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4 - 중세 미술에 대한 인식과 고대말의 중세적 징후

중세라는 용어
서양의 4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일컫는 '中世'(middle age)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중간시대라는 뜻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대를 현대(modern era)라 부르고 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고대라고 부르며 그 사이의 시대를 중간시대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는 용어입니다. 물론 역사의 한 구간을 중간에 끼어있는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르네상스인들의 편견이며 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의 결과입니다.
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있는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곤 했지만 이 또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중시한 르네상스인들이 神중심적인 중세를 비하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중세는 지중해 중심의 라틴민족과 유럽북방의 게르만민족이 융합하여 근대의 유럽국가의 원형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낳은 참으로 역동적인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세의 기간
중세의 시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달리 잡고 있습니다. 3세기경에 중세의 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때문에 3세기를 시작으로 삼는 이도 있고, 서 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공통된 특징이 기독교이므로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삼는 학설이 일반적입니다. 중세의 끝 경계는 분명히 자를 수 없지만 이탈리아의 경우 르네상스의 시작을 15세기로 삼으므로 그 이전 즉 14세기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미술과 오늘의 미술: 사회적인 역할의 차이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문명의 진단이나 예견을 요구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중세의 미술은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필요와 주문에 따라 공방에서 만들어진 제조품입니다. 중세 미술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예나 조각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이의 생산품이었으며 이러한 익명성은 중세미술을 폄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습니다.

생활 속의 미술: 부수미술(minor art)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
19세기 이후 순수미술 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술은 예술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위 순수 미술(fine art)과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응용 미술(applied art)분야로 크게 나뉘었으며 현대 미술에서 이 분류는 회화, 조각 위주의 소위 주요 미술(major art)과 공예나 상업 디자인의 부수 미술(minor art)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세 미술은 모두 응용 미술이며 대부분이 부수 미술이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미술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사회 생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든 조형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미술은 무궁무진한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중세의 미술품은 예술가 혼자의 몸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종교와 사회의 주문에 의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의 특별한 관심들을 정확히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술이 고대의 것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객관적인 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높였다는 점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비사실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으나 20세기 초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큰 전환을 이루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적 묘사의 거부는 로마말기부터 시작된 현상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로마황제 초상들을 살펴보면서 4세기 전반에 제작된 콘스탄티누스황제상이 (5주, 주제2, 도26)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황제 상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같은 황제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도1)에 새겨진 <황제의 훈시>(도2,3)는 같은 개선문에 새겨진 이전 황제시대의 부조(도4)양식과 현격히 다릅니다. 양감은 없어지고 평면에 깊이 새기는 방식의 낮은 부조로 변하였으며, 주변의 인물보다 훨씬 크게 묘사된 황제는 중앙에 정면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황제이지만 주변인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부조(도4)와 비교하면,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엔 대상을 보이는 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각시키고자 하는 중요성에 따라 크기와 위치를 정하였던 것입니다.

 

도1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로마
 
 
 
 
도2 <황제의 훈시> 부조
 
 
 
 
도3 <황제의 훈시> 도2의 중앙부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부조
315년경, 로마
 
 
도4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냥 축하 의식 중
다이아나신에게의 헌주>
130년경, 대리석,,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드리아누스 황제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에 세워진 <데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 기단부> 부조 (도5,6)를 보면 위의 변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황제와 대신은 소위 로얄 박스로 차별화하고, 황제는 한 가운데 제일 크게 위치해 있습니다. 사실적인 요소는 전혀 없어서 모든 사람은 일률적이고, 따라서 개별화 시킬 수 없으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로지 크기가 큰 황제뿐입니다.

 

도5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오벨리스 기단부>
39년, 대리석,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
왼쪽엔 황제와 가족이 로얄 박스에, 오른쪽엔 황제와 대신들이
로얄 박스에 새겨져 있다.
도6 도5의 부분, 마차 경기를 관람하는 장면이며
윗단엔 황제와 대신들, 아랫단엔 관중석이 새겨졌다.
 
 
 
 

로마 말기에 사실성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특별한 존재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도7)에서는 황제에게 두광까지 씌워서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황제는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이며, 미술은 그렇게 믿도록 설득하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기독교 주제가 주를 이루는 중세 미술에 더욱 효과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미술의 양식은 더욱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힘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도7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
또는 <데오도시우루스 황제 취임 20주년 기념 쟁반>
388년, 은, 지름 74cm 무게 15kg
마드리드, 왕립 역사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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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3 - 폼페이와 로마의 회화

로마의 원래 회화는 역사적 사건의 기록에 의의가 있었던 듯합니다.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회화는(도1) 남자들이 서로 만나는 장면을 여러 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헬멧과 방패를 든 사람이 토가를 입고 창을 든 남자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 등으로 보아 실제 있었던 사건의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회화는 매우 드물며 로마 회화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환영적 기법의 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1 <역사주제의 그림>
기뭔전 3세기 또는 2세기 후반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무덤 출토, 높이 87 cm
로마 팔레초 데이 콘세르바토리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기에 발달하였던 그리스 회화의 원작은 거의 소실되는데 반해, 로마에서 수용한 회화의 현상은 남아있는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원 후 화산 폭발로 도시 대부분이 화산재로 뒤덮였던 폼페이는 건축과 회화의 생생한 현장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폼페이의 회화 양식은 4단계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제 1 양식

우선 도의 그림부터 봅시다. 그림이 어디 있는지 찾게 되죠? 돌을 쌓은 듯한 벽이 바로 그림입니다. 그림이 벗겨진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벽을 쌓은 후 회벽을 칠하여서 마치 대리석 벽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실내장식의 벽화입니다. 도을 자세히 보면 아랫단과 윗단 사이는 석고를 도톰히 하여 더 튀어나와 보이게 하는 스투코(stucco)방식도 그림과 함께 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리석 같이 보이게 하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마치 속임을 당한 듯 실망스럽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지금의 우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니어판에 얇은 원목이나, 원목 무늬의 비닐을 붙이는 것과 같은 수법 이지요. '석재 양식'(mason style)이라고 부르는 이런 그림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지중해 전역에 사용되었던 방식으로 폼페이의 제 1양식은 이의 이탈리아식 버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2 <살루트의 집> 폼페이 Ⅵ 2,4
기원전 2세기 말 또는 1세기 초
 
 
도3 폼페이 Ⅵ 2,4
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 초
 
 
 
 

제 2 양식

기원전 1세기초에서 말 사이에 유행하였던 제 2 양식은 한층 더 발달된 눈속임의 효과를 보여줍니다. 그 초기 형태는 로마의 파라티네 언덕에서 발굴된 일명 <그리핀의 집>(도4.5) 벽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다양한 색의 돌을 맞추어 벽면 무늬를 만들고 그 양쪽엔 산호무늬 대리석을 붙인 것 같죠? 도5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득 그려져서 발코니와 기둥, 그리고 천장 가까이의 석가래까지, 즉 건축적 요소들까지 프레스코로 그림으로써 벽면이 입체감 있게 느껴지지게 됩니다. 제1 양식과는 달리 제2 양식에서는 스투코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회화 기법만을 사용해서 깊이감과 양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4 <그라핀의 집, 네 번째 방>
기원전 1세기 1/4분기
로마, 팔라티네 안티쿼리움
 
도5 도4의 부분
 
 
 
 

제 2 양식의 가장 발달된 모습은 나폴리 근처 보스코레알레(Boscoreale)지역의 한 별장, 침실 벽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연색 도판이 없어서 아쉽지만 도6과 도7을 이어 보면서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도6 < P.파니우스 시니스터의 별장, 침실M의 벽화>
기원전 50-40년경, 1930년 발굴당시 모습
 
 
 
도7 도6의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진열된 현재 모습
 
 
 
 

작은 침실이지만 마치 창밖으로 정원과 이웃집들이 보이는 열린 공간으로 느껴지죠? 기둥과 감실 등으로 건축적인 틀을 설정하고 그 안의 면적을 마치 창문 너머의 광경이 보이는 것처럼 효과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서양문화에서의 그림의 역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즉 그림은 실제는 아니지만 마치 무엇처럼 보이게 하는 환영(illusion)의 효과를 나타내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도8 도6,7의 부분
 
 
 
 
 

제 3 양식

이렇게 실내를 꾸미는 벽화는 그 장식적인 기능에 걸 맞는 양식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폼페이의 일명 '베티의 집' 벽화(도9)를 보면 기둥사이에 펼쳐진 창 너머의 그림이라는 요소를 이어 받고 있지만 기둥이 너무 가늘어서 실제 건물같이 느껴지지 않으며 기둥 사이의 그림도 창 밖의 풍경이기보다는 그림이 걸려있는 듯한 구성입니다.

 

도9 <베티의 집> 폼페이 Ⅵ15,Ⅰ
기원 후 62년경
 
 
 
도10 <뱀을 죽이는 어린 헤라클레스> (도9)의 가운데 부분
 
 
 
 

도11,12,13,14는 폼페이의 일명 M. 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 벽화와 부분들입니다. 선명한 붉은 색이나 까만 바탕에 잔무늬의 장식을 두르고 그 가운데 그리스 신화 이야기 그림을 걸어 놓은 듯한 장식벽화가 집안 전체에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로마 귀족들의 화려한 삶과 이 많은 벽화의 수요에 동분서주했을 화가들의 삶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도11 폼페이의 M.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 벽화
기원후 40-50년
 
 
 
도12 도11의 남쪽 벽 부분
 
 
 
도.13 <비너스에게 구애하는 마르스>
도11의 안쪽 벽 가운데 부분
 
 
도14 <별장 풍경> 도11의 안쪽 벽 왼쪽 부분
 
 
 
 
 
 

제 4양식

4양식은 1, 2, 3양식과 같이 그렇게 분명히 구분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2, 3양식이 절충되고, 이와는 매우 다른 장식적인 양식들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도15). 이들이 천장과 벽을 이어가며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인 연결은 마치 '벽지패턴'같은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도16).

 

도15 <베티의 집 중 익시온의 방>
기원후 62년
 
 
도16 <베티의 집 중, 동쪽벽>
기원후 62년 이후
 
 
 
 

이외에도 로마벽화에서는 일루젼 기능을 하면서도 그리스 방식과는 다른 회화방식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림이 신비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폼페이의 <신비의 집>벽화에서는 한방의 네 벽면에 거의 등신대의 인물들이 마치 연극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17, 18, 19, 20). 우리가 도10이나 13에서 본 인물들은 근경, 중경, 원경으로 공간감 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신비의 집>인물들은 평면적인 배경에 거의 근경의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야기 서술을 강조하는 로마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인물 중에 실레누스형의 남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바카스 신화와 관계된 이야기라고 짐작되지만 분명하지는 않으며 특정한 의식을 행하는 장면인 듯 합니다.

 

도17 폼페이의 <신비의 집> 북, 동쪽 벽화,
인물 그림 높이 162cm, 기원전 60-50년경
 
 
 
도18 도17의 부분
 
 
 
도19 도17의 부분
 
 
 
도20 도19의 부분
 
 
 
 
 

환영기법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부인(?)인 리비아의 별장 지하에는 정원만을 그린 벽화가 그려졌습니다. 정원의 담장이나 일루젼적인 방법은 앞서 살핀 제2 양식과 연관지을 수 있으나 건축적 기능의 기둥은 모퉁이에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미풍에 흩날리는 나무들은 향기 마저 느껴질 듯 감미롭습니다. 아마도 여름철을 위한 시원한 지하 식당인 듯 한데 아마 이 곳에 앉아 있으면 지하이면서도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여서 시야가 탁 트인 듯 느껴질 것입니다.

 

도21 <리비아의 별장 정원그림>
높이 2m, 기원전 20년경
로마, 테르메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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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2 - 황제의 기념비와 초상조각

여러분은 '로마'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세요? 개선문, 콜로세움, 로마 황제…. 바로 그런 것이 로마의 유산입니다.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영토확장과 그것의 유지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를 하면 개선문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전쟁에 승리한 후 신전을 지은 것과 큰 대조를 보이죠? 그리스인은 승리 후 신에게 감사드렸다면 로마인은 이를 황제의 업적으로 기린 것입니다. 티투스 황제(Titus: )의 개선문엔(도1) 그들이 예루살렘 점령 후 전리품을 들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부조를 새기고(도2), 아치 안에는 독수리로 로마황제를 상징하였습니다(도3). 로마인에게는 승리와 개선이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306-337)는 4세기에 그의 개선문을 축조하면서 이전의 현제(賢帝), 아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시대의 조각을 그의 개선문에 붙였습니다(도4,5,6). 이전 현제의 위업을 계승한다는 암시겠지요.

도1 티투스 개선문 80-85년, 대리석, 포로 로마노
 
 
 
도2 도1의 부분<예루살렘 신전의 점령>
 
 
 
도3 도1의 부분<티투스의 신격화>
 
 
 
도4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대리석
 
 
 
도5 대리석, 지름 340cm,
130-13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도6 180-190년경에 제작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대리석, 높이 314cm
 
 
 
 
 
 

로마인은 또한 기념주를 만들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부조로 새겼습니다. <트라이아누스 기념주>(도7)는 높이가 40m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입니다. 기둥표면을 나사모양으로 둘러가며 띠를 형성하였는데 200m에 달하는 이 띠엔 트라이아누스가 수행한 다치아(Dacia, 현재의 루마니아)와의 전쟁, 즉 101-102년과 105-107년 두 번에 걸친 전쟁의 기록을 부조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하면서 반인반수나 거인족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적을 암시한 것과는 달리 로마인은 황제가 다치아와 직접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였으니, 이는 신화보다 인간의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사고의 결과일 것입니다(도8,9).

 

도7 <트라이아누스 기념주>
110-113년경, 대리석, 높이 38m, 로마
 
 
도8 도7의 부분
띠의 높이 96cm
 
 
도9 <다치아 성의 함락> 도7의 부분
 
 
 
 
 

콜로세움은 많은 영화의 장면들 덕분에 검투사들의 싸움터로, 기독교인의 박해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공공의 행사장소였습니다(도 10,11). 우선 외부부터 보면 콜로세움은 거대한 원형의 단일 건물입니다. 그리스인은 주로 열주형태를 사용한데 반해 로마인은 아치를 주요 건축 요소로 적용하였습니다. 아치 사이에 그리스 식의 기둥이 있지만 건축적인 기능을 하지 않고 단지 장식적인 역할을 할 뿐이죠. 내부는 현대의 운동 경기장같이 스타디움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도11 에서 보는 현재의 바닥은 지하 부분이고 그 위는 마루로 덮여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에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건축물이죠.

도10 <콜로세움>, 석회석(트라베르티노), 높이 48.5m , 로마
 
 
 
도11 도10의 내부
 
 
 
 
 

로마 미술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초상 조각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12의 초상을 봅시다. 어떻습니까? 귀족의 초상이라고 여겨집니까? 왜 아니죠? 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서민도 사진을 찍을 때면 되도록 잘 나오도록 인상관리를 하는데 로마인은 귀족도 미화시키지 않다니 매우 특별한, 현실적인 사회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집에 조상들의 초상조각을 진열해 놓았다가 집안 식구의 장례 때 이 상들을 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조상이 후손의 장례에 참석한다는 의미일 테니 가문의 중요성이 컸던 사회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도13).

도12 <로마귀족의 초상>
1세기 중엽, 대리석, 높이 35cm
로마, 트르로니아 박물관
 
도13 <선조의 초상을 들고 있는 귀족의 초상>
기원전 1세기 말, 대리석, 높이 165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초상의 대상은 남녀노소가 다 포함되지만 우리 수업에서는 로마초기부터 4세기경까지의 황제초상을 살펴보겠습니다. 황제의 초상들은 각 시대가 어떠한 지도자를 원하였는지 잘 보여주어서 사회의 변천까지 느낄 수 있으니까요.

도14의 초상은 기원전 82년부터 4년 간 로마를 통치하였던 독재자 실라(Silla: 138-78 B.C.)의 초상입니다. 독재자로서의 권위보다 마른 얼굴에 집요한 성격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어서, 그리스의 인물상과는 매우 다른 로마의 초상 전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삼두정치시대를 마감하고 황제시대로 접어들면서 실제를 직설적으로 나타내던 로마의 초상방식은 점차 그리스 헬레니즘 양식을 가미하고 있습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제위27B.C.-14A.D.(도15))는 섬세한 얼굴에 예민한 성격의 개인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주름까지 나타내던 이전의 로마초상과 달리 얼굴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국가를 황제체제의 로마의 평화시기(Pax Romana)로 정립시키는 시기에 그리스방식을 적용시킴으로써 황제를 정통화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玉>(도16)은 이 시대 헬레니즘적 성격의 기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투구를 쓴 로마의 의인화 옆에서 그리스 영웅같이 반 누드로 있고, 우주의 상징인 오이코우메네(Oikoumene)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방패를 딛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옥좌아래엔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있으며, 아래 단엔 로마군들이 적을 포로로 삼는, 즉 승리의 순간을 새겨 넣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이상화시키는 이 모든 내용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헬레니즘 양식으로 잘 포장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4 <실라초상>
기원전 80-75년,대리석, 높이 26cm
베네치아 고고박물관
 
 
도15 <아우구스투스 황제초상>
기원전 35-29년, 대리석,높이 37cm
로마, 알바니 콜렉션
 
 
도16 <아우구스투스 玉>
15-37년경, 카메오, 19×23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다시 황제 초상으로 돌아가봅시다. 1세기 후반의 안정된 로마에서는 생김새를 그대로 나타내는 직설적 사실주의가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도17과 18의 두상은 모두 기원 후 69년에서 79년까지 집정한 베스파지아누스황제(Vespasianus : 제위69-79)의 초상입니다. 왼쪽 초상(도17) 을 보면 눈, 코, 입이 얼굴 한 가운데로 모여있고, 눈가와 이마에 주름이 많으며 코가 크고, 입이 들어간 황제의 실제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같은 황제의 초상으로 오른쪽 상도 있습니다. 똑같이 생겼으나 미묘하게 다르죠? 좀더 세련되게 다듬은 오른쪽의 초상(도18)은 아마도 공식적인 황제 초상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17 <베스파지아누스 황제>
69-79년, 대리석, 높이 29cm
코펜하겐, Ny팔스버그 글립토테크
 
도18 <베스파지아누스 황제>
69-79년, 대리석, 높이 40cm
로마 국립박물관
 
 
 

로마가 최대의 영토를 지니고, 또한 내부적으로도 가장 안정된 로마 전성기의 황제는 늠름한 젊은이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핀 <트라이아누스 기념주>(5주 주제2,도7)의 주인공인 트라이아누스황제(Trianus: 황제 98-117, 도19)는 98년에서 117년까지 19년 간을 통치한 소위 5현제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기념주에서도 부관과 의논하고 있는 인간적이고 현명한 황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도20).

도19 <트라이아누스황제 취임20주년 기념초상>
108년, 대리석, 75cm
런던, 프리티시 박물관
 
도20 <트라이아누스와 부관수라> 도7의 부분
110-113년,대리석, <트라이누스 기념주>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로마는 그들이 정복한 변방의 민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 황제 161-180년 A.D., 도21)는 그의 『명상록』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의무였음을 토로하며, 전쟁의 광경을 '뼈다귀를 위해 싸우는 인형들'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미술엔 특히 이러한 비참함이 강하게 베어있습니다. 그의 기념주엔 포로를 참수하는 끔찍한 광경이 묘사되고(도22), 그의 시대에 제작된 또 다른 부조의 장면은 적장이 아들과 함께 항복하는 장면을 처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도23,24).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옷자락을 깊게 파는 표현주의적인 조각기법은 참담함을 나타내는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되었습니다.

 

도2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도22 <포로들을 참수하는 로마군>,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도23 <적장의 투항을 받는 아우렐리우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부분,,180-190년
높이314cm, 대리석, 로마
 
도24 도23의 부분
 
 
 
 
 

시대의 어려움을 철학자적인 자세로 감수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는 달리 그의 계승자 콤모두스 황제(Commodus:제위 180-192)는 변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원로원이 아닌 경기장에서 세월을 보내어 국가를 더욱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강한 황제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헤라클레스에 비유하였습니다(도25). 안밖으로 흔들리던 로마는 이제 더 이상 훌륭한 한 인간인 황제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황제를 요구하는 사회심리를 볼 수 있습니다.

 

도25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황제>
190년경, 대리석, 높이 118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이보다 150년 가량이 지난 4세기 전반, 황제는 절대자가 되어갔습니다. 도26의 초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상(Constantinus:제위 305-337)입니다. 황제상은 더 이상 특정 인물을 닮은 초상이 아닙니다. 커다란 두 눈은 현실이 아닌 먼 곳을 응시하여 초월적인 인상을 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초상은 높이가 2.6m에 달하는 실로 큰 두상이지만 이 또한 거대한 좌상의 일부이니 실제의 황제상은 거의 12m에 달한다는 사실입니다(도27,28). 이제 황제상은 인간의 상이기보다 숭배의 상이 된 것입니다. 로마사에서는 1-2세기를 황금시대라 하고, 2세기말부터 나타난 정치적인 쇠퇴가 이어진 3-4세기를 녹슨 철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때는 47년 동안 25명의 황제가 바뀌고, 그 중 1명만이 자기 침대에서 죽었다고 하니, 죽고 죽이는 무력적인 찬탈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리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사회는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지도자와 신비종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도26 <콘스탄티누스황제 초상중 두상부분>
312-315년, 대리석, 높이 260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도27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두상이 진열된 모습>
 
 
 
도28 콘스탄티누스 황제 상의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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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1 - 그리스 미술의 수용과 로마의 특성

기원전 146년 로마가 그리스의 코린트 지역을 점령한 이후 지중해 지역은 사실상 로마의 영토가 되어갔습니다. 로마시의 티베리나섬에서 부터 시작한 로마 민족은 이제 제국으로 성장해 간 것입니다(도1). 원래 호전적이었던 로마민족은 그리스의 발달된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켰습니다. 비너스와 마르스의 상에 얼굴만 초상으로 바꾸어 부부의 초상을 만든다든지(도2), 그리스 신전형식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인이 중요시하던 조화로운 비례감은 무시하는 등의 현상에 대해서 고대전공의 초기 미술사학자들은 그리스 미술을 망쳐놓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현상은 한가지 기준으로 우열을 가리기보다 각 사회의 요구에 의한 생산임을 자각한 이후의 학자들은 로마미술의 특성을 찾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미술은 실용성과 현실성, 그리고 이야기 서술을 중요시 여긴 것입니다. 이제 건축과 조각, 회화의 작품을 예로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어떻게 수용하고 변형시켰는지 살펴봅시다.

 

도1 로마의 티베리나 섬
 
 
 
도2 비너스와 마르스 상으로 나타낸 부부초상
대리석, 높이216cm, 오스티아출토
로마 국립박물관 소장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판테온 신전(Pantheon=Pan모든+Theon신들)(도3), 의 정면은 기단부 위에 열주와 삼각형 팀파늄을 얹은 그리스 신전의 형식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신전과 비교해 보면 열주는 너무 가늘고 팀파늄은 지나치게 커서 그리스 신전이 지닌 조화로운 비례는 찾아볼 수 없으니 로마인은 美의 요소는 빠뜨린 채 형식만 가져온 셈입니다. 그러나 판테온의 전체구조를 보면 로마인은 현관만 그리스 신전형식으로 장식하였을 뿐 내부는 완전한 구(球)의 단일 공간으로 설계하였습니다(도6). 그리스 신전은 내부를 닫고 외부에서의 시각적 효과를 중요시여긴 건축인데 반하여, 로마의 판테온은 내부를 실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건축인 것입니다.

 

도3 판테온 신전, 2세기 초, 로마
 
 
 
도.4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도5 도3의 로마 당시로의 복원 모형
 
 
 
도6 도3의 내부
 
 
 
 
 

도7의 조각상은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 조각의 전형으로 본 <창을 들고 가는 사람>(도 8)과 비교해 보면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즉 몸의 포즈와 형태를 그대로 수용한 채 아우구스투스의 갑옷을 입히고, 익명의 얼굴이었던 그리스 두상자리에 초상을 넣음으로써 황제의 상으로 바꾸었으니 필요에 의한 변형인 것입니다.

 

도7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상>
14-29년경, 대리석, 높이204cm
바티칸, 키아라 몬티 박물관
 
도8 <창 들고 가는 사람>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원형의 기원후 1세기 로마 복제품
 
 
 
 

회화의 예도 살펴봅시다. 지난주에 본 바와 같이 그리스의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기에는 벽화 등의 대형회화가 크게 발달하였으나 본토에 있던 원작은 거의 소실되었습니다. 반면에 이를 받아들인 로마의 회화는 많은 부분이 보존되어 있어서 그리스 회화의 성격을 짐작케하며 또한 로마인의 다양한 수용형태를 보여줍니다. 도9와 도10은 모두 미노스 궁전에 갇혀있던 아테네인들을 아테네로 구출해 온 영웅 테세우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같은 주제이고, 테세우스가 한 가운데 있는 같은 형식이지만 차이가 있죠? 그럼 어떤 그림이 더 마음에 듭니까? 제가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물으면 대부분이 도9의 그림을 선호하더군요. 그도 당연한 것이 남자 인체를 훨씬 아름답게, 그리스 조각에서 본 모델같이 묘사하였죠. 이에 비교해 볼 때 도10의 인체는 어깨가 너무 내려오고, 상체가 너무 길고, 허리와 다리를 잇는 고관절의 묘사가 약합니다. 실제 인체에 더 유사할 지는 모르지만 아름답지는 않죠. 그러나 조금 관점을 달리하여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봅시다. 왼쪽의 그림은 테세우스라는 한 영웅을 강조할 뿐이지만 오른쪽 그림은 그가 구한 아테네 시민들에게도 큰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죠. 로마인들은 그리스 신화나 역사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때론 그리스 화가를 데려오기도 하고, 혹은 그 그림을 보고 로마의 화가가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두 그림은 모두 기원 후 1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도9의 <테세우스>는 로마의 행정장소였던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발견되었고, 도10의 <테세우스>는 폼페이의 개인집에 그려진 것이어서 전자는 좀 더 공적인 장소에, 후자는 개인적인 공간에 그려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초기 황제시대엔 공적인 목적에선 그리스 문화를 더 많이 수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또한 전자는 그리스 화가가 와서 그린 것이라면 후자는 이를 보고 로마 화가가 그린 것 일 수도 있습니다. 위의 세 비교를 통해 로마인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으며 또 미화된 한 주인공보다는 이야기 서술을 선호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도9 <아테네인을 구하는 테세우스>
60-79년경, 프레스코화, 높이190cm, 에르콜라노 언덕 출토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10 <아테네인을 구하는 테세우스>
60~79년경, 프레스코화, 폼페이가비우스 루푸스집 출토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
 
 
 

한 두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도11의 부조는 오스티아(Ostia)도시의 가게 간판이었습니다.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금방 알 수 있겠죠? 아래쪽엔 토끼가 갇혀있고, 위엔 닭 같은 것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닭과 토끼 등을 파는 곳이었겠지요. 그럼 도12의 그림은 무슨 가게의 간판일까요? 시원한 음료와 과일이 있는걸 보니 아마 간이 음식점이라고 짐작됩니다. 작은 테이블은 옆에서 보고 컵은 약간 위에서 보고 그린 것이어서 마치 엉터리 같이 느껴지죠. 그러나 그런 점은 오히려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컵을 옆에서 보면 사다리형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로마의 미술은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보다 직접적인 전달력을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11 <야채와 닭을 파는 집 간판>, 2세기 후반, 폭55cm, 대리석, 오스트리아박물관
 
 
 
 
도12 <간이 음식점 간판>, 1세기, 프레스코화, 폭105cm, 오스티아의 비아 디 디아나 현장
 
 
 
 
 
 

도13의 부조도 로마인의 성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부조는 도14의 무덤 제일 윗부분에 새겨진 것입니다. 무슨 장면이냐고요. 자세히 보십시요. 맨 오른쪽에서부터 보면 나귀가 돌리는 방아가 보이고, 그 왼쪽 상 위에서 두 사람이 무언가 만들고 있습니다. 밀을 가루로 만들어 반죽하고, 그 왼쪽의 오븐에 넣어 빵을 만드는 장면입니다. 이 무덤은 빵제조업자 비르질리오스 에우리사세스(M. Vergilius Eurysaces)의 무덤입니다. 빵 굽는 이를 미화시키지 않고 자기 직업을 그대로 묘사한 것입니다. 로마인의 현실적인 성격도 놀랍지만 이 무덤이 서울로 말하면 4대문 안에 놓여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도15). 그리스인들이 죽은 이를 승리한 운동선수(도16)나 용감한 기병(도17)으로 미화시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로마인은 묘비에 자신의 직업을 그대로 <빵 굽는 이>(도13)나 <배 만드는 이>(도18)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인의 이러한 현실적인 사고 방식은 미술사에 커다란 두 가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나는 황제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고, 다른 하나는 초상조각입니다.

 

도13 <빵제조업자 M.베르질리우스 에우리사세스의 무덤 윗부분>
1세기말, 대리석, 로마, 프레네스티나 가,
 
 
 
 
도14 <빵제조업자 M.베르질리우스 에우리사세스의 무덤>
1세기말,대리석, 로마, 프레네스티나 가
 
 
도15 <포르타 마죠레>
오른쪽 아래가 도14의 무덤
 
 
도16 <승리한 우동선수>, 기원 전340년경,

높이168cm, 아테네, 대리석

아테네에서 출토된 묘비석
국립고고학박물관
 
도17 <용감한 기병>, 높이175cm
대리석, 아테네 출토
댁실레오스의 묘비석
페라메이코스 박물관
 
도18 <푸블리오 농기디에노 家 의 묘비>
1세기, 전체 높이266cm의 부분, 대리석
라벤나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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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0 - 그리스 회화와 헬레니즘

우리가 그리스 도자기를 통하여 살펴본 아르카익 시대의 회화는 기원전 5세기의 고전기에 큰 규모의 벽화로 발전하였습니다. 원근법과 명암법, 다양한 색채가 구사된 사실적인 회화는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이들은 2500여 년의 흐름과 함께 소멸되었으나 문헌의 기록들은 그리스 회화가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를 제시 합니다.

기원전 4세기 초에 활동한 제욱시스(Xeuxis)와 파라시우스(Parlasios)에 대하여 로마의 플리니우스(Plinius)는 다음과 같은 경쟁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루는 제욱시스가 포도송이를 그리니 새가 진짜인줄 알고 그림에 날아 앉았다고 합니다. 득의양양한 제욱시스는 파라시우스의 그림을 보자고 앞에 있는 커튼을 걷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커튼은 바로 파라시우스의 그림이었습니다. 제욱시스는 자기는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우스는 화가인 자기의 눈을 속였으니 파라시우스가 더 훌륭한 화가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그림은 진짜 같이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크세노폰(Xenophon)은 파라시우스와 소크라테스사이의 대화를 전해줍니다.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파라시우스의 집에 와서 그에게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냐고 묻자 파라시우스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인간의 마음, 즉 달콤함, 친절함, 사랑스러움 같은 것은 모방할 수 없냐고 묻자 파라시우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그리겠느냐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천함이나 부자유, 겸손함이나 사려 깊음 뿐 만 아니라 장엄함이나 자유로움 등도 얼굴의 표정이나 동작의 태도에 나타나는 것이니 모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되묻자 파라시우스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글들은 몇 세기를 거치는 동안 윤색되어온 내용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리스의 회화가 사실성과 함께 인간의 감성을 나타내려 했음을 짐작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자료입니다.

 
 
그리스의 화가 중에서도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아펠레스(Apelles)는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그를 능가하는 화가는 아무도 없었다고 칭송 받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화가였던 그는 대왕에게 충고하고, 대왕 또한 그를 존경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왕의 초상뿐만 아니라 신화와 역사이야기까지 광범위하게 그렸으나 전해지는 진품은 없고, 로마시대의 모작을 통해 짐작할 뿐입니다.

도1의 <알렉산더 모자잌>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Ⅲ세에게 크게 이긴 익수스대전을 그린 기원전 4세기 후반의 그림을 폼페이에서 모자잌으로 모사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왼쪽의 알렉산더 대왕은 창을 들고 공격하고, 페르시아왕은 황급히 마차를 돌려 뒤를 쳐다보며 후퇴하는 박진감 넘치는 구도입니다. 대각선으로 배치된 페르시아 군대의 창들은 원근감을 느끼게 하고 인물엔 명암법을 구사하여 볼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도2). 우왕좌왕하는 퇴각의 혼돈스러움과 다리우스의 겁먹은 표정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느낄 수 있습니다.(도3). 모자잌 모사가 이렇다면 그리스의 진작이 연출하였을 생동감 넘치는 효과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도1 <익수스 대전>
310년경 B.C. , 그리스의 2~1세기 그림의 로마시대 모자잌모사,
폼페이, 목신의 집 출토, 나폴리 국립박물관
 
 
 
도2 도1의 왼쪽 부분
 
 
 
도3 다리우스 도1의 오른쪽 부분
 
 
 
 
 

그러나 그림은 언제나 실제 장면이 아니고 특정효과를 내는 연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숨막히는 전쟁에서 알렉산더는 투구도 쓰지 않았으니, 이는 알렉산더를 젊고 건장한 영웅의 이미지로 남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미술을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 활용한 최초의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용맹스럽게 보이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사자탈을 쓴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며(도 4,5), 언제나 태양신 헬리오스를 연상시키는 사자갈기 머리에 보는 이를 제압하는 깊은 눈의 강렬한 시선으로 묘사하게 하였습니다(도4).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조각이라 전하는 (도4)의 두상은 알렉산더 이미지를 짐작케하며 이 모델은 이후에도 크게 유행하여 거듭 복제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것이라 전해지는 도6의 석관은 그 진위가 논란거리이지만 사자머리를 쓰고 적을 짓밟는 용맹스런 알렉산더 이미지가 크게 확산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4 <알렉산드로스 대황의 두상>
340~330년경 B.C. , 대리석, 35cm
아테네
 
도5 <알렉산드로스 동전>
318년경 B.C.
런던 대영박물관
 
도6 알렉산더 석관, 기원 전4세기, 시돈출토, 대리석, 69cm,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도7 도6의 뒷면
 
 
 
 
도8 도6의 부분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 출신이었으나 범 그리스 정책을 써서 그가 정복한 지중해 중심의 전 영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범 그리스 문화를 일컫는 헬레니즘은 그리스 미술이 각 지역에 이식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줍니다. 소아시아 반도에 위치한 도시 페르가모(Pergamo)의 군상과 제단을 봅시다. <죽어가는 갈리아인>(도10)과 <아내를 죽이고 자결하는 갈리아인>(도11)은 현재 로마의 카피톨리네 미술관에 소장된 로마 시대의 복제품이지만 원작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원래는 다섯 점이 모여 이룬 군상으로 아탈로1세(Attalo)가 갈리아에게 이긴 전쟁을 기념하는 조각입니다(도9). 죽음을 앞둔 갈리아인과 적의 포로가 되기 보다 죽음을 택하는 무사의 처참함에서 우리는 고전기가 지니고 있던 숭고함이나 영웅적인 보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연극적으로 세팅된 비극적인 참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탈로 I세는 적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어렵게 얻은 자신의 승리를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9 갈리아
 
 
도10 <죽어가는 갈리아인>
220년경 B.C., 대리석, 94cm
로마, 카피톨미술관
 
도11 <아내를 죽이고 자결하는 갈이아인>
220년경 B.C., 대리석, 211cm
로마, 국립미술관
 
 
 

아탈로 I세의 아들 에우메네II세(EumeneII)는 아버지를 위해 제우스 제단을 건립하였습니다. 열주와 팀파늄 형식의 단일구조는 이제 기원전 2세기에 모양의 복합적인 구조로 변하였으며 팀파늄이나 메토프에 새겨져서 멀리 올려다보아야 했던 부조는 계단 옆 아래에서, 보는 이의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폭이 36.5m에 달하는 거대한 제단은 그리스 모델을 받아들여 파격적으로 변형시킨 헬레니즘의 양상을 잘 대변합니다(도12,13).

 

도12 <제우스 제단>
175년경 B.C.
베를린 국립박물관
 
도13 제우스 제단의 왼쪽
 
 
 
도14 제우스 제단 왼쪽 부분
 
도15 제우스 제단 부분
 
도16 제우스 제단 부분
 
도17 제우스 제단 부분
 
 
 

부조로 새겨진 다이나믹한 움직임과 격렬한 표정의 장면들은 <神들과 거인족의 싸움>입니다(도13-17). 신화의 싸움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균형과 절제를 지니고 있었던 고전기의 부조들과 달리 기원전 2세기 소아시아에 이식된 그리스 조각은 온통 격렬한 움직임 뿐 입니다. 조각들은 깊게 파여 강한 표현력을 지니며 신들에게 패배한 거인들의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습니다. 신전의 구조와 조각수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주제에서 그리스인의 방식을 받아들여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인들이 신이나 영웅을 한편에 두고, 이에 대항하는 반인반수의 괴물이나 거인족을 적으로 대치함으로써, 그리스인과 非그리스인의 싸움을 선과 악의 대결로 삼았듯이, 페르가모인은 자신들과 갈리아인의 싸움을 신과 거인의 전투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에겐 자신들도 야만인이었으니 그들 또한 문화적인 식민종주국의 방법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거대한 제단과 조각을 완성하는데는 페르가모의 조각가 뿐 만이 아니라 로디(Rhodi) 등 그리스 전역의 조각가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페르가모에서 적용된 조각수법은 그리스 전역에 공통된 이 시대의 양식이기도 하였습니다. 스페르롱가 지역에서 제작된 <오딧세이의 모험>(도18)이나 <라오콘>(도19)은 모두 격렬한 표현의 바로크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두 아들과 함께 뱀에 감기는 고통을 당하는 라오콘은 고통의 절정의 순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조각은 온통 비틀려 있으며, 일그러진 근육은 격렬하고, 고통스런 표정은 장렬합니다. 이제 조형의 성격은 고전기의 성격과 정 반대편에 있습니다. 균형은 다이나믹함으로, 절제는 무절제로, 평정은 격렬함으로 영원함은 순간적 묘사로 변한 것입니다.

도18 <오딧세우스>
1세기 B.C, 스페르롱가 출토, 대리석
스페르롱가, 고고학 박물관
 
 
도19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1세기경 B.C., 대리석, 184cm
로마 바티칸 미술관
 
 
도20 도19의 라오콘 머리부분
 
 
 
 
 
 
 

알렉산더 대왕 이후 지중해 전역이 그리스화 되고, 사회가 급변하면서, 행운과 좌절이 점철된 인간의 삶은 예견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격렬함이나 처절함, 또는 기이하거나 에로틱한 극단적이고 다양한 미술을 낳았습니다.

이름 없는 <술 파는 노인>(도21)은 밑바닥 인생의 처절함을 보여주며, 꼽추나 기형의 기이함을 즐기고(도22), 디오니소스 주제의 성적사랑(도23), 남녀양성을 지닌 아프로디테의 변태적 性(도24)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도21 <술파는 노인>
 
 
 
도22 꼽추
 
 
 
도23 <아프로디테, 에로스, 판>
100년경 B.C., 델로스출토, 대리석, 111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24 <에름 아프로디테>
2세기경 B.C., 페르가모 출토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그러나 또한 고전에 대한 회기현상도 일어났으니 잘 알려진 밀로섬 출토의 아프로디테(도25)는 고전적 美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보여줍니다. 이제 예술의 주요 주제는 공공적인 이상이 아니고,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둔 감정, 사랑, 순간적인 심리가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특이함과 불안감은 물론 헬레니즘시대의 격변하는 사회에서 요구된 미술의 양상입니다. 그리스 이제 고전기의 아테네가 지녔던 공동체의 보장이 붕괴되었으며, 불확실하고 예견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행운을 찾아 그리스 점령의 신도시로 떠난 이들은 삶의 불확실 속에서 기회와 행운을 찾고, 이러한 행운에 대한 강박관념은 영웅적인 인간의 힘보다는 운명을 믿게 되었습니다. 도26의 <티케Tyche>상은 머리에 성곽의 관을 쓴 티케지역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상징만은 아니고 믿음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니 번영과 희망, 운명은 바로 티케상에게 달렸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도25 <밀로섬 출토의 아프로디테>
150~250년경 B.C., 대리석,17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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