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치지 않고 때리지 않고 아이를 변화시키는 비결 소리치지 않고 때리지 않고 아이를 변화시키는 비결 1
제리 위코프 외 지음, 서현정 옮김 / 명진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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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엊그제 아장아장 걸어 다녔는데 지금은 방 안에서 달리기를 한다. 아이가 재밌고 신나게 노는 모습은 좋다. 그러나 방 안에서 항상 달리기를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고집을 부려 나를 화나게 한다. ' 다음에 하면 안 될까?' 혹은 ' 말 안 들으면 혼난다'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막무가내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한계에 이른 초보 아빠는 소리치거나 때리기도 한다. 그러면 그 순간 아이는 조용해진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일까? 우리가 아이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아기가 균형있게 성장해야 하는데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에게 화를 내면 예전에는 조용했는데 이제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큰 소리로 울어대거나 소리친다. 그것도 모자라 손에 닿는 아무 물건을 내던지고 아빠인 나를 때린다.

일찍이 루소는 <에밀>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문제에 대해서 생각지 않은 체 어린이가 어른이 된 후의 문제만을 생각하려 한다고, 말했다. 되돌아 보면 내가 아이에게 버룻처럼 소리치거나 때렸던 것은 아이을 아이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른으로 인식했던 감정의 충돌이 아니었을까, 반성해보았다. 이것이 아이에게 상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지 이 책에 나와 있는 ' 소리치지 않고 때리지 않는' 것이 현명한 부모라는 말에 공감했다. 앞서 말했듯 아이가 제 멋대로 말썽을 부리면 나도 모르게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몇 번 때리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글썽이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애처로워 마음이 아팠다. 내가 회조리같은 것을 손에 들기만 해도 아이는 지레 겁부터 먹고 엄마에게 달려가곤 했다.

이 책을 통해 무엇이 문제임을 하나 둘 알았다. 아이의 성장에 맞게 아이를 변화시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무엇을 생각하는 것도 모른 체 자꾸만 안 된다고 하니 아이는 아이대로 울고 나는 나대로 화만 내며 서로 전쟁을 했다. 하지만 '혼자말하기 훈련'을 하고 나서는 어른이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와  눈높이를 같이 했다. 그러자 아이가 놀랍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책에 나와 있는 아이를 변하시키는 비결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속도을 체크하면서 나름대로 전략을 세운 그들은 현명한 부모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많은 부모들이  시행착오을 반복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사소해보일 정도이지만 친철하면서도 섬세하게 아이를 변화시키는 비결을 들려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 해답은 간단하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비결들은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매우 좋은 비결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현명한 부모여야 한다. 초보 부모라고 해서 아이를 초보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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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쇼 선생님께 보림문학선 3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이승민 그림, 선우미정 옮김 / 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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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아이는 성장한다. 하지만 아이가 생각하는 마음은 성장의 속도에 비해 느리다. 성장의 고통이 따른다. <정글북>에 나오는 오스카는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 다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는 오스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하곤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좋고 나쁘다는 판단이 확실하지 않는 아이에게 이것해라 저것해라 간섭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잣대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면에서 <헨쇼 선생님께>는 아이와 눈높이를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아이의 성장을 밝고 건강하게 도와주고 있다.  아이는 밀랍인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리 보츠처럼 우리는 어릴 적 편지와 일기를 써 본 경험이 있다. 여기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방과 후에 해야 하는 과제물이다. 반면에 나머지 하나는 일상을 보내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담아낸 고백록일 것이다.  이중에서 편지와 일기가 고백록에 가까울수록 감동의 폭이 그만큼 넓다. 조금이라도 솔직하지 못하면 글이 엉망이 되고 만다.

우리는 리  보츠의 편지와 일기를 읽으면서 아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부모가 이혼했고 전학도 여러 번 했다.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가 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리 보츠는 혼자서 허허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헨쇼 선생님께 편지를 쓰면서부터 리 보츠는 서서히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나간다.

돌이켜 보면 리 보츠의 글쓰기는 자신의 고민을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리 보츠에게 헨쇼 선생님은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이상형이다. 어쩌면 엄마 아빠가 이랬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헨쇼 선생님은 일기를 써보라고 한다. 편지가 세상을 향한 글쓰기라면 일기는 자신을 향한 글쓰기라는 미세한 차이를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리 보츠의 고민이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렇듯 작가는 리 보츠의 성장하는 과정을 독특하게 글쓰기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헨쇼 선생님으로 부터 글을 잘쓰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해나가면서 치료하는 형식이다. 즉 많이 읽고 많이 듣고 편지를 쓰듯 일기를 써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답게' 써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리 보츠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균치 소년이 아니라 진짜 작가에게 칭찬을 받는 소년으로 바뀐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아이에게 글쓰기 효과가 만점이라는 것이다. 진솔한 글쓰기는 자신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문제점을 발견하고 토해내게 한다. 동시에 문제점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 한 발 한 발 성장한다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맛있는 도시락을 훔쳐먹는 도둑때문에 도시락에 도난경보기를 만든다. 아이의 행동이 장난스럽지만 우리가 좀 더 리 보츠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다행이다'는 놀라운 발견을 스스로 하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오스카는 '자라야 한다'로 결정을 내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 책에서 리 보츠는 글을 쓰면서 원하는 것이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빠가 그립지만 더 이상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해도 소용없음을 받아들인다. 이렇듯 아이가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은 가슴 시리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더욱 성숙해진다. 어느 새  마음이 훈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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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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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스포츠 하나인 월드컵. 월드컵 이야기가 나오면 지구는 어느 때보다 흥분의 도가니다. 세계적인 스타들을 한 자리에 볼 수 있으니 그렇다. 그들의 멋진 플레이에서 우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90분 내내 우리는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공을 따라간다. 90분이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그라운드 안에서는 축구공 없이는 축구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라운드 밖에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얼마든지 축구공 없이 축구를 할 수 있다. 우리는 발(足 )이 아니라 입으로 축구를 할 수 있다. 왜냐면 문화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는『문화의 패턴』에서 ‘집단의 단체적인 행동은 각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 세계이며 그 세계로부터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1억 원 당첨작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억’ 소리가 나온다. 한마디로 억세게 좋았다가 억세게 나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렇게 억센 남자는 축구 때문에 아내와 결혼했다. 그러나 동시에 축구 때문에 아내가 결혼했다. 와/가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것은 남자의 말대로 인생이 엉망이 될 정도다. 전자가 나와 아내가 한 몸이지만 후자는 한 몸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일까? 축구를 단순히 보고 즐기는 시대는 사라졌다. 축구를 분석하고 전략 전술을 구사한다. 때로는 선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감독이 된다. 녹색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축구는 이제 더 이상 축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축구는 예술이며 발칙한 상상력이다. 무엇보다도 축구는 계속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아내가 남자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이다. 축구와 아내의 결혼이라는 팽팽한 긴장감속에서 터져 나오는 남자의 ‘억’소리는 아내의 강력한 태클의 메아리다.


작가는 남녀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이라는 문제를 축구라는 스포츠를 통해서 명쾌하게 그리고 있다. 남녀는 각각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로셀로나라는 팀을 이끌며 더블 매치 게임을 펼친다. 남자의 슬로건이 지구 방위대며 여자의 슬로건은 클럽, 이상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남자가 일방적으로 공격한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결정적인 한 골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아내의 반격이 시작된다. 골기퍼를 2명이나 기용하고 두톱체제로 공격력을 배가시킨다. 또한 심판을 매수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내의 반칙과 변칙적인 공격 앞에 남자의 공격은 골대를 벗어난다.


그래도 남자는 공격을 멈출 수 없다. 비록 남자의 공격이 아내의 토탈사커 내지 빗장수비에 걸려 실패하더라도 한 골이면 험난한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서 한 골을 넣는다면 남자는 아내보다 한 골을 더 넣으려고 한다. 남자는 아내를 지키려고 한다. 남자는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며 결혼을 방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처다부제라는 매우 도발적인 전술로 남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내의 공격은 느슨하면서도 치명적이다.


21세기는 혼돈의 시대다.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가치들이 해체되고 있다. 아내가 바라는 일처다부제라는 모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진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내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미래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아내는 남자의 현재라는 관습에 대한 거침없는 도전을 하는 셈이다. 남자의 현재는 펠레같은 축구 황제다. 하지만 아내는 지단같은 아트사커다.


누가 승리할까? 월드컵 결승전을 보는 듯한 긴장감이 있고 속도감도 있다. 그리고 골키퍼와 일대일 부딪치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결승전은 곧 남녀의 사랑싸움이다. 결승전에는 무승부가 없다. 우리는 승리하는 쪽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결승골은 위험하다. 그래서일까? 박수가 나올 듯 하면서도 위험해서 좀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티스두타가 “모든 것은 무너져도 우리에게 항상 축구가 있다”라고 했듯이 이 책은 “문학이 흥행에 실패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항상 소설이 있다”는 말처럼 소설이 축구처럼 흥미진진하길 바란다. 작가는 소설의 빈틈을 노리면서 우리에게 젊고 날카로운 패스를 연거푸 한다. 그래서 우리가 골대를 향하여 통쾌하게 슛을 날릴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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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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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구달이 우리 곁에 또 한 번 왔다. 70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비행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녀의 열정은 무엇 때문일까? 일찍이 침팬지를 연구하는 여류학자로 알려진 탓에 ‘침팬지 엄마’라고 불렸다. 그녀를 통해 침팬지도 육식을 한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번에 나온『희망의 밥상』을 통해 그녀는 채식주의가 되어 있었다. 채식주의가 단순히 육식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채식주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선택이 곧 우리의 희망이며 보다 나은 자연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기 위한 것이다.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으로 알려진 레이첼 카슨의『침묵의 봄』이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살충제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 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인 구달의『희망의 밥상』은 그 연장선에 있다. 가령, 1헥타르의 농지에서 각각 다른 곡물을 재배했을 때 그 곡물을 식량으로 1년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스물두 명이었다. 반면에 소나 양을 길러 고기를 생산하면 단지 한 두 명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수를 담는 플라스틱 병의 물질인 PET 1kg를 생산하기 위해서 1.75kg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동식물들이 겪고 있는 실체를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축을 사육하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만행이 사실일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밥상의 혁명이라는 메시지를 지구상에 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패스트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보다 빨리 살려고 한다. 우리의 밥상도 예외는 아니다. 햄버거로 불리는 이른바 패스트푸드 음식은 물론 유전자변형 식물이 우리의 입맛을 바꿔버렸다. 앞서 말했듯이 자연이 침묵하는 사이에 그 빈자리를 사람들의 탐욕과 오만함으로 인해 우리의 밥상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값싸고 먹기 좋다는 식으로 우리의 눈이 흐려져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서히 작은 혁명들이 일어나고 있다.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쇼핑 센터에서 각종 음식재료를 산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유기농이니 친환경이 하는 상품들이 아니면 지갑을 열지 않는다.
또한 육식 대신에 채식이 웰빙 바람을 타고 있다. 우리의 밥상이 슬로푸드로 바뀌고 있다. 서서히 우리의 생활이 슬로 라이프로 접어들고 있다. 그만큼 우리 밥상 옆에『희망의 밥상』을 놓아두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소비자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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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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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를 보면 ‘나는 분홍만큼이나 바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분홍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만큼 남성에게 순종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연애소설에 나오는 가련한 이미지로 미화되고 만다. 달콤해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
그리고 엄마의 길로 접어들면 여성의 삶은 더욱 차가운 현실적이 된다. 대부분의 여성이 결혼하고 나면 직장을 포기해야 한다. 말이 포기인지 거의 강압적이다. 여성의 능력이 우수하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정과 육아 문제에 있어 여성의 멍에는 무겁기만 하다. 이제 여성은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여성이라면 정말로 이런 삶이 행복할까?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이제까지 남성주의 패턴은 불편한 것이 없다. 너무나 낭만적이다 보니 때로는 에로티즘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불편한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남자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별 속에서 남자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모험적이다. 우선 마초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문제를 여성이 아닌 남성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하게 메아리만 울리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말 것이다.
저자는『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를 통해서 허울뿐인 남성의 페미니스트를 경계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반성을 한다. 좀 더 현실적으로 여성의 눈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야만 여성이 어떤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불평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문제에 있어 얼마 전 타계한 미국 여성 운동가 베티 프리던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가정은 안락한 포로수용소’라고 했다. 그냥 듣고 있자면 속이 거북할 정도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여성에게는 성의 정체성이 위태롭게 흔들린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베티 프리던은『여성의 신비』에서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신비스러움으로 인해 여성의 사회생활을 억압하고 대신에 집에서 헌신하도록 하여 우울증을 만들어내는 남성 중심의 코드 때문이다. 우리 사는 세상의 절반이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의 지배가 당연시되고 현실에서는 여성은 화려하고 섹시할 뿐이다. 그러니 여성이 그녀 말대로 이름모를 병에 걸리는 것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저자가 단순히 이름모를 병을 고치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남성중심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을 파헤쳐 우리 사회가 페미니스트들에게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여성의 문제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문제를 남성이 함께 고민해보야 한다.
시대는 계속 바뀌고 있는데 시대정신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시대는 고여 있는 물과 같다. 이것이 저자가 페미니스트를 대하는 자세다. 고여 있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다. 여성의 문제를 페미니스트만 고민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보통 남성들도 일상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여성화되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의 고민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다. 더 이상 여성에게 가정이 안락한 포로수용소가 아니었으면 한다.
저자 말대로 남성, 여성 모두가 생긴 대로 사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또한 성의 도덕보다는 성의 문란이 더 좋다는 저자의 말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깨뜨리는 것이다.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여성주의가 정말로 남성을 살리는 것이다. 여성의 삶이 과거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성의 사회참여는 불평등하다. 이런 불평등속에서 여성의 삶은 슬픈 포로수용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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