은 고유한 인간이 아닌 위험한 나르시스트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소설이랄까.

즐거운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신유나처럼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 이런 노력으로? 신유나가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것이었나? 남들과 비교할 때? 좀더 좋은 것? 있어보이는 것? 행복이란 실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가치 있는 목표나 기준에 이르렀을 때 얻을 수 있는 무엇일 것이다.

즐거운 인생은 자고로 스스로 창조해내야 한다. 타인에게 악영향을 주거나 다른 사람이 이룩한 그럴싸한 껍대기만 보고 그것을 쟁취하고자 그대로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를 즐기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 자존감이 바닥일 필요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다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인정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배워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찾아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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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2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르시스적 자기애를 좀 버리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리뷰랑 일맥상통하네요.

icaru 2022-06-21 08:07   좋아요 0 | URL
잉크님 말씀이 맞아요!! 요즘 어떻게... 행복하게 지내시나요? ㅎ 별일 없음 행복한 거다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ㅎㅎ 조용한 인생이요.

프레이야 2022-06-2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나왔을 때 바로 사서 읽었어요. 정유정을 좋아합니다. 종의 기원,에서도 그랬지만 하드보일드하더군요. 섬칫해 하며 읽었는데 우리 안의 어쩌면 그런 악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걸 드러내어 보여주려고 한 작가의 의도로 봐야할 것 같았어요. 완전한 행복은커녕 행복이란 게 있을까요. 신기루 같은 것^^

icaru 2022-06-23 21:56   좋아요 1 | URL
우아!!! 프레이야 님이 방문해 주셨다!! ^^ 완전한행복은 커녕이라는 말 전적으로 동감해요! 행복에 집착하지 않기로 해놓고도 ㅎㅎㅎ 하늘에 구멍이 나서 폭우가 쏟아지는 오늘 시원하다 라는 마음 한켠에 크고작은 물난리를 겪는사람들도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또 딸려오네요 ㅎㅎ ㅠㅠ 몇년전에 타레가의 ‘눈물‘‘을 기타동아리 발표무대에서 멋지게 들려 주었던 잘자란 큰따님 안부가 궁금할 적도 있었어요 하하하! 잘 지내셨죠?

프레이야 2022-06-23 23:09   좋아요 0 | URL
오모나 그걸 기억하시네요. 그 앤 이제 서른이 다 돼가네요. 요샌 기타도 안 치고 번역한다고 올인했어요. 세상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답니다 ^^
 
향수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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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와 어떤 장소나 그만의 냄새가 있다. 심지어는 우리집 강아지에게서도 아무리 샴푸질을 해도 그 녀석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질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낯선 장소에 떨어져도 전에 맡은 적이 있는 냄새를 맡게 되면, 마음이 편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생선 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태어나고 버려진 그르누이는 천성적으로 몸에 냄새를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는 냄새에 유난한 집착하며, 가히 후각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급기야 향수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그르누이에게는 야심이 하나 생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향수계의 스승인 발디니나 드뤼오가 자신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그를 죽도록 혹사시키거나 이용해 먹거나, 다른 동료나 세상 사람들이 그 자신을 지루한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 밖에 없다. 향수를 만드는 일. 그 향수로 말할 거 같으면, 그걸 뿌린 사람을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좋아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향수. 일단 그 향수를 만들면, 세상은 자기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모두가 자신의 편이 되니까. 정말 시작은 그래서였을까?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서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인가? 

세월이 흘러 드디어 그르누이가 원하는 대망의 향수를 완성하게 되었을 때, 그의 그동안의 살인 행각이 밝혀지고, 시민들이 모인 광장 앞에서 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다다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스물 여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이 살인마를 잔인하게 처형시켜야 한다며 아우성이던 사람들이 그르누이가 처형장에 당도한 순간, 처형이 다 뭔가, 그에게 연민과 호감을 느끼며 급기야 사랑하게 된다. 모두 그 향수 덕분이다.

그르누이가 꿈꾸던 것이 드디어 성공했다. 일생일대의 기다리던 그 감격의 순간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 그런데 가만있자 그렇지가 않다. 그르누이 마음이 달라졌다. 사람들로 사랑을 받는 이 상황이 혐오스럽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거지. 사람들은 진짜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태생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그 무엇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에게서 단지 그가 연출한 분위기만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르누이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르누이는 그가 언제나 증오 속에서만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유 고약해라. 

그가 만든 향수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존재가 들키지 않도록 하는 향수, 다른 사람에게 순진하고 가여운 느낌을 주는 향수, 다른 사람들에게 단정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향수.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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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3-27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너무 재밌게 만들어졌죠. 결말이 다소 충격적이죠.

icaru 2021-05-03 15:11   좋아요 1 | URL
우앗 두문불출한 사이에 댓글도 달아주셨네요. 이제야 확인이라니 ;;;; 저도 참~~
ott 서비스의 축복인지 재앙인지~ 요즘에 넷플릭스나 왓챠로 오랜전에 봤던 영화들을 보거나 엄두도 못 냈던 영화들을 보고 있는데요~ 향수는 원작으로 읽었지만 영화로는 아직 .. 마음의 준비가 덜 됐나봐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