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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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지인이 편해영과 황정은(지인은 이분을 조금 더 좋아하신다고) 작가를 좋아하고, 두 작가가 친구라는 TMI까지 곁들여서 얘기를 했었다. 나한테 추천하고 싶은 책 있냐고 물으니 발간 당시 그러니까 7~8년 전에 추천했던 편해영의 책이 이 책이다. 길게 설명해줬는데, 구덩이, 사위, 장모 이 세 키워드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달 도서모임에서 책을 선정하는데 멤버 누군가의 입에서 이 책 이름이 나왔다. 다른 멤버들이 제목을 검색하는데 잘 안 찾아지니까 제목이 뭐라구요? 라고 하시고, 나는 발음을 이야기 하는 줄 알고, "'홀로' 할 때 '홀'이요," 그랬더니 책 추천인이 "그게 아니고 구멍할 때 홀이에요." 무튼 홀은 홀이잖아! 라고 혼잣속으로 .. 좌중에게 " '더 홀'로 검색하시오들!" 


딴소리를 조금 하자면, 과거의 나는 (픽션에 한정하여) 책읽을 시간이 조금 있을 때, 좋아하는 작가 온다 리쿠를 포함하여 일본 미스터리를 즐겨 했었다. 국내 소설보다는 더 읽었던 것 같다. 물론 몇몇 국내 좋아하는 작가가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즐기면서 많이 읽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밀리의 서재로 굵직한 국내 작가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권여선 작가의 작품들이 내 산만한 읽기 회로를 꽉 붙들어 주는 것이었다. 책을 통 못 읽고 안 읽히는 정신산만한 상태이기도 해서 뭘 잡아도 끝까지 읽어내지를 못하는 와중이었는데, 단비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꿀같은 국내 작가의 소설들이 많다는 것을 또 새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늘 배운다. 모르는 게 참 많다는 걸 배운다. 굵직한 작가의 목록에 편해영 님도 넣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참 이렇게 늦게야 만나는 작가들이 있다. 


다시 더 홀로 돌아와서, 우리 인생의 기본값은 평범함의 균열이나, 일상의 안전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불안과 상실과 공포 같은 것. 그래선지 나는 이 소설 진짜 흥미롭게 잘 읽혔다.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 수도 있고,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수도 있고, 또 삶은 실패가 쌓일 뿐실패를 통해 나아지지는 않으니까. 라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아니야 인생은 그렇지 않아, 실패를 통해 성장해야지! 너 자신을 찾아야 해. ' 같은 서술로 독자에게 다가온다면 그또한 결이 다른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내 다리 가려운데 옆사람 허벅다리 긁는 표현으로 밖엔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데, 스포일러를 비껴가면서 굳이 말을 하자면, 나는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남편 오기의 아내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아내 생각은 제대로 정확히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남편 오기의 입에서 그려지는 것으로 추측할 뿐인데, 남편 오기가 아내의 진면목을 제대로 서술해 줄 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모습에 이입이 되는 것은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모르기는 뭘, 작가의 촘촘한 설계이지) 


또 훌쩍 넘어가서 독서모임에의 분위기를 전달하자면, 대개의 독자들이 그럴수도 있겠지만 우리 멤버들도 인간 내면의 불안, 은근한 폭력성 등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모호하고 차갑게 제시한 것에 대단히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마음의 불편함을 재미없음과 등가로 할 수 있는 것이냐고 그 마음씀을 만류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ㅋ 어쩌겠어 감상은 각자의 몫이니까. 


하기는 나도 부정적인 한마디를 보태기는 했다. 이혼숙려캠프에 나왔던 에피소드와 장치가 클리셰처럼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고. 클리셰일리가!  이혼숙려캠프는 이 작품이 나오고도 한참 후의 프로그램이고, 심지어 리얼다큐인데? 그냥 평범하다는 우리네의 삶이 기실 어이없고 남루한 것일뿐.


이 책이 또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이 끝나고, 뒤에 평론가의 해설이 붙지 않았다는 점이고, 또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작품 속에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거나 직접 언급한 참고 서적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아 요즘 소설들은 이렇게 저작권을 소상히 밝혀 주나요?)


참고 

-베른하르트 알브레히트, <탁터스>. 배명자 옮김, 한스미디어, 2014

-허연, <슬픈 빙하시대2>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대실 해밋, <<몰타의 매>>, 고정아 옮김, 열린책들, 2007

-제리 브로턴, <<욕망하는 지도>> 이창신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4

-에밀 졸라, <<전진하는 진실>>, 박명숙 옮김, 은행나무, 2014


이 소설은 한국 최초로 미국의 셜리 잭슨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셜리 잭슨(1916~1965)은 단편 〈추첨(The Lottery, 1948)〉으로 유명한 미국의 여성 작가라고 한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계열의 작가일까? 



77

마흔은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이였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개인 사업을 궁리하며 바깥으로 나돈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말하자면 사십대는 세상에 적응하거나 완벽하게 실패하는 분기점이 되는 시기였다.

 (...)

자괴를 이겨내기 위해 아내가 읽어준 허연의 시를 종종 떠올렸다. 사십대란 모든 죄가 잘 어울리는 나이라는 표현 다시 찾기 위해 허연의 시를 찾았지만, 제목에 사십대라거나 마흔이 붙은 시는 없었다. 시집을 전부 읽어나가다 예의 그 시를 찾았지만, 제목은 물론이고 본문에도 사십대라는 표현은 없었다.

시인의 나이로 미루어 대략 그정도의 나이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79

아내는 하려던 일에서 지속적으로 좌절했고, 스스로의 재능에 성취감을 느낀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렇더라도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여긴다면 좋은 일이지만, 아내는 어느 순간 달라졌다.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뭔가를 배우러 다니지도 않았고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87

오기가 생각하기에 아내의 불행은 그것이었다. 늘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언제나 그것을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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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2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홀로‘의 ‘홀‘을 구태여 ‘hole‘의 ‘홀‘로 수정해주시는 분은 문해력 센스가 영 고쟁이셔!!!ㅎㅎ
마음의 불편함을 재미없음으로 등가시키는 경험은 누구나 해 봄직 합니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나 할까요.

icaru 2025-09-21 12:30   좋아요 1 | URL
조직의 말버릇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는 긍정으로 처음엔 응수한 다음 그렇지만, 이렇게~.. 근데, 이 모임에서는 일단 ‘아니‘로 시작해요. 심지어 저도요. ㅋ 같은 맥락의 말을 하고 있으면서 아니, 이래요 ㅋ 저조차도 ㅋㅋ ˝마음의 불편함을 재미없음으로 등가시키는˝ 맞습니다. 그러네요. 내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한 캬. 사실 저도 그런 면이 있으면서 ㅎ 책 추천자도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가 먼저 이 책을 읽고 복잡해져서 같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고요~

잉크냄새 2025-10-17 21:29   좋아요 1 | URL
앗,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icaru 2025-10-17 22:03   좋아요 0 | URL
이런 어설픈 글에도 행운이 찾아들어와 주기도 하나봐요 와 ㅎㅎ 잉크님 아녔으면 몰랐었을 뻔 ㅎㅎ

2025-09-26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2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2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5-09-30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하도 익숙해서 이 책 이미 읽은줄로 알았거든요. 밑에 인용문 읽어보았더니, 저 이 책 안 읽었네요.
얼른 찾아가서 읽어봐야겠어요. 마흔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25-10-01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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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트러스트의 뜻은 (알다시피) 믿음이고, 또다른 의미로는 독점(금융과 기업 권력의 결합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를 모두 뜻한다. 독자가 라쇼몽 같은 서술 서사 기법을 좋아하고, 주식이나 대공황기 포함 미국 혹은 경제(경제, 금융, , 권력, 계급)에 관심이 다소 많이 있다면 꽤나 꿀잼으로 읽힐 소설이다. 동일한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반복적으로 서술한다. 장르를 다양화해가면서(총4부작 구성인데, 1부는 이 소설속의 또다른 소설로 주인공은 극중 실존 '베벨'임을 짐작하게 함, 2부는 베벨의 자서전, 3부는 베벨의 자서전을 대필해 준 작가의 회고록, 4부는 자서전의 주인공의 아내 밀드레드의 일기). 각 서술은 부분적으로 맞닿지만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어서 어느 한쪽의 이야기를 절대적 진실로 확정할 수 없게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 아내 밀드레드의 일기인 마지막 챕터가 진실에 가깝고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24년에 읽은 소설 중에 최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지속하고 있는 도서모임(큰애 중학교 어머니독서회)의 도서로 추천했다가 품평할 때 욕 좀 먹은 작품이다.

 “이게 소설이에요, 에세이예요, 자서전이에요, 회고록이에요? 뭐예요?”

 

인정한다. 1부는 재미없고 지루할 수 있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을 암묵적으로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속의 소설인데, 거의 고발이나 다름없게 인간미 없는 파렴치한 부자처럼 서술하고 있어, 정나미가 안 붙기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2부에 가면 실제 그 인물의 자서전을 읽게 된다. 1부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괴리감을 느끼면서.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소설이다. 그래서 초반부 지루하다는 분들에게는 조금 더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달라질 것이다 라고 말해 주었다.


23년에는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몰표를 받았다는 거 같다.

   

3부에서 옮기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3부는 거물급 주식 부자 주인공 베벨의 자서전을 써준 작가가 자서전을 대필했던 23세의 그 당시를 회고하는 회고록.

 

267

베벨 투자회사에서 시험과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할 기회가 생긴 한 가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권력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권위와 돈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그들을 둘러싼 침묵의 두께로 측정할 수 있다.

 

291

당시 저택은 가장 융성할 때였고, 내게 끼치도록 고안된 모든 영향을 끼쳤다. 저택은 내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나 자신이 어색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뭘 달라고 하는 입장도 아닌데 거지가 된 것 같았다. 그래, 난 압도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딸답게, 나는 역겨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저택 때문에든, 저택에 대한 나의 순종적인 반응에든.

나는 아이다가 처음 베벨의 저택에 발을 딛으며 느낀 감상을 고급 호텔의 로비에 들어설 때 느끼곤 한다. 특히 반얀트리나 워커힐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 어려운 호텔일수록 더.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난 자체가 내가 그곳을 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임을 증언하고, 언덕을 지나 마침내 호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비싼 외제차나, 평일 낮인데도 호텔의 야외 골프장에서 한가로이 골프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난 그걸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거지가 된 것 같아진다. 내겐 이게 역사가 우리를 배제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도 느껴졌다. 개인의 욕망이 무관해지는 압도적이고 철저한 배제.

 

 

311

나는 브루클린 공립도서관에서 그런 책 몇 권을 빌릴 수 있었고, 이어지는 주에는 혼란스럽고도 무계획적인 방식으로 그 책들을 훑었다. 별 체계 없이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건너뛰며 출처를 적지 않은 채 아무 내용이나 메모했다. 나는 문서 연구에 대해서나 서지 정보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이점이었다. 나의 거칠고 타협의 여지 없이 비체계적인 접근법 덕분에 책들은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남자들 각각의 개인적인 특징은--카네기의 자족적인 독실함, 그랜트의 근본적인 품위, 포드의 딱딱한 실용주의, 쿨리지의 수사적 검양 등등--당시 내가 생각하던 그들 모두의 공통점 앞에 무너져내렸다. ,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혹시 내 행동이 지나쳤다는 의미로 하는 말인가?”

마침내 내가 베벨을 화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혹시 내가 악의나 복수심에 따라 움직인다거나, 그보다 더 나쁘게는 잔인함에서 변태적인 전율을 찾는다는 얘기를 하는 건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 모든 일이 다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것입니다.” 당시에 나는 그 표현이 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인지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가 남이 자기 말을 인용하는 걸 좋아하다는 건 알았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현실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베너가 존재한 적도 없던 세상에서 베너의 흔적이 발견되다니, 얼마나 앞 뒤가 맞지 않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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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9-07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밀리의 서재에 둥둥 떠다니길래 일단 서재 보관함에 담아둔 책이었는데 까먹고 있었던 책이네요.ㅋㅋㅋ
이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이나 어딜 가는 곳마다 책표지가 늘 눈에 띄었었는데 icaru 님의 리뷰를 읽으니 읽으라는 그동안의 계시였던가? 싶은 맘이 드네요.ㅋㅋㅋ
와. 근데 어머니 독서회.독서 모임을 아직도 유지 중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다들^^

2025-09-07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둔색환시행
온다 리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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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쪽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그리 순조로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불안을 가득 안고 출발해서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어느새 막다른 길이 나오죠. 발이 걸려서 멈췄다가 제자리만 맴돌고 결국에는 팔방이 꽉 막힌 것 같아 절망합니다. 그러다 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죠.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야 당연히 힘들죠. 하지만 바로 그곳에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실감이 있고, 얼얼한 통증의 실체가 있는 겁니다. 그 현장의 공기의 감촉이라고 할까요? 저는 그 안에 있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510쪽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지내왔지. 제법 괜찮은 인생이었어. 어둠 속에서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인생을 간접 체험했으니까. 단 한사람의 인생치고는 호화롭다고 생각하지 않나? 현실이 중요하다 물리적으로도 도움 되는 것과 득을 보는 것이 최고다. 한 번뿐인 인생 후회없이 삽시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삽시다. 한데 말야 정말 그렇게 대단한 건가.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그리 훌륭한 건가?  대부분의 사람은 먹기 위해 자손을 남기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힘든 일을 겪어 가며 살아가지. 물론 힘든 일을 겪지 않는 사람도 있어. 그저 빈둥빈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긴 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힘든 일을 겪으며 기타 등등의 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지. 자네들이 충실하게 보내고 싶어 하는 자네들의 인생. 그 안에 진실은 없다고. 사실과 현실은 있어. 생활도 있고 감정도 있지. 가끔은 감동 같은 것도 조금은 있을지 모르지. 한데 진실은 없어. 인생 속에는 진실이 없네. 진실은 허구 속에서만 있네.   


온다 리쿠의 나이는 올해로 62세이다. 이 작품은 그녀가 15년 동안 써온 작품이고, 근래 들어 신작이기도 하다. 온다 리쿠의 작품이 늘 그렇듯, 제목이 왜이럼, 싶은데, 찾아봤더니 빛도 색도 흐린, 희미하고 애매한 세계.라는 뜻이라고. 수평선과 바다가 어렴풋이 녹아드는 풍경처럼, 애매함을 견디는 것이 어른의 자세라는 것을 전하고 싶은게 작가의 생각인 것 같다. 그가 50세 즈음 접어들었을 때의 깨달음과 맥이 닿았을수도 있다. 





특히 이 소설은 밀실 미스터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 내가 좋아하는 밀실 미스터리.) 본래 이 작가는 고풍스러운 저택이라거나 하는 어느 한 공간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했었는데, 이번에는 크루즈이다. 배안에서의 이야기. 크루즈 여행을 해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굳이 말하자면 간접경험해보는 재미도 있다. 좀 거추장스러울 듯 하지만, 드레스코드 이런 것도 있는 것 같더라. 

 저주받은 (영화나 연극으로 제작하려 했던 관련자의 상당수가 죽었음.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고사든)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의 사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이 책 관련자들을 크루즈에 모이게 한다. 이 소설과 관련된 꽤나 다양한 각계각층의 등장인물들은 각자 이야기를 제작자, 목격자, 혹은 해석자의 위치에서 진술하며 이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작품 창작이란 무엇인지,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거의 작가의 전신으로 보여지는 여성작가 고즈에가 소설의 전반부에서 후반부까지 주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작가는 재혼을 했는데, 재혼남편도 재혼을 한 것이고, 남편의 첫 아내는 저주받은 <밤이 끝나는 곳>을 각색하려던 작가였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고즈에와 결혼한 것. 


한마디로 이 소설의 메시지는 진실의 애매함을 견디라는 것, 허구의 힘이란 존재의 애매함과도 같아서 진실을 알려고 애쓸 게 아니라 그 과정을 견뎌라, 인 듯하다.  온다 리쿠도 나이가 들은게지.


651쪽까지 언제 달려가나 싶었는데, 도 끝을 보았기에 기록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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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06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온다 리쿠의 책은 추리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경게가 애매모호해서 개인적으로는 계속해서 찾아 읽지 않는것 같아요^^

icaru 2025-09-06 10:19   좋아요 0 | URL
저도 2014년도까지는 온다 리쿠를 일본 작가 중에 제일 좋아했었는데요~ 그 이후로는 조금은 덜 읽게 된달까 꿀벌과 천둥부터 버퍼링의 시작이었던 것같습니다. ㅎㅎ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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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2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속의 우수작 일렉트릭 픽션을 읽기 전까지는 알고 있지 않은 작가였다. 대상 수상자 예소연 작품에 대한 궁금함 혹은 갈망 때문에 거의 20(2005년 한강의 몽고반점 이후니까)만에 사봤던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니까.


이상문학학상 수상작품집 속의 우수작 

일렉트릭 픽션 중에서 


삶이란 이미 뭉쳐버린 반죽 같아서 이것과 저것으로 분해할 수는 없지만, 그는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 안에 있다고 느꼈다. 문 밖의 일은 문 안의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견디는 무엇이었다. 세상에는 반대로 사는 사람도 많았다. 문밖의 삶을 위하여 문 안에서는 몸뚱이를 씻기고 눕히는 일만 하는 사람들. 너무 많이 가졌거나 너무 적게 가졌기 때문이라 짐작하며, 그는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 헤아려보기도 했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을 다하는 이곳에서 자신이 505,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 사람, 배려와 무례가 섞인 문장들이 아주 조금 열어놓은 문,. 그 틈으로 나는 김수영처럼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느라 가구를 끌어 옮겼던 이, 자우림처럼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기분으로 옷을 벗어 던지며 흥얼거린,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믿었던 이를 돌아본다.”

 

일렉트릭 픽션에서는 1층의 필로티식 주차장을 빼고 2층부터 6층까지 스물다섯 가구쯤은 살지만 서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문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 도시 풍경에 흔한 빌라촌에 사는 ''는 에너지 공기업의 한 사무실에서 유일한 계약직으로 일한다. 8년째 재계약을 거듭하며 같은 곳에서 일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전 직원이 사옥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날, 나오지 않고 사무실을 지키더라도 아무도 왜 안 나왔냐고 묻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데, 주인공으로 추정(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할 수 있는 이 인물은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이는 단순히 악기를 배우는 것에서 넘어서 무기력한 삶에 작은 자극을 주는 소재로 설정되었다. 현대인의 무기력과 소외, 익명성의 빛과 어둠 등을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풀어냈기에.

8년째 계약직이라같은 자리에서 일하지만 이름조차 잘 불리지 않는 사람. 고용은 보장되지만, 그 보장이 곧 "갇힘"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안정에 안주해야 하나, 아니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나?’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작고 반복적인 하루가 쌓여가면서, 그 틈새에서 발견하는 작은 자유, 예기치 못한 변화의 불씨, 계약직 신분 자체가 현대 사회의 노동 현실, 제도와 개인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기도 하는데, ‘그런데 문 밖의 일은 문 안의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견디는 무엇이었다.’라고 했다.

 

일렉트린 픽션을 읽은 게 계기가 되어 찾아봤더니, 김기태는 이미 봤던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 소개되었던 그 작가였고, 더 찾아봤더니 24년 국제 도서전에서 특별히 핸드폰에 사진으로 담아두기까지 했었던 바로 그 책이었던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로 들어가서


 


두 사람의 인터네셔널 중에서


롤링 선더 러브

 

사람들이 클래식을 듣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음을 증류해서 색과 맛과 향을 없애기. ”

 

맹희는 자신의 따뜻하고 웃긴 친구에게 선물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조등

 

통계학이란 숫자 안에 숨은 메시지를 꺼내는 일이랍니다. 라는 옛교수의 말은 멋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메시지는 숫자 안에 숨은 것이 아니라 그가 참석하지 못하는 회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해진 결론에 봉사하도록 숫자를 가공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

 

회사에서는 업무적인 유능함이 인간적인 호감으로 이어지기 쉬웠다. ”

 

결혼이란 적령기에 옆에 있던 사람과 하는 것이며, 돈을 모으려면 꼭 해야 하지만 돈을 모아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죽음만큼이나 미룰수록 좋지만 사람 구실을 하려면 하긴 해야 하며,...”

 

 

전반적으로 현실적인 듯 보이면서도, 자조하는 듯 미묘한 어조의 문제적 평범함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진지한 테마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철저한 서비스 정신 같은 것도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말이 좀 싼티가 나는데, 포장하면 이런 것이다. 특정하고 숭고한 문학적 리얼리티를 추구하기 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사회적 고충이나 대중 문화의 코드 등을 잘 버무려 평범함이라는 콩코물을 뿌려 주어서, 독자로 하여금 고단한 인생살이에서 한발짝 물러나 일상을 관조하게 한다. 약간의 유머도 한 스푼 넣어서. 그렇다. 소설가는 퇴근길에 당신, 책을 보는 독자들이 훨씬 인생살이 힘들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해설에 붙은 이희우 평론가는 이 작품집의 키워드를 다음과 같이 찾았다.

통속성- <롤링 선더 러브>는 리얼 연애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대중적인유행과 접속하여 그 통속성을 사랑스럽게 다룬다.

핍진성- <무겁고 높은>의 고등학생 역도 선수 송희는 진로에 대한 일 때문에 승부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승패를 떠나 무게와 힘에 집중하려고 한다. 사물을 규정하는 관습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물의 작동 방식을 기술하는데, 송희는 바벨을 던질 때의 그 가벼운 느낌에 천착하고 의미를 규정한다.

무난함- 요즘말로 육각형 같은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조등>이다. 성실하고 유능하고 적당히 예의바르고 생애 주기에 따라 과제를 무난하게 수행하였고, 다음 미션, 그 다음 미션에 집중해 나간다. 하늘에서 떨어져 한쪽 전조등을 고장내 버린 기이하고 요상한 일이 있었어도, 이내 잊어버리고, 토끼같은 가족들이 있는 예쁜 풍경 속으로들어간다.

허구적이거나 모순된 보편성- <보편 교양>을 보면, 수험생 자녀들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하아- 제목처럼 보편적이지 못한 교육의 왜곡된 현실을 목도하게 한다. 곽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교양을 전달하고자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자신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의 내면의 갈등은 실제 현상 교사들의 어려움을 대변할 것이다.

 


나머지는 책에서 확인하시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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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8-30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이 책을 좋아해서 표지는 익숙한데 전 아직 읽어보기 전입니다. 8년째 계약직… 그 부분이 마음에 다 와닿네요. 8년째이든 15년째이든 모든 직장인은 결국 다 계약직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고용 보장이라는 건 이제 어디에서도 불가능한 일…

자주 오시니깐 참 좋아요! ☺️🤩😎

icaru 2025-08-30 17:13   좋아요 1 | URL
저도 근래들어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그런 것일수도 있을텐데, 뭐랄까요. 트렌디한 것을 반영한 작품에서도 읽는 재미뿐만 아니라 시사점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어서, 작가의 다음 작품을 막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ㅎㅎㅎ 맞아요 8년째 계약직이며 뭐 거의 정직이죠 ㅎㅎ 결국 다 계약직이죠..
거의 실시간 댓글 비슷하게 단발머리님께 글을 받으니까 우아! 되게 흥분되고 신선하네용

단발머리 2025-08-30 17:15   좋아요 1 | URL
자주 오시면 이런 흥분되고 신선한 순간들이 계약 연장됩니다. 최소 8년 이상이요 ㅋㅋㅋㅋㅋㅋㅋ

icaru 2025-08-30 17:19   좋아요 1 | URL
알라딘 마을서재 마케팅부장님이셔 ㅋㅋㅋ

단발머리 2025-08-30 17:22   좋아요 1 | URL
진짜요?…. icaru님이 그러시다면 그렇다고 해야겠지요 ㅋㅋㅋㅋ제가 많이 부족해서 요즘 쪼금 스산한가요? 다시 한 번! 파이어! 🔥🔥🔥

잉크냄새 2025-08-30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는 동인문학상이 이윤기의 <숨은그림찾기1> 딱 한 권 있는데 헌책방에서 모아보려고 해도 이상은 많은데 동인은 안 보이더군요. 판매부수의 차이인 걸까요?

그리고 마지막이 너무 시크합니다.
네, 나머지는 책에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icaru 2025-08-31 13:25   좋아요 0 | URL
이윤기 와아 진짜 추억의 이름이라는 ㅎㅎㅎㅎ 잉크님 서재에도 책이 꽤 ~~~ 많이 ..그래서 집주인 노릇을 하는 ㅎㅎ 저는 그렇거든요 ㅠㅠㅠㅠ 이 작가는 동인문학상 수상하면서 데뷔했고, 이상문학상은 근래 들어 우수상을 수상하는 듯해요. 동아일보 신출문예에 등단한것도 22년인가라는 것을 보면.. 제가 과제 완결력이 떨어져서 ㅎㅎㅎ 완결을 못 짓네요. 진짜 말하지 작품에서 할말이 더 많은데,,, 제가 방언 터질까봐 수습못할까봐 무서웠어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5-08-31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작년에 여기 저기서 추천하던 책이어서 눈에 익네요.
읽어봐야지. 하면서 그대로 잊혀져 있던 책입니다.ㅋㅋ
책 평을 보다가 어떤 분은 텔레비젼을 보는 것 같다는 평을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솔로 지옥>같은 상황도 있나보군요.
근데 엘리베이터를 탈 때의 조심스러움!ㅋㅋㅋ
앞집과 맞닥뜨리면 어색한 순간의 초단위가 부담스럽긴 합니다. 엘리베이터 이야긴 엄청 공감되네요.
그리고 8년 째 계약직..ㅜ.ㅜ
암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책이로군요.
읽여봐야겠군요.^^

icaru 2025-08-31 13:29   좋아요 1 | URL
와 책나무님 어떤분의 텔레비전 보는 것 같다는 말 찰떡인데요!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딱 알겠어요. 저와 책나무님 어떤분의 텔레비전 보는 것 같다는 말 찰떡인데요!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딱 알겠어요. 저는 이 작가가 정말 기존 작가들하고 달랐어요. 요즘 소설가들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어서 유사한 풍의 작가가 있을 수도 있을텐데 제가 모르는 걸수도 있겠지만 ㅋㅋㅋ 계약직 8년은 일렉트릭 픽션이라는 작품인데, 이상문학상 25년도 수상집에 있는 작품이어요. 이 책은 아니고,,, ^^ ㅋ제가 막 헷갈리게 써놔서... ㅋ 이 책(두 사람의 인터네셔널) 뿐만 아니라 써낸 모든 작품이 기념비적이었단 뜻으로 돌려서 이해하셔도 되용.. 일요일 오후 우리 젊은 친구들 점심 고민하시는 건 아니시죠 ㅋㅋㅋ 맞다구요? 저도... 언제 다 키우나요... 졸업하고 싶어라

 
살림 비용 데버라 리비 자전적 에세이 3부작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백수린 후기 / 플레이타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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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통합 도서관에 딱 한 권 밖에 없던 책을 빌렸던 터라 더 감질났던 거 같다. 드물게도 빌려 읽고 그냥 한 권 다시 구매한 책이다. 두께도 얇아서 마음에 쏙 든다.

작가는 이혼을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내는 일에 빗댄 다음 자신이 자아를 찾아 가는 과정이 동화 벽지"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퍼붓는 비를 맞아 가며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오르던 길에 그만 가방이 열려 장 봐 온 닭이 로드킬되는 걸 목격해야 했던 작가는 비에 쫄딱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그토록 피곤한 날에도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소 자조적으로 말한다. "나는 혼자였고 나는 자유였다. 관리되는 것도 거의 없고 수도나 전기 같은 기본 시설마저 수시로 끊기는 집에 따라붙는 막대한 관리비를 지불할 자유가 내게 있었다.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다해 가는 컴퓨터에 글을 쓸 자유가 내게 있었다."

기묘한 유의 수동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일터에서 더 많은 직무를 맡기 시작했다. 집에서 남편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한 것이다. 두 사람은 한집에 살면서도 별도로 생활하고 잠도 각방에서 잤다. 일터에서 까다롭고 보람찬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을 때 함께 영화를 보며 저녁 시간을 보낼 사람이 있음에 여자는 만족스러워했다.

현대 가정을 둘러싼 변덕스런 정치가 한층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 터였다. 내가 아는 혅대적이고 외관상 힘있어 보이는 여자 중의 다수가 다른 이들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도 보금자리에서 느껴야 마땅할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보다 사무실이나 다른 형태의 작업 공간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후자에선 그나마 누군가의 와이프 이상의 지위를 누리기 때문이었다.

라고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내 인생에 대입해 본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눈치를 보는 인생인 것이다. 휴식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나로 존재하는 이 삶이 수고로워 죽겠는데,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생각이 많아지는 나.

가부장제 바깥에서 다 형태의 공동체를 꿈꿀 자유, 누구누구의 아내나 엄마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존재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내가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다가 작은 구리 주전자에 터키 커피를 끓여 그 잔에 붓고 은 뚜껑을 덮곤 한다는 얘기를 하직 가게의 막내 형제에게 털어놓지는 못했다. 이건 내 글쓰기 일과의 작은 의례가 되었다. 자정부터 다음 날 이른 시간까지 진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지면에서도 어김없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글쓰기용 의자에서 한 발도 안 움직이고 밤을 거니는 방랑자가 된다. 낮보다 부드럽고 조용하고 슬프고 차분한 밤, 그리고 그 밤을 채우는 소리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배관에서 올라오는 소리,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삐그덕대는 바닥 마룻장과 유령처럼 오가는 야간 버스 소리"

백수련 님의 에필로그


"손재주가 아주 좋았고, 집 안을 누구보다 깨끗하게 정리했고, 식혜나 고추장 같은 음식을 맛있게 만들었지만 할머니는 내겐 그런 것들을 조금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작가가 된 후 새벽까지 거실에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앉아 있을 때가 많았는데,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로 나온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아직도 그러고 있냐"하며 안쓰러워했다. "얼른 가서 자라, 병 날라"하지만 졸음 섞인 할머니의 목소리에 당신이 감히 꿈꿔 볼 수 없었던 어떤 고귀한 일을 하는 손녀딸을 기특해하는 마음이 한밤의 꽃향기처럼 비밀스럽게 배어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것밖에는 몰랐던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물질적인 삶'과는 다른, 할머니의 눈에 보다 숭고해 보이는 정신적 세계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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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06-1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님 , 정말 오랜만. 잘 지내셨지요?

icaru 2023-06-14 14:50   좋아요 0 | URL
우아 나인님 너무나 반갑고 궁금한 아이디예요!!
잘 지내시죠? 아드님은 이제 성년이 다 되었겠어요!!
저 종종 들어가서 사진과 페이퍼를 본답니다~

최근에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 격조하였지만 ㅎㅎ

icaru 2023-06-14 14:51   좋아요 0 | URL
나인 님이 유튭으로 올리셨던 피아노 연주도 가끔 생각하는데요 저는 ㅋㅋ

책읽는나무 2023-06-1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드디어!!
마침내!!!^^

icaru 2023-06-16 16:13   좋아요 1 | URL
ㅋㅋㅋ 또 이 책하면 책나무님!!!

2023-08-04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23-08-0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아공 ㅎㅎㅎ

단발머리 2025-08-1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u님, 안녕하세요?
제게 항상 긍정과 칭찬의 댓글을 달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예전 글 읽다가 달아주신 댓글 보고 인사하러 왔어요. 별일 없이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가장 큰 적은 역시나 한여름 무더위구요.
항상 건강하세요, icaru님~~ 심심하시면 한 번씩 놀러 오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