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9 - 신고전주의

19세기는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폭풍 같은 혁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지도) 대혁명과 산업혁명만큼 서양문명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중산층의 삶이 미술에 반영되는 것은 19세기 중반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16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라든가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주장은 처음에는 너무도 과격한 것이어서 이를 성취하는데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로 알려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 서구의 미술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혁명의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이성에 대한 열렬한 신념이 반영되어 있고, 그런가하면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는 낭만적인 상상력이 한껏 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번주는 19세기의 전반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술을 통해, 정치적인 혁명, 개인의 발견, 민족국가의 형성과 제국주의의 시선과 같은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1760년 즈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진행되던 고대유적 발굴과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의 미학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고대 동경에 대해서는 14주의 3번째 주제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발견한 고대 유물들은 로마 시대의 대리석 복제물이기는 하였지만, 고대건축과 조각의 명료함, 단순 장엄함은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갈망하였던 새로운 시대의 덕목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특징이 왕정체제를 뒷받침해온 구시대의 미술이었다면, 고전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조류를 대변하는 문화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가 성숙하여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자 미술에도 역사적인 사건이나 영웅적인 주제를 다루는 역사화가 다시 등장합니다. 프라고나르부쉐의 감성적인 그림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는 바로 이러한 혁명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변합니다.

 
 

로마상(프리 드 롬: Prix de Rome)을 수상하고, 로마에서 유학을 마친 후 다비드(Jacqes-Louis David, 1748-1825)는 귀국하던 해의 살롱에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도1)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다비드는 6년을 로마에서 지내며, 고대의 유적을 몸소 체험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할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림의 원경에 보이는 오벨리스크와 로마풍의 건축물, 웅장한 기둥과 조각처럼 명암이 두드러진 인물들은 로마에서 체제하였던 경험의 산물이었습니다. 특히 다비드는 푸생의 고전적인 숭고함을 높이 샀는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로마는 그냥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푸생의 <포키온의 장례>(도2)에서처럼 영웅적인 행동에 걸맞는 무대일 것입니다. 게다가 두 그림에 동시에 나타나는 후경의 오벨리스크로 보아 다비드는 푸생의 그림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도1 다비드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
1781년, 287×312cm, 캔바스에 유채,
릴, 보자르 미술관
 
도2 푸생 <포키온의 장례>, 1648년,
캔버스에 유채, 웨일스 국립미술관
 
 

발리자리우스는 6세기경, 로마의 재건에 큰 공을 세웠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장님이 되어 추방되었던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치하의 장군이었습니다. 18세기 귀족들의 사치와 방종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되면서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시민으로서의 도덕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따랐던 로마 공화정시대의 영웅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비록 발리자리우스처럼 비극적일 종말을 맞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고전미술의 장엄함이야말로 애국적 희생이라는 정신적인 숭고함을 발현시키기에 가장 적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호라티우스의 맹세>(도3)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던 18세기 말을 대변하는 다비드의 대표작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의 『호라스』는 영국의 햄릿이나 멕베스처럼 고전비극의 대표작으로 당시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로마 건국시대입니다.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리던 로마와 알바 두 도시는 마침내 양쪽에서 3인의 전사를 내어 승부를 결정짓기로 하였습니다. 로마의 호라스 형제와 알바의 퀴리아스 3형제가 선택되었는데, 두 집안은 이미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호라스의 누이 카미유(오른쪽에 슬픔에 빠져 있는, 푸른 옷을 입은 여인)는 적군의 형제와 이미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호라스 형제들은 상대를 차례로 죽이고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주지만, 연인을 잃고 절망하는 여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죄인의 몸이 되고 맙니다. 원래 프랑스 왕실로부터 다비드가 주문받았던 장면은 아버지의 열렬한 변호로 호라스가 법정에서 사면되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출정전에 아들들이 아버지 앞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승리를 맹세하는 장면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이 장면은 원작에는 없었던 장면이었습니다. 다비드의 의도는 모든 것이 파멸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결과보다는, 고귀한 애국심 고취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도3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4년
캔바스에 유채, 330×42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1781년 로마에서 돌아온 다비드는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를 시작으로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포함하여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고대 영웅들의 도덕적인 용기를 찬양하는 작품들을 연속해서 그렸습니다. 악법이지만 국가의 법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와(도4)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모반혐의가 있는 아들들을 참수시킨 부르투스(도5)는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죽음과 인륜을 넘어서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다비드가 나중에 프랑스 혁명에 동조한 까닭에, 군주제를 반대하는 화가의 속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다비드가 과연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을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그림들이 부르봉 왕실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시민적인 덕목(civic virture)을 말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국가가 왕의 소유물이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인 애국심을 필요로 하는 구성체로 인식하게 된 것을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며, 그런점에서 다비드의 실제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19세기의 중요한 키워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도4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129.9×195.9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5 다비드 <브르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
1789년, 322.9×422cm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도3,6,7). 그리스 부조나 도기화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 같은 여인들은 슬픔에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어 보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조국을 구하겠다는 결의에 찬 남성들과 여성들의 나약함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로코코 시대의 여성적인 장식성을 구시대의 타락한 문화의 표현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의 표시로 더욱 남성적인 강인함을 연상시키는 고전주의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남성이 ‘이성’이라면 여성은 ‘감성’을 대변한다고 여겼으며, 이러한 감수성에 분명한 위계를 두었습니다. 위를 향한 소크라테스의 손가락이나(도8), 부르투스의 머리로 향한 손은(도9) 그들이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스춰입니다. 성에 따라 타고난 감수성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지금도 많은 논쟁을 낳고 있으며, 현대미술의 한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도6 <호라티우스의 맹세> 부분
 
 
 
 
도7 <호라티우스의 맹세> 부분
 
 
 
도8 <소크라테스의 죽음> 부분
 
 
 
도9 <부르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 부분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에 동조하여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의 일을 도왔습니다.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우는 데도 기꺼이 찬성하였으며, 혁명정부가 주관하는 국민축제를 기획하기도 하였습니다. 도10의 <마라의 죽음>은 바로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급진적 공화주의자였던 마라는 왕당파의 열성단원이었던 샤를로트 코르디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피부병으로 늘 욕조에서 업무를 보았다고 하는데 욕실에서 무방비상태로 젊은 여자에게 칼을 맞은 이 사건 자체로는 어떠한 영웅적인 결말을 그려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현실의 사건을 영웅적인 순교의 장면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화면의 절반을 비워두고 시선의 초점을 마라에게만 집중시킵니다. 현실의 욕조는 고대의 석관으로 변화되며, 다비드는 일부러 집무 테이블을 ‘마라에게,A MARA’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흰 터번은 후광이 되어 마라를 혁명의 순교자로 이상화시킵니다. 이전의 역사화처럼 고대를 연상시키는 어떠한 직접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어떤 신고전주의 역사화보다 숭고함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정신이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10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캔바스에 유채, 165×128.3 cm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도11 벤자민 웨스트 <울프장군의 죽음>
1770년, 캔바스에 유채, 151×213 cm
오타와, 캐나다 국립미술관
 

영국에서 활약하였던 미국인 화가 벤자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는 20여 년 전에 퀘백 전투에서 프랑스 부대를 물리치고 목숨을 버린 젊은 영국인 장교의 죽음을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도11). 벤자민 웨스트 역시 울프장군을 종교적인 순교자의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당대의 사건을 주제로 삼은 역사화입니다만, <마라의 죽음>과 비교하여 볼 때 그뢰즈식의 과장된 설교는 그만 그림의 숭고함을 감소시켜 버렸습니다.

 
 

19세기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미술은 권력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가 실각한 이후 다비드는 다시 나폴레옹의 제정기의 미술가로서 다시 한번 선전미술을 담당하게 됩니다. 코르시카의 일개 장교에서, 프랑스를 구한 구국의 위인으로, 종신통령을 거쳐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나폴레옹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통치자였을 것입니다.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로 세습황제가 된 그는 그해 12월에 노틀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룹니다. 다비드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파노라마로 재현하였는데, 그 호화로운 금실의 장식과 생생한 인물들의 초상이 보는이를 압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림에 포착된 장면이 나폴레옹이 관을 쓰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황제는 교황에게서 관을 받았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며(왕권신수설), 교회는 국가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이러한 교회와 군주라는 봉건적인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교황에게서 관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았던 것에는 무엇인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이 국민의 제정을 다시 펴지만, 혁명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내보이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능력으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던 것에 걸맞게 이 놀라운 장면을 주관하는 마스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12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5-07년
캔바스에 유채, 629×979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3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부분
 
 
 
 
 

나폴레옹이 권력을 구가하던 시기에 미술가들은 그의 초상이나, 전쟁기록화같은 선전미술에 동원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장터의 열혈남아로(도14), 자연위에 군림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도15),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그림에서는 제우스의 도상을 빌어 신의 영역에 입적하고 있습니다(도16). 이 모든 것들이 화가의 신념에 의한 것일까요? 정치적인 선전에 미술이 하녀의 노릇을 한 것일까요. 전체주의 시대의 미술은 항상 이러한 난처한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도14 그로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
1796년, 74.9×58.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5 다비드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
1800-01년, 캔바스에 유채, 뮤제 드 샤토 말메종
 
 
 
도16 앵그르 <옥좌의 나폴레옹>
1806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무제 드 아메
 
 
 
 
 

숭고함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의 이상은 회화보다는 조각에 더 적합한 미학이었습니다. 카노바(Antonio Canova,1757-1822)는 조각에서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합니다. 카노바는 18세기 ‘대여행’시대의 골동품 취미에 맞추어 이탈리아에서 작업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고전 조각에 버금가는 순수함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카노바는 <테세우스와 미로타오르>(도17)에서 그리스 영웅의 결렬한 싸움의 장면 대신 미노타오르를 제압한 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보통 바로크적인 운동감보다는 정적이며 안정된 구도를 더 즐겨하였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카노바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생명력이 결여된 복고양식으로 여기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특히 나폴레옹 제정기에도 그의 그리스풍 조각은 환영받았는데, 도18은 나폴레옹의 누이 보르헤스의 초상조각입니다. 손에 쥔 파리스 사과로 보아 왕가의 여인은 그리스 여신, 비너스로 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7 카노바 <테세우스와 미로타오르>
1781-83년, 대리석, 73×74×50cm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도18 카노바 <승리의 비너스로 분장한 파올리나 보르헤스>
1808년, 대리석, 높이 2m
로마, 보르헤스 미술관
 
 
 

우리는 이 시대의 다른 한편에서 우동의 고전주의에서 벗어난 리얼리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앙트완 우동(Jean-Antoine Houdon, 1741-1828)은 계몽주의 철학자나, 혁명기의 정치지도자들의 동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하였던 초상조각가였습니다. 도19의 볼테르의 주름진 얼굴의 묘사와 섬세한 근육의 표정을 보면 그가 볼테르를 이상화시키기 보다는 현실적인 인간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쇄한 육체는 오히려 그의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우동의 명성은 미국에도 전해져서 미국건국의 아버지 워싱턴의 기념동상을 의뢰받았습니다(도20). 우동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실제 몸 치수를 재고 어깨나 손을 캐스팅하여 작품제작에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도19 앙트완 우동 <볼테르>
1778-80년, 테라코타, 실물크기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도20 우동 <조지 워싱턴>
1786-96년, 대리석, 실물크기
리치몬드, 버지니아 주의회사당
 
 
 

다비드 이후 프랑스 미술은 낭만적인 성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앵그르는 낭만주의에 맞서고자 하였으며, 혁명적인 성향에 반대하여 끝까지 왕정체제를 지지하였던 보수적인 화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랑 오달리스크>(도21)에서 볼 수 있듯이 인체의 곡선을 추상적으로 왜곡시키는가 하면, 풍부하고 화려한 색상은 색채화가로서의 면모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음 주제인 낭만주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국적인 취미나, 낭만적인 신화이야기를 즐겨 다루었습니다.

도21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
1814년, 캔바스에 유채, 89.7×6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는 다비드와는 달리 역사화에는 큰 재능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솜씨가 마음껏 발휘된 장르는 초상화입니다. 과거 아카데미 화가들의 역사화는 국가에서 구입하였으며, 국비로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지원은 기대만큼 충분하지 않았으며, 아카데미 화가들은 초상화에 많은 수입을 기대하여야 했습니다. 아마도 앵그르의 초상화도 그러한 사회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앵그르의 초상화는 사진이 초상의 기록을 떠맡게 되는 시기 이전의 회화적인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22 앵그르 <마담 므와티시에>
1856년, 캔바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신고전주의는 대륙에서는 다비드, 카노바, 앵그르와 같은 회화나 조각을 통해 꽃을 피웠던 반면, 영국에서 팔라디오니즘이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사실 팔라디오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로서 그의 빌라 로톤다(도23)는 그리스식 주식과 박공의 현관을 제외하고는 고대 건축물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계몽귀족들에게 도24의 치즈윅 하우스와 같은 팔라디오식 별장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인 진보적인 개혁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건축양식은 식민지 미국에도 전해져 ‘조지안 양식’으로 불리는 미국의 건축양식을 유포시킵니다. 특히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하였던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자신의 저택을 팔라디오식으로 개조하였을 뿐 아니라(도25), 도27의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시대를 근거로 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워싱턴의 도시계획에도 적용하고자 하였습니다(도26.27). 당시 미국인들 역시 신고전주의를 자유에 근거를 둔 미국의 이상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국회의사당이나 백악관과 같은 이때 세워진 미국의 공공건물들이 대부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도23 팔라디오, 빌라 로톤다, 비첸자
 
 
 
 
도24 벌링턴 경과 윌리암 켄트 <치즈윅 하우스>
1725년 시작, 런던근교
 
 
도25 토마스 제퍼슨, 몬티첼로, 버지니아
1770-84년 1796-1806년
 
 
도26 손튼 라트로브 벌핀치, <미국 국회의사당>
워싱턴, 1793-1830년
 
 
도27 <워싱턴 전경 상상의 드로잉>, 1852년
 
 
 
 
 
 
신고전주의는 곧이어 낭만주의의 반격에 직면하게 되지만,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서로 상반되는 양식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고전주의는 넓게 말한다면, 혁명기의 낭만적인 열정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던 미술양식을 지칭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8 - 고대 취향과 여행 취미

18세기에 유럽(지도)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대한 관심과 동경의 열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지중해에서 기원한 고대문명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역사학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으며, 여행문학이 넘쳐났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는 18세기 전반기에 발견된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의 고고학적인 발굴도 한몫을 하였습니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고대국가를 ‘자연’과 ‘합리성’이 결합된 이상적인 사회로 믿었으며, 계몽주의 시대에 새롭게 건설해야할 문명의 모델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문명의 뿌리인 고대의 향기를 맡기 위해 몇 년간의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영국의 상류사회의 자제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등을 두루 돌아보고 최종적으로 로마와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대여행 Grand Tour'로 자신들의 교육을 마무리하였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와르 기본 Edward Gibbon은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그 영원한 도시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내 마음을 뒤흔든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포름의 폐허와, 로물로스와 키케로스와 시저가 서 있었을 역사적인 장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티슈바인(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751-1829)이 그린 아래그림의 주인공 괴테는 가장 유명한 여행객 중 한 명이었습니다(도1). 시인은 로마 외곽의 캄파냐에서, 마치 로마의 황제처럼 편안한 자세로 명상에 잠겨 있습니다. 그의 발치에는 무너진 신전의 이오니아식 주두가 뒹굴고 있어서 더욱 문명의 무상함이 고조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은 로마나 베네치아에서 역사와 시간이 주는 장엄한 감동을 느끼고자 하였는데, 로마유적을 배경으로 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기수, 괴테의 초상에서 우리는 당시 지식인들의 이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1816년에 인쇄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가장 뛰어난 이탈리아 여행보고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1 티슈바인 <로마 캄파냐의 괴테>, 1786년
캔바스에 유채, 164×206 cm, 프랑크프르트, 시립미술관
 
 
 
 
 

18세기에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와 같은 북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낭만적인 고대취향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지만, 18세기에 등장하는 역사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럽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교황권이 힘을 잃은 후에 현저하게 정체되어 가는 당시의 이탈리아 도시들을 보면서, 문명이 탄생해서, 부흥하고 몰락해가는 역사의 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지중해 지역을 과거에는 화려했으나 지금은 정체된, 유적의 무덤과 같은 곳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폐허와 유적을 주제로 삼은 풍경화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도14,15,16). 그런 점에서 유럽인의 고대에 대한 동경은 퇴행적인 회고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에 대한 낙관론과 낭만적 자유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비행기와 철도망이 없는, 18세기의 ‘대 여행’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지중해로의 여행은 한 두달 안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아마 여행경비도 엄청나게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여행객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 도시에는 그들을 상대로 하는 여관과 주점들이 들어섰을 것이며, 이러한 관광업의 번성은 지역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겠지요. 이와 같은 18세기의 현상은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관광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관광객들은 이러한 뜻 깊은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유적을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리고, 골동품이나 복제물들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자신의 거실과 갤러리, 즉 회랑을 장식하고 싶어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념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는 것과 거의 흡사합니다. 도2는 영국 귀족, 탈보트의 젊은 날의 기념초상입니다. 화가 판니니는 로마의 골동품(혹은 미술품) 가게에서 여행객들이 기념품과 소장품을 마련하려고 물건을 고르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도3). 이런 풍경화와 유적의 발굴품들, 고대의 복제물들이 빽빽이 걸려 있거나 놓여 있어서 당시에 어떤 장르의 미술품들이 즐겨 거래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도2. 바토니 <존 탈보트>1773년
캔바스에 유채, 로스엔젤레스, 폴 게티 미술관
 
 
도3 판니니 <로마의 골동품상>, 1755 년 경
캔바스에 유채, 186×227 cm,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
 
 
 
 

경제력 있는 유럽의 상류층들이 로마나 베네치아로 몰려들고 기념품 사업이 붐을 이루자, 많은 미술가들도 수요를 쫓아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반 비텔(Gaspar Van Wittel, 1653-1736)은 일찍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네덜란드 풍경화의 영향을 받은 지형학적인 풍광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18세기의 지형학적인, 명승지 풍경화를 ‘베두타 veduta’라고 합니다. 왼쪽의 포폴로 광장은 로마에 입성하는 관문으로 여행객들에게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도4). 오벨리스크를 이정표 삼아 마침내 ‘영원한 도시’ 로마에 들어선 관광객들은 여기에서 갈라져, 콜로세움이나 포름과 같은 유적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입니다(도5). 판니니는 도시의 풍경뿐만 아니라, 판테온이나 성 베드로 대성당과 같은 건축물의 실내를 원근법에 맞게 정확하게 묘사한 그림을 많이 제작하였습니다(도6,7).

 

도4 반 비텔 <로마, 포폴로 광장의 광경>, 1678년경, 에칭
 
 
 
 
도5 반 비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1711년경
캔바스에 유채, 57×11 cm , 개인소장
 
 
도6 판니니 <성 베드로 성당의 실내>
1754년경, 캔바스에 유채, 154.5×197 cm
 
 
도7 판니니 <판테옹의 실내>, 1734년경
워싱턴, 국립박물관
 
 
 
 

18세기 베네치아 베두타의 대가는 카날레토(Antonio Canaletto, 1697-1768)였습니다. 베네치아의 바다와 옛 건물을 배경으로 한, 그의 이국적인 풍경화는 영국의 부유한 여행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도8,9,10,11). 반 비텔이나 카날레토의 풍경화는 지금의 관광기념 엽서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카날레토는 도시의 여러 광경들을 섬세한 건축 드로잉과 지형학적인 원근법에 맞추어 여러 장의 드로잉을 준비해 두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조수들을 시켜 인물과 빛에 수정을 가하여 각기 다른 제품들로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관광철에 밀려드는 주문과 이에 대한 빠른 대응의 모습, 그리고 당시 풍경화의 효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림의 마무리는 물론 카날레토의 몫이었습니다. 카날레토의 아름다운 풍경화는 일차적으로는 베네치아 경치에 감탄하고, 그곳의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했던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한편으로 베네치아의 당시의 모습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도시의 행사들을 기록한 연대기이기도 합니다(도8,9).

 

도8 카날레토 <축제일에 총독배의 도착>
1730-35년, 캔바스에 유채, 윈저궁 왕립컬렉션
 
 
 
도9 카날레토 <살루트 교회에서 바라본 대운하>
1738-42년, 캔바스에 유채, 121×151cm
취리히 개인컬렉션
 
도10 카날레토 <프랑스 대사의 베네치아 도착>
1740년대, 캔바스에 유채, 181×259,5 cm
성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쥐 박물관
 
도11 카날레토 <석조건물의 안마당>, 1725-30년
캔바스에 유채, 123.8×162.9 cm, 런던, 국립미술관
 
 
 
 

구아르디 (Francesco Guardi, 1712-1793)는 카날네토 만큼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낭만적이며 회화적인,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구아르디는 가벼운 붓놀림과 물감의 자국으로 베네치아의 빛과 물의 반짝이는 느낌을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표면의 회화적인 느낌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비슷합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는 물고기잡이와 같은 평범한 베네치아 주민들의 일상도 포착되어 있습니다.

 

도12 구아르디 <리오다리가 보이는 운하>
캔바스에 유채, 카라라 아카데미아 미술관
 
 
도13 구아르디 <바다에서 바라본 산 안드레아 성곽>
1712-93년, 펜과 갈색 잉크, 30×45.9 cm
 
 
 
 

18세기 고대에 대한 관심과 낭만적인 상상은 여러 종류의 풍경화를 낳았습니다. 아래 도14의 그림에서 판니니는 고대의 페허 더미에서 기독교 성인들이 설교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로마의 판테온과 허물어진 고대 신전, 아폴로 신상과 멀리 원주가 그려져 있지만 실제 로마의 풍경은 아닙니다. 지형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베두타와 구별하여, 이러한 상상에 의존한 풍경화를 '카프리치오' (capriccio: 환상)라 부릅니다. 이끼가 끼고, 풀이 무성하게 자란 고대문명의 폐허는 그 자체로 위대한 과거와 지나간 시간의 허망함,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게 합니다. 카프리치오는 당시의 고대취향, 신고전주의가 가지는 낭만적인 성향을 잘 반영합니다. 이러한 낭만적인 감수성은 혁명의 시기가 되면 근대적인 '개인'의 자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폭발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로베르 위베르(Robert Hubert, 1733-1808)는 특히 이러한 카프리치오를 잘 그려 '폐허의 로베르(Robert des ruins)'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습니다(도15,16).

도14 조반니 판니니 <아폴로 동상이 있는 로마의 폐허에서 설교>
1740년대, 캔바스에 유채, 81×125 cm,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
 
 
 
도15 로베르 위베르 <카프리치오 풍경>, 1772년
펜, 갈색잉크, 푸른색 수채물감, 1/2×30 3/4 inch
로스엔젤레스, 폴 게티미술관
 
도16 로베르 위베르 <폐허가 된 루브르 대회랑의 상상의 풍경>
1796년. 캔바스에 유채, 114,5×146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의 화가 피라네지(Giovanni Battista Piranesi, 1720-1778)(도17)는 이러한 카프리치오를 더욱 극단적인 환상과 악몽의 세계로 밀고 나갔습니다. 주로 에칭으로 남아 있는 피라네지의 카프리치오는 과거에 대한 무겁고 강박적인 상상력을 들추어냅니다(도18). 그는 1740년대부터 <감옥Carceri>연작(도19,20)을 제작하였는데, 그의 판화는 섬뜩한 명암의 대비와 상상력으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고안해낸 상상의 감옥에는, 아치와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흉칙한 고문 도구나 밧줄들이 늘어져 있어서 보는이에게 오싹한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초자연적인 힘과 인간의 무의식속에 감추어진 광기가 넘쳐나는 그의 작품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전조라 하겠습니다.

 

도17 피라네지 <자화상>, 인레이빙
 
 
 
 
도18 피라네지 <알바노의 술뤼스 성문>, 인그레이빙
 
 
 
도19 피라네지 <감옥시리즈>
표지, 인그레이빙
 
 
도20 피라네지 <감옥시리즈> 네 번째 장면
1760년경, 에칭, 54,5×41,5 cm
 
 
 
 

로마나 베네치아의 여행을 통해 유럽인들은 고전적인 취향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특히 클로드 로렌 스타일의(도22) 고전풍경화를 높이 평가하였던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풍경에서도 그와 유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였습니다. 리차드 윌슨 (Richard Wilson, 1713-1782)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던 영국 풍경화에 고전적 원리인 엄격함과 장중함을 첨가시켰습니다(도21). 클로드 로렌 풍의 고전적인 풍경화는 곧 영국의 풍경자체를 바꾸어 놓게 됩니다. 눅눅한 영국의 대지는 이제 목가적인 전원풍경에 고전적인 원리를 적용한 영국식 픽처레스크 풍경으로 변모하게 됩니다(14주. 주제3 영국과 프랑스의 자연관 비교 참조). 한편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베르네 (Claude-Joseph Vernet, 1714-1789)는 클로드 로렌의 풍경화처럼 프랑스 항구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도23,24).

도21 리차드 윌슨 <알바노 호수와 간돌프성>
1754년, 캔바스에 유채
영국,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도22 클로드 로렌 <파리스의 심판>
1645-46년, 워싱턴, 국립 박물관
 
 
도23 클로드 베르네 <난파>, 1759년
캔바스에 유채 96×134,5 cm
브뤼쥬, 그레냉쥬 미술관
 
도24 클로드 로렌 <메디치 빌라의 항구>, 1637년
캔바스에 유채,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7 - 샤르댕과 호가스 : 교훈과 계몽

18세기(지도)에 궁정과 귀족의 살롱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술이 그 세련미를 더해가던 가운데, 한편으로는 겸손과 미덕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미술이 등장합니다. 영국의 윌리암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도2), 프랑스의 샤르댕(Jean-Baptiste-Simeon, 1699-1779)(도1)과 그뢰즈(Jean Baptist Greuse, 1725-1805) 같은 화가들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반 로코코적인 미술은 자연과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교양을 갖춘 중산층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도1 샤르댕 <챙이 있는 모자를 쓴 자화상>
1775년. 종이에 파스텔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 호가스 <화가와 개>
1745년, 캔바스에 유채, 90×70 cm
런던, 테이트 미술관
 
 
 

프랑스의 샤르댕은 앞 주제에서 살펴본 로코코의 경쾌함과 피상적인 터치와는 다른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세계를 지향하였습니다. 샤르댕은 1728년에 정물과 동물화 부분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는데, 도3의 <홍어>는 이때 아카데미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털을 세운 고양이와 미끈한 홍어, 그리고 도자기와 흰 식탁보와 같은 다양한 물건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은 물론 정물화가로서의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세브르산 도자기(도8)나, 은식기가 아니라 검소한 중산층 가정의 부엌 한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엌의 가재도구와 식기들은 동시에 청교도적인 검소함과 노동을 상징합니다(도4). 도6의 작품 <부엌에서 물긷는 여자>에 그려진 청동물통을 보면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가사노동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처럼 말입니다(도5,6,7). 샤르댕이 즐겨 다루었던 소박한 물건들과 가정의 풍경은 마치 로코코 시대 궁정과 귀족들의 지나친 향유에 대한 해독제처럼 느껴집니다(도7,8).

 

도3 샤르댕 <홍어>
1728년, 캔바스에 유채, 114×146 cm
파리, 루르브 박물관
 
 
도4 샤르댕 <시장에서 돌아옴>
1739년, 캔바스에 유채, 47×37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5 샤르댕 <가정의 물통>
1734년경, 나무에 유채, 28,5×2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샤르댕 <부엌에서 물 긷는 여자>
1733년, 나무패널에 유채
스톡홀름 미술관
 
 
 
도7 샤르댕 <파이프와 물병>
1737년경, 캔바스에 유채, 32,5×4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프랑스, 세브르 도자기
1778-79년, 세브르 공방
 
 
 

샤르댕의 정물화에서 우리는, 물건이 지닌 원래의 촉각적인 실재감과 화면에서의 물감의 느낌이 참으로 잘 어우러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도7). 이러한 사실성을 보고, 당시 미술 비평가로 명성이 높았던 디드로는 “샤르댕의 정물화는 자연 그 자체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그가 여러 가지 기물들을 섬세하고 관찰하고, 그것들을 온화한 조명아래 단순하면서도 균형 있게 배치하는 점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가들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상징성이 강한 17세기 정물화와는 달리 샤르댕의 정물화는 계몽시대의 낙관적인 이상주의가 배여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온화한 가르침과 격려를 통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에밀』과 같은 교육서를 썼던 루소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그는 가정에서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녀의 양육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샤르댕은 장르화를 통해, 중산층의 노동과 함께 교육에 관한 주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아래 도9의 <가정교사>를 봅시다. 아이의 가정교사는 학교에 가는 것도 잊고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를 꾸짖어 타이르고 있습니다. 흐트러진 아이의 놀잇감은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보모의 잘 정리된 바느질 바구니와 대비됩니다. 그렇지만 아이의 뒤편으로 열려진 문은, 보모가 손질해준 모자를 쓰고 곧 학교에 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태함에 대한 계몽적인 경계의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도9 샤르댕 <가정교사>, 1738년, 캔바스에 유채
오타와, 국립미술관
 
 
 
 
 

영국은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정치혁명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인 정서로 인하여 과장된 바로크 미술이 그다지 번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팔라디오풍의 별장을 짓고, 고전주의 미술이야 말로 고상함과 아름다움의 표본이라 믿고 있던 당시 영국의 상류계층들은 자기네 미술을 지방적인 것으로 폄하하여서 대부분의 미술품이나 장식품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수입하거나, 아니면 외국의 미술가들을 직접 불러들여서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는 자신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화가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작품을 제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호가스는 도시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절제한 악행들, 당시의 잡지나 통속소설에 자주 오르내리는 일화에서 주제를 찾아 이야기형식의 판화로 제작하여 판매하였습니다. 그는 주점이 있어 흥청거리고, 간판들이 즐비한 도시의 뒷골목을 즐겨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듭니다. 이러한 도시중심의 대중문화는 19세기 근대주의를 거쳐 더욱 가속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호가스가 그려낸 도시는 악덕의 온상처럼 보입니다. 도10의 <진 골목>은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방종을 경고합니다. 매춘부 일대기의 첫 번째 장면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순진한 처녀가 포주의 꾀임에 빠지는 장면입니다(도11). 이 때에도 도시는 순진한 여자를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악한 곳으로 그려집니다.

도10 호가스 <진 골목>, 1750-51년
에칭과 엔그레이빙, 359×341 mm
 
 
도11 호가스 <매춘부의 일대기> 첫 번째 이야기
1731년경, 동판화, 런던, 영국박물관
 
 
 
 

호가스의 가장 잘 알려진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도12-16)은 귀족들과 부유한 계층의 탐욕과 무절제가 마지하게될 비극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사치로 재산을 소진한 귀족이 자신의 아들을 부유한 상인의 딸과 정략 결혼시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른쪽에 앉은 귀족은 짐짓 위엄을 가장하고 있으며, 돈은 많지만 교양 없는 상인의 모습은 희화되어 있습니다. 철없는 젊은 부부는 결혼 한 직후부터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합니다(도13,14). 향락가에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야 돌아온 남편의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고, 안주인 역시 밤사이의 카드놀이로 지쳐있습니다. 각종 청구서에 집사만 발을 동동 구릅니다. 특히 벽난로 위가 중국풍의 장식물들로 번잡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사치스러웠을 뿐 아니라 교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두 부부는 파산하고, 남편의 때 이른 죽음과 여주인의 자살로 비극적인 삶을 마무리하게 됩니다(도15,16). 이 이야기의 주제는 명료합니다. 사치와 방종, 무절제한 생활이 결국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지 알려주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도12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첫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3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두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4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두번째 이야기 부분
 
 
 
도15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다섯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6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여섯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유행에 따른 결혼>과 같은 유화 연작은 귀족과 부유층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 작품은 쉽게 구매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판화를 통한 판매가 휠씬 쉬었으며, 판화의 독점판매권은 호가스에게 명성과 경제적인 여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런점에서 호가스는 대중화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가 더욱 무르익어 갑니다. 더불어 부셰나 프라고나르 같은 여성스럽고 가벼운 미술보다는 장엄하고 교훈을 주는 서사적인 미술이 다시 확산됩니다. 프랑스의 화가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1725-1805)역시 미술은 모름지기 도덕적이고,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특히 그뢰즈는 小양식인 장르화를 고상한 역사화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도17은 아버지의 죽음의 순간에 임박하여 돌아온 아들이 얼굴을 파묻고 후회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술사에서 즐겨 다루어지는 오래된 탕자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겠지요. 그뢰즈는 인물들을 장엄한 서사극에서 격렬하게 연기하고 있는 배우처럼 그렸습니다. 마치 곧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면, 관객들의 열렬한 커튼콜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디드로는 이러한 그뢰즈의 작품에 대해서, 고귀하고 진지한 인간의 행동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푸생의 역사화에 걸맞는 작품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미술이 문학적인 상상력과 에피소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현대에 와서는 미술을 문학이나 윤리와는 다른 미적 조형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같은 스토리에 너무 의존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려한 계몽미술은 현대에 와서는 그렇게 높게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도17 그뢰즈 <벌받은 아들>, 1778년, 캔바스에 유채, 130×163 cm
파리, 루부르 박물관
 
 
 
 
 

당시 아카데미는 정물화, 장르화, 역사화와 같은 범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장르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화가들의 최고의 목표는 역사화가가 되고자 했겠지요. 그뢰즈의 장르화에서는 분명히 그러한 야심이 엿보입니다. 그런 점은 앞서 보았던 호가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훈과 도덕을 부르짖었던 호가스나 그뢰즈와 같은 계몽주의 미술가들에게 자신의 작품과 삶은 과연 얼마나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미술가들이 그림을 통해 도덕적인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철학자이거나 계몽주의자이기 이전에 성공을 쫓는 세속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그뢰즈가 말년까지 즐겨 그렸던 아래 그림들은 미술가의 이중성을 잘 보여줍니다. 샤르댕 보다는 호가스와 유사합니다. 도18,19에서 깨어진 항아리, 흐트러진 옷매무새는 이 여자아이들이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는 여성의 정숙함에 대한 경고겠지만, 소녀들은 매우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그뢰즈의 본심을 의심케 합니다.

도18 그뢰즈 <깨어진 항아리>
1785년, 캔바스에 유채, 110×8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9 그뢰즈 <기다림>
1770년대, 캔바스에 유채, 79,3×61 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샤르댕, 호가스, 그뢰즈는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하였던 반 로코코적인 미술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교훈을 실천하는 방식은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샤르댕의 미술에서는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구조가 두드러지며, 호가스에게는 위트와 유머가, 그리고 그뢰즈는 과장된 수사법이 그 특징입니다. 특히 샤르댕은 그뢰즈처럼 설교하듯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는 않지만, 화면의 절제된 구성의 아름다움은 누구보다도 설득력있게 구시대의 방종이나 사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8세기 말이 되면 이러한 성향들은 고전취향으로 수렴되며, 곧이어 혁명의 정신에 따라 근대 미술로 나아가게 됩니다.

도20 샤르댕 <비누방울>, 1739년경
캔바스에 유채, 61×63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21 호가스 <방탕아의 편력> 세번째 이야기, 1733-34년
캔바스에 유채, 62.2×75 cm, 런던, 존 소앤 경 박물관
 
 
도22 그뢰즈 <마을의 신부>1761년 , 91.4×118.1 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6 - 귀족의 궁정 생활을 위하여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루이 14세의 절대권력도 18세기(지도)에 들어서면서 점차 퇴조하고, 궁정중심의 장엄했던 바로크 미술은 보다 장식적이며 감각적인 귀족문화로 변모해 갑니다.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보다는 가볍고 위트는 현실적인 미술이 풍미하였으며, 푸생의 엄격함보다는 루벤스의 흐트러진 색채감각이 더 선호되었습니다. 이러한 귀족중심의 경쾌한 18세기의 미술경향을 일반적으로 로코코 미술이라 하는데, 부셰(Fransois Boucher, 1703-70) 나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ngonard, 1732-1806)의 감미로운 그림은 이러한 취향을 대변합니다(도2). 그러나 이러한 표피적인 감각성이 18세기 유럽사회의 이념적인 충돌과 사회의 변화를 모두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8세기는 전제왕권 사회가 시민 중심의 근대사회로 이행되어 가는 변환기였습니다. 또한 미신과 종교의 권위대신, ‘자연’과 ‘이성’을 중시여기는 합리주의가 싹트는 계몽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은 18세기 시각미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납니다(도1,2).

도1의 조셉 라이트(Joseph Wright, 1734-1797)의 <공기펌프>는 진공상태 실험관에서 비둘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명암의 극적을 대비를 통해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러한 그림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신념을 잘 보여줍니다. 이성의 빛을 통해 구질서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자들의 목표였습니다.

도1 조셉 라이트 <공기 펌프실험>
1768년, 캔바스에 유채, 180×240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2 프라고나르 <그네>
1766년, 런던, 왈라스 컬렉션
 
 
 
 

루이 14세가 사망한 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벗어나 파리로 돌아온 귀족들은 개인저택을 중심으로 우아한 살롱문화를 꽃피웁니다. 둥글거나 타원형의 거실은 규모가 큰 벽화보다는 아기자기한 금박 장식문양과 반짝이는 거울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도3,19). 벽의 빈 공간에는 로카이유 장식의 액자에 넣은 초상화나, 가벼운 사랑이야기를 담은 그림이 걸려 있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로코코 시대는 가구, 식기, 장신구, 의상디자인과 같은 장식미술과 공예분야의 전성기였습니다(도4).

도3 제르멩 보프랑, 오텔 드 수비스, 왕비의 방,
파리, 1737-1738년
 
 
도4 니콜라 폴리오, 18세기 중반,
프랑스, 에르미타쥐 박물관
 
 
 
 

로코코 미술이 바로크 미술과는 다른 감수성을 쫓고 있지만, 두 시기의 경계를 분명하게 가를 수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로코코 미술은 넓은 의미에서 바로크 미술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남부 독일과 같은 곳에서는 절대 군주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과 사치가 오랫동안 번성하였으며, 호사스런 교회건축도 잇달았습니다. 그러나 장엄한 효과를 강조하였던 17세기 건축과는 달리, 율동감있는 문양과 밝은 회벽토와 섬세한 금박장식이 더욱 선호되었습니다. 독일의 18세기 대표적인 건축가인 발타사르 노이만 (Balthar Neumann)이 설계한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궁전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도5,6). 베네치아의 화가 티에폴로(Giambattista Tiepolo, 1696-1770)의 프레스코 벽화는 이 궁전을 가벼운 빛과 숨쉴 듯한 대기로 가득한 환상적인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도5 폰 힐데브란트, 발타자르 노이만 등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1720-1744년
 
 
도6 티에폴로 <프랑코니아 백작수여식>
,1751년, 프레스코, 400×500 cm,
뷔르츠브르크 레지덴츠, 황제의 방
 
 

 

 

티에폴로는 소규모의 회화로 변화되어 가는 18세기 이탈리아의 미술풍토에서 예외적으로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 미술가입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확실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의 엄청난 규모의 장식프로젝트도 옛 말이 되었으며, 놀라운 상업도시인 베네치아도 점차 그 영향력이 약해졌습니다. 더불어 프레스코 벽화나 천장화와 같은 ‘대규모 회화: grand genre’도 함께 쇠락합니다. 그는 주로 스페인이나 독일의 궁정 장식주문을 받았는데, 그의 명성도 신고전주의의 등장과 함께 점차 낮아졌습니다. 아래 보이는 스페인 마드리드 궁정의 천장화(도7)나 베네치아 라비아 궁에 그려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의 역사적 일화는 그의 이러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도7,8,9).

도7 티에폴로 <스페인 왕실의 영광>
1762-66년, 프레스코화, 1500×900 cm
마드리드 왕궁, 여왕의 방
 
도8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향연>
1746-47년, 프레스코, 650×300 cm,
베네치아, 팔라초 라비아
 
도9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향연> 부분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는 18세기 프랑스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입니다. 그가 펼쳐 보인 애상적인 세계는 18세기 귀족사회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와, 고독한 자아를 예민하게 들추어냅니다. 달콤쌉사름한 화면의 바니타스(vanitas), 즉 공허함과 결핵으로 요절한 와토의 생애는 서로 얼마나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와토는 오페라나 대중적인 희극이었던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연극과 배우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즐겨 그렸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오페라나 무용극이 유행하여 파리인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도10). 대중문화의 등장이라 할 수 있겠지요. 배우와 광대는 가면극이나 서커스를 벌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길거리나 숲에서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사랑의 이야기를 연기하였습니다. 오른쪽 <페트 베네치엔느>(도11)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이는 바로 와토의 자화상입니다. 등 돌린 여배우와 그녀를 바라보며 악기를 연주하는 와토, 어쩐지 이 그림에는 화가의 사랑에 대한 암시가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도10 와토 <이탈리아 코메디>, 1720년경, 캔바스에 유채
워싱턴, 국립미술관
 
 
도11 와토 <페트 베네치엔느>, 1718-19년,
캔바스에 유채, 56×46 cm
에딘버러 국립미술관
 
 
 

와토는 이처럼 무도회나 오페라의 감미로운 사랑의 사교모임를 주로 그렸는데, 이러한 장르를 일컫어 ‘페트 갈랑트 Fete Galante' 즉 '사랑의 연회'라고 합니다. 페트 갈랑트는 18세기에 와토가 창안한 것이지만, 목가적인 전원에서 벌어지는 로맨틱한 연애담은 지오네나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앞선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도13). 특히 이전세기 루벤스의 풍부한 색채와 낙천적인 사랑이야기는 발렌시아 출신의 와토에게 큰 영감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도14). 아래 <키테라 섬에서의 출항>(도12)은 와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도12 와토 <키테라섬에서의 출항>, 1717년, 캔바스에 유채, 129×194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3 조르지오네, <전원의 합주>
1508-09, 캔바스에 유채, 110×138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4 루벤스 <사랑의 정원>
1633년경, 캔바스에 유채, 98×283 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키테라 섬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와토는, 여신의 도움으로 어떠한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신비의 섬에서 아쉬운 하루를 보내고 떠나려 채비하는 연인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른거리는 대기와 부드러운 색조는 젊은 날의 짧은 사랑과 연극과도 같은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이 그림에는 세쌍의 연인들이 보여주는 망설임과 갈망이 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와토의 그림은 로코코시대의 가벼움과 그 이면의 애상적인 심리를 함께 반영합니다.
 

와토의 <질과 네명의 배우들>(도15)과 같은 작품에서는 특히 이러한 심리묘사가 두드러집니다. 극단의 연극이 끝난 뒤, 한 걸음 무대 앞으로 나와 우뚝 서 있는 광대 질의 모습은 낮게 배치한 배경의 인물들과 대비를 이루어서 외롭고 어색해 보이지만 또한 거대해 보입니다. 한편 오른쪽 그림 <메제틴>(도16)에서, 돌처럼 굳게 돌아선 조각상은 메제틴의 세레나데가 혼자만의 사랑의 노래임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질과 메제틴에게 와토의 자화상이, 더 넓게는 관객의 사적인 자아가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18세기 계몽사상은 인간의 사적인 감정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의 감정에 대한 미술가들의 몰두는 이러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겠지요. 와토는 주변의 희극배우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러한 개인의 자아를 들여다보았으며, 와토 미술의 깊이는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발견됩니다.

도15 와토 <질과 네명의 배우들>
1718-20년, 캔바스에 유채, 184.5×149.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6 와토 <메제틴>
1717-19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당시의 귀족취향에 부응한 미술의 예는 누구보다도 프랑스와 부셰(Francois Boucher: 1732-1806)와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술은 귀족들의 세속적인 취향에 걸맞는 선정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비너스의 탄생>(도17)이나 프라고나르의 <목욕녀>(도18)와 같은 그림들은 신화를 빙자하여 여인들의 탐스러운 육체를 눈으로 즐기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귀족들의 침실 등에 걸려 있었을 이러한 그림들은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지금의 포르노에 가까운 선정적인 이미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도17 부셰 <비너스의 탄생> 1740년,
캔바스에 유채, 130×162 cm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도18 프라고나르 <목욕녀들>, 1765년,
캔버스에 유채, 64,1×80.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로코코 시대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여성적인 감수성이 주도하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살롱문화를 주도하였던 이는 바로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초상화를 비롯하여 의상과 보석, 식기와 같은 제품들을 실제로 구입하였던 당사자이기도 하였습니다(도20, 21). 특히 루이 15세의 연인이기도 하였던 마담 퐁파두르는 당시 프랑스 궁정미술을 후원하고 귀족들의 취향을 선도하고 있었습니다(도20). 마담 퐁파두르는 유행에 따른 세련된 치장을 하고 있지만, 손에 쥔 책과 자연을 향수하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교양’을 중시하는 계몽적인 후견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성 초상화가들의 활동이 어느 때 보다도 두드러졌는데 비제 르 브렁의 자화상은 여성으로서의 섬세함과 미술가로서의 당당함이 동시에 드러납니다(도21). 유화보다도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재료인 파스텔화가 많이 그려진 것도 그러한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는데, 특히 베네치아 출신의 여성화가인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1675-1757)의 파스텔 초상화는 상류층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도22).

도19 니콜라 피노, 오텔 드 바렝쥐빌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라이츠만 콜렉션
 
 
 
도20 부셰 <마담 퐁파두르>
1758년, 캔바스에 유채, 72,5×57 cm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미술관
 
도21 비제 르 브렁 <밀집모자를 쓴 자화상>
1782년 이후, 캔바스에 유채
 
 
도22 카리에라 <자화상>
1731년, 종이에 파스텔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단지 여성화가들이 그린 초상화가 아니더라도 권력과 자원과 문화를 독점하고 누렸던 봉건 귀족들의 생활 모습은 판화나 풍자화 등을 통해서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도24). 영국의 초상화가 게인즈보로(Thomas Gainsborough, 1727-88)의 <아침 산책>(도23)은, 이제 막 결혼한 젊은 부부가 자신들의 영지를 가볍게 산책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차림새를 갖추었으며, 표정은 냉담하고 무관심합니다. 게인즈보로는 환영과도 같은 그들의 자태를 묘사하기 위해 일부러 멀찌감치 서서 긴 붓으로 캔바스를 스치듯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비드의 <단두대 앞에 선 마리 앙트와네트>(도25) 스케치는 18세기 귀족 사회의 세련됨과 냉담함, 그들의 독점과 특권의식이 맞게 될 파국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23 게인즈보로
<윌리암 할레트부부의 초상 (아침산책)>
1785년, 캔바스에 유채, 236×179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24 작가미상 <미장원에서의 화재>
1780년 경
 
 
 
도25 다비드 <단두대앞의 마리 앙트와네트>
1793년 드로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5 - 17세기 프랑스 미술 : 절대 군주 미술

오랫동안 유럽 문화와 절대적인 미술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뒤이어 17세기 파리(지도)는 새로운 중심으로 두각을 나타냅니다. '예술의 도시 파리'라는 문화적인 위상이 바로 이때부터 절대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확고해졌던 것이지요. 교황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던 로마나 스페인과는 달리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로 남아있었지만 교회의 힘보다는 왕실의 권력이 더욱 강하였습니다. 그런점에서 상인 시민들이 중심이 된 네덜란드와도 매우 다룬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절대왕권의 핵심인 '태양왕' 루이 14세는 70여년이 넘는 정력적인 통치기간동안 유럽 문화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한 과시적인 프랑스 왕실의 권위가 표출되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파리근교에 세워진 거대한 베르사이유 궁전일 것입니다(도1, 2) .

 

도1 베르사이유 궁전의 조망
 
 
 
도2 베르사이유 궁전, 전쟁의 방 < 아폴로상 >
 
 
 
 
 

베르사이유 궁전은 군주의 별장이나, 사냥터에 지어지던 이제까지의 왕궁과는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적인 권력이 집합된 하나의 특별한 공간입니다. 궁궐이라는 건축물만이 아니라 시선이 닿는 주위 경관의 모든 것들이 왕의 권위에 절대복종한다는 이념하에 인공적으로 다듬어졌습니다. 궁전 조경의 중심 축은 잘 조성된 정원을 따라 멀리 지평선에까지 닿습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3 피에르 파텔 < 베르사이유 조감도 >
1668년, 캔바스에 유채, 115×161cm
베르사이유 박물관
 
도4 베르사이유의 조망
 
 
 
 
 

궁전의 곳곳에는 루이 14세를 신격화하는 조각과 흉상이 놓여졌으며 특히 태양왕의 기마상은 수없이 복제되어 프랑스 여러 도시의 공공 공간에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묘사를 넘어서 국왕이 신화속의 인물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베르사이유 정원에는 아래 오른쪽 조각인, 님프들의 시중을 받는 아폴로상이 놓여 있습니다. 로마 교황청 벨베데레 정원에 있는 아폴로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고전양식의 이 조각상이 태양으로 은유되던 절대왕, 루이14세의 초상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5 프랑소와 지라르동 < 루이 14세 기마상 >
1600년 경, 청동,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프랑스와 지라르동 <님프들의 시중을 받는 아폴로 >
1666-1675년, 대리석, 베르사이유 공원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1659-1743)가18세기초에 그린 나이든 루이 14세의 화려한 초상화는 권력자를 멋지게 이미지화하는 최고의 방식을 보여줍니다(도7). 오만한 자세의 루이 14세가 입고 있는 값비싼 모피는 화면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18세기의 한 삽화는 그를 짐짓 당당해 보이려 커다란 가발을 쓰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왜소한 한 늙은이로 희화하고 있습니다(도8). 우리는 리고의 이러한 초상화에서 루이왕의 인간적인 내면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바로크 미술은 베르사이유의 궁정미술에서 그 연극적인 효과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베르니니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위해 솜씨를 다했던 것처럼 프랑스의 미술가와 건축가들은 이 세속군주를 위해 자신들의 역량을 다 쏟아 부은 것입니다.

 

도7 이아생트 리고 < 루이 14세의 초상 >
1701년, 279×190 cm
파리, 루브르박물관
 
도8 1840년 역사수첩(the Paris Sketchbook)의 표지화
 
 
 
 
 

그러나 17세기 프랑스 미술은 조형적인 형식에 있어서 특히 로마의 바로크 미술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 미술은 국제적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루브르 궁전을 건립하기 위해 당시 로마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고 있던 베르니니를 파리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베르사이유를 위한 설계를 부탁합니다. 아래 스케치는 그가 계획한 궁전의 모습입니다(도9).

 

도9 베르니니, 루브르 궁전을 위한 파사드 스케치
 
 
 
 
 
 
도10 클로드 페로, 1667-1670년, 루브르 궁전 동쪽 파사드, 파리
 
 
 
 
 
 

베르니니의 계획은 건물에 앞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부분과 뒤로 들어간 부분의 요철을 두어 변화와 장엄함을 결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2주에서 이미 보았던 것처럼, 로마의 바로크 건축 양식이 적용된 것이지요.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베르니니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내의 건축가들에게 궁전 건축을 위임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미술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도10의 건물은 그렇게 해서 완성된 루브르 궁전의 동쪽면의 모습입니다.

 

 

더욱 독자적인 프랑스 바로크 건축의 예는 보 르 비콩트 궁전에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보 르 비콩트 궁전은 프랑스 고유의 샤토식 지붕과 단순한 파사드로 프랑스 건축을 대표합니다(도11).베르사이유 궁전 뿐 아니라, 루브르 궁전 그리고, 보 르 비콩트 성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적인 규모의 웅대함에 있어서는 바로크적이라 할 수 있지만 건축의 기본 단위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굴곡과 변화가 두드러진 로마교회의 건축 양식과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이는 조각이나 회화에서도 나타나는 프랑스 바로크 미술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입니다.

 

도11 보 르 비콩트 성
 
 
 
 
 
 

17세기 전반기의 프랑스 지역 출신의 화가로는 르 냉 형제(Autine le Noiu, 1588-1648: Louis Le Nain: 1593-1648: Mathieu le Nain, 1607-1677)와 조르쥬 드 라 투르(Geroge de La Tour, 1593-1648)가 있습니다. 이들의 등장과 더불어 프랑스 회화는 하나의 유파를 이루게 됩니다. 르 냉이 그린 농민들의 저녁식사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즐겨 그려졌던 장르화의 주제이기도 합니다(도12). 아마도 지역적으로 가까운 북유럽 미술의 사실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루이 르 냉은 인물들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기보다는 엄격하고 무게있게 그려냈습니다. 한편 로렌지방에서 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조르주 드 라 투르의 강한 조명의 대비는 그가 카라바지오의 명암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도13). 그러나 그가 그린 인물들 역시 매우 기하학적이며 엄격한 드로잉에 따라 그려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2 루이 르 냉 <농부의 저녁식사 >
1642년, 캔바스에 유채, 97×12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3 조르주 드 라 투르 < 양치기의 경배 >
1644년경, 캔바스에 유채, 107×131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1648년 프랑스 왕립 회화아카데미의 성립은 17세기 이후 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왕립 회화아카데미 회원화가들은 왕실의 후원을 받아 파리의 루브르 궁전에서 작업실을 열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는 서사적인 역사화를 회화의 최고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서는 엄격한 구도와 고요한 단순함과 같은 고전주의 미술을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 라파엘로의 르네상스 미술 그리고 당대의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의미술(도14)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쫓아야 할 최고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누드 드로잉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엄격한 학습방식은 19세기 쿠르베나 마네와 같은 전위미술가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미술의 이념과 생산을 독점하였으며, 미술가들의 창조성을 억누르는 폐단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도14 니콜라 푸생 < 사빈느 여인의 납치 >
1637-38년, 캔바스에 유채, 159×206 cm
파리 루브르박물관
 
 
 
 

푸생과 같은 독립적인 미술가가 있기는 하지만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왕립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왕실의 선전 미술과 장식을 담당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한 왕실의 미술후원은 고블랭 타피스트리 제작소를 운영하거나 금속, 가구제작과 같은 공예에까지 미쳐 사치스러운 18세기 궁정미술의 터를 이미 마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도15).

 

도15 르블렁 < 고블랭 제작소를 방문한 루이 14세 >, 타피스트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