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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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왜 피부색이 다를까요? 과학적으로 피부의 어두운 물질인 멜라닌 세포(melanocyte) 때문입니다. 피부는 햇빛 속에 포함된 자외선에 약합니다. 그래서 피부의 멜라닌 세포가 자외선을 차단하는 일종의 보호막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외선의 양이 많을수록 피부색은 검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외선의 양이 적을수록 피부색은 하얗게 됩니다. 문제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인종(人種)은 주변 환경에 적응한 결과입니다.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피부색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부색으로 하나만으로 인종을 구별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 사회역학의 관심을 대중적으로 불러일으킨 김승섭은『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앎’에 질문하며 새로운 현재적인 가치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환원주의(還元主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환원주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여러 원인 중에 어느 하나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령, 피부색이 검다고 해서 모두 흑인종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피부색이더라도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몸에 새겨진 인종에 대한 지식을 사회역학으로 전복하고 있습니다.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문제에 대한 사회적 원인을 해독하는 것입니다. 인종을 피부색으로 구별하는 것도 모자라 ‘한 방울의 법칙(One drop rule)’은 인종이 사회학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당혹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방울은 ‘피(blood)’를 말합니다. 이 책에는 오랫동안 자신이 백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여행을 갈 목적으로 여권을 만들다가 출생증명서에 흑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여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유인즉, 그녀의 몇 세대 부모에게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섞여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흐른다는 근거에 있었습니다. 정작 그녀의 몸에 32분의 29에 해당하는 백인 피는 무시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인종에 대한 계산은 비과학적이며 사회적으로 ‘인종차별’이라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차별을 당한 사람 스스로 미래가 없는 열등한 사람,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계속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가면서 우리 몸 또한 비정상이 됩니다. 인종에 대한 콤플렉스, 트라우마와 같은 모든 부정적인 사실들은 사회적 폭력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몸에 둘러싼 문제를 ‘몸’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의 바깥이 아닌 안쪽에만 찾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몸의 상처를 몸 내부에서 찾아 치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픈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픈 몸을 치료하면 건강한 몸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몸속의 암을 수술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는 ‘암’이라는 결과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암의 발생 원인을 제대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쁜 습관으로 인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자는 몸에 각인된 불편한 진실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과학의 언어’로 질문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언어는 경험에서 얻어졌다고 하더라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상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경험을 판단의 언어라고 한다면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있습니다. 판단의 언어는 경험에 따라 직관적이며 틀릴 수 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판단의 언어는 천동설(天動說)이며 과학의 언어는 지동설(地動說)이라는 견해를 알게 됩니다. 즉,

 

그래서 더욱, 오늘날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이나 직접 경험했다는 이유로 확신하는 사실들 역시 우리 시대의 천동성일 가능성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비판적 사고는 인류가 과거의 상식과 맞서 싸우며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던 거대한 원동력이었습니다(p 317).


<언스플래쉬>


그렇습니다. 지동설은 과거 천동설과 맞서 싸우며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려는 원동력에서 나왔습니다. 저자는 인간(몸)과 사회의 역학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이나 상식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실제로는 이것이 마치 천동설과 다르지 않아 인간의 감각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弱者)들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차별적인 지식에 대해 수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지식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아픈 몸을 예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더욱 어제 없던 것이 오늘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불편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과연 정상적인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상적인 사회는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정의롭고 평등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법과 제도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정의롭고 평등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역학을 공부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절박한 문제를 연구하는 지식인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이야기하다보니 자신마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고뇌를 저자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진정한 열정과 용기가 아닐까요?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지식인의 표상』에서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양심을 말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문가적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적 양심입니다. 전문가적 태도는 지식인이 권력이나 권위에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마추어 양심은 권력이나 권위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또한 전문가적 태도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라면 아마추어 양심은 해야 할 일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저자는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들과 아픔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합니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고통을 결코 쉽지 않는 과학의 언어로 꺼내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도는 것처럼 그의 아마추어적 양심이 한순간에도 멈추질 않길 바랍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꼭 필요한 관심과 열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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