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직장을 오래 다니는 사람을 예전엔 지금처럼 존경스런 눈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결혼한 여자들의 경우 출산과 육아의 시기를, 직장 때려치우지 않고 (나처럼) 이어나가느라 얼마나 눈물, 콧물 다 흘려야 했을지 짐작 하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도 한 직장을 44년 다니셨고, 나의 첫 직장에 나와 함께 들어갔던 동료들은 지금도 모두 22년째 그곳에 다니고 있다. 나는 딱 3년 다니고 사표내고 나왔는데.

 

같은 직장에 20년 넘게 다니고 있는 친구로부터 종종 전화를 받는다. 결혼도 늦게 하고, 출산도 늦게 한 이 친구는, 아이 키우는 것, 도우미 구하는 것 등 물어보기에 대학생 학부모가 된 다른 친구들보다  이 친구 다음으로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낳은 내가, 그나마 기억하는 부분이 많으니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일거다.

 

1. "앞으로 여기 더 다녀봤자 10년이면 나가야 할거야. 이 직장에서 뼈빠지게 일해도 내게 보장해주는 것도 없는데 여길 계속 다녀야 돼?"

-아이쿠, 더 다녀봤자10년이라니. 10년동안 계속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외국에서 같으면 거의 특혜야. 대학 교수들도 2-3년마다 업적 평가 받고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데? 10년 동안 그야말로 안 짤리고 다닐 수 있는 직장, 흔치 않아. 그건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부러워할 수도 있는 사항 같은데. 자부심을 가져. 그리고 직원이 퇴직하고 노후 생활까지 보장해주는 직장이 이 세상에 어디있니? 다니는 동안 배려해주면 그뿐이지.

 

2. "그만 두고 집에서 아이 키울까봐. 오늘도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나오는데 얼마나 울어대던지,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더라고. 그런데 집안 일도 막상 해보면 힘들겠지?"

-집안 일도 쉽지야 않지. 그런데 집안 일이 쉬운가 어려운가 보다 더 생각해봐야 할것은, 이십 년 넘게 직장 다니다가 집에서 아이 키우고 살림 하면서 네가 흔들리지 않을 소신과 그런 결단을 내릴 용기가 있느냐 하는거야. 가족 조차도 알아주지 않는 때가 많아,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거.

매정한 말 같지만, 아이 울음 소리 뒤통수에 달고 직장까지 출근하며 울음 삼키는거, 직장 다니는 여자들 대부분 다 겪고 지나가는 거란다. 그래서 직장 생활 오래한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단단해지지. 그야말로 그런 시험을 다 통과해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웬만한 고난과 역경에 강해지는 것 같아. 그 부분에 대해서 누가 말만 꺼내봐. 남자들 군대 갔다온 이야기 못지 않지.

 

3. "요즘은 하도 갑갑해서 점이라도 보러 갈까 생각한다니까."

-그럼 한번 가보는거지. 못갈게 뭐 있어. 난 아직 안가봐서 모르지만. 심리상담소라는데는 가봤어. 그런데 거기 가서도 어차피 내가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주게 되더라고. 내가 듣고 싶은 답이 나오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있지. 그러니 어차피 답은 내 안에 있구나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용한 점집이라는 곳이 말이야, 그 사람의 과거 지나온 길을 잘 알아맞추는 것을 보고 용하다고 하는 것 아니니? 그런데 우리가 알고 싶은건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일이잖아.

 

4. "그래도 우리 친구들 중에 OO 가 제일 행복해보여. 그애가 이제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니."

- OO아니라 누구라도 이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 남의 걱정이 내게는 걱정으로 안보일 뿐이지.

 

 

친구에게 축하해줄 일이 있을 때보다는, 주로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 전화를 받는 나.

아무튼 나를 떠올리고 전화를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아주 쓸모 없는 인간은 아닌 것 같아 기분 나쁘지 않지만 오늘은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기쁠 때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을 때 찾는 사람.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고.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2-11-06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명한 답변이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기쁠 때 찾는 친구도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 찾는 친구되기가 더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친구 한 사람이 없어 세상 뜨는 사람 종종 있잖아요~~~~~ ㅠ

hnine 2012-11-06 07:14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때부터 친구라서 그냥 솔직하게 생각대로 대답했네요.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으면 다르게 대답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댓글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싸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그러니까 의미있는 일 맞는거죠?

숲노래 2012-11-06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쉬운 소리...는 늘 아쉽지 않은 사람이 말하지 싶어요.
그러고 보면,
서운한 소리는 스스로 서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말하고
짜증 섞인 소리는 스스로 짜증 섞인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말하며
사랑스러운 소리는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말하는구나 싶어요.

내 모습은 어떠한 소리를 내는 사람인가
문득 돌아봅니다...

hnine 2012-11-06 04:49   좋아요 0 | URL
사람이라면 아쉬운 소리 할때도 있고, 서운한 소리 할때도 있고, 짜증 섞인 소리, 사랑스러운 소리 할때가 있지 않을까 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 경우엔 사랑스러운 소리는 별로 하는 것 같지 않네요 ㅠㅠ

LAYLA 2012-11-06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처럼 현명한 친구라니...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인 것처럼 많은 생각을 하고 갑니다.

hnine 2012-11-06 16:17   좋아요 0 | URL
LAYLA님, 남자들의 경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 경우에는요, 진짜 나이와는 별개로 같은 경험을 겪고 있는 사람들끼리 같은 동지 처럼 묶이더라고요. 저보다 일곱 살 어린 직장 동료가 있었는데 아이들의 나이가 같다보니 선후배가 아니라 친구처럼 얘기가 통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자산 문제, 재정 문제, 뭐 이런 것에 대해서라면 제가 묻고 위의 친구는 대답해주고 그러겠지요.

oren 2012-11-0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글을 읽으니 방금 전에 '친구로부터 받은 카톡'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있어서 재미있네요. 카톡으로 받은 내용은 소위 '성공한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10대부터 쭈욱 길게 나오는데, hnine님 말씀대로 지나간 건 다 제쳐두고 미래에 다가올 내용들만 덧붙여 봅니다.
*성공한 인생*
(10대-50대 생략)
60대-아직 돈벌고 있으면 성공
70대-건강하면 성공
80대-본처가 밥 차려 주면 성공
90대-전화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성공
100세-아침에 눈뜨면 성공

hnine 2012-11-07 09:25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말 속에 뼈 아픈 의미가 있네요.
'지나간 건 다 제쳐두고' 덧붙이신다고 하셨는데 50대도 제쳐두고 60대부터 적어주신 걸 보니, 제가 50대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ㅠㅠ

프레이야 2012-11-0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명한 답변 주셨네요. 역시^^ 특히 3,4번 동감해요. 그리고 힘들때 찾는 친구가 정말 친구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진실되게 살기란 쉬울거 같지만 만만하지 않아요. ㅠ

hnine 2012-11-07 09:25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고민거리를 가지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나한테 올땐 칭찬 받을 거리를 가지고 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셔요.
힘들다 힘들다 하면 자꾸 힘들어진다고, 상대방의 말을 단번에 멈추게 하는 경우도 있고요.
저는 상대방의 말에 너무나 몰입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역시 중용을 지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요.
1, 2번은 그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해온 그 친구의 경력을 생각해서 한 말이고요 ^^

icaru 2012-11-0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힘들거나 갈등에 빠졌을 때, 친구를 찾게 되는 거 같아요. 기쁜 일있을 땐 부러 알리기보단 통화가 되면, 소식을 전한다거나 하는데,,, 뭔가 일이 있을 땐 아무래도 조금은 냉정하게 들리게 말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사안을 볼 줄 아는 친구를 찾게 되요~ 저는 그렇다는 것이고 ㅎㅎㅎ
아 근데,,, 진짜 감탄스러운 답변들예요!!

hnine 2012-11-07 16:37   좋아요 0 | URL
저 친구도 이 시기를 거치고 나면 나름대로 누가 물어보면 해줄 말이 생기겠지요.
돌이켜보면 저는 성공적으로 잘 해낸 것보다는, 많은 시행착오에, 현실 감각 부족에, 다른 사람 도움에 대한 결벽 가까운 증세에...아무튼 순탄치 못한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누가 물어보면 간단히 대답 못하고 말이 많아지더라고요 에궁~

감탄스럽기는요, icaru님 요즘 아이들 영어책 리뷰 올리시는거 보고 감탄은 제가 하고 있답니다. 저는 제 아이 어릴때 그렇게 못해줬어요. 아니 다시 키운다고 해도 못할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