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24- 만토바와 우르비노

르네상스 도입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15-16세기의 이탈리아(지도)는 작은 도시들이 독립된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 본 피렌체와 로마는 그 중 중심이 되었지만 주변의 국가들 또한 그들과의 영향 속에서 독창성을 지니면서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만토바는 곤자가가문이 이끄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루도비코 곤자가(Ludivico Gonzaga)는 건축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에게 그들의 교회 설계를 의뢰하고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를 궁정화가로 기용함으로써 고대에 대한 관심을 현실의 시각이미지로 구현시켰습니다.

 

 

인문주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알베르티는 만토바의 산 안드레아(St.Andrea) 교회를 짓는데 고대건축의 방식을 응용하였습니다(도1,2). 정면의 지붕엔 그리스식 삼각형 팀파늄을 얹고 아래엔 로마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아치를 적용한 것입니다. 내부는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하여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로마 건축에서 사용하던 넓은 폭의 베럴 볼트로 천장을 처리함으로써 제단까지 확 트인 시야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도1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산 안드레아>
1472년 만토바
 
 
 
도2 도1의 내부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루도비코 곤자가는 고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그 이미지를 자신의 궁에 적용하였습니다. 그가 고대 유적에 관심이 많던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를 궁정화가로 채용한 것은 이전의 국제 고딕 양식으로부터 과감히 단절하고 고전주의를 택하는 모험을 의미합니다. 그는 2년이 넘는 기간동안 만테냐를 설득하고, 화가가 만토바에 체류하는 동안 큰집과 충분한 재정을 약속했습니다. 1460년에 궁정화가가 된 만테냐가 46년 동안이나 곤자가 가문을 위해 일하였음은 주문의 성격과 화가의 관심이 어느 정도 일치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만테냐가 이 곳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현재 <신혼의 방>이라 불리는 방의 벽화입니다. 당시에 일종의 접견실이었다고 짐작되는 이 방은 도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방과 천장에 모두 벽화가 그려져서 '그림이 그려진 방'(Camera Picta)라고도 불렸습니다. 벽면의 그림들은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오른쪽 벽의 벽난로 위엔 루도비코와 부인이 앉아 있고 그의 아들, 딸, 궁정인, 시종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벽엔 추기경이 된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편지를 받아 든 장면입니다(도4). 어떤 사건을 나타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림 전체의 주제는 가문의 번영과 영광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테냐는 많은 인물들을 옆면으로 배치하여 그림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높였으며, 멀리 배경엔 로마의 상징적인 건물들을 넣음으로써 고전의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도3 안드레아 만테냐, <신혼의 방>, 1465-74년
프레스코 벽화, 만토바, 성 죠르지오 城
 
 
 

 

도4 도3의 부분, 루도비코 곤자가(화면왼쪽)와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화면 중앙)
 
도5 도3의 천장부분
 
 

이 방을 특별히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천장부분입니다. 만테냐는 아래서부터 위로 쳐다 본 원근법을 처음으로 적용함으로써 마치 하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이 방의 장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낸 것입니다(도5). 이러한 획기적인 회화기법은 화가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작은 도시 만토바의 문화적 수준, 즉 가문의 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1478년 루도비코가 죽은 후에도 만테냐는 그의 후손들이 이끄는 궁정의 화가로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 미술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루도비코의 손자인 프란체스코의 부인,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였습니다. 이사벨라는 라틴어를 구사하고 문인들과 논의할 정도로 출중한 여성으로 궁 안에 자신의 서재를 만들어 고대조각을 전시하고 만테냐에게 고대신화 그림을 주문하였습니다. 장신구나 종교화 주문에 제한되었던 당시 여성들의 주문과 비교하면 이사벨라는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테냐가 그녀의 주문으로 그린 <파르나소스>(도6)는 과도할 정도로 사실적이던 만테냐의 이전 그림과 비교할 때 매우 우아한 모습이어서 주문자의 성향이 반영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비너스와 마르스의 사랑이 그림의 주제이지만 이사벨라의 남편이 용병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주제는 단순히 고대 신화에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자신을 미화시키는 방편이었음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도6 안드레아 만테냐 <파르나 소스>, 1497년, 캔버스에 유채
160×192cm, 원래 이사벨라의 서재에 있었으며 현재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됨
 
 

이제 잠시 이사벨라의 초상화주문을 통해서 르세상스시대의 여성초상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벨라의 주문은 매우 격이 높아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도 닿았습니다. 그가 그린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완성되지 못한 채 드로잉으로 남아있지만 초상화의 의도를 짐작하게 합니다(도7). 우선 옆면의 얼굴은 특정인의 얼굴이기보다 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마돈나 상들과 매우 비슷한 유형입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현재는 아랫부분이 잘려있지만 이 그림을 보고 그린 다른 드로잉을 참고해보면 그녀는 책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8). 즉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기를 바란 것이지요.

 

도7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사벨라 데 스테의 초상>
1499년, 63×46㎝,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작가미상, 도7을 보고 그린그림
1499년 이후 옥스퍼드, 에쉬몰린 박물관
 
 
 
 
 

르네상스시대엔 특히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자신만 주문한 것이 아니라, 남이 주문하여 선물하기도 하였고,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사진과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지만 화가가 그린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그릴 가능성이 아주 높지요. 특히 여성초상의 경우엔 특정인을 닮기 보다 아름다운 유형으로 그려지는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티치아노가 그린 도9의 <이사벨라 초상>은 그녀가 60세 때에 주문한 것이어서 매우 충격적입니다(도9). 티치아노는 물론 그녀를 보지도 않고 그렸으며 일명 <벨라>(도10) 즉 '아름다운 여자'라는 유형의 여성초상화에 옷 만 이사벨라의 것을 입힌 것 같습니다. 마치 나이 많은 여배우가 젊은 때 사진만 내보이는 것 같은 셈이니 당시 초상화는 인상관리 품목이었던 것입니다.

 

도9 티치아노 <이사벨라 초상>
1534-36년, 캔바스에 유채
빈, 미술사 박물관
 
 
도10 티치아노 <벨라>
1536년, 피렌체, 피티궁
 
 
 
 
 

이탈리아 중부도시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는 미술을 통하여 지배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남성 초상화의 예를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당시 궁 안에서의 서재는 거의 외교적인 공간이었는데, 페데리코는 그 곳에 시저와 한니발 등 역사적인 영웅들의 초상을 걸어놓았고 자신과 아들이 함께 있는 초상도 그 중 한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을 역사적인 인물과 동일시하였습니다(도11,12)

도11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서재, 우르비노 공작궁,
초상화들이 있었던 이 서재엔 현재 복사본들이 전시되었고,
원본 초상화는 파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다.
 
 
도12 후스반 겐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아들 구이도발도>, 1474-76년경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 미술관
 
 
 
 
 

아들과 함께 있는 도12의 초상화를 보면, 페데리코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천장을 뚫을 듯이 거대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그는 무거운 갑옷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책을 읽고 있으며, 옆에 서있는 아들은 홀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장면은 아니지요. 용병장이었던 그는 갑옷을 입어 무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책을 읽는 자세로서 문무를 겸비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홀을 들려, 후계자임을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 등장하는 갑옷, 책, 홀 등은 모두 메시지 전달을 위한 도상이며 초상은 지도자 이미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가 그린 몬테펠트로 부부초상은 르네상스 초상화 중 아주 중요한 작품입니다.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초상과 함께 뒷면엔 이들의 덕성을 나타내는 양면초상입니다(도13,14,15,16,17). 우선 페데리코는 정 옆면이며, 작은 초상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대하다는 느낌을 줍니다(도15).

배경이 이렇게 멀리 보이게 하려면 아마 높은 건물의 발코니에서 주인공을 아주 가까이 놓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실제 장면이기보다는 일종의 세팅이죠. 배경이 멀리 있음으로써 주인공이 기념비적으로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의 메달에 그 근원을 두고있는 옆면 얼굴은 정치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는데, 3/4각도의 초상이 많이 그려지던 15세기 후반에 페데리코만이 정 옆면을 사용한 것은 전투에서 잃은 한쪽 눈의 흉한 모습을 보완하기 위함입니다. 눈 사이가 푹 들어가고 메부리 같이 강하고 큰 코의 묘사에서 우리는 이 초상을 사실적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이렇게 특정부분을 사실적으로 한 반면 전체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매우 치밀하게 이상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1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초상>
1474년 이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도14 도13중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 초상>부분
도15 도13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초상>부분
 
 

남자의 초상은 단순하고 강한 반면 여자의 초상은 같은 옆면이라도 마네킹같이 유형화되어 있으며,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머리장식과, 목걸이, 옷 무늬 등의 장식들입니다(도14,15). 이렇게 남자의 미덕과 여자의 미덕은 서로 구분되었으며 이는 뒷면에 그려진 덕성의 상징들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도16,17). 즉 페데리코는 정의와 신중함, 꿋꿋함과 절제의 상징과 함께 하고 있는 마차에서 명예의 여신으로부터 승리의 관을 받고 있습니다(도16). 반면 부인 스포르차는 순결을 상징하는 일각수가 이끄는 마차에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세 덕성이 부인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도17). 뒷면의 도상을 알고 나면 이제 앞면 초상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도16 도15의 뒷면
 
 
 
 
도17 도14의 뒷면
 
 
 
 
옆면 초상과 세부묘사, 원경의 배경 등의 조화로운 절충은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지만 이는 바로 주문자의 여러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현존했던 실제 부부의 초상이면서 이상화되어야 했으며 우르비노 지방을 통치하는 군주의 초상으로 부각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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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23 - 라파엘로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지도) 교황청은 종교만을 주관하는 기관이 아니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중부와 북동부에 이르는 큰 영토를 지닌 교황청국가였습니다. 또한 로마는 카톨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고대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야심이 있는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Caput mundi)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습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 재임 1471-84)는 로마의 도시계획을 정비하고, 옛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설립하였으며, 고대 조각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바티칸 도서관의 벽면에 그려졌던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투스 4세>(도1)는 도서관과 고대가 교황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말해줍니다.

 

도1 멜로초 다 포를리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투스4세>
1476-77년, 프레스코, 370×315cm,
원래는 바티칸 도서관에 벽화로 있었으나 현재는
캔버스에 옮겨져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은 로마의 황제같이 옥좌에 앉아 있고 관장은 무릎을 꿇고 임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화면 가운데에는 관장보다 더 중요하게 차지한 인물이 있습니다. 교황의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으로 훗날 교황 줄리오 2세가 될 인물입니다. 줄리오 2세가 이 도서관을 증축하였을 때 한 설교자는 "(당신의 삼촌 식스투스 4세가)배움의 전당을 세우고, 당신은 이에 액자를 끼웠다. 그가 교황청 도서관을 세웠으니 여기에 아테네를 가져온 것이다." 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교황이 고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고대의 영광을 현재에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오 2세는 교황이 되자 로마가 고대의 위용을 다시 갖추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 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 바티칸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했습니다. 또한 궁 안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의뢰하고, 라파엘에게는 <서명실>의 벽화를 주문했습니다. 교황의 이 왕성한 미술사업은 로마제국을 되살리고, 자신이 줄리우스 시저의 이미지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의뢰한 <벨베데레>정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습니다(도2,3,4). 8각형의 정원에 고전적인 건축방식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배치된 조각의 전시방법은 실로 쾌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어서 이 후에도 조각 전시방법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도2 빈첸초 페올리 <벨베데레 정원>, 18세기
 
 
 
 
도3 <아폴로 디 벨베데레>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원작의 로마시대 모작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
 
도4 <라오콘>
기원전 2세기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
 
고대조각을 공부할 때 언제나 언급되는 <아폴로 디 벨베데레>(도3)와 <라오콘>(도4)도 이때 수집, 전시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대조각의 수집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발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닌 로마는 이 시대의 관심을 리드하였습니다. 부와 종교권력을 지닌 교황청은 도서관과 박물관을 조성함으로써 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매우 정치적이었던 교황 줄리오 2세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06년엔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형태의 <베드로 성당>을 완전히 다시 지을 계획에 착수하고, 1508년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시작한 시스틴 예배실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엔 라파엘에게 현재의 서명실벽화를 주문하였습니다. <아테네 학당>(도6)과 <성체에 대한 논쟁> 등의 주제로 그려진 소위 <서명실> 벽화는 라파엘 회화의 가장 완숙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줄리오 2세의 고전주의 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문자의 정책과 화가의 스타일이 일치되었기 때문이죠.

 
 

현재 <서명실>이라 부르는 바티칸의 이 방은 줄리오 2세 당시엔 개인 도서실이었습니다. 당시의 서재는 외교적인 공간이었고, 이 그림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물이었습니다. 그럼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어떻게 이교의 학문인 <아테네 학당>을 이러한 공간에 그리게 되었을까요. 교황 줄리오 2세는 군사원정도 마다하지 않던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이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도5 교황청의 <서명실>
 
 
 
 
 

네 벽면에 그려진 이 방의 회화는 각기 신학을 나타내는 <성체에 대한 논쟁>, 詩를 나타내는 <파르나소스>, 법학을 나타내는 <세 덕성>, 그리고 철학을 나타내는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학, 철학, 문학, 법학 등의 이들 네 주제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분류이기도 하며 대학의 전공분류이기도 하였으니 학문의 네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6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1년, 프레스코
폭770cm, 바티칸, 서명실
 
 
도7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
도6의 중앙부분
 
 
도8 피타고라스

도6의 왼쪽 부분

 
 
 
도9 유클리드
도6의 오른쪽 부분
 
 
 
도10 톨로메오와 조로아스터
도6의 오른쪽 끝부분
 
 
 
브라만테가 설계한 베드로 대성당의 르네상스식 건축물 아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7)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도8)는 제자가 받쳐주고 있는 작은 판에 그려진 도형을 보며 음악의 조화에 대하여 쓰고 있으며 유클리드(도9)는 컴파스로 두 개의 삼각형을 그려 보이며 그의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법칙에 몰두한 어린 학생들의 놀라워하는 표정은 진지한 배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밖에도 그 오른쪽에서 지구를 들고 있는 톨로메오, 천계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도10)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철학자,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모두 모여 <아테네 학당>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라파엘로는 이 두 철학자를 원근법의 소실점에 배치함으로써 시선의 중심에 놓이게 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로 그려진 플라톤은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저서 『티마우스』를 들고 있음으로써 자연의 근원은 하늘에 있음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왼손에 그의 저서 『윤리학』을 들고 오른손 바닥을 펴 땅을 가리킴으로써 인간행동에 대한 도덕적 철학자임을 나타내는 등 라파엘로는 각각의 철학자를 나타내는 도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지식'인 철학은 맞은편에 그려진 '신성한 것에 대한 지식'인 신학과 함께 인간의 지식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조화로운 화풍은 이들이 이룬 질서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같이 느끼게 하는 사실적인 기법과 관객을 끌어들이는 연극적인 제스춰들은 보는 이를 그림에 참여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림에 있는 고대의 인물과 이를 보고 있는 현대의 인물이 함께 있는 고대와 현대의 공존은 '다시 태어난 로마'를 이루고자 했던 교황 줄리오 2세의 정책에 부합되는 이미지였던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로마'라는 이미지는 로마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하는 교황의 정책이었습니다. 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왕정의 세력 확장 속에 힘이 약화되었으며, 교황청은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교황 줄리오 2세는 비록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사원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지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는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도11).

 

도11 라파엘로 <교황 줄리오 2세>
1511-12년, 런던, 국립미술관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습니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입니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의 교황들도 끊임없이 지속하였습니다. 베드로 대 성당의 개축은 브라만테,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져 오늘의 위용을 낳았으며, 교황 파올로 3세가 주문하고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또한 16세기 로마에 고대 로마의 유적을 되살린 사업이었습니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습니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카톨릭 역사상 최악의 현실에 부딪힌 것입니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지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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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22 -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피렌체(지도)의 근처 카프레제(Capres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성장기부터 1564년에 죽기까지, 즉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역사는 격변기였습니다. 평온을 유지하던 피렌체는 1492년 로렌조 디 메디치가 죽자 1494년에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1495년엔 메디치家가 피렌체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그후 공화정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힘은 약하였고, 1512년엔 메디치家의 코지모(Cosimo I di Medici)가 장악하면서 피렌체는 거의 군주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의 교황청 국가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의 침략과 약탈에 위기를 겪는 한편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카톨릭의 권위마저 흔들렸습니다. 메디치와 공화정의 집권이 번복되던 피렌체와 로마의 교황청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위안과 과시의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주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대에 공화정과 메디치, 그리고 교황의 가장 큰 주문들을 받아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정치 속에서 예술가가 겪는 보호와 갈등,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미켈란젤로는 13살에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로렌초 디 메디치의 주목을 받으면서 메디치家가 수집한 고대조각들을 자유로이 접하고 이를 통해 조각의 기술을 익혀갔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센토들의 싸움>과 로마체제 중 제작한 <바쿠스>는 그의 초기 학습과정을 잘 보여줍니다(도1, 2).

 

도1 미켈란젤로<센토들의 싸움>, 1492년경,
대리석, 84.5×90.5㎝, 피렌체, 부오나로티의 집
 
 
도2 미켈란젤로 <바쿠스>
1497년, 대리석, 높이 203㎝,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바쿠스>(도2)는 로마의 조각을 그대로 모사한 듯하며 그리스 신화를 부조로 새긴 <센토들의 싸움>(도1) 또한 주제와 기법면에서 고대조각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20세를 전후하여 제작한 이 두조각에서 우리는 벌써 미켈란젤로의 특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센토들의 싸움> 의 수많은 군상들이 서로 부딪치고, 밀고, 당기는 투쟁과 갈등, 술에 취한 듯 넘어질 것 같은 <바쿠스>의 불균형 등은 그의 긴 생애에서 남긴 작품들 속에 언제나 배어있는 요소입니다.

 
 

1494년 그는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에 잠시 머문 후 로마에 체재하였습니다. 이 기간 중 제작한 <피에타>(Pieta,도3)와 피렌체로 되돌아가 제작한 <다비드>(도4)는 그가 이전기간에 습득한 고전적인 조각기법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도3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9년, 대리석, 높이 174㎝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마리아의 섬세한 옷주름과 죽은 예수의 시신의 축 늘어진 근육묘사는 대리석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인 묘사의 단계로 이끌었습니다. 24세였던 미켈란젤로도 자신이 이룬 기술의 완성에 만족한 듯 합니다.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미완성으로 끝나고, 모두 서명이 없는데, 이 작품에만 그가 싸인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싸인은 마리아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띄에 새겨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세부묘사는 사실적이지만 구조나 도상은 임의의 설정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피라밋형의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을 좀 더 넓게 잡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는 자세는 중세부터 내려온 도상인데, 이와 더불어 마리아는 33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이기보다 수태고지를 받던 10대의 소녀 나이입니다. 순결한 성처녀 마리아를 강조한 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00년경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공화정의 피렌체는 그에게 다비드 상을 주문합니다. 어느 조각가도 다루지 못하던 4m가 넘는 거대한 석재에서 다비드상을 완성하였을 때 피렌체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각상의 공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던 피렌체 공화정은 이를 시청 앞에 놓음으로써 <다비드>(도4,5)로 하여금 나라를 구한 소년 영웅의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구현한 고대 남성 조각의 조형미, 사실과 이상의 조화는 조각으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공화정의 이념으로서도 더 없이 적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팔매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죽인 다비드 이야기를 상기한다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도4)는 행동하는 영웅이기보다 도덕적인 이상의 영웅인 듯 합니다.

 

도4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4년, 높이 4.1m, 대리석
피렌체, 아카데미아
 
 
 
도5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놓여있던 피렌체 시청 앞
현재는 복제품이 놓여있다.
 
 
 
 
 
피렌체가 아직 공화정으로 있을 때 시장은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 군대 최고 지휘자)의 커다란 방 양쪽 벽에 피렌체가 치룬 전쟁의 그림을 주문하였습니다. 하나는 1440년 밀라노군을 퇴각시킨 <앙기에리 전투> 이며, 다른 하나는 피사 근처에서 치룬 <카시나 전투> 전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1503) 후자는 미켈란젤로에게(1504) 주어졌습니다. 두 대가의 그림이 한방에서 한 시기에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사회의 커다란 관심이었습니다. 두 대가에게 경쟁을 붙여놓은 것이지요. 아쉽게도 두 그림은 완성되지 못하였고, 피렌체는 공작정치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1563년 공작은 이 자리를 바자리의 그림으로 대치시켰습니다. 원작은 남아있지 않으나,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이 그림은 루벤스와 상갈로의 드로잉으로 그 모습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도6,7).

 

도6 피터 폴 루벤스, 레오나르도의 <앙기에리 전투>
(1503)를 모사한 드로잉, 1600-08년, 펜과 잉크
45.2×63.5㎝,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7 세바스티아노 다 상갈로(?)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를
모사한 그리자유 패널, 홀크햄 홀, 라이체스터경 수집
 
 
 
 
 
레오나르도는 기마병들이 서로 엉켜 싸우는 격동적인 순간을 택하였습니다(도6). 우리가 2주제에서 본 <동방박사들의 경배>(주제2, 도4) 배경에 그려졌던 말 탄 모습은 화면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군인들이 강에서 목욕을 한 후 대장의 부름에 다시 준비하는 순간을 택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설정으로 많은 누드의 다양한 포즈를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든 듯합니다. 그가 17세에 제작한 <센토의 싸움>(도1)부터 <천지창조>(도8)와 <최후의 심판>(도20)에 이르기까지 그는 군상이 주는 에너지를 매우 선호했습니다.

 

 
 
교황 줄리오 2세(Julio Ⅱ , 즉위 1503-)는 1506년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청 안의 시스틴 예배실 천장화를 주문하였습니다. 교황의 처음 주문은 창문들 사이에 12사도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장식 모티브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워 교황을 설득하고 지금의 천장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빛의 창조에서 노아의 홍수에까지 이르는 <천지창조>의 주제를 택하였습니다(도8,9). 그는 기존의 건축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천장에 이와 연결된 건축구조를 그림으로 만들었습니다(도8,11). 즉 그리자이유의 단색 기법으로 대리석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이은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생긴 9개의 면적에 천지창조이야기를 그리고, 창문 위 삼각형 사이의 큰 공간엔 예언자와 무녀들을 그렸습니다. 이 장대한 프로그램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빛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그들의 원죄, 노아의 타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양쪽의 예언자와 무녀들은 구원자가 오실 것임을 알려준 존재들입니다.

 

도8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1508-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틴 예배실
 
 
도9 <시스틴 예배실>
 
 
 
 
 
 
 
도10 미켈란젤로 <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 추방> 도8의 부분
 
 
 
 

이러한 대규모의 구상과 우리를 매료시키는 인체묘사들은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신기에 가까운 묘사력을 보면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가 낳은 천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분들을 보면 그가 이전의 그림들을 참고하였음도 분명합니다. <낙원추방>(도10) 부분을 보면 여러분들도 금방 마사치오의 <낙원추방>(8주 주제3 도17)이 떠오를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입력되었던 수많은 이미지들은 다시 새로운 이미지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인체의 온갖 포즈를 시도하기 위하여 준비 드로잉이 수없이 그려졌을 것입니다(도11,12).

도11 <리비아의 무녀> 도8의 부분
 
 
 
 
도12 미켈란젤로 <리비아의 무녀>를 위한 드로잉
1511년, 종이에 목탄, 29×21㎝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교황 줄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도 주문하였습니다. 이 또한 오랜 기간에 걸친 큰 프로젝트였고, 완성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이의 부분으로 제작한 일명 노예상 두 점을 보겠습니다. 16점의 노예상중에서 완성된 것은 현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는 1점뿐이며(도13), 미완성 몇 점이 피렌체 아카데미에 소장되어 있습니다(도14). 가슴을 천으로 묶인 누드의 남자는 이를 벗기려하는 동작이지만, 그의 표정은 오히려 내적인 구속과 갈등임을 보여줍니다(도13). 미완성 작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도14). 우선 우리는 일반적으로 돌을 깨어낼 때 겉의 큰 부분을 털어내고 부분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는데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가슴과 무릎부분은 거의 완성 단계까지 이끌고 나머지는 아직 돌덩어리로 남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제작과정을 말해주는데 즉 미켈란젤로는 완성될 작품과 같은 크기의 석고 모형을 만들고 이를 큰 컴퍼스를 이용한 점 기법으로 옮김으로써 대리석으로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13 미켈란젤로 <노예상>
1513년경, 대리석, 높이 229㎝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4 미켈란젤로 <노예상>
1519-36년경, 대리석, 높이 267㎝,
피렌체, 아카데미
 
 
 
그래도 궁금한 것은 왜 어느 부분은 돌덩어리 채로 남겨두고, 어느 부분은 마광까지 낸 완성단계에까지 이끌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미완성을 보면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의 누드 조각부분과 돌덩어리의 대비를 크게 느끼게 됩니다. 생명력 없는 돌이라는 재료에서 마치 영혼이 담긴 듯한 인간의 몸이 생성되는 느낌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였는데 그가 남긴 詩중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미술가라도, 대리석 덩어리가 스스로는 지니지 못한 어떤 개념을 갖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지성의 명령에 따르는 손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즉 대리석이 어떤 개념을 지니는 것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손은 지성에 따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현상계와 본질인 이데아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신 플라토니즘적인 사고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메디치家 주변의 인문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깊이 공감한 신 플라토니즘을 예술로서 구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513년에 교황 줄리오 2세가 죽고,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아들 죠반니가 교황에 올라 레오 10세(Leo X:등극 1513-1521)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는 1515년에 그의 고향 피렌체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으며, 이후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후의 교황 클레멘테 7세)과 함께 메디치家의 재건을 서두르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메디치家의 가족묘를 주문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건축과 조각, 회화가 어우러진 묘실을 구상하였으나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도15 미켈란젤로 <메디치 예배실>, 1520-34년, 피렌체, 산 로렌조
 
 
 
 
 
우리 나라에서 미대입시를 위해 외우다시피하는 석고상 줄리앙은 쥴리아노의 불어 발음으로 바로 이 가족묘 중 일부입니다. 줄리아노(Giuliano di Medici, Duke of Nemours:1478-1516)는 레오 10세의 형제이며, 마주하고 있는 묘의 주인공 로렌조(Lorenzo di Medici, Duke of Urbino: 1492-1519)는 레오 10세의 조카였습니다(도16,17).

 

도16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피렌체, 산 로렌조
 
 
도17 미켈란젤로 <로렌조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피렌체, 산 로렌조
 
 
도18 도16의 부분
 
 
 
도19 도18의 부분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만든 묘의 주인공들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보았거나, 초상화가 남아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닮은 바가 없습니다. 줄리아노의 얼굴은 오히려 그가 젊은 때에 제작한 <다비드>(도4)의 얼굴과 같은 유형이어서, 구체적인 한 인물의 얼굴이기보다 이상적인 인간형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두 조각상을 통하여 인간의 두 유형 즉 행동하는 유형(칼을 들고 있는 줄리아노)과 명상하는 유형(생각하는 자세의 로렌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명상하는 로렌조의 석관 위엔 아침과 저녁을, 행동하는 줄리아노의 석관 위엔 낮과 밤을 놓음으로써 시간의 운행과 영원함을 동시에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파르네제家의 교황 바오로 3세(PaoloⅢ: 즉위 1534-49)는 교황이 되자마자 메디치 예배실에 전념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여 <최후의 심판>(도20)을 주문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켈란젤로는 주문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20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4-41년, 프레스코, 14.6×13.41m
바티칸, 시스틴 예배실
 

 

우선 무엇보다도 수많은 누드의 인물들이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천당과 지옥이 좌·우로 나뉘던 중세의 도상은 연옥을 사이에 둔 상·하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연옥의 인물들마저도 구원의 상승보다는 추락의 가혹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르네상스 원근법의 화면 구성과는 반대로 화면 위의 인물들이 더 크고, 아래 인물들이 더 작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세의 인물비례처럼 예수와 주요 성인 몇몇은 거인 같고, 지옥의 인물들은 버러지 같은 미물로 그려졌습니다. 자비와 보호의 역할을 하던 마리아는 예수에게 몸을 움츠려 기대어 있고, 심판자는 단호하며, 공중에 떠있는 듯한 연옥의 인물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도21).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은 껍질만이라도 구원받으려는 듯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손에 매달려있습니다(도22).

 

도21 도20의 부분
 
도22 자기의 껍질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
도20의 부분, 껍질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이다.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습니다. 도23의 <피에타>는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합니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이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습니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 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존재를 이렇게 크게, 그리고 그의 얼굴엔 자신의 모습을 새긴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학자들은 카톨릭세계에 있었던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개혁적인 성향을 이렇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개혁성향의 사람들을 다시 탄압하던 1555년경 그가 이 상을 부수려 했던 행동은 이를 반증하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도23 미켈란젤로 <피에타>
1546-55년경, 대리석, 높이 233cm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
 
 
 
일명 <론다니니 피에타>(도24)라고 부르는 또 다른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입니다. 시신은 길게 늘려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 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합니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만든 이 <피에타>는 그가 청년기에 만든 바티칸 소장의<피에타>(도3)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입니다.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기법은 모두 사라지고 절절한 간구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피에타는 무르익던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미켈란젤로가 구원을 갈구하는 참 모습일 것입니다. 미술의 세계도 조화를 버리고 왜곡과 과장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는 매너리즘으로 향한지 벌써 반세기가 되는 시기입니다.

도24 미켈란젤로 <론다니니 피에타>
1552-64년, 대리석, 높이 195cm
밀라노, 스포르제스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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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21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

저는 미술사를 가르쳐오면서 작가 한 사람을 천재시 한다든지, 예술적인 업적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을 경계해 왔습니다. 한 작가가 아무리 뛰어났어도 작품은 사회의 여건과 요구에 의해 생산되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미술을 가르치다보면 저는 언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따로 언급하고, 그들의 업적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시대의 요구에 따르면서도 언제나 이를 능가하는 이들의 작품이 없이는 르네상스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술을 통하여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탐구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종교적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지도) 근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빈치에서 온 레오나르도'라는 뜻이지요. 변호사와 농촌여인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알려져 있고요. 레오나르도는 14살쯤에 베로키오(Andrea Verrocchio)의 제자로 들어가 화업을 시작했고, 3-4년 후인 1470년경엔 베로키오의 작품 <예수의 세례>(도1)에 레오나르도의 붓질이 처음 보입니다. 다른 화가들처럼 붓 빨고 물감을 만드는 등 도제교육을 받으면서 조수로 일한 기간의 모습이죠. 도1의 작품은 물론 스승 베로키오의 작품이고 일부분만 레오나르도가 했습니다. 여러분도 가려낼 수 있습니다. 도1의 작품을 크게 하여서 어디가 어떻게 다르고, 어느 부분을 레오나르도가 했을까 맞춰보세요.

 

도1 베로키오 <예수의 세례>
 
 
 
도2 도1의 부분
 
 
 
그림의 아래왼쪽 천사부분과 배경부분이죠. 스승 베로키오가 그린 예수 모습은 색채나 윤곽선 묘사가 분명한데 비해 레오나르도가 그린 부분은 다소 어슴프레 합니다. 천사의 머리카락이나 눈, 또는 옷 부분을 보면 잔 선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경계를 흐릿하게 하였지요.
 
 

이렇게 어려서부터 나타난 그의 그림의 특징은 말년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또한 드로잉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펜으로 그린 스케치는 아르노 강가의 모습입니다(도3). 그는 바위절벽, 잔나무들과 강을 묘사하면서 끊임없이 잔 터치를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사물은 우리 앞에 선명히 부각되지 않고 멀리 밀려나 있습니다. 사물과 보는 이 사이엔 공기가 있으며, 자연의 관찰자 레오나르도는 이 공기의 존재를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도3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르노 강가>
1473년, 펜 스케치, 피렌체, 우피치
 
 
 

레오나르도는 26살쯤인 1478년에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였고 그 후 주문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이 <동방박사의 경배>(도4,5)입니다. 미완성으로 남아있지만 그의 관심을 읽을 수 있는 중요작품입니다. 레오나르도는 공간에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기 위하여 미리 정확한 원근법의 스케치를 하였습니다(도6). 그리고 이를 확대하여 패널에 옮긴 후 그 위에 비례에 맞게 인물을 배치하였습니다.

도4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방박사들의 경배>
1481-82년, 나무패널에 갈색 잉크, 246×243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도5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위한 드로잉
 
 
 
도6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물드로잉>, 1490년경, 윈저, 로얄 라이브러리
 
 
 

 

인물들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빙 둘려 있는데 특히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부분은 오른쪽 어두운 부분의 인물들입니다. 수염 난 노인은 아기 예수를 자세히 보려는 듯 눈 위 이마에 손을 뻗어 놀라움을 표시하며 제일 오른쪽의 아름다운 젊은이는 그윽하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해골과 같은 상태의 노인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름답게 정형화되어 있는 마리아와 대조적으로 이들 인물들은 젊은이, 늙은이 또는 놀라는 이 침착하게 바라보는 이 등 다양합니다(도5). 레오나르도는 많은 글을 남겼는데, 인물의 제스춰와 표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드로잉을 보면 그는 실제 인물의 행동을 관찰한 후 글로 써서 이론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완성하지 못한 채 밀라노에 갔으며 거기서 거의 17년을 머물게 됩니다. 루도비코 스포르자(Ludovico Sforza)의 초청으로 밀라노에 가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엔지니어 역할이었습니다. 움직이는 다리를 설계하고, 대포나 전쟁무기를 고안했으며, 건축설계도 하였습니다. 그가 최초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제작된 것은 많지 않지만 그는 물리적인 이치를 적용하여 도구를 만드는데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7 레오나르도 다 빈치 <거대한 활> 드로잉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있는 동안 제작한 그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화업에서 빼 놓지 못할 작품들입니다. 그 중 하나가 <동굴의 성모>(도8)이며 다른 하나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동굴의 성모>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 소장 2 점의 서로 다른 버전이 전해집니다. 1483년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가 주문하여 완성한 것은 루브르 소장의 작품이며, 이것을 후에 프랑스의 루이12세에게 선물하면서 다시 그 자리를 위해 그린 것이 런던의 대영박물관작품이라고 연구되었습니다.

 

도8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굴의 성모>
1483-86년, 패널에 유화, 199×122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 작품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왜 마리아와 예수가 동굴에 있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학자들 간에 일치된 해석은 없지만 저는 그 중 두가지에 공감합니다. 하나는 이 제단화가 있었던 예배실이 '원죄없이 잉태한 마리아'에게 바쳐졌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보면 동굴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 태초의 곳이라는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레오나르도의 지질학에 대한 관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하는 점입니다. 동굴은 이끼가 가득 끼고 습해 보이지만 마리아의 주변엔 물과 바위, 수많은 작은 꽃들이 서생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건축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그림에서 그와 비슷한 구조를 느끼게 됩니다. 동굴은 마치 커다란 도움 같이 이들을 감싸고 있으며, 아래 있는 네 인물들 또한 원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의 마리아는 오른손으로 아기 예수를 이끌면서 왼 손으로는 세례요한을 축복하는 자세입니다. 오른쪽의 천사는 왼 손으로 세례요한을 받쳐주면서 아기 예수를 가리킵니다. 천사와 요한은 메시아가 오심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있지요. 그리고 아기 예수의 몸은 천사와 요한에게 향하고 있으면서 마리아에게 이끌려있습니다. 그들의 제스춰는 성경의 의미와 함께 화면구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관람자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화면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스춰를 구도와 의미에 적용하는 레오나르도의 방법은 <최후의 만찬>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의 주제1에서 <최후의 만찬>(도9)의 원근법적인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번엔 이야기와 인물의 동작을 봅시다. 잠시 기법을 이야기하죠. 원래 프레스코화는 젖은 회벽에 수성물감을 투입시켜서 말리는 기법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시도하려 했던 레오나르도는 마른 회벽에 유성물감을 사용하였습니다. 제작한 지 2년도 안 돼서 물감들이 벗겨져서 현재도 매우 보기에 어려운 상태입니다.

 

도9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8년, 높이 460×880cm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찌아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 부분을 들으면서 그림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께서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셨다.(마태복음 26:21-28)

 

도10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도9의 부분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제자들의 동작을 보니 마치 연극같죠? 제자들은 저마다 두 손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또는 두 팔을 벌리며 "저는 아니겠지요?"를 말하고 있습니다(도10). 그리고 배반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서로 수근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놀라고 있는 동작에도 불구하고 침착해 보이는 것은 아마 화면의 구성덕분일 것입니다. 침착한 예수의 좌우에 있는 12명의 제자는 3명씩 네 그룹으로 나뉘어 화면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예수 쪽으로 몸을 향하고 있으나 유다 만이 예수와 반대쪽으로 몸을 비키고 있습니다.(왼쪽에서 5번째, 몸을 뒤로 빼어서 머리는 4번째에 그려졌음) 레오나르도의 많은 작품 중에서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는 작품은 아마 <모나리자> (Mona Lisa)일 것입니다. '신비한 미소'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는 이 초상화는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으며 현대에도 작품이나 광고에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신비의 베일로 신화화시키는 것은 감상의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 본 레오나르도의 관심들을 상기한다면 이 그림도 그 관심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모나리자>는 실제 여인이며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다(Francesco del Gioconda)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주인공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림이 아름다운 건 아니지요.

 

도11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05년, 패널에 유채
76×53.3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우선 모나리자는 시선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몸은 약간 오른쪽으로 틀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습니다. 따라서 세 변이 서로 약간 다른 삼각형을 이루어, 균형 잡힌 듯하면서 자연스럽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인 사진에 이 포즈를 잘 이용하고 있지요. 눈이나 머리카락, 옷, 손등 등의 모든 세부들은 윤곽선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사용해 온 스푸마토기법을 더욱 섬세하고 우아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법이 아마 <모나리자>를 신비하게 느끼게 한 주 요인일 것입니다. 배경도 실제의 풍경과 우리가 <동굴의 성모>에서 본 바와 같은 지형학에 대한 관심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자신 또한 이 그림에 애착을 가진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그림을 통해 추구한 자연의 근원에 대한 탐구와 실제 사물이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소위 명화라고 지칭하는 레오나르도의 작품들보다 그의 관심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은 드로잉 또는 스케치들입니다. 교황에게 허가를 받아 인체 해부를 하며 그린 인체의 그림들도 그중 일부입니다. 그는 팔, 다리의 근육과 뼈, 동작에 따른 이들의 변화 등을 아주 상세히 관찰하고 묘사했습니다(도12).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정확한 인체묘사를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지만 그의 해부학은 그러한 목적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체내의 내장이나 신경조직, 뱃속의 태아까지 연구한 것을 보면 그의 탐구는 바로 생명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하는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13). 인체 뿐만 아니라 수 많은 물거품을 이루며 부서지는 홍수의 소용돌이에서 그는 사물을 움직이는 원동력, 에너지의 원천을 찾고자 했습니다(도14).

도12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체 드로잉>
1510, 잉크스케치, 29×20㎝
윈저 궁, 왕실도서관
 
 
도13 레오나르도 다 빈치 <태아연구>
잉크스케치, 30.14×21.25㎝
윈저 궁, 왕실도서관
 
 
도14 레오나르도 다 빈치 <홍수>
1515년경, 검은 목탄, 16×20㎝
원저 궁, 왕실도서관
 
 
 

 

우리는 다방면에 재주 있는 사람을 르네상스맨이라고 부릅니다. 시대의 양식을 이끈 화가이며, 근대적인 경험과학을 시작한 과학자이고, 또 용도에 맞는 기구를 창안한 엔지니어이고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야말로 르네상스맨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의 업적들은 단순한 재주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통찰과 탐구의 소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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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20 - 원근법의 발달

르네상스 미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과학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공간을 묘사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으나 이 시대 미술가들이 연구한 선 원근법은 인간이 내 앞에 펼쳐진 공간을 합리적으로 파악한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마사치오(Masaccio)가 그린<성 삼위일체>(도1) 벽화가 있습니다.
도1 마사치오 <성 삼위일체>
1425-28, 프레스코 벽화,667×317cm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도2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가 있는 벽면
 
 
 
교회의 평평한 벽에 그려진 벽화이지만 마치 우묵히 들어간 감실에 실제 인물들이 있는 것 같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양쪽의 마리아와 요한, 그 뒤에 하느님이 계시고 둘 사이엔 비둘기 모양의 성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봉헌한 주문자 부부는 마치 감실 밖에서 무릎꿇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그림이 실제 상황이라면 이 장면을 보는 시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천장무늬의 선들을 잇고 우리 눈 높이를 맞춰보면 우리의 시선은 바로 봉헌자가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의 가운데 부분에 있죠. 이렇게 하나의 소실점을 가지고 있는 르네상스 원근법을 우리는 선 원근법이라고 부릅니다.
 
이 그림에서의 소실점은 바닥으로부터 153cm 높이에 위치 있는데 이는 키 162cm 정도의 사람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눈의 위치에 해당하죠. 마사치오가 벽화에 구현한 이 원근법은 매우 과학적이어서 우리는 벽화의 감실 깊이까지 계산해 낼 수 있습니다(도3,도4).
도3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의 소실점
도4 마사치오의 <성삼위일체> 관람자 눈 위치와 감실 깊이 측정
 
르네상스 화가들은 이러한 원근법에 정말 매료되었습니다. 15세기 후반의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는 전쟁장면을 그리면서도 그의 실제 관심은 원근법이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창과 칼 마져도 바둑판 무늬로 배치해서 공간감을 나타내려 했습니다(도5). 그가 그린 한 사물의 구조도는 참으로 정확해서 현대의 컴퓨터가 측정한 사물 구조도와 거의 일치합니다(도6).
도5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전투>, 1450년대, 나무에 탬페라, 182×32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도5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전투>
1450년대, 나무에 탬페라, 182×32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15세기 후반엔 이러한 원근법이 더욱 연구되어서 그림의 세부에까지 적용되고, 따라서 이 공간에 배치된 인물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예수 책형>(도7) 그림을 봅시다. 건물밖에 있는 인물은 아주 크고 건물 안의 인물들은 작지요. 우리는 이것이 거리에 따른 차이라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정확한 원근법이 구사되었기 때문이죠. 바닥의 기하학적 무늬가 기울어진 각도는 바로 보는 이의 눈 높이에 있는 소실점에서 얻어진 수학적인 계산이었습니다(도8).
 
도7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수책형>,
1455년경, 나무 패널에 유화와 탬페라
58.4×81.5cm,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미술관
 
 
 
이러한 배경에서 회화를 과학적인 이론으로 접근한 화가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을 봅시다(도9,10).
도9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 벽화
460×880cm,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아
 
 
도10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있는 방의 모습
 
 
우리는 이 그림을 인쇄된 달력이나, 액자에 끼워놓은 인쇄물로 보기 때문에 실감하기 어렵지만 실제의 이 그림은 폭이 880cm에 달하는 아주 큰 벽화입니다. 수도원 식당의 작은 쪽 벽면을 꽉 채운 그림이죠. 만약 현장에서 이 벽화를 본다면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바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식당의 넓은 벽 위쪽을 가로지르는 실제 선은 그림 속의 창문 윗 선으로 이어집니다. 실제공간과 그림 속의 공간은 하나인 셈입니다. 식당에 있던 수도사들은 아마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선 원근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기 원근법을 구사하였습니다. 그의 그림 <성 안나와 마리아, 아기예수>(도11)를 보면 관람자와 가까이 있는 마리아의 팔이나 어깨부분은 붉은 색조의 선명한 명암을 보여주고 먼 산은 푸른 색조의 희미한 톤으로 그려졌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저서 회화론에서 "가까이 있는 사물의 밝은 부분은 먼 곳의 밝은 부분보다 더 밝으며, 원경의 어두운 부분은 근경의 어두운 부분보다 덜 어둡다." "가까이 있는 사물은 붉은 색조를 띄며 먼 곳에 있는 사물은 푸른 색조를 띤다. 이는 우리의 눈과 사물사이에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부드러운 톤에 감싸인 <성 안나와 마리아, 아기예수> 그림이 분명한 원근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공기 원근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도11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 안나와 마리아, 아기 예수>
1510년, 나무패널에 유채,
168,5×130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지금까지 여러분은 르네상스의 원근법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한가지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원근법이 공간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작품의 비교라는 항목에 있는 '그 밖의 원근법'을 Click하시면 볼 수 있듯이 원근법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아래서 위로 보는 원근법', '왜곡된 원근법', 새가 바라보는 시각인 '조감도' 등의 방법들이지요. 또한 우리는 동양인이니까 동양에서의 공간묘사법도 알아야 하는데 '그들과 우리' 항목에 들어가면 자세히 볼 수 있듯이, 동양의 산수화에서는 평원법, 고원법, 심원법등의 삼원법이나 걸어가면서 보는 파노라마식 관찰법도 사용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원근법이 이러한 많은 원근법과 다른 점은 바로 인간인 내가 정지한 상태에서 내 앞의 사물을 보았을 때의 공간을 과학적으로 묘사해 낸 점입니다. 르네상스 때 이 원근법이 고안된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르네상스는 神중심의 중세시대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인 세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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