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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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는 죽음 앞에서도 그 마음이 강철과 같고,

의사는 위기에 처해도 그 기세가 구름과 같다.

-안중근

 

김훈의『하얼빈』은 절박한 소설이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겠다는 소망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작가의 고백이 마음을 관통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을 치욕적인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의 정치적 거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민족의 영웅이다. 안중근의 절박함은 개인적인 뼈를 갉는 아픔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절박함이었다. 그래서 일까?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소용돌이치는 안중근의 영혼은 대담한 정신으로 충만한 구름이 되어 휘몰아쳤다.


안중근의 삶과 죽음은 짧았다. 그러나 불의(不義)에 맞서는 운명은 강렬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쏜 세 발의 총알은 명중했다. 비록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마음가짐이 흐트러지면 결코 대업은 실패했을 것이다. 국가의 안위를 노심초사했던 그는 가족, 종교 그리고 목숨의 연민을 버리면서까지 묵묵히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켰다. 불의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총알은 불의의 과녁을 빗나갔을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에서 이미 알 수 있듯 일본의 동양평화는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강자의 논리였다. 나라 잃은 고단한 국민들이 무참히 희생이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금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격동의 시대에서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대한독립이라는 일편단심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러 나섰고 그래서 복수에 성공했으니 복수의 정의로움은 구국의 영웅다웠다. 


그러나 작가가 소설에서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안중근의 역사적인 사건을 낱낱이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느린 속도로 안중근의 행적을따라가면서 그의 마지막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마지막은 일본이 정치적인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한 말쑥한 논리에 따르면 결코 ‘파락호(破落戶)’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본 법정에서 당당히 말한 대로 무지몽매한 “자객”이 아니라 “의병 참모중장”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우리의 심장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235p)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안중근의 생생한 비장함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작가의 표현대로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307p)는 것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31세 안중근이 가슴에 품었던 절박함의 베일이 벗겨지고,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오래된 질문에 골몰하면서 어떤 새로운 다짐이 필요한가? 라는 절박함을 깨달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 풍진시대(風塵時代). 시대의 장벽을 넘어 김훈의『하얼빈』을 통해 다시 살아난 안중근의 영혼은 ‘청춘의 언어’이며, 우리 모두의 정신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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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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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몰랐으면 어땠을까? 앞도, 뒤도, 옆도 바라보지 않는 시에 대한 궁극을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의 즐거움이 곧 삶의 행복이며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삶을 나는 견딜 수 없었고 방황의 그림자를 끝내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행히 고통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시의 의지가 있었기에 이 세계를 단단히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시가 우리 몸 밖으로 내 몰린 삭막한 풍경에서 막상스 페르민의『눈』에는 하염없이 시를 쓰는 남자, 유코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삶을 본능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시인이 하나의 직업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삶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였으니까.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그는 마음속에 눈을 품고 사는 존재였다. 눈은 시이며, 시는 눈이었다.


그는 눈의 깃든 아름다움을 말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최고의 시인이었다.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시인의 길을 걸어가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의 시에 색(色)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생겨났다. 순백색이라고 믿었던 눈의 아름다움은 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빛과 색을 똑같이 받아들이지만 놀랍게도 빛이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라면 색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가 빛난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은 일이고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망적으로 하얗기만” 하는 절망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어쩌면 한 편의 시에 색이 있다면 그 색이 시가 될 것이라는 자각은 눈의 여섯 가지 특징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은 색채의 대가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통해 가능해졌다. 이제까지 무채색이었던 그의 순백의 시는 무지개 색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막상스 페르민의『눈』은 ‘한 편의 소설이면서 한 편의 시’가 되는 이야기라 쉽게 읽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소세키 선생이 예상과는 달리 눈먼 화가여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강도는 오히려 낮은 편이다. 그 보다는 “사랑이란 가장 어려운 예술”은 매우 친숙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소세키 선생과 곡예사의 사랑은 내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가는 낭만적인 보통의 시간에다 죽음으로 슬픔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나 멈추지 않고 사랑을 확장시킨다. 글을 쓰는 것, 춤을 추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들의 결정적인 진실은 사랑의 투사라는 것. 그러면서 예술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둘러싼 비밀 하나를 펼쳐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곡예사의 예술’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100p)


돌이켜보면, 예술가들은 특별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특별한 운명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 있듯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곡예사처럼 아름다움의 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만 한다. 


시를 몰랐으면 좋았을까? 아니다. 시를 몰랐으면 아름다움을 끝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이며 꿈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팽팽한 줄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과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사랑과 예술은 닮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눈부시게 빛나는 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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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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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작은 죽음이다. 죽음은 큰 고통이다.

-하이데거


황시운의『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페이지 한 장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마침표가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삶의 최전선이라는 게 있다.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또 하나의 시작이 없다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허무하게 마침표로 끝났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불행을 몸소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는 순간이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슬픔이 택배’로 오거나 이 책의 저자의 말처럼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날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 더욱 믿을 수 없었다. 하반신이 마비되고 그것으로도 가혹한 운명은 부족했는지 신경병증성 통증에 시달린다고 하면 거짓말이 마치 진실과 뒤엉키기도 한다. 그러나 통증 때문에 사납게 비명을 지르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악취 나는 몸뚱아리 신세라는 작가의 고백을 듣고 나면 차라리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당신을 몰랐기에 더욱 그랬다.


어디 그뿐인가? 하반신이 마비된 체 ‘반쪽짜리’ 인생이 감당해야 할 수치심과 분노는 매번 곪아터졌다. 장애 때문에 남들과 같은 일상생활은 어렵다.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야 할 턱과 틈을 생각하면 당신을 모르는 나 또한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채 사라지기 전에 차별과 혐오라는 타인의 무례한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이 아닌 ‘시한폭탄’같은 존재라는 죄책감을 끌어안고 버텨야만 했다. 슬픔이 빼곡해질수록 눈동자는 침묵할 수 없었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무게만큼이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당신은 세상에는 울어도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프지 않길 마냥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애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적처럼 물러설 리가 없으며 제 살을 긁어내는 통증이 한바탕 눈물로 사라질 리가 없다. 장애는 삶의 불편한 조건이며 이러한 불편함을 선택하기까지 그만큼의 눈물겨운 시간을 지나왔을 테니까. 당신은 이것 밖에는 아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우리의 심장과 맥박을 뛰게 하는 걸 보면 참 괜찮은 방법이었다.


돌이켜보면 장애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는 좌절은 절망이 흘러가는 아픈 종착지다. 통증이 신체적인 고통이라고 한다면 좌절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고통 때문에 삶의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며 쓸쓸하다. 작가에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버티며 지내왔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가는 통증과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맑은 정신’으로 다시 살고 싶었다. 맑은 정신은 견딜 수 있는 경계이며 살고 싶은 의지였다. 


그러니 작가의 생존에 가까운 글을 읽고 다시 봄을 맞이했으면 한다. 아프고 다친 몸은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도 좋을 마땅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불행 때문에 자주 뒷걸음치는 이유에서다. 불편한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죽을힘으로 버텨야낼 때 비로소 슬픔이 완성되는 것이다. 결코 슬픔의 미화(美化)가 아니다. 이러한 다짐은 우리의 삶을 더욱 삶답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는 수많은 장애를 결국 극복하며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어이 믿고 싶어졌다.


당신을 몰랐던 우리는 이제 당신을 알게 되었다.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무료해서 고쳐지지 않고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씩 무너졌다. 눈을 감으니 낙엽처럼 메마른 가슴에 온기가 가득해졌다. 그리하여 오로지 이 세상을 끝내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맑은 정신을 끝까지 움직이고 싶었다. 최소한으로 아주 가볍고도 촘촘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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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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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불급(不狂不及). 세상에는 지독하게 날카로운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치고 않고서는 결코 미칠 수 없을 것 같은 질긴 운명의 그림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두고 구구절절 좋고 싫음을 따지는 것은 무척이나 따분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혼자만의 미친 운명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에게는 바다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에게는 그림이 그랬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에 나오는 랜드에게 암벽이 진짜 삶이었습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암벽은 하강하는 거대한 강물이며 이런 불가항력에 맞서 암벽 등반하는 과정이 일종의 자신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소설은 두 개의 일상이 교차합니다. 황량한 캘리포니아와 아름다운 몽블랑. 그는 캘리포니아의 따분한 일상에서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든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완벽한 이기주의자로 살아갑니다. 세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 고독을 불태웁니다. 왜 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등반 앞에서 그는 결코 유유부단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두 번째, 세 번째 동작을 할 수 없으며 결국에는 산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좋아하는 관점에서 그의 독특한 등반은 상상력이 섬뜩했습니다. 상상력은 단순히 산을 정복하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 다음과 같은 그의 육성은 절박하고 생생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그의 정신적 고뇌는 사실상 바로 나의 고뇌이기도 했습니다. 내 인생을 걸고 끝없이 펼쳐질 도전 같았습니다. ,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195)

 

오로지 그는 산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며 남성성이라는 운명 끈을 뚝뚝 잘라내더니 놀랍게도 남성성 존재에 가까운 산에 자일을 연결하고는 무모할 정도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의 확고한 기쁨은 마치 햇빛을 받은 몽블랑 같았습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느끼면서 그의 불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불변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아마도 고독한 얼굴일 것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항상 변하지만 완전히 완벽해 보이는 순간”(227)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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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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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

-사르트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뭘까? 죽음이라는 불청객이다.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어느 누구도 생명의 법칙을 파괴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일상적인 그러니까 늙고 병들거나 아파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자연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자살(suizid)을 선택하는 것은 비자연적(非自然的)인 죽음이다.


자살에 대한 거부감은 극명하다. 자살은 단단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단단한 흉터로 남는다. 흉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자살은 죽음을 담보로 하여 삶에 반항한다. 반항하는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일수록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만약에 삶을 질식시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성은 마비되고 탈출이라는 고통스러운 감각은 살아남게 된다. 여기까지 충분히 면죄부가 허용된다. 그럼에도 자살에 대한 죄책감이 피부에 와 닿게 되면 이상하게도 불편하였다. 


우리는 사회적인 잣대로 뉴스 화면에 나오는 자살을 수동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장 아메리는『자유죽음』에서 우리가 제대로 인지 못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자살은 자살을 둘러싼 객관적인 사실들의 결과다. 분명 어딘가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따라 자살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자살자에 대한 가혹한 상황이 전부일까? 자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수레바퀴일까? 


그래서 ‘자유죽음(freitod)’을 생각할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하는 고민이다 보니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 자살과 죽음은 죽음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서로 의미가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과 죽음 사이에 자유를 놓고 생각하면 낯선 의문들이 생겨난다. 자살이 의미하고 있듯 자살은 자유의 영역이다 보니 자유죽음과의 경계선이 흐려진다. 나를 찌르는 대상이 남이 아니라 나이며 그런 내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자유죽음과 비슷한 궤도에 있다.


이렇게 자살과 자유죽음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이 타당한 선택인지 선명해진다. 자유죽음을 택할 것이다. 삶의 무게감이 시시포스가 밀어 올리는 바위와 같더라도 살기 위해서 자살을 부정하게 한다. 그럼에도 ‘에셰크(echec: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를 구원하는 자유죽음이 이미 내 몸속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위로를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자살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은 던지지 마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대답 자체가 곤란한 질문이다. 자살은 곤란한 질문이지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정말이지 곤란한 질문이다. 어쩌면 대답하기 어렵다고 해서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삶의 피곤함과 좌절감이 켜켜이 쌓일 뿐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이라는 침묵을 깨트리고 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죽음을 성찰하면서 자유죽음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자살과 자유죽음을 둘러싼 수동과 능동의 관점은 자살자의 내면에 얼마큼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죽음은 자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삶의 밑바닥에 가려앉아 있는 죽음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만 하는 인생은 없다.”라고 하며 실존적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


실존적 부조리에 따르면 우리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 생명은 ‘없음에서 있음’이다. 이와는 달리 죽음은 ‘있음에서 없음’이다. 우리는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 비록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있음이 없음보다는 대단히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삶이 무슨 소용이라 말인가? 생명의 효율성을 최고로 여기며 살아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삶은 정반대로 작용했다. 오히려 생명의 올가미에 둘러싸인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스스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생명이 아닌 자유죽음의 관점으로 보면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가령, 운동선수는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운동할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못 이겨 그토록 안타까운 눈물을 흘린다. 물론 운동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먹고 살 길은 있다. 문제는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눈물 흘리는 이유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있다. 운동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선수에게 삶의 가치를 호소하는 것은 회복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다. 더구나 죽을 듯 살아가는 정신적 황폐함으로 무작정 손을 놓아버리는 것은 개인의 희생양이라는 주홍글씨를 남기게 된다.


자유죽음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정신착란이라는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죽음의 방식으로 ‘손을 내려놓는 것’은 타인의 의지가 아니다. 타인의 의지에 일어나는 죽음이 ‘사건’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자유인은 언제까지 살 것인가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자유죽음을 굳이 ‘손’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나와 내 몸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까닭에는 ‘나’라는 것이 공간이라면 내부세계인 자아와 외부세계인 내 몸은 시간이라는 주장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손을 내려놓으면 시간이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보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이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문득, 왜 자유죽음인가? 라는 문제를 둘러싼 고민을 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살이 아닌 자유죽음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혹은 삶의 부당함에도 구토를 참아가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부조리에 맞서 저자는 자유죽음이라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말한다. 견디기 힘든 모멸의 순간, 마음의 문을 필사적으로 잠갔을 때 삶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인간의 특권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특권을 대신할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직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만약에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동물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동물에게 없는 부음(訃音)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은 죽음을 단순히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을 삶의 진공상태가 아니라 집합체로 믿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살이 만연하고 있는 ‘자살문화’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죽음을 자살과 곧바로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낙인이다. 자유죽음은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죽음이 아니다.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느끼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죽음으로 뛰어내기 전 출구를 찾아 나선다. 자유죽음을 둘러싼 옳고 그름은 폭력적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경계선에서 자유는 삶을 파괴하지 않으며 더더욱 자살을 응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저자의 묵직한 고백을 읽으면서 ‘자유죽음’이라는 네 글자가 죽음의 율법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는 자유죽음을 불청객이 아니라 친절한 손님으로 맞이하니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삶의 어느 순간에 자유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존엄한 삶을 더 발견하게 되었다. 자유죽음이 결코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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