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ㅅ아, 나 진짜 멋있는 가수 알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가 내게 말했다. 그당시 언니는 중학교 2학년,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맏이인 내게 친언니는 아니었고 이종사촌 언니였는데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 잠시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면서 흥얼거리는 노래는 내가 듣기엔 영 아니었다.
"언니, 가사가 꼭 옛날 노래 같애."
"옛날 노래라니~ 실제로 들어보면 얼마나 좋은지 알아? 노래도 진짜 잘 불러."
나중에 TV에서 그 가수가 직접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어보았다. 그래도 나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그런 쪽으로 앞서 가던 나는 당시 유행가는 물론이고 흘러간 옛노래까지 가사를 다 외워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그 언니는 예정대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내가 그 언니 나이쯤 되었을 때 비로소 그 가수의 노래가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왔다.
그의 노래중 지금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이 노래이고,  youtu.be/KWghopHrTHs
그때 언니가 흥분해서 흥얼거리던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친언니가 없던 나는 언니뻘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큰아버지의 둘째딸인 사촌 언니는 가끔 취직 문제로 서울에 올때면 우리집에서 자고 갔다.
그때 그 언니는 고3, 나는 역시 초등학생이었다.
이번엔 그 언니가 알려준 가수이다.
"얼굴은 진~짜 못생겼거든. 그런데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노래도 좋고."
"언니, 여기에 가사 좀 적어줘."
언니가 적어준 가사를 보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나중에 TV에서 보았는데 언니 말대로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가수의 마스크가 아닌 것이다. 마치 옆집 아저씨 같고 촌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 그런데 목소리가 정말 곱다. 무슨 남자 목소리가 저리 고울 수가 있나 싶었다.  youtu.be/6wgL-zzDzkg 
그 수수하고 꾸밈없어 보이던 그 가수가 지금의 거물급 사장님이 될 줄이야.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버지께서 조그만 탁상용 라디오를 사주셨다. 이제는 언니들로부터 새로운 노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TV에서 보게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끼고 살던 라디오에서 듣고 따라 부르게 되었다. 한번 듣고 마음에 꽝 박히는 노래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 노래는 얼음같은 차가움과 절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도 애잔했고 가사는 더욱더 그랬다. 혼자서 흥얼흥얼 많이도 불렀던 이 노래를 지금도 혼자 길을 걸을 때 나도 모르게 흥얼 거리고 있다. 작정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가 먼저 나오고 내가 지금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는 노래.  youtu.be/7Cj_hDwaJHM  

 

학교 졸업하고 처음 자리잡은 직장이 대전으로 이전하여 나도 같이 따라 내려갔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주말이 되면 서울의 집으로 올라갔다가 월요일 새벽에 내려오는 생활을 했다. 나중엔 귀찮아서 그만 두었지만.
실험을 의뢰한 사람과 그것을 맡아 해주는 사람으로 알게 되어 조금씩 친해지던 사람이 있었다. 아주 순박한 외모에 키도 작았지만 나는 좀 특이하게 예나 지금이나 외모를 별로 따지지 않는 사람이라서 부담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문제는 항상 내가 그 '부담'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발생한다. 어느 날 저녁을 함께 먹고난 후 그 사람이 내게 자기의 꿈을 얘기하는 것이다. 자기와 같은 전공을 가진 여자와 결혼을 해서, 같은 실험실에서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것이 꿈이란다. 나는 왜! 그 꿈을 내게 말하는 그 사람의 의도를 그리도 부담스럽게 여겨야 했던 것일까.
어느 주말, 만나자는 말에 서울 가야한다고 했더니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들으라고 테이프에 노래를 잔뜩 녹음해서는 나의 일터 정문 수위실에 맡겨 놓고 갔다. 그 테이프에 들어있던 노래중 제일 좋던 노래는  youtu.be/ADHIFTFESQY 
지금도 눈이 오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생각난다. 그 사람은 지금 나의 모교의 교수님이 되어 계시다.



요즘은 그때 만큼 노래를 잘 못 듣고 있어 아쉽다. 더구나 요즘 그룹들은 이름도 얼마나 특이하게 짓는지, 따로 공부해서 알아낼 수도 없고 참... youtu.be/oIHikjAGy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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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10-0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는 대학가요젠지 무슨 가요제에서 두번째 상을 받았잖아요. 저는 처음 듣는 순간 그 노래에 쀨이 팍 꽂혀서 이 노래가 반드시 대상을 받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대상은 인상좋게 생긴 유열인가 그 사람이었나? 바윗섬? 암튼)큰상을 못 받아서 막 아쉬워하고 그랬었던 기억나요. 나중에 이 노래 음악다방 가면 종종 신청하고 그랬었죠. 간만에 옛날 생각도 하고 좋군요^^

hnine 2011-10-01 20:56   좋아요 0 | URL
쀨~ ㅋㅋ
노래와 사연이 잘못 링크되어 있는 것을 지금 수정했어요. 이 정석 노래 좋지요. 조금 있으면 첫눈이 올 것이고 그 노래 생각이 날 거예요 노래에 얽힌 사람 생각도 잠시 날 것이고..^^

노이에자이트 2011-10-0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청소년이나 20대보단 기성세대가 더 좋아했지요.이미자 나훈아 노래 좋아하던 사람들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좋아했을 거에요.동영상은 Q지요?

'행복'이나 '그것은 인생'은 당시 기성세대에겐 좀 생소한 풍이었죠.젊은이 위주...지금의 청소년이나 대학생에겐 그 당시의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 모두 기성세대...

hnine 2011-10-01 21:04   좋아요 0 | URL
어이쿠, 우리 가요평론가 선생님 방문해주셨군요 ^^
이런 날은 가만 두면 연줄연줄 계속 노래만 듣게 돼요. 나쁘지 않지요.
생각해보니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한동안 금지곡으로 묶였던 적도 있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10-01 21:21   좋아요 0 | URL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내고 얼마 안 되어 조용필이 마약복용으로 5년 정도 연예계에서 퇴출되었죠.노래 자체는 금지곡이 된 적은 없었을 겁니다.그리고 재기하여 '촛불'을 내고 성공했죠.'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다시 부산을 통해 한국을 재정복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있긴 했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괴담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hnine 2011-10-02 09:24   좋아요 0 | URL
아, 노래가 묶여있던 것이 아니라 가수가 묶여있던 것이군요. 조용필 대마초 복용 사건도 기억이 나는데 저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것과 별개로 말씀하셨다시피 가사가 의미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있다고 해서 금지곡이 되었었는 줄 알았어요.

잘잘라 2011-10-01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마지막 연주곡이 참 좋아요. 테마는 봄인데 아까 낮에 밖에 나가서 제대로 느끼고 온 가을 햇살이 떠올라요. 어? 플레이 해놓고 댓글 쓰는데 벌써 끝났어요. 아쉬워서 한 번 더! ^^

hnine 2011-10-02 09:22   좋아요 0 | URL
에피톤 프로젝트, 좋더라고요. 이름에 관심이 많은 저는 또 막 궁금해져요. 이 이름의 유래는 무엇일까하고.

2011-10-02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2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0-0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에 얽힌 hnine님의 성장기 & 연애담(이라고 하기엔 좀 어울리지 않나요? ㅎ)이군요~
아마 제가 산 물건 가운데, 현재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것이 라디오 일거예요. 병원에서 두 번 입원해야 된다는 소식듣고 그간 몇 년동안이나 뒷전에 밀어두고 있던 거 바로 샀지요.

라디오는 전자기기로도 들을 수 있겠지만, 아날로그 방식으로 채널 살살 돌려가며 듣는 맛이 좋더라고요. 라디오 말고 컴퓨터용 스피커는 2만원도 안되는 것이라.. 음반들을때도 유용하고요~


hnine 2011-10-03 09:43   좋아요 0 | URL
오래 전 짐가방 들고 혼자 외지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구입한 것이 주방 도구, TV, 이불, 이런 것 아니고 라디오 겸용 CD player였어요. 그당시 저에게는 거금 110 파운드나 주고서요.
지금 쓰고 있는 라디오도 채널 살살 돌려가며 듣는 것인데 성질 급한 저는 바람결님처럼 살살 돌리기보다는 확 확 돌려서 채널 잡으려면 몇번을 왔다 갔다 해야하지요 ㅋㅋ
그런데 병원에 두번 입원해야한다고 했으면 한번 더 입원하셔야 하나요??

비로그인 2011-10-03 10:09   좋아요 0 | URL
한번은 올해 사월 그리고 얼마 전인, 팔월이었어요 ^^ 날이 추워지니깐 라디오 사러 조금 멀리 전철타고 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꽤나 추웠는데, 집에 가져 오니 연하게 겉에 습기가 묻어나던 장면. 그리고 맨 처음 연결해서 라디오를 듣던 기억.

아 벌써 10개월이 후다닥 지나갔습니다 :)

hnine 2011-10-03 13:52   좋아요 0 | URL
입원 얘기가 나오면 읽는 저도 일단 긴장이 되어서요.
건강만큼 소중한게 어디 있나요.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니 매일 어떤 '별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별일 없이' 무사히 지내는 것도 감사하게 되네요.
또 입원하시는 일은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따라 쓰다 (1/2)

 

운전사는 겸연쩍은 듯 씩 웃었으나 나는 이미 억지웃음을 지을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파트 문 손잡이에 열쇠를 밀어넣었다. 예상대로 집은 어두웠고 방안에는 남편이 딸아이를 데리고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공부방으로 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던 나는 막바지 일주일 동안 여관에 출근하고 있었다. 남자작가들이야 감독과 함께 숙식하면서 글을 쓰지만 내가 여자라는 점을 참작해 우리는 주로 다방 같은 곳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진도는 생각만큼 잘 나가지 않았다. 촬영개시일은 다가오고 있었고 감독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여관작업은 내가 제의한 것이었다. 여자작가를 택했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나의 오기도 작용했다. 연출부 세 명과 함께 여관에 들었지만 나는 거기서 잘 수는 없었으므로, 아침에 그들이 잠이 깰 때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편법을 썼던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작가인 내가 차마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다가 열두시를 십오분 남겨놓고 일어섰을 때, 닫히는 여관방 문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 여자 남편도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저렇게 늦게 다니는 마누라 안 데리고 살지.”
그리고 높은 웃음소리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책상서랍을 열고 의미없이 지저분한 책상속을 뒤적거렸다. 툭 하고 편지가 떨어졌다. 미국에 유학중인 내 친구가 삼년 전에 보내온 편지였다.
“민희야, 제발 우리 부모님을 좀 설득해줘. 설사 그가 이혼한 경력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를 선택 못할 이유는 없어. 만일 부모님 말대로라면 우리는 시장에 가서 제일 좋은 조건의 신랑감을 골라야 해. 하지만 너도 알잖아. 우린 그저 다른 여자들처럼 그러려니 체념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남편한테 얹혀살진 말자고……”
나는 편지를 읽다 말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날 아침 나는 거의 일년 만에 그 친구의 국제전화를 받았었다.
“민희야, 나 이혼해……”
그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먼저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이 친구에게 학위를 포기하고 같이 모국으로 돌아가기를 종용했던 것이었다. 그 고민에 대한 편지를 받은 지 거의 이년이 지나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통증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내 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는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이 그저 내 어깨를 자꾸 삐그덕거리게 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저, 저……”
누군가 나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발작적으로 팔을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잠깐 여기가 어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앞에 옷을 단정히 입은 현이가 앉아 있었다. 현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꿈을 꾸시는 것 같아서.”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 사십분, 아직 동도 트지 않았다. 방문 밖에서 분주히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집 대문이 열려 있었고 김만석씨와 그의 부인이 서울로 가는 트럭에 부지런히 꿀통을 싣고 있었다. 한 박스에 일리터짜리 꿀통이 열두 개씩 들어 있는데 그것을 트럭에 나르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도 드릴 겨를 없이 나도 그들이 하는 대로 꿀통을 날랐다. 현이 어머니는 꿀통 개수를 체크하랴, 부엌에 드나들며 국을 끓이랴, 첫차를 타고 순창 읍내로 통학하는 현이의 상을 따로 차리랴 정신이 없었다.
꿀통 나르기가 대충 끝났을 때 나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아궁이와 가마솥이 놓인 부엌이었다. 민속촌에서밖에는 나는 그런 부엌을 본 기억이 없었다. 민속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부엌 상단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가스레인지 정도일까.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이들 셋이 제각기 학교로 갔다. 김만석씨도 작은 트럭을 타고 읍내로 떠났다. 부엌에 수도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릇들을 모아 마당으로 나왔고 거기서 쭈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했다.
시린 손을 말리면서 툇마루에 앉아 있자니 비로소 마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삼십여 호 되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중 다섯 집 정도는 빈집이었고 그나마 나머지 다섯 호 정도도 노인들이 혼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김만석씨 댁과 이웃하고 있는 네 채의 집도 원래는 모두 빈집이었는데 그중 두 채에 노인들이 며느리와 떨어져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까치밥 몇 개를 남겨놓은 감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맑았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한옥의 그늘에는 괴기스러운 침묵만 가득 차 있었다. 노인네들 돌아가시고 나면 이제 몇집 안 남게 되겠지. 이곳에 오기 전에 자료를 읽은 바에 의하면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하기 위해서 농촌인구를 오 퍼센트 이하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인당 경작면적을 확대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마을을 돌아보았을 때 우리의 선대들이 한톨의 낟알이라도 더 얻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자갈을 골라내고 개간해놓은 밭은 잡초 무성하게 버려져 있었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였다. 농촌인구의 고령화, 농업의 집단기계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숫자상의 인구를 줄이는 일이 경지면적을 확대하는 일인 양 알고 있는 그들이 좋은 대학을 나온 유수한 농업문제 각료들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곳에 온 지 열두 시간도 안 hel는 나도 깨닫는 일을 그들이 모르고 있다니. 그것은 내가 이땅의 관료들에게 기대를 가질 만큼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안이하게 제시한 정책들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훼손할 것인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휴식을 마치고 현이 어머니와 나는 갈퀴를 하나씩 들고 뒷산으로 향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것은 거개가 늙은 사람들이었다. 현이 어머니는 이 마을에서 삼십대 주부가 자신과 이장 부인 둘뿐이라고 했다. 역설적으로 이 마을에는 장가를 못 가 속을 태우는 농촌 총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처녀는 물론 남아 있는 젊은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이 대한민국에서 그걸 물어볼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일을 하겠다고 대갈퀴를 손에 잡을 때부터 현이 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뒤숭숭한 살림에 군식객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이 어느정도 가신 모양이었다. 우리는 대나무갈퀴로 숲에 떨어진 솔잎들을 긁어 나뭇단을 만들었다. 그 나뭇단의 구조는 도회에서 자란 내게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우선 활엽수의 가지들을 낫으로 잘라 석 삼자 모양이 되게 놓은 다음 그 위에 활엽수의 잔가지들을 얼기설기 놓고 다시 솔잎 긁은 것을 올려놓았다. 소나무 이파리들은 갈퀴로 몇번 긁어주면 마치 잘 빗질된 짐승의 털처럼 일렬로 잘 누워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 솔잎 긁은 것을 보통사람의 키만한 길이와 허리쯤 되는 높이로 쌓고 그 위에 다시 활엽수의 잔가지를 놓고 밑에 깔아놓은 새끼줄을 들어 묶으면 되는 것이었다. 성냥불 하나만 켜 대면 곧 타 없어질 것 들이지만 하나하나 좀더 예쁜 모양으로 배치하고 좀더 단단히 묶으려는 현이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옛날에 나무꾼들이 이걸 장에 내다 팔 때는 더 예쁘게 묶으려고 했었지요.”
어느새 볼일을 마치고 산으로 올라온 김만석씨가 말을 거들었다. 김만석씨는 우리가 묶어놓은 것들을 산 아래로 날랐다. 나는 거의 힘든 일은 하지 않고 갈퀴질만 했지만 허리가 몹시 아팠고 배도 고팠다. 나는 아침밥상에서 지레 겁을 먹고 밥을 덜어놓았던 것을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대학 사학년 때였던가, 여행중에 거제도에 있던 선배네 집을 들렀을 때 커다란 스텐주발에 고봉으로 밥을 퍼주시던 선배의 노모. 성의를 무시한다 생각할까봐 그 밥을 다 먹고 배탈이 나서 여행의 마지막을 죽을상을 하고 다녔던 기억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밥의 양에 대해 공포를 가졌던 것은 그만큼 내가 육체노동을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잠시 후, 김만석씨가 무를 두 개 뽑아가지고 오셨다. 우리는 잠시 쉬기로 하고 산비탈에 앉았다. 올라올 때는 몹시 추웠는데 이제는 산위로 불어오는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김만석씨는 낫으로 무껍질을 벗겨 내게 먹을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왜 먹을 수가 없겠는가, 나는 어른 팔뚝보다 크고 굵은 그 무를 다 먹어치웠다.
마치 우리의 옛 농부를 연상시킬 만큼 자존심이 세어 보이는 김만석씨는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어느정도 나에 대한 딱딱한 태도와 경계심 ---- 사실 이것은 내상상에 비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시골에 가본 경험이 거의 없던 나로서는 여섯살 무렵, 먼 친척 할머니 댁에서 내게 보여주었던 환대를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은 이미 이십오년이 넘게 흘렀고 그 세월은 이 시골사람들로 하여금 도화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경계를 품게 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으리라 --- 이 누그러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아래로 버스가 지나갔다. 이 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지 겨우 오륙년. 그러니까 우리가 팔육, 팔팔 어쩌구 하며 선진조국의 꿈을 끊임없이 강요당하던 그 무렵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순창읍에서 이십여 리 길을 걸어다닌 것이었다.
“처음 시집올 때 광주 친정에서 담양으로 해서 택시를 타고 오는디 눈앞이 깜깜하두마.”
현이 어머니는 그때 일을 생각하는지 희미하게 웃으셨다.
“두 분 늘 이렇게 같이 일하시면 좀 지루하지 않으세요?”
현이 어머니와 김만석씨는 잠시 서로 마주보더니 쑥스럽게 웃으셨다.
“왜요, 없으면 오히려 힘들고 허전하제.”
김만석씨와 현이 어머니가 여자가 일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땅바닥에 자꾸 의미없는 금만 그었다.
“아가씨는 농촌에 시집와서 살 마음이 있소?”
김만석씨가 물었다.
“아뇨.”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김만석씨도 현이 어머니도 놀라지 않았다. 우리의 고향이었던 그 푸른 농촌이 이제 그들이 낳은 젊은이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결코 땅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으리라.
내려오는 길에 김만석씨의 포도밭에 들렀다. 재작년에 심었다는 포도는 어려서 아직 가지들끼리 손잡지 못하고 있었다. 논농사 밭농사, 소 기르기까지 실패하고 심었다는 이국의 포도나무 밭에서 김만석씨와 부인은 심각한 얼굴로 이것저것 상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좀 떨어진 곳에서 포도나무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포도는 재벌의 포도주공장에 싼값으로 팔려갈 것이고 부자들의 만찬에 애피타이저로 오를 것이다. 김만석씨와 그 부인은 저 포도주를 맛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그 시간에 미국에서 수입된 콩으로 만든 두부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포도밭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이들은 이렇게 나란히 서서 다른 작물에 대해 상의할 수 있을까.
남편의 글은 과격하거나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자꾸 되돌려져 왔다. 대신 나의 글은 그런대로 무난하다는 평을 받으며 게재되곤 했었다. 한때 우리도 저렇게 나란히 앉아 문학과 정의와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격려했지만 그는 자꾸 슬럼프로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가 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었다면 파국이 왔을까. 하지만 그것이 모두 그의 잘못을 아니었다.
“왜 억울하다고 하셨어요?”
잠자리에 들었을 때 현이가 겸연쩍어하면서 내게 물었다. 내가 아침에 억울하다고 잠꼬대를 했다는 것이었다.
“글쎄 난 안 죽었는데 날 보고 누가 자꾸 귀신이라고 하잖아.”
“구신요? 왜요?”
“비오는 날 흰옷을 입었거든.”
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끼며 돌아노웠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들은 모두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소복을 한 여인네들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이야기는 할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것이었다.
“여자들이 독하지. 니도 기가 세서 걱정이다. 여자는 그저 남편 하늘같이 받들고 자식새끼들 보믄서 살아야 하는데.”
할머니는 베갯머리에서 설핏 잠이 든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반박하지도 않고 그대로 콧방귀를 뀌곤 했었다. 첫날밤,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거의 이십년을 혼자 살다가 우리 할아버지의 재취로 들어온 할머니에게 아니라고 강변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저 할머니 앞에서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조용해지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결국 할어버지의 첫번째 부인과 같은 병, 울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집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망연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그 집에 데려다주고 현이 어머니는 벌써 길 아래로 사라지고 계셨다. 집을 잘 못 찾은 것 같았다. 내가 들어선 집은 폐가 중의 폐가였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부엌의 문, 마당 가득 쌓인 가구 부스러기들, 장독대가 있었으나 그것은 다른 빈집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서둘러 현이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 집의 부서진 문을 열고 키가 훌쩍 큰 여자가 나왔다.
“꼴이 심란허제? 사는 게 심란하당께.”
심란하다는 말은 아마도 집안이 어수선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는데 그 말의 뉘앙스가 이 집의 분위기와 참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엌 앞에 놓인 바구니에서 감을 하나 골라 내게 내밀었다.
내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삐죽삐죽 감을 먹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무다라이 속에 풀주머니 같은 것을 넣어놓고 맨발로 그것을 밟았다.
“내가 뭐하고 있는지 왜 물어보지 않는겨?”
나는 사실 그 집의 모양새에 대해 거의 넋이 빠져 있었고, 이런 집에서 미꾸라지를 팔아 어렵게 사는 그녀가 왜 저렇게 방실방실 웃어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만석씨 댁이 민속촌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 집은 아예 신석기시대 같은 느낌이었다.
“뭐하시는 건데요?”
나는 마치 국민학생처럼 그녀가 하라는 대로 물었다.
“알아맞혀봐. 시큼한 건데.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기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와 스무고개를 할 생각은 없었다.
“몰러? 누룩 뜰 밀이여. 술 담그려고. 누가 부탁을 혀서.”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안에서 기척이 났다. 사람의 소리라고 하기에는 아주 낮고 쉰 목소리였다. 이 집에 왹 전에 현이 어머니에게서 이 집의 남편이 알코올중독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 목소리가 사람의 것이라면 그 남편이리라.
“손님 왔응께 조용히 있어요. 나 밭에 갔다 올 테니께.”
그녀는 내게 한 눈을 찡긋하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커다란 고무대야와 마부대를 들고 우리는 밭으로 향했다.
“처녀가 이런 데 혼자 오면 집에서 걱정들 안혀?”
“저 처녀 아니에요. 아이도 하나 있어요.”
내가 철부지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편이 이야기하기가 쉽겠기에 그렇게 말했다.
“그럼 남편은?”
“서울에요.”
“왜 같이 안 오구?”
“잡지사 부탁으로 취재하러 왔는데요.”
“아아, 난 또 혼자 방황하러 왔는 줄 알았제.”
시골 아낙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나는 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묘하다는 생각을 했고 가슴 한구석을 찔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순임이가 대학에 가고 싶어한다면서요?”
“아이들 셋이 모두 공부를 잘하니 걱정이제. 하지만 딸년 대학 보낼 돈이 어딨어? 지는 장학금 받을 수 있는 데로 간다고 하지만……”
말투는 어두웠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따라 시커먼 결명자를 털었다. 좁쌀보다 조금 큰 알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우리 밭 꼴도 심란허제? 남들은 발써 다 거둬들였는데 어디 내가 시간이 있었어야제…… 아까 순임이 야그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난봄에 순임이랑 같이 핵교 댕기던 기집애 둘이 부산 신발공장으로 떠났어. 속으로 저것이 쟈들이랑 같이 간다 그라믄 얼매나 좋을까 생각이 들더만…… 내 한번은 핵교 그만두라고 했더니 글쎄 이것이 사흘 동안 밥을 안 먹더라구. 내가 졌제. 헌데 신랑은 뭐해?”
“……글써요.”
“그랴. 같이 글쓰고 좋겠네. 근데 연애했나봐?”
“그랬죠.”
내는 내가 결혼했다는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내게 물었다. 아이는 몇살이냐, 지금 누가 보느냐, 남편이랑 사이는 좋으냐.
“고추가 시들었네요.”
나는 결명자를 털다 말고 고추밭으로 갔다. 다 붉어지지 못한 고추가 그저 약만 바짝 오른 채 시들고 있었다.
“놔둬, 따봤자 똥금이여. 우리 식구 먹을 것만 대강 땄어.”
하지만 나는 고추를 땄다. 오랜 시간, 인간의 지혜와 노동이 뿌린 씨앗에 대해 대지는 평등한 선물을 주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다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날이 어둑해졌을 때 나는 마대 가득 고추를 딸 수 있었다. 고추 딴 것을 어깨에 지고 우리는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갔다. 국민학교 삼학년짜리 막내가 돌아와 있다 그녀를 보자 달려와 짐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가려는 나를 억지로 잡아앉히며 꼭 저녁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알코올중독자 남편이 마음에 걸렸다. 술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면 낯선 여자 앞에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가 말했다.
“행패는 안 부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어.”
나는 묻고 싶었다. 아저씨와 이혼하고 싶은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밉제. 밉당께.”
그녀는 또 웃었다. 밉긴 왜 미워 하는 얼굴이었따.
“들어가, 찬데. 얼렁.”
나는 하는 수 없이 장지로 안방과 통하는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섰다. 열린 장지문 사이로 순임 아버지의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평 좀 넘을까, 서까래에서 금방이라도 흙이 와르르 쏟아져내릴 것 같은데 알전구가 휑뎅그레 매달려 있고 흙이 드러나도록 좀 작은 비닐장판이 깔려 있었다. 커다란 쌀독과 아이들의 앉은뱅이책상이 하나 있을 뿐, 을씨년스러운 방이었다.
그녀는 낡고 때묻은 이불을 내 무릎 위로 덮어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고상한 거는 말로 다 못혀. 우리 둘째녀석은 나가 길바닥서 났는디……”
그녀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 순창 시장서 시금치를 파는디 아가 나오려고 하는겨. 이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바닥서 낳을 수는 없고 혀서, 나도 모르겠다, 읍내 산부인과로 달려갔지. 헌데 병원 문을 여는디 그만 그 녀석이 나와버린겨. 난생 처음 병원 침대에 누워 호사스레 지냈제…… 이 야그가 여러 책에 나왔어.”
그녀는 방구석에서 소책자 몇권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전북 여성농민회 같은 단체들에서 낸 소책자였다. 알코올중독인 그녀의 남편을 부양하며 사는 그녀의 이야기가 고난받는 여성의 표본으로 고통스레 그려져 있었다. 그런 이야기라면 여러 번 읽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주인공인 그녀가 자랑스레 웃으며 그런 말을 꺼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더더구나 나보다 더 행복한 얼굴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나는 갑자기 할말이 없었다.
“저, 아저씨는 하루 종일 뭐하세요/’
“그냥 있제.”
여러 번 물었지만 똑 같은 대답이었다. 그냥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짓도 안한당께. 그냥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일어나고 또 눕고 그랴.”
“술은?”
“못 마시게 혀도 소용없어. 딱 끊어버리믄 되는디, 그라믄 될 텐디.”
“병원에라두…… 아니면 여러 어른들이 지키고서 한 일주일간이라도 술을 못 드시게 하면……”
“안돼. 그라면 저 냥반은 죽어.”
나느 ㄴ상식적으로 말해본 것이었으나 그녀는 뜻밖에 완강했다. 나는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단단한 자물쇠를 채우는 것을 느꼈다.
“글쎄 우리가 이해 못하는 점이 바로 그거야. 술을 못 먹게 하믄 되는디 사다준단 말이여…… 젊었을 때 순임 아버지가 인물 좋아 바람을 좀 폈지. 순임 어매는 그저 남편이 허튼짓 안허고 집에 있는 것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어.”
현이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저녁이 준비되었고 나는 순임 아버지와 대면하게 되었다.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 초점 없는 눈동자. 한때는 건강했으나 바스러질 것처럼 마른 몸. 막상 밥상을 대하고 마주앚자 오히려 쓰잘데없는 두려움 같은 것은 일지 않았다.
“원래 술을 입에도 못 댔더랬는데, 뭣이냐, 그 노풍벼 땜시 빚지고 소 키우다 망하고 그 담부터 이렇게 되았어.”
안방 벽면 높은 곳으로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희고 맑은 얼굴, 감수성이 예민해 보이는 눈. 순임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밥을 씹다가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저 영민한 청년은 왜 이 값싼 소주에 제 몸을 버리는 늙은이가 되었는가, 순임 어머니는 왜 치매상태로라도 남편을 붙들어매놓지 않으면 안되는가, 순임이는 왜 공부를 잘하는가, 공부를 잘하는 순임이는 왜 대학에 갈 수 없는가, 순임이의 친구들은 왜 모두 신발공장으로 떠나버렸는가, 왜 이곳에선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왜 콩밭은 포도밭이 되었는가, 왜 그는 나를 그토록 자신 속에만 가두고 싶어했을까, 나는 왜 모든 걸 버리고 이곳까지 와 있어야 했던가.
나의 괴로움은 내가 그 모든 것의 대답을 알고 있다는 데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고, 또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한 절망을 아득하고 여우언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하늘은 아주 맑아 있었다.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 어귀에 서 있었다.
“그래, 사흘 묵고 나서 농촌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겠어요?”
김만석씨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걸코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암바도 쓰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우리의 이 아름다운 땅과 마음을 황폐하게 했는지, 무엇이 우리 서로를 가두어 물어뜯고 할퀴는지. 나는 적어도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미리 만들어놓은 관념으로 사람을 재단하지는 말아야 했다. 회피하지 않고 나가고 싶었다.
“내일은 장날이라 마중 못허겄네. 시장으로 들를쳐?”
어제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순임이 어머니에게 들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갑자기 불행 앞에서 그녀가 그토록 행복해할 수도 있는가 하는 따위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들르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행복했던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이 꿋꿋했던 것이다. 절망 따위의 말 같은 건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방황하러 온 게 아니고?”
어떻게 보면 시골 아낙이 뱉기에는 너무도 문학적인 말을 뱉어놓고 결명자를 쓱쓱 베던 그녀였다.
그리고 버스가 왔다.
"참 감사했습니다.”
읍내로 가는 할머니들이 올라타고 내가 맨 마지막에 탔다. 김만석씨 부부가 오래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순안마을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다시 절망이라든가 하는 말은 결코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절망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기 위해 순창읍에서 내렸다.  

(1992, 샘이 깊은 물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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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서울을 떠났을 때서야 비로소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혼자서 떠나는 취재여행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정말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혹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늘 불안해 보인다는 염려를 받았다. 발작적인 신경질과 괴상스런 침묵, 그리고 무모한 발랄함.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각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글 한 줄 쓸 수 없었고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계약금을 끌어다 쓴 출판사 담당자의 협박어린 충고도 나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전에서 십오분간 쉬었다가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 구내에서 뜨거운 우동을 먹던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타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니 자리를 찾아야지.”
농촌여성을 취재하는 르뽀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러 전화를 한 선배가 용건 끝에 따지는 듯한 음성으로 덧붙였던 것이 지난달이었다.
“찾아야지."
“말은 잘한다.”
“미안해, 언니. 나 아주 잘 있어. 단지, 글을 쓸 수가 없어. 써봤자 모두 인간에 대한 절망만으로 가득 차게 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
“………”
“그래, 절망하는 김에 밑바닥까지 가봐라. 그것도 괜찮지…… 밑바닥까지 갔을 때 그때 전화해.”
선배는 툭 뱉듯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뭇사람들이 그러했듯 어줍잖은 말로 나를 위로할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많은 반박들이 마음속에서 갑자기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이상으런 오기까지 생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다면 다시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서 보고 느끼면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모두들 얼마나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개찰구에서 가방을 넘겨주며 선배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선배가 건네준 쪽지를 펴보았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창덕리 순안마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내가 농촌을 읽어낼 수 있을까. 그것도 단 며칠 만에. 하지만 기차는 어쨌든 달리고 있었고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간다 해도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나를 울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뿐이었다. 나의 어머니와 그리고 나의 딸.
나는 핏줄로 이어진 두 사람의 여성 중 한 사람 앞에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니가 알아서 해라. 이젠 나도 지쳤다…… 그래, 엄마 세대와는 다르지. 나도 너보고 이 에미가 그랬듯 꾹 참고 살라고는 말 안해.”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내가 천진스런 딸아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윗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계셨다.
“이혼할 용기가 있는 년이 울긴 왜 울어! 다시 시작해. 기죽지 말고.”
추수가 끝난 논에는 젓빛 갈대와 마른바람 그리고 황량함이 가득 차있었다. 이젠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순안까지 가는 버스를 타러 순창터미널로 갔을 때는 이미 어두운 저녁이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서둘러 와버린 어둠 때문이었고 낯선 거리의 낯선 말투들 때문이었다.
터미널로 갔지만 순안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면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차가 다니는 간격이 두 시간 반, 더구나 다음 버스가 막차였다.
나는 가방을 메고 거리를 걸었다. 배도 몹시 고팠고 추웠다.
정육점에 들어가 고기를 사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제과점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줄 과자도 조금 사고 나서 우유로 빈속을 때웠다. 제과점 한구석에 있는 어항 속에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난 당신한테 사육당하는 게 아냐!
당신이 당신 일을 소중히 하는 만큼 나한테도 일이 소중해.”
“여민이가 있잖아. 난 저 아이가 당신이 밤늦게 들어오도록 파출부 아주머니 눈치만 보고 있는 걸 참을 수 없어.”
“제말 이러지 마. 아이는 다 제게 주어진 방식에 적응하면서 사는거야. 내가 놀러다니는 거야, 춤바람 나서 카바레 다니는 거냐구! 날 용서할 수 없는 건 여민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그 알량한 봉건의식 아냐?”
“내가 당신이 늦으면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알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당신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
“당신이 날 믿는다면 설사 내가 밤에 떼강도에게 윤간을 당한다 해도 문제가 안돼! 왜 솔직하지 못하지? 여편네가 일한답시고 다른 남자들이랑 어울리는 게 싫은 거 아냐! 집에 오면 남들처럼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도 없고 썰렁한 방에 들어오기 싫다는 게 이유 아니야? 당신 우리 배고픈 시절에는 내가 일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여민이 때문이잖아, 여민이!”
“아니야, 여민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떼강도는 있었고 그때도 난 밤늦게까지 취재를 다니곤 했어. 내가 싫은 건 당신이 좀더 당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거야!”
싸우던 것은 오히려 애정이 있을 때였다. 점차로 집안에서는 말소리가 줄어갔고 아이를 매개로 한 대화 이외엔 우리는 그저 서걱거리는 얼굴로 마주쳤을 뿐, 서로의 문을 굳게 걸어잠갔다.
버스 시간이 대략 이십분 남은 걸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어 살 된 아이가 엄마에게 안겨 제과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에 커다란 팥빵을 쥐어주면서 흐뭇한 얼굴을 했다.
나는 돈을 치르고 제과점 문을 열었다. 내가 무심히 지나쳐온 낯선 많은 간이역들처럼 나도 여민이를 잊게 될까. 나는 대합실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대합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귀퉁이 의자에 앉았다.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았지만 시간은 몹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군인 하나와 젊은 남자 둘이 들어섰다. 군인이 내 오른쪽에, 갈색 잠바의 청년이 내 왼쪽에, 그리고 나머지 이마에 흉터가 있는 젊은이가 내 앞자리에 와서 나를 돌아보았다. 영락없이 포위당한 꼴이었다.
“이곳 분은 아니신 거 같은디…… 여자 혼자서 뭔 일이시오? 학생이오?”
그들의 입에서는 독한 술내가 풍겨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비로소 실감이 왔다. 그렇다. 이곳은 대한민국. 여자 혼자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나의 조국.
“좀 비켜주세요.”
나는 그들을 빠져나와 무작정 승강장 쪽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그들은 더 따라오지 않았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승강장에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몇 달째 사람들을 기피하고 지내던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순안이라는 팻말이 씌어진 줄 뒤에 섰다. 하교하는 고등학생들과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기집애 대학 보내서 뭘 혀. 고등학교까지만도 감지덕지제.”
앞니가 뻐드러지고 키가 훌쩍 큰 여자가 여고생들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순임인 공부를 잘하잖아요.”
그 여자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에미가 미꾸라지 팔아서 겨우 밥먹는디 대학은 무슨 대학.”
버스가 왔고 나는 그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앞니가 뻐드러진 순임이 엄마가 내 옆에 앉았다. 버스는 읍내를 빠져나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덜컹이고 기우뚱거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어, 순안마을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나요?”
“아이고, 내가 그 마을에 사는디, 누구 집에 가는가?”
“저, 현이네 집에……”
“현이네는 왜?”
“취재왔어요.”
여자는 반색을 했다.
“농촌 취재 나왔다니께 우리 집에도 다녀가요. 전에도 뭣이냐, 글을 쓴다는 사램이 우리 집에서 이틀이나 자믄서 나랑 이야기허고 갔어. 헌데 소설은 안 나오등만.”
여자는 왠지 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순안마을에서 내려 마중 나온 현이 어머니의 안내를 받아 가는 내 등뒤에 대고 그 여자는 또 소리쳤다.
“꼭 와야 혀. 모레는 일 안 나가니께.”
하늘엔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기온이 몹시 찼다. 어둠에 낯선 눈으로 나는 더듬듯이 현이네 집으로 들어섰다. 으레 그랬듯이 이방인을 향해 개들이 미친 듯이 짖었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서울 잡지사에서 연락을 받고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평 반이나 될까, 텔레비전 한대와 경대가 놓인 간소한 방이었다. 중학교 이학년인 현이는 방바닥에 도화지를 펴놓고 미술숙제를 하고 있었고, 그 동생들은 이 낯선 서울여자 앞에서 부끄럼을 타는지 윗언니가 숙제하는 데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는 현이 아버지인 김만석씨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직감적으로 이댁 식구들이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이나 머물 거냐는 물음에 계획과는 달리 사흘 정도라고 우물우물 대답해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린 사실 아홉시 전에 자요.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지요. 그럴 수 있겠소?”
김만석씨가 물었다. 나는 사실 밤에 글을 쓰고 아침엔 잠이 좀 많은 편이었다.
“그래야지요.”
“그럼 내일 뵙시다.”
김만석씨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아주 뚝뚝한 말씨였다. 나는 큰딸 현이와 함꼐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한 평 반쯤 되는 정갈한 방이었다. 이미 불을 때두었는지 방바닥이 따뜻했다. 의외로 잠이 쏟아졌다. 아침에 집을 나선 것이 아홉시 반이었으므로 천리도 못 되는 길을 근 열 두 시간이나 헤매어 찾아온 꼴이었다.

비가 퍼붓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해 봄과 여름 사이 지긋지긋하게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나는 우산을 펴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차도 가장자리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지만 택시들은 흙탕물만 튀기고는 나를 지나쳐버렸다. 그래서 겨우 택시가 잡혔을 때 나는 무조건 올라타고 애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 근교의 한 읍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데는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운전사는 머리가 희끗희끗 오십이 넘어 보였는데 눈살을 좀 찌푸리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비는 폭우에 가까울 정도로 퍼붓고 있었고 불광동을 지났을 때는 거의 다릴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운전사는 차를 몰다가 자주 나를 돌아보았다.
“허어, 이거 이런 날에는 여자를 태우지 말랬는데. 흰옷 입은 여자는……”
운전사가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여러 번 말을 되풀이할 때까지 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구파발을 지나 차가 논길에 들어섰을 때 그는 또 말을 꺼냈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개명했다고 하지만 이런 날은 왠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요. ……내 친구 중에 하나는 글쎄 비오는 날 머리가 길고 하얀 옷을 입을 여자를 태웠는데……”
운전사는 말을 계속했다. 여자가 가자는 대로 험한 산골 앞에 차를 세우고 돈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여자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들어가보니 그곳에 그런 여자는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운전사가 분명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자 문을 열어준 여인이 한숨 쉬며 말하기를 오늘이 바로 내 딸의 제삿날이유, 했다는 흔한 이야기였다.
“아가씨, 좀 잘 앉아보슈. 백미러로 잘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제서야 내 몰골을 돌아보았다. 흰 남방셔츠에 흰 모시재킷, 그리고 긴 생머리. 물론 밑에야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지만 나는 그가 정말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그런 걸 믿고 있다는데 웃을 수도 없었고 저는 귀신이 아니에요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더 이상했다. 나는 백미러에 내 얼굴이 잘 비치도록 앉아 그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하지만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건 삶이 아니야. 어쩌면 여기 앉아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정말 유령인지도 몰라. 아침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지치도록 일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남편과의 부딪침.
차는 느릿느릿 달렸고 나는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파란 만원짜리 지폐를 그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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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라 쓰다 (2/2)
    from 내 인생은 진행중 2011-08-08 15:21 
    비가 퍼붓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해 봄과 여름 사이 지긋지긋하게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나는 우산을 펴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차도 가장자리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지만 택시들은 흙탕물만 튀기고는 나를 지나쳐버렸다. 그래서 겨우 택시가 잡혔을 때 나는 무조건 올라타고 애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 근교의 한 읍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데는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운전사는 머리가 희끗희
 
 
2011-08-03 0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8-03 08:24   좋아요 0 | URL
우울하고 절망하는 것도 여유가 있는 사람의 사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어요. 그런 내용의 글이 처음은 아니었을텐데 이 글을 읽으면서 왜 그리 강렬하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리라 해놓고 이제서 다시 읽네요. 십 오년 만에...

2011-08-03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8-03 14:48   좋아요 0 | URL
어제 늦게 주무셨군요 ^^ 오늘도 무더운 날씨입니다.

저 책을 가지고 계신가봐요. 오래 전에 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이번에 겨우 중고책 구입을 했답니다.이건 계속 소장하고 있을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1-08-0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혹시 손으로 베껴 쓰셨을까요?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올 때 창문 너머 비가 많이 와 방에 두었던 편지들이 잔뜩 젖어 말린 기억이 납니다. 참 많이도 쓰고, 많이도 받고 했었더라고요. 그렇게 손으로 쓴 글, 그리고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 적은 글. 사뭇 다른 느낌인 것 같습니다.

그냥 hnine님 서재에 들르니 막 그런 생각이 드네요 ^^

hnine 2011-08-07 05:36   좋아요 0 | URL
이번엔 손이 아니라 컴퓨터로 바로 옮겨 써 보았어요. 기계적으로 따라쓸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꼭 그렇지 않더라고요. 자판에 이미 많이 익숙해져있나봐요. 손으로 베껴쓰는 것보다 속도감이 붙어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더군요.
편지를 많이 쓰고 많이 받으셨군요. 저도 그랬는데 ^^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받은 편지들. 한때는 그것들이 나의 재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오래 끌어안고 있는 것이 스스로 맘에 안들때도 있어요. 저는 변덕쟁이예요 ^^
 

 

언제나 그랫듯이  외할머니를 꿈속에서 만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었는데 
어젯밤에는 외할머니와 한 방에서 자면서  이야기까지 나누었었단다. 
그 뿐인가? 
새벽에 기도를 하고 있는데 마치 
내 방 창가에 와 있는듯  가까이에서 까치가 
조용 조용하게 노래를 불러 주는 거야. 그것도 한~동안이나.... 
오늘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자. 
오늘도 좋은 날이기를  두 손 모아 합장한다.         

          -  엄마가  -

 

 

웬일로 엄마께서 이메일을 보내셨길래 읽어보았더니
꿈에서 외할머니를 만나시고 기분이 좋으셔서 쓰신 메일이었다.
누구에게라도 그 기분을 말씀하시고 싶으셨겠지.
625전쟁때, 그러니까 우리 엄마 열 한 살때, 외할아버지께서 행방불명 되셔서 우리 엄마는 지금도 아버지 얼굴이 가물가물 하시단다. 그후 혼자서 별별 일 다 하시며 우리 엄마를 비롯한 삼남매를 키우신 외할머니. 고생 많이 하시다가 예순 여섯 되시던 해에 천식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올해 일흔 셋인 우리 엄마는 지금도 한달에 한번은 외할머니 산소엘 가신다. 이 세상에 제일 부러운 사람은 엄마가 살아계신 사람이라면서, 지금도 외할머니 얘기를 하실 땐 눈물을 글썽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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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6-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엄마도 그런말씀하셨는데요.
그래서 건강해야겠단 생각이 드네요.님도요^^

hnine 2011-06-29 05:43   좋아요 0 | URL
네, 부모님께서 옆에 계신 동안은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 보호막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엄마'란 이름만큼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을까요. 그 엄마라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축복으로도 생각되고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하고, 그렇네요.

sangmee 2011-06-28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 많이 슬퍼했던 기억나.
어린 시절 너한테 네 외할머니는 엄마랑 같은 의미였지...
우리 외할머니는 나 대학 입학식 3일 전에 돌아가셨잖아.
이젠 울 엄마 나이가 그 때 할머니 연세보다 더 드셨다는게 슬플 따름이고....

hnine 2011-06-29 05:45   좋아요 0 | URL
기억력 짱 김 상미!
외할머니 장례식때, 학교 빠지면 안된다고 엄마가 못가게 해서 더 서럽고 슬펐지.

세실 2011-06-29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글이 참으로 고우세요. 아 좋다~~~~

"오늘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자. "
저도 이렇게 시작할래요.

hnine 2011-06-29 14:26   좋아요 0 | URL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로 시작하는 하루! 매일 그럴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예전에 저의 엄마는 늘 바쁘시고, 저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을만큼 예민하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정년 퇴직하시고 연세가 들어가실수록 많이 편안해지시는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1-06-2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나인 언니는 어머님과 이런 메일도 주고 받으시는군요.
저희 모녀는 가끔 낯설어해요.. ㅎㅎ. 어쩐지 많이 부러워지는걸요.

hnine 2011-06-29 16:35   좋아요 0 | URL
아주 가끔요 ^^
이메일은 종종 보내시는데 대개 재미있는 사진이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으신 좋~은 글귀 전달이거나, 기도문이거나 (제 어머니 불자 시거든요.) 그렇지요.

순오기 2011-07-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정엄마~~~~ 역시 선생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네요~~~~

hnine 2011-07-02 07:54   좋아요 0 | URL
^^
(지금 순오기님 서재 가서 도서관 페이퍼 읽고 감동 받고 왔어요. 많은 분들이 댓글 다셔서 저는 생략하고 왔지만요.)
 

  

 

과연 그럴 날이 올까 생각했던 시간이 결국 이렇게 오는구나.

'내가 도대체 왜 이 길을 택했을까
나도 과연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될까
나만의 가정을 꾸리게 될까
아이가 생기면
예전에 엄마가 살던 곳이라고
이곳을 아이에게 보여줄 날이 있을까
그보다 우선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제대로 마칠 수나 있을까'

그렇게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으며 보낸 시간들.
2000년이 되기 이전의 일이니
그 동안 시간 참 많이 흘렀다.

"엄마, 지금 xx에 가려고 하는데 어느 역에서 기차를 타야하지요?"
아이에게 전화를 받고 어느 역에서 타서 어디에서 내리라고 알려주고 전화를 끊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물 밀듯 밀려오누나. 
과연 그럴 날이 올까 했던 바로 그날이구나 오늘이.

 

  

 

 

 세레나데 (serenade). 밤에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집 창 밖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가볍게 야외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란 뜻으로 바뀌긴 했지만 아무튼 세레나데가 저런 뜻이라는 것을 처음에 피아노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중에 옆에 있던 동생이랑 얼마나 낄낄거렸던지. 사랑하는 사람, 창 밖에서 어쩌구...이런 말들 아니어도 마냥 웃음이 헤프던 나이였다. 피아노 선생님께서 뭐가 그렇게 웃기냐고 언짢아 하시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웃음이 자꾸 터져나왔던 기억이.

세레나데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곡이라서 올려본다. 여기에도 역시 차이코프스키다운 비장한 아름다움이 뚝뚝 묻어난다.

중학생때 읽었던 책 클라우스 만이 쓴 <소설 차이코프스키>를 검색하니 제목은 뜨는데 절판되었다며 이미지 조차 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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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2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도 소설 차이코프스키 중학교 때 읽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읽다 포기했어요. 다시 읽으면 읽혀지려나?
근데 절판됐군요.ㅠ

hnine 2011-06-24 19:47   좋아요 0 | URL
와~~~ 스텔라님. 그 책을 아시는군요! 숨길 수 없는 우리 나이 ㅋㅋ
제 기억에도 그 책이 그리 술술 읽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 책이 아마 그때 중앙일보에서 주최하던 독서감상문 대회 대상 서적 중 한권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읽긴 읽었는데 아시다시피 차이코프스키의 사적인 생활이 보통 사람이 볼때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던지라 더 난해하게 읽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같은하늘 2011-06-2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너무 오랜만에 서재나들이 해봅니다.^^

hnine 2011-06-24 19:48   좋아요 0 | URL
같은하늘님. 무슨 사정이 있으시려니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다시 돌아오실 거라 기대하고 있었어요.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같은하늘님의 생생한 포토리뷰를 이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네요.

마노아 2011-06-2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살던 저곳은 어딘가요? 유학 갔던 학교일까요? 격세지감이 느껴지겠어요.
저 오늘 영화보다가 hnine님께 궁금한 게 생겼어요.
우린 검은 머리가 나이 들면 흰머리 되잖아요.
금발 머리나 붉은 머리, 혹은 은발 머리 등등...
다른 컬러의 머리카락도 나이 들면 흰색이 되나요?
그럴 것 같긴 한데 또 아닐 것도 같아서 hine님께 묻고 싶어졌어요.^^;;;

hnine 2011-06-24 22:18   좋아요 0 | URL
흰머리가 생기는 것이 일종의 노화현상이니까 검은 머리든 금발이든 나이 들면 흰머리가 생길 것 같은데요? 다만 검은 머리인 경우 제일 두드러져 보이겠네요.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인데 저도 갑자기 흥미가 생깁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 맞고요, 오늘 다린이가 아빠랑 거길 간다고 하더라고요 ^^

비로그인 2011-06-2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릴 때 풍금이었는데..ㅎ
hnine님 기분 좋은 축축함입니다. ^^.. 조용히 웃으며 읽고 있답니다

hnine 2011-06-25 08:37   좋아요 0 | URL
어릴때 풍금? 혼자 무슨 뜻일까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기는 쉬지 않고 비가 계속 옵니다.
비가 저를 집안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게 하고 있네요.

하늘바람 2011-06-24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바람결님 패이퍼읽고 님 페이퍼 읽는데 참 느낌이 닮아 있는듯도 합니다.
부러워요 음악엔 문외한이어서요,

hnine 2011-06-25 08:39   좋아요 0 | URL
어제는 음악이 저를 부르는 날이었어요. 예전처럼 자주 못 듣고 있습니다. 주로 라디오를 듣지요. 그것도 집안 일 하면서요 ^^

달사르 2011-06-2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어떤 학교였을까요. 건물이 예사롭지 않은데요. 무슨 연주회장 분위기의 멋진 건물입니다. hnine님의 과거 어느때의 아련하던 생각이 미래의 한 지점과 공유를 했군요. 와..멋져요.

hnine 2011-06-27 16:21   좋아요 0 | URL
하하, 별로 건물이 멋있는 학교는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학교 홈피에 가봤더니 저 사진이 있길래 퍼왔어요.
그때는 참 지루하고 더디게 가던 시간들이었는데, 마치 15년을 훌쩍 시간 이동을 해서 지금에 와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신기하고, 말씀하신대로 아련하기도 하고요. 달사르님의 오늘은 후에 어떻게 기억이 될까요? 저의 오늘은 또 나중에 어떻게 기억이 될까요...

순오기 2011-06-27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야에 듣는 세레나데~~~ 좋은데요.
다린이는 아빠랑 어디를 간 걸까~~~ 궁금해졌어요.^^

hnine 2011-06-27 16:21   좋아요 0 | URL
다린이는 지금 아빠랑 여행중이랍니다. 저는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200% 만끽하고 있는 중이고요 ^^

순오기 2011-06-28 05:13   좋아요 0 | URL
오~ 외국여행인가 봐요.^^

hnine 2011-06-28 06:04   좋아요 0 | URL
짧게 여행가서 내일 돌아온답니다. 제 방학이 오늘 하루 남았어요 ㅠㅠ
오늘 개학 준비 (^^)로 반찬도 만들어놓고 깍두기도 좀 담그고, 김도 굽고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