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1 - 오리엔탈리즘 : 제국주의의 시선

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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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1 - 오리엔탈리즘 : 제국주의의 시선

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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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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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1 - 오리엔탈리즘 : 제국주의의 시선

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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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0 - 낭만주의와 혁명의 그림자

신고전주의가 일관된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서, 미술사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좁게는 19세기 초 신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에 대한 반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개인의 상상력을 중시하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 좀 더 광범위한 예술운동입니다. 18세기부터 유행한 신고전주의 역시 시간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고대를 동경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몰아닥친 질풍노도의 혁명의 시대를 반영하는 정신적인 사조였으며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를 여는 그의 전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19세기 전반기(지도)를 뜨겁게 달군 낭만주의는 한편으로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져온 '계몽주의의 또 다른 열매이기도 했습니다. 모순 되게 생각되지만 계몽주의는 이성과 더불어 상상력과 감정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고야(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도1)는 이러한 낭만주의의 양면성을 잘 보여줍니다.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남자의 등뒤로 무지와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부엉이, 박쥐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섬짓합니다. 18세기 말 계몽주의 시대에는 예술을 광기에 붙잡힌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고야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기에 뒤러가 예술가를 우울증에 사로잡힌 천재로 묘사했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도2). 고야는 내면의 상상력이야말로 예술 창조력의 보고라는 점을 인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상상력'은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정신의 근간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낭만주의는 19세기 말의 상징주의나 표현주의와 상통합니다. 또한 현실과 충돌하는 초현실의 영역에 대한 탐구는 후에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도1 고야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
판화집 카프리초스 43번
1799년, 21.6×15.2 cm
 
도2 뒤러 <멜랑코리아 I> 1514년
드라이포인트와 에칭
24×19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3에서 보듯 들라크르와의 회화는 격렬한 동세, 파격적인 색채의 사용, 그리고 휘몰아치는 붓놀림으로 신고전주의에 도전하였던 낭만주의 미술사조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적인 구분으로 낭만주의라는 광범위한 미술사조를 다 포괄할 수는 없겠습니다. 도4에서 보듯, 신고전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였던 앵그르의 신화적인 상상력이나 자연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였던 영국의 컨스터블(도5), 그리고 영혼이 깃 든 듯한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도6) 역시 이러한 낭만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도3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54년, 유화스케치
86×115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4 앵그르 <안젤리카를 구하는 뤼지에르>
1893년, 캔바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도5 컨스터블 <찰즈베리 대성당>
1831년, 캔바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도6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위의 방랑자>
1818년경, 캔바스에 유채, 34.8×74.8 cm
함부르그, 국립박물관
 
 
 
 

낭만주의, 즉 로맨티시즘이라는 용어는 중세의 모험담을 일컫는 로맨스에서 나왔습니다. 18세기에는 고대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고딕시대의 중세적인 상상력도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는 단테의 『지옥편』의 한 장면을 그린 <쾌락의 원형>(도7)에서 남녀의 결합을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때 남녀들의 왜곡된 인체는 중세 고딕성당의 그로테스크한 조각상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 예언자』라는 시집의 표지였던 <태고>(도8)에 등장하는 창조주의 모습은 그 영웅적인 신체에서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빛의 컴퍼스로 세상을 재단하는 창조자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꿈에서 독특한 장면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내면의 무의식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미술가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7 윌리암 블레이크 <쾌락의 원형> 단테의 『지옥편』
중 제 5편, 1824년 경종이위에 펜, 연필, 수채화,
46×58 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도8 윌리암 블레이크 <태고> 1794년, 에칭에 수채,
23.3×16.8 cm
런던, 대영박물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난폭함과 잔인함, 이성의 본 모습에 대해 고야처럼 놀라운 작품을 제작한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프랑스의 다비드가 혁명의 신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면,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고야 는 그 혁명의 광기로 인한 비극적인 그림자를 표출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다비드에 대해서는 15주의 주제1을 참조). 두 화가 모두 일국의 공식화가로서 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비드의 차갑고 매끈한 화면이 관객의 감정이 극적으로 쏠리는 것을 막고 시대의 도덕적인 명분을 생각하게 하는 반면, 고야의 음울한 화면에서는 감정이 넘쳐나고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고야는 얼마전까지 티에폴로가 활약했던 마드리드 궁전에서 로코코 양식으로 화업을 시작하였습니다(14주 주제1참조). 도9에서 보듯이, 실크 스타킹에 모자를 쓴 멋쟁이 신사의 모습은 당시 궁정화가 고야의 자화상입니다. 그는 당시 왕실에서 사용할 타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거나 왕실의 귀족들의 초상화를 주로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시기의 걸작은 뭐니 뭐니해도 거대한 <카를로스 4세>(도10)의 가족 초상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이 왕족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이 작품은 왕가의 초상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소적이며 현대적입니다. 물론 고야는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자를 비롯하여 자녀들을 화려하게 치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쩐지 세련되지 못한 벼락 출세자들처럼 그려져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느낌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15주 주제1, 도12)에 재현된 왕가의 권위를 생각하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초상화는 이러한 점 때문에 봉건왕조가 몰락하는 징후를 포착한 시대의 자화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야는 이 작품을 통해 민중의 시각을 반영하였다고 해석되었지요. 그러나 절대왕조가 몰락하는 혁명의 시대에 미술가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두대에 갈 뻔한 다비드의 예를 보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왕조들이 그렇게 취약하게 그려진 것일까요.

도9 고야 <화실의 자화상>
1791-92년경, 캔바스에 유채, 42×29 cm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도10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800년, 캔바스에 유채, 2.79×3.35 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도11 벨라스케스 <라스메니나스>
1656년, 캔바스에 유채, 3.2×2.7 m
프라도, 마드리드 박물관
 
 
도12 고야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
모사 동판화
 
 

마드리드 궁정은 지난 17세기의 위대한 화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던 곳으로, 옛 대가의 명성은 고야에게 존경심과 경쟁심을 함께 자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벨라스케스 역시 화가의 모습이 포함된 왕실초상화 <라스메니나스>(도11)를 그렸는데,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그 크기도 흡사합니다. 도12에서 보듯이 고야는 <라스메니나스>를 동판화로 모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벨라스케스가 이작품에서 십자훈장을 단 자신을 당당하게 그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12주 주제3 참조). 그렇다면 고야가 이처럼 왕족들을 속물처럼 그리게 된 것도 왕실화가로서의 높은 자부심 때문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고야의 이 왕실초상화에서, 권력자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버리지 않았던 벨라스케스의 유산을 만나게 됩니다.

 
 

고야의 판화집『카프리쵸스 Los Caprichos: 변덕』에는 18세기말 불안정한 시대를 사는 스페인 민초들의 모습과 인간의 무의식을 사로잡는 불안, 광기, 폭력, 잔혹함에 대한 어두운 시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거리의 뚜장이, 부랑자, 주정뱅이와 같은 어리석은 인간들과 마녀들이 등장하여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1870년대 스페인 왕가의 시대를 우울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도13,14). 도13에서는 당나귀를 등에 메고 힘겨워하는 농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두 마리의 당나귀는 '왕실'과 '교회'를 상징합니다. 혁명전야에 교회와 왕권에 눌려 신음하는 민중의 자화상이라 할 만합니다. 또한 도14에서 보듯 고야는 마녀나 정신병자들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주제는 피라네지의 <감옥>시리즈(14주 주제3, 도19 참조)나, 호가스의 <베들럼>(14주 주제2참조)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계몽주의 시대에 사회적인 규율이나 정상에서 배제된 것들에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도13 고야 <너는 그것을 하지 못한다>
변덕연작, 42번, 1799년, 에칭과 아쿼틴트
 
 
도14 고야 <그들은 실을 잘 잣고 있다>
카프리치오소 제 44번
1797-98년, 동판화, 21.4×15 cm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에 입성하였을 때 민중들은 내심 혁명군이 자신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라 기대하였지만 제국주의적인 욕심을 지닌 프랑스 군대는 단지 침략자였을 뿐이었습니다. 고야의 <1808년 5월의 처형>(도15)은 전날 스페인의 기습공격을 당한 프랑스인들이 무고한 농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고야는 카라바지오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빛을 사용하여 참혹스러운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두려움에 얼굴을 감싸고 형장으로 올라오는 인물과 이미 주검이 되어 쓰러진 인물 사이의 흰 옷을 입은 인물은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해서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고야는 이 무지랭이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순교자로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맹렬한 저항으로 마침내 무적의 나폴레옹군은 1814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페인인들은 프랑스와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민족의식을 싹 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스페인의 저항을 기념하기 위해 1814년 페르디난트 7세의 요청으로 제작된 역사의 기록화이자, 혁명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운 19세기 낭만주의의 걸작입니다.

도15 고야 <1808년 5월의 처형>
1814년, 캔바스에 유채, 266×345 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거인>이나 <전쟁의 참화>(도16,17)와 같은 고야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전쟁의 시기를 거쳐 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잔혹, 인간의 내면적인 폭력성, 그리고 공포가 악몽처럼 거침없이 드러난 이 작품들을 접하면 인간이 정말 이성적이며 선한 본성을 지녔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몽사상의 기본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세기의 대량살상의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고야의 이미지들은 소름끼치는 예언력을 지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16 고야 <거인>, 1808-12년
캔바스에 유채, 116×105 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7 고야 <이것이 더 나쁘다> 『전쟁의 참화』 제 37번
1810-15년 경, 에칭, 15.7×20.5 cm,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가 여전히 우세했지만 점차 다비드의 다음세대들에게서 낭만적인 기질이 반영된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다비드의 화실에서 배웠던 제자 그로(Baron Antoine-Jean Gros, 1771-1835) 제리코는 자유스럽고 제약받지 않는 창작욕구와 고전적인 규범 사이에서 특히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종군화가였던 그로 남작의 <자파에서의 전염병>(도18)은 혁명전쟁을 기록한 전쟁기록화입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페스트가 발병하여 이집트군과 프랑스군 모두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하는데, 두 진영은 빛과 어둠의 부분으로 화면을 크게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는 전경에 처참하게 죽어 가는 시신을 늘어 놓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회교사원을 배경으로 하여 보는 이들에게 이국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는 다비드의 화실에서 신고전주의의 규범을 배웠지만, 죽음, 공포, 이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그를 낭만주의 사조로 나아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도18 그로 <자파에서의 전염병>
1804년, 캔바스에 유채, 532×7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로는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린 부하들의 몸에 손을 대면서까지 그들을 격려하는 나폴레옹의 두려움 없는 용기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병자들을 돌보는 예수의 모습으로 이상화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이라는 동일한 이야기를 다룬 고야의 <1808년의 총살>과 여러모로 비교됩니다. 그로의 작품이 전쟁영웅을 미화하였다면 고야의 작품에는 혁명의 어두운 면이 폭로되어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이곳을 다녀간 후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고 하니 통치자를 선전하는 이미지가 사실과 다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로와 마찬가지로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1791-1824)역시 짧은 생애동안 줄곧 죽음과 폭력, 절망과 같은 극적인 장면에 몰두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질은 고야의 음울한 상상력과도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도19의 <메두사의 뗏목>은 그가 몇 년을 두고 몰두하였던 야심작으로, 낭만주의의 선언이 되었던 작품입니다. 나중에 들라크르와는 후일 <단테의 배>(도20)를 통해 제리코의 죽음에 경의를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제리코가 그린 이 장면은 1816년 당시 있었던 사건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범선 메두사호는 군인과 이주민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승객을 태우고 세네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는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난파되어 12일 동안의 표류 끝에 겨우 15명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사고는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부조리 때문이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제리코가 이사건을 장엄한 역사화의 스케일로 제작한 것에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부패형 참사를 기록한 다큐멘타리 사진 전시회 같은 것을 상상해보면 수긍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도19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9년
캔바스에 유채, 491×716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0 들라크르와 <단테의 배>, 1822년
캔바스에 유채, 189×24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물론 이 작품에는 해부학적인 인체의 묘사라든가, 안정된 삼각형 구도와 같은 신고전주의적인 요소가 분명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낭만주의의 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고전주의처럼 도덕적인 교훈을 중시하기보다는 기아와 풍랑에 휩쓸리며 희망을 잃은 인간들의 참상 그 자체에 주제를 맞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21의 습작에서 보듯이 제리코는 이 작품을 위해 수많은 습작을 했을 뿐 아니라 생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으며, 전경의 널부러진 시체들을 더욱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서 시체보관소에 가서 절단된 사지나 참수된 두상을 관찰하여 그리기도 하였습니다(도22). 제리코는 이후 정신과 의사의 요청으로 편집광 환자들의 임상적인 표정을 포착한 초상화(도23)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작업들에서 제리코가 일찍이 역사나 신화보다는 현실적인 것과 눈에 보이는 것에 더욱 집착하는 실증주의적인 태도를 지녔음을 보게됩니다.

도21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을 위한 습작
 
 
 
도22 제리코 <잘린 머리>
1818년, 캔바스에 유채, 50×61 cm
스톡홀름, 스웨덴 국립박물관
 
도23 제리코 <편집광 환자>
1822-23년 경, 캔바스에 유채
72×58 cm, 리옹, 미술관
 
 
 
 

그로와 제리코의 작품은 들라크르와(Eugene Delacroix, 1798-1863)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신은 결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들라크르와에게서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미술은 가장 만발하였습니다. 1924년 살롱에 <키오스섬에서의 학살>(도24)이 출품되자 관객들의 회화의 학살이라고 경악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살롱에 출품되는 작품은 명암법을 잘 구사하여 매끄럽게 마무리되어야 했습니다.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은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중경이 없이 급격하게 멀어지는 화면의 공간이나, 원색적인 붉은 색의 과격한 병치, 스케치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붓자국 때문에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루벤스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파격적인 구성과 강렬한 색채 때문에 그는 푸생을 옹호하던 아카데미 화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인간의 감정을 미술에 투영하고자 했던 낭만주의는 이미 시대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상 미술의 가장 근원적인 주제는 인간의 내면과 감정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미술관에서 만나는 현대미술도 자세히 보면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24 들라크르와 <키오스섬의 학살>
1822-24년, 캔바스에 유채, 4.2×3.5 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5 들라크르와 <키오스섬의 학살> 부분
 
 
 
 
 

들라크르와의 낭만주의는 1829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26)에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동명의 희곡에서 따온 것으로,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최후의 순간에 후궁들을 살해하고 보물들을 모아 불을 지르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파멸시키고 맞이하는참혹한 죽음은 신고전주의의 영웅찬미와 큰 대조를 이루는 낭만주의적인 소재입니다. 또한 동방의 이국적인 왕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장면은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하였던 이국적인 동방취미의 전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장면이 실제의 역사적인 사건이기보다는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동방에 대한 선입관이나 인상에 의해 상상된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키오스섬의 학살>(도24)에서도 그리스를 침략하는 터키인들은 잔혹한 야만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서구의 시선'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겠지만, 21세기인 현재에도 유효한 것이 많습니다.

도26 들라크르와 <사르다라팔루스의 죽음>,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신고전주의에 뒤이어 전개되는 열정과 상상력과 광기가 곁들어진 미술운동은 유럽과 신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정치적인 격정과 그로 인한 긴장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괴테는 이러한 19세기를 일컬어 "질풍노도의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블레이크, 그로, 고야, 제리코 등등의 작가에게서는 상상력과 자신들의 개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새로운 미술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창조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선물로 여겼는데 우리가 미술가에 대해 생각하는 고독한 천재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생각은 20세기 전위미술을 거쳐 지금도 상당부분 믿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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