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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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왜 피부색이 다를까요? 과학적으로 피부의 어두운 물질인 멜라닌 세포(melanocyte) 때문입니다. 피부는 햇빛 속에 포함된 자외선에 약합니다. 그래서 피부의 멜라닌 세포가 자외선을 차단하는 일종의 보호막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외선의 양이 많을수록 피부색은 검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외선의 양이 적을수록 피부색은 하얗게 됩니다. 문제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인종(人種)은 주변 환경에 적응한 결과입니다.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피부색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부색으로 하나만으로 인종을 구별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 사회역학의 관심을 대중적으로 불러일으킨 김승섭은『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앎’에 질문하며 새로운 현재적인 가치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환원주의(還元主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환원주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여러 원인 중에 어느 하나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령, 피부색이 검다고 해서 모두 흑인종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피부색이더라도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몸에 새겨진 인종에 대한 지식을 사회역학으로 전복하고 있습니다.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문제에 대한 사회적 원인을 해독하는 것입니다. 인종을 피부색으로 구별하는 것도 모자라 ‘한 방울의 법칙(One drop rule)’은 인종이 사회학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당혹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방울은 ‘피(blood)’를 말합니다. 이 책에는 오랫동안 자신이 백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여행을 갈 목적으로 여권을 만들다가 출생증명서에 흑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여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유인즉, 그녀의 몇 세대 부모에게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섞여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흐른다는 근거에 있었습니다. 정작 그녀의 몸에 32분의 29에 해당하는 백인 피는 무시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인종에 대한 계산은 비과학적이며 사회적으로 ‘인종차별’이라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차별을 당한 사람 스스로 미래가 없는 열등한 사람,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계속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가면서 우리 몸 또한 비정상이 됩니다. 인종에 대한 콤플렉스, 트라우마와 같은 모든 부정적인 사실들은 사회적 폭력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몸에 둘러싼 문제를 ‘몸’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의 바깥이 아닌 안쪽에만 찾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몸의 상처를 몸 내부에서 찾아 치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픈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픈 몸을 치료하면 건강한 몸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몸속의 암을 수술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는 ‘암’이라는 결과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암의 발생 원인을 제대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쁜 습관으로 인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자는 몸에 각인된 불편한 진실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과학의 언어’로 질문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언어는 경험에서 얻어졌다고 하더라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상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경험을 판단의 언어라고 한다면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있습니다. 판단의 언어는 경험에 따라 직관적이며 틀릴 수 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판단의 언어는 천동설(天動說)이며 과학의 언어는 지동설(地動說)이라는 견해를 알게 됩니다. 즉,

 

그래서 더욱, 오늘날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이나 직접 경험했다는 이유로 확신하는 사실들 역시 우리 시대의 천동성일 가능성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비판적 사고는 인류가 과거의 상식과 맞서 싸우며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던 거대한 원동력이었습니다(p 317).


<언스플래쉬>


그렇습니다. 지동설은 과거 천동설과 맞서 싸우며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려는 원동력에서 나왔습니다. 저자는 인간(몸)과 사회의 역학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이나 상식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실제로는 이것이 마치 천동설과 다르지 않아 인간의 감각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弱者)들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차별적인 지식에 대해 수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지식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아픈 몸을 예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더욱 어제 없던 것이 오늘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불편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과연 정상적인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상적인 사회는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정의롭고 평등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법과 제도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정의롭고 평등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역학을 공부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절박한 문제를 연구하는 지식인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이야기하다보니 자신마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고뇌를 저자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진정한 열정과 용기가 아닐까요?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지식인의 표상』에서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양심을 말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문가적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적 양심입니다. 전문가적 태도는 지식인이 권력이나 권위에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마추어 양심은 권력이나 권위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또한 전문가적 태도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라면 아마추어 양심은 해야 할 일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저자는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들과 아픔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합니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고통을 결코 쉽지 않는 과학의 언어로 꺼내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도는 것처럼 그의 아마추어적 양심이 한순간에도 멈추질 않길 바랍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꼭 필요한 관심과 열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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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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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때때로 새 작품을 시작하려는데 도저히 진전이 없을 때가 있다.……나는 일어서서 파리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 너는 예전에도 썼고 지금도 쓸 수 있어. 네가 할 일은 단지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는 거야.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하나 써봐.’ 그래서 마침내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고 나면 나는 거기서부터 계속 진행해나갔다.

-헤밍웨이

 

예전에 내가 자란 마을은 집집마다 소가 어슬렁거리는 시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빈 섬이 되었다. 고향이라는 인연이 차츰 사그라지면서 시골은 낯선 사람들이 잠깐씩 거주하는 빌라 단지가 되었다. 그래서 고향에 갔다 올 때마다 마음이 다쳤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더 이상 절망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골이라는 메시지는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얼마나 버티는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손홍규의『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곱씹어 읽으면서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흐릿했던 사연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모르게 꼭꼭 숨어 있었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사연들이었다. 만약에 사연들이 없다고 한다면 굳이 고향이라는 이야기꽃은 피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꽃은 마음속에서 반짝반짝 핀다. 그러니 작가 말대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이 이야기들은 너무나 절망스러운데도 아름답다. 놀랍게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를 한다.


작가의 안부 인사를 받을 때마다 시골의 논밭이 떠올랐고, 가난했으나 가난을 모르며 재밌게 놀던 동네 친구들이 떠올랐고, 이른 새벽 아궁이에 불 피우며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에서야 ‘아짐찮은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될 정도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작가의 안부 인사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일상을 마주하면서 환상이 되고 만다.


그런데 아짐찮은 시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비밀이란 단순히 말하면 우리가 언제까지나 환상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살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환상이 아닌 일상적으로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은 소설이 될 수 있다. 작가의 표현을 빌려보면 ‘아름다운 소설’이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빈틈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소설가에는 삶의 흔적들 모두가 문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삶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다. 다시 말하면 삶이 곧 소설이며 소설이 곧 삶이다. 가령, ‘아짐찮다.’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사전이 아닌 삶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네 인생을 담은 이야기꽃이다. 동시에 소설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회의하는 작가의 모습을 진솔하게 볼 수 있다.


매번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작가 자신의 내면 고백을 들으면서 진실한 문장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었다. 살다보면 우리 몸 어딘가에는 고통이 박혀 있을 것이다. 몸이 애써 품고 있는 상처와 아픔을 들여다보면 몸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삶의 육중한 무게를 견뎌내면서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쳐 더욱 몸이 아프다는 걸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절망도 그러하다. 절망을 깊이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반성에 가깝다는 것이다. 해서 더욱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읽는 내내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 되어야 하는 너무 아름다운 삶의 비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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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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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레프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는 전혀 고민해 본 적어 없었던 인생 전체에 대한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고민을 읽다보면 어느새 우리 모두의 절박한 문제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단지 머나먼 러시아 이야기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군대에 가려고 한 안드레이 공작은 평화스러운 생각으로 보였다. 전쟁의 반대가 곧 평화라는 오래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이 바라는 평화는 달랐다. 전쟁을 반대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을 위대한 영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려보면, "보나파르트도 일을 하고 한 걸음씩 자기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는 자유로웠어.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리고 그는 목적을 달성했어."

 

다른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건방진 작자'라고 했다. 혁명을 하는 것은 괜찮은데 권력을 잡고 나서부터는 자유와 평등은 공허한 호언장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그래서 더욱 쓸모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가 군대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목적, 다시 말하면 자기 의지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기 의지의 문제는 영웅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래서 인생 전체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않을까?

 

한편, 자신의 의지 없이 방탕했던 피예르는 아내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투를 벌어야 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리메이슨의 형제단인 노인과 대화하면서 그토록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 하느님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가 불행했던 것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다. 하느님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살아가면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눈에 보일 수 있다.

 

사람들은 불행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떻게든 불행을 피하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딜레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종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때로는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지혜의 극한인지 모른다. 만약에 하느님이 없다면 굳이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에 대한 구원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최고의 지혜와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구원이지 않을까? 최고의 지혜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정화해야 한다. 이유인즉,"최고의 지혜와 진리는 우리가 마시고 싶어 하는 가장 깨끗한 액체"와 같으며 이 깨끗한 액체를 더러운 그릇에 담아놓으면 깨끗함을 판단할 수 없다. 오직 마음의 양심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은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다. 불행을 사용하다보면 슬픔만 있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전쟁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적이 동지가 될 수도 있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총과 칼이 없을 뿐 질투와 연민으로 상대방을 구속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는 언젠가 상처라는 부메랑이 되고 만다.


그러면 불행을 사용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톨스토이의 시선으로 보면 '역사의 도구'다. 그가 나폴레옹을 역사의 노예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무의식으로는 역사의 도구가 되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도구에 맞는 역사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톨스토이가 말하는 새로운 역사학은 관찰 대상이 다르다. 이것은 운동의 절대성을 인간의 이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운동의 연속성을 우리가 자의대로 단편적으로 분할하면서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류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미분과 적분이라는 방법을 통해 역사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작가는 전쟁과 사랑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인간이라는 역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영원한 고통일수도 있다. 그리고 영원한 고통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다르면서도 사랑이라는 경이로움을 깨닫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좋아하니까 아름다운 것이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은 물방울 같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합쳐지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세상의 고통 속에서, 죄 없이 받는 고통 속에서 삶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가장 커다란 기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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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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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 대결은 결국 알파고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신의 한수는 통하지 않았다. 대신에 신의 한수를 보여준 것은 알파고였다. 알파고의 알고리즘의 수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러면서도 인공지능의 묘수였다. 좁게는 인간 대 인공지능의 바둑 대결을 흥미롭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둑판을 벗어나면 인공지능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깨닫게 된다. 당장 우리는 인공지능과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만 한다. sf 영화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점차로 현실화되고 있다. 그 순간, “과학은 장례식만큼 진보한다”는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이 말이 떠올랐다.

 

알파고의 시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시대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유발 하라리의『호모 데우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장례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장례식을 치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쓸모없는 계급’이라는 잉여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날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의 지배자가 될 정도로 쓸모있는 계급이었다. 농업혁명으로 동물들을 침묵시킨 동시에 신을 믿었다. 그리고 과학혁명으로 신을 침묵시키고는 인본주의를 믿었다. 이제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기우제를 지낼 필요는 없다. 과학은 신성을 넘어섰다. 문제는 인간마저 넘어서면서 미래에 인간이 쓸모없는 계급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본주의의 제1계명은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좀 더 말하면 과거에는 신이 맡았던 역할을 인본주의에서는 인간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 영혼,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 생명과학, 뇌과학은 호모 사피엔스가 더 이상 신비한 블랙박스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어떤 결정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도 자유의지가 아니라 유전자, 호르몬이라는 전기화학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유의지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도 불투명하다. 개인의 사전적인 의미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몸이 약 37개조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인간은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호모 데우스는 나눠질 수 없는 존재에 가깝다. 신이 된 인간을 과학적으로만 설명하다보니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인간의 비밀을 해독한다고 해도 인간이 산소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도스토옙스키의『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지하인’이 2×2=4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면, 2×2=5는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호모 데우스는 종교적이다. 저자는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을 말했다. 여기서 비유기체 합성은 바로 신성(divinity)을 획득하는 것이다.

 

미래에 호모 데우스가 신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놀랍다. 호모 사피엔스는 기독교, 힌두교, 불교 등 종교와 계약을 맺고 예수, 알라, 부처라는 그들의 이름을 창조했다. 하지만 호모 데우스에게는 유일신 같은 이름이 없다. 대신에 정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호모 데우스에게 새로운 종교는 ‘데이터 교(敎)’다. 다시 말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인본주의 종교를 통해 영적 여행을 했지만 호모 데우스는 기술 종교를 통해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데이터 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정보의 흐름이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호모 데우스가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가 되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데이터의 처리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지식이다. 지식은 석유, 태양 같은 에너지와 차원이 다르다. 보통 에너지는 사용하면 고갈되는데 지식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늘어나는 성장하는 자원이다. 하지만 우리의 뇌가 막대한 지식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떠한 지혜나 정보다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정보의 흐름이 막혀 버려 우리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이럴 때 데이터는 정보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면서 정보를 자유롭게 하고는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할 수 있게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지식이나 지혜 같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보다는 데이터라는 전산 알고리즘을 신뢰하게 된다.

 

저자가 호모 데우스(신이 된 인간)의 정체를 광범위하게 파악하려는 것도 여기에 있다. 21세기 첨단과학으로 펼쳐지는 삶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즉,

 

이 책이 현시점에 우리가 처한 조건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그 얽매임에서 벗어나 다르게 행동하고, 미래에 대해 훨씬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목표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시나리오를 예측함으로써 우리의 지평을 좁히는 대신, 지평을 넓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542~543p).

 

“역사에는 공백이 없다.”는 저자의 주장처럼 4차 산업혁명의 지각변동으로 지구촌이 들썩거리고 있다. 경험이나 감정이 아닌 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호모 데우스가 우리의 미래이며 가능성이다. 삶의 모든 권위가 ‘나’가 아닌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좀처럼 답할 수 없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얽매임 때문일까?『호모 데우스』를 읽으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장례식을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틀린 것이 아니다. 저자의 지식 생산은 역사의 공백을 없앴는데 탁월했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가 사랑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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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워크 - 강렬한 몰입, 최고의 성과
칼 뉴포트 지음, 김태훈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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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기계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결은 놀라운 결과였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인공지능 알파고가 승리했다. 상상했던 현실이 무너지는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에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다가올 미래에는 인간과 기계가 경쟁해야 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주목했다. 사회가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되는 속도에 따라 제 4차 산업혁명이 우리 사회의 일상 언어가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 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제2의 기계 시대를 말한다. 지난 날 산업혁명의 증기기관이 제1의 기계 시대였다면 제2의 기계 시대는 디지털 기술이다. 기계가 디지털 기술로 진보하면서 그만큼 스마트(smart)해졌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이라는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셈법은 복잡해졌다.인공지능 기계들이 효율적으로 일하게 되면서 무인(無人) 시스템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라는 부수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을 다해야 한다. 당장 일자리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할 일이 불가피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기술만을 배우면 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딥 러닝(Deep Learing)’의 기술이다. 컴퓨터가 학습을 통해 인간처럼 생각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꾸로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다. 생각하지 않고 있다.

 

 

취업 전망을 좋게 하거나 디지털 격차를 줄이기 위해 우리 또한 스마트해진 게 사실이다. 단순히 생활의 편리함을 생각한다면 스마트한 기술 없이는 제대로 사는 게 어려우니까. 우리는 좀처럼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스마트폰이 고장이 나서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단 몇 분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악몽에 시달려야만 하는지 모른다. 디지털 기계를 오래 동안 사용하는 만큼 우리는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디지터스(Homo Digitus)’다. 그러면 호모 디지터스가 우리 모두를 위한 미래일까? 우리가 디지털 기계의 소비자라고 하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디지털 기계의 생산자가 되고 싶다면 칼 뉴포트의 실용적이고 설득력 있는 조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뉴욕 타임스 북 리뷰에 따르면 칼 뉴포트는 자기계발의 특별한 작가다.『딥 워크(DEEP WORK)』을 읽어보면 작가의 통찰은 예리하고 정확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호모 디지터스의 미래를 찬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극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들은 아주 일상적이다. 이 책의 부제는 '강렬한 몰입, 최고의 성과‘다. 디지털 기계가 마법적 도구라고 한다면 딥 워크, 즉 몰입은 인간적인 도구다. 마법적 도구가 손과 눈의 예술이라면 인간적인 도구는 마음의 예술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미 있는 행동보다 오히려 의미 없는 행동들을 훨씬 많이 한다. 과거에는 TV가 바보상자였다면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 바보상자다. 만약에 스마트폰이라는 기계와 그것에 붙여진 이름이 같다고 하면 우리는 굳이 어떠한 고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의 중독은 우리에게는 최악의 삶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작가의 스마트한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 디펜시스(homo sapiens deepensis)’로 거듭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몰입이 어려 모로 최선이기 때문이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몰입은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한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육체나 정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일 때 최고의 순간들이 찾아온다.”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최고의 순간은 몰입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을 하면서 최고의 성과를 달성하려면 우리는 몰입과 마주해야만 한다. 예전처럼 오래 일만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깊이 일하면서 집중해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상적인 직장 생활의 ‘상시 접속 문화(culture of connectivity)’가 최선이 아님을 보여준다. 직원들이 바쁘게 일해야 하는 모습이 곧 그 회사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결코 최고의 성과를 달성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직장에서 최소 저항을 극복하기 최선의 방법으로 딥 워크의 생산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딥 워크를 실행하기 위해서 하나, 몰두하라. 둘, 무료함을 받아들여라. 셋, 소셜 미디어를 끊어라. 넷, 피상적 작업을 차단하라는 것이다.

 

 

가령, 산만함을 일으키는 인터넷을 현명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안식일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금식(禁食)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성공하기 힘들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보다 구체적인 방법은 인터넷 안식일의 대안이다. 즉 “가끔 산만함에서 벗어나 집중하는 시간을 정할 것이 아니라 가끔 집중에서 벗어나 산만함을 허용하는 시간을 정하자”(154p)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을 쓰는 시간을 정해 놓고는 나머지 시간은 인터넷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인터넷은 자극이 높은 탓에 그 시간동안 우리의 활동은 가치가 낮아지게 된다.

 

 

또 하나, ‘연락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라.’고 한다. 파상적 작업이란 “지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종종 다른 곳에 정신을 팔면서 수행하는 부수적 작업”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파상적 작업은 업무를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이메일을 관리하는 데도 시간낭비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목적에 맞는 발신자를 제한하는 ‘발신자 필터’, 평범한 답신이 아닌 좀 더 ‘절차 중심 접근법’, 답신을 쓸 가치가 최소화라고 한다면 ‘회신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조언은 이메일이 일으키는 스트레스를 크게 약화시킨다. 따라서 연락하기 어려운 사람은 새로운 의사소통이며 가치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늘 바쁘게 일한다. 그래서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가장 어렵다. 하지만『딥 워크』의 대답은 스마트하다. 바로 몰입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나 알고 있으나 정작 누구나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며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몰입이 최고의 성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앞서 말했듯 몰입은 정신적 체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두뇌를 렌즈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부터 나는 일을 할 때 노동자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기로 했다. ‘생산자의 시간표, 매니저의 시간표(Maker's Schedule, Manager's Schedule)’라는 유명한 글을 쓴 폴 그레이엄은 창조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생산자’의 시간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생산자의 시간이란 오랫동안 방해받지 않는 업무 시간을 의미한다. 내 방식대로라면 생산자의 시간은 곧 스마트한 시간이다. 쉽지 않겠지만 하루에 1~2시간은 연락하기 힘든 사람이 되어보는 것이다. 최선은 그런 것이다.

 

# 딥 워크, 몰입, 호모사피엔스디펜시스, 생산자의 시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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