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 프로이트도 놓친 꿈에 관한 15가지 진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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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인생의 3분의 1 동안 잠을 자면서 보낸다. 동시에 꿈을 꾼다. 그런데도 꿈에서 깨어나면 꿈을 제대로 기억하기란 힘들다. 또 하나, 꿈의 파편은 아주 다양하더라도 불완전하며 엉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정말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정도는 프로이트가『꿈의 해석』에서 말한 대로 꿈을 무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꿈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반복하는 셈이다.

 

그런데 슈테판 클라인은 다양한 꿈의 분석을 통해『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바로 “꿈의 힘을 활용하면 인생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과학을 비롯하여 철학, 정신분석을 넘나들며 꿈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이해하기 쉽게 펼치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꿈을 무시한다. 밤보다는 낮이 우리 생활의 주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을 무시하면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영혼을 느낄 수도 없으며 만날 수도 없게 된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삶의 되돌림이 아니라 연장선이다. 그런 만큼 꿈의 의식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만약에 꿈이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낮의 잔재(Tagesrete)’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삶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관찰자가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얼마든지 꿈꾸는 동안에도 미래를 능동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꿈이 과거를 해석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꿈은 과거인 동시에 현재며 미래다. 놀랍게도 우리는 꿈꾸면서도 학습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새로운 지식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발상과 기억과 지각이 오로지 낮의 삶 덕분에 가능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잠은 휴식기간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상태의 연쇄이며, 그 상태에서 뇌는 과거의 흔적을 정리하고 미래의 과제를 준비하고 앎을 획득한다. 꿈꾸기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꿈을 통해 알게 되는 수수께끼 중에는 ‘불안하니까 꿈을 꾼다’는 것이다. 꿈을 꾸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유인즉 꿈을 지배하는 진정한 주체는 감정이며 꿈에 나타난 시각적 이미지들은 환영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환영에 상징적 의미를 두거나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에 알맞은 진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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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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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처럼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블로그에다 쓰다 보니 이런 바람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서투르고 빈약한 내 문장에 비해 작가의 문장은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는 탄탄한 문장을 읽으면 답답했던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들며 잠들어 있던 오감을 깨어나게 한다. 그러니 작가처럼 글을 쓰려고 한 시절을 보낼 때 좋은 문장을 만나는 것은 오랜 벗을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문장을 좋게 하는 규칙 혹은 기술과 방법은 많다. 하지만 좋은 문장은 설득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다듬고 저렇게 다듬었다면 비록 규칙에는 어긋나지 않겠지만 죽은 문장일 뿐이다. 규칙에 대한 집착이 좋은 문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문장을 좋게 하는 규칙이라고 하더라도 ‘글맛’이 없다고 하면 좋은 문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맛이란 글을 읽게 만드는 것이다. 글맛이 나야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읽고 나서도 충분히 배부를 수 있게 된다.

 

안대회의『문장의 품격』을 읽으면서 ‘글맛’이라는 의미를 깨달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 책에는 허균, 이용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옥, 정약용 등 조선의 문장가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소개되고 있다. 이른바 ‘조선의 파워블로그’로 불리는 그들이 말하는 문장의 품격이란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이다. 좋은 문장이라고 해서 꼭 논리적으로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문장을 비논리적으로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르를 떠나서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진실하고 담백하게 쓰는 것이다.

 

조선 명문가의 문장은 파격적이다. 기존의 낡은 사상과 정서를 답습하는 고문(古文)이 아니었다. 대신에 아주 다양한 일상적인 모습을 개성이 넘치며 실험적으로 그려낸 소품(小品)이다. 가령, 문호(文豪)인 동시에 문제적 작가인 박지원의 산문은 그만의 개성이 넘치는 문체를 보여 ‘연암체(燕巖體)’라고 불릴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박지원에게 글의 격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글의 소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었다. 오직 먹물에 듬뿍 묻힌 법고창신(法古昌新)이라는 창작력으로 독특한 색채를 창조해냈다.

 

한편으로,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부른 이덕무는 ‘문단을 뒤흔든 낯선 문장’이라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창작해냈다. 그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잘 표현한 ‘나비의 비유’를 잠시 감상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짜에 바짝 다가서고 몹시 닮은 것이라 해도 하나같이 제이(第二)의 자리에 머무는 법. 핍진(逼眞)하고 닮았다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다시 한 번 똑똑히 살펴보라! 본연의 바탕을 먼저 볼 수 있어야 가짜에 막힘을 당하지 않는다. 온갖 가지 수많은 물상(物象)은 이 나비의 비유를 법으로 삼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7인의 조선 문장가의 문장은 모호한 구석이 없다. 인생의 치열함에서 건져올 린 생각이 투명하고 분명하다. 허균은 비판적이며 이옥은 희작적이다. 이렇듯 조선의 파워블로그 7인은 다른 글쓰기를 보이면서 다른 삶을 살았다. 문장은 글쓴이의 생각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장은 글쓴이의 인격이며 인격은 곧 문장의 품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문장은 좋은 인격이며 동시에 좋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고전 산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좋은 예술이란 박제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입맛’이 나야 한다. 맛이 없으면 우리는 먹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글이 아니면 우리는 읽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글맛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입맛’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입맛이 글맛에 대한 최고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 출판사에서 제공해준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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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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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이제 10년은 너무 긴 세월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변하는 세상을 볼 때마다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러니 격변하는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거대한 변화의 역사를 겪은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는 불행한 현실 구조에서 살고 있다. 국민 소득이 적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고 해서 세상이 좀 더 행복하거나 좀 더 정의로워졌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화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는 소설가 위화의『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어야만 하는지 궁금하다. 위화의 삶에는 마오쩌둥의 흑백 시대부터 등소평의 컬러 시대까지 지난 30년의 중국의 일상적 모습에 담긴 역사적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다. 흑백 시대에는 정치논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컬러시대에는 경제논리였다. 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발생하는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날카로워지면 개인은 국가의 운명에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작가의 실천적 삶은 현재 우리 사회가 참으로 뼈아프게 요청하는 ‘공공 지식인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민(人民),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10 개의 키워드를 통해 중국의 고통을 들려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작가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알 수 없었을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낯선 단어를 생각한다면 중국의 고통은 만만치 않은 주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의 무게에 눌리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세태 한탄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10개의 단어는 그 시대의 신산한 풍경을 마주하게 했으며 중국의 고통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보게 했다.

 

그 다른 각도 중에 있어 무엇보다도 삶과 글쓰기는 끝없이 나뉘는 갈림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353p)

 

남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어느 정도 상관성이 있는지 모호하다. 그럼에도 남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공감하게 되면 그 순간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은 투명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우리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중국의 고통이 그의 고통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참혹하다고 해도 작가의 글쓰기는 버릴 수 없거나 버려서도 안 되는 희망이다 . 삶이 곧 글쓰기가 되며 그런 순간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소통의 언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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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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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때문이었을까? 먹는 것을 볼 때마다 당장에라도 먹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알려진 맛집을 굳이 찾아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꿀맛’도 부족해 ‘핵꿀맛’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는 배고픔을 참을 만한 용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만큼 먹는 것은 삶의 시작이기 때문다. 어디 그뿐인가. 음식을 먹었던 그 시간만큼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먹방의 시대에서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꿀맛나는 음식을 먹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그렇다.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이 먹는 게 비슷비슷하다. 먹방은 살아갈 방법이 아니다. 단지, 그냥 먹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황석영이 담아 낸 음식이야기『황석영의 밥도둑』은 요새 유행하는 먹방이 아니었다. 먹방의 관심사는 앞서 말했듯 꿀맛에 있다. 꿀맛이 아니면 ‘노맛’. 지금의 입맛으로 따지면 이 책은 분명 노맛에 가깝다. 하지만 노맛은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영영 식지 않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돌이켜보면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음식을 만든 사람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음식의 낭만성을 찾고자하는 것은 궁핍한 삶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한지 모른다. 그러니 궁핍하고 절박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음식은 ‘밥맛’을 소박하게 채워주었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특별한 밥맛을 가지고 있다. 특별함은 곧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이 생각날 때마다 맨 먼저 우리 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추억이 앞선다. 혹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떠나갈 사람에 대한 추억이다. 바로 추억의 존재는 어머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어 그때를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어보아도 그 밥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눈물을 감출 수 없어 결국에는 ‘눈물맛’을 먹고야 만다. 그렇게 눈물맛을 먹고 나서도 또 무슨 그리움을 만들어줄 것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맛을 만들고 만다.

 

 

한편, 눈물맛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준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면, 외로울 때, 힘들 때, 아플 때, 슬플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정든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음식들은 저자가 견뎌온 아픈 시간을 위로해주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삶의 한 소절씩 간절한 입맛을 내는 음식을 더욱 감사해한다. 비록 지금은 먹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음식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먹지 않는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이 책이 밥도둑이야기라고 해서 단순히 먹거리에 대한 여행에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애틋한 음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까. 저자의 굴곡진 인생에 비한다면 나의 생활은 얼마가 될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런 만큼 저자의 음식에 대한 감정은 특별하다. 더구나 이런 음식에 대한 감정들이 장소 그리고 사람으로 이어지는 정서적인 유대감을 생각하면 내가 모르는 아득한 또 따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홍어, 돼지 삼겹살, 김치 세 가지를 합쳐 별미가 되는 ‘홍탁삼합(洪濁三合)’처럼 음식, 장소, 사람의 절묘한 조합이 곧 ‘음식삼합(飮食三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황석영의 산문은 딱히 목적을 정하지 않고 발길이 이끌리는 대로 걷다가 문득 발견하게 되는 음식의 흔적들이다. 평범함 음식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향해 발휘하는 감정선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골똘히 짚어보게 한다. 작가는 음식으로 세상과 교감하고 이해하면서 ‘무엇보다도 음식은 사람끼리의 관계이며, 시간에 얹힌 기억들의 촉매’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자꾸만 새로워지는 느낌은 음식과 사람의 공통점은 ‘밥도둑’이라는 것이다. 음식과 사람이 밥도둑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는 사랑할 수 없지 않을까?

 

 

인상파 거장 폴 세잔은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위해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고 한다. 우리 문학의 거장 황석영도 음식이 썩을 때까지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음식을 먹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생생하여 먹방으로 굳어버린 꿀맛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음식의 가치를 ‘밥도둑’즉, 밥을 함께 나눠 먹는 것에서 찾는다. 이유인즉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음식적이면서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밥도둑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더할 수 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밥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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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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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니 때때로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날이 있지요.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을 정도이면 외로움을 탓할 수만 없게 됩니다. 어느 순간 지친 어깨 위로 내려앉은 단단해진 무력감을 싹둑싹둑 잘라내고 싶어도 오히려 절망감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핍한 삶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의 참 좋은 감정입니다. 참 좋은 감정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이 행복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못 견딥니다. 그래서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법륜 스님의 행복』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행복하려고 야단법석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왜 행복 때문에 몹쓸 병을 앓는 건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무섭기도 합니다. 그만큼 행복해야만 하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행복하길 원하면서 생겨나는 또다른 문제는 행복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깊이가 없는 행복, 즉 단순한 행복은 욕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스님의 즉문즉설(卽問卽說)에 따르면 단순한 행복이라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더라도 행복이 단순해지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자리(自利)’에서 비롯됩니다. 자기에게만 좋다는 이기심 때문에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면에서 행복을 보면 자리와 이타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진실로 행복할 수 없으며, ‘자리리타(自利利他)’여야 비로소 온전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돕는 것이 나한테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행복은 남을 자기처럼 여길 때 가슴이 뿌듯하며 감동을 안겨줍니다.


『법륜 스님의 행복』을 읽으면 읽을수록 몸에 좋다는 것을 느낍니다. 스님의 맑고 담백한 목소리는 '온전한 행복'을 지니고 있어 까맣게 타 들어간 마음이 회복됩니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입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도 입맛이 좋다는 것만 먹은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작 입맛이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입맛이 없을 때 스님은 말합니다. 행복은 입맛이 아니라 몸이 중심이라는 것을. 좀 더 말하자면 우리는 성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어제 행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마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무한반복 됩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으며 오늘은 내일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행복을 저버릴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행복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는 행복해야만 합니다. 삶은 영원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겸손함으로 오늘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해맑은 미소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두 가지 감정을 깨달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내 마음이 더 잘 보였습니다. 바로 ‘내려놓음’과 ‘20%’입니다. 부끄럽게도 내려놓음을 마치 현실회피인양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은 마음의 집착을 비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현실회피는 마음의 집착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착의 질량은 가볍고 무겁습니다. 질량의 가벼움은 곧 ‘원(願)’이며, 질량의 무거움은 곧 ‘욕심(慾心)’입니다. 그리고 하루의 20%는 자기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비록 80%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더라도 20%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람되고 재밌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버트런드 러셀은 “객관적으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 행복하다고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때 그것은 치유의 시간인 동시에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스님의 말씀처럼 행복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님은 행복을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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