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2 - 황제의 기념비와 초상조각

여러분은 '로마'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세요? 개선문, 콜로세움, 로마 황제…. 바로 그런 것이 로마의 유산입니다.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영토확장과 그것의 유지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를 하면 개선문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전쟁에 승리한 후 신전을 지은 것과 큰 대조를 보이죠? 그리스인은 승리 후 신에게 감사드렸다면 로마인은 이를 황제의 업적으로 기린 것입니다. 티투스 황제(Titus: )의 개선문엔(도1) 그들이 예루살렘 점령 후 전리품을 들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부조를 새기고(도2), 아치 안에는 독수리로 로마황제를 상징하였습니다(도3). 로마인에게는 승리와 개선이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306-337)는 4세기에 그의 개선문을 축조하면서 이전의 현제(賢帝), 아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시대의 조각을 그의 개선문에 붙였습니다(도4,5,6). 이전 현제의 위업을 계승한다는 암시겠지요.

도1 티투스 개선문 80-85년, 대리석, 포로 로마노
 
 
 
도2 도1의 부분<예루살렘 신전의 점령>
 
 
 
도3 도1의 부분<티투스의 신격화>
 
 
 
도4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대리석
 
 
 
도5 대리석, 지름 340cm,
130-13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도6 180-190년경에 제작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대리석, 높이 314cm
 
 
 
 
 
 

로마인은 또한 기념주를 만들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부조로 새겼습니다. <트라이아누스 기념주>(도7)는 높이가 40m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입니다. 기둥표면을 나사모양으로 둘러가며 띠를 형성하였는데 200m에 달하는 이 띠엔 트라이아누스가 수행한 다치아(Dacia, 현재의 루마니아)와의 전쟁, 즉 101-102년과 105-107년 두 번에 걸친 전쟁의 기록을 부조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하면서 반인반수나 거인족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적을 암시한 것과는 달리 로마인은 황제가 다치아와 직접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였으니, 이는 신화보다 인간의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사고의 결과일 것입니다(도8,9).

 

도7 <트라이아누스 기념주>
110-113년경, 대리석, 높이 38m, 로마
 
 
도8 도7의 부분
띠의 높이 96cm
 
 
도9 <다치아 성의 함락> 도7의 부분
 
 
 
 
 

콜로세움은 많은 영화의 장면들 덕분에 검투사들의 싸움터로, 기독교인의 박해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공공의 행사장소였습니다(도 10,11). 우선 외부부터 보면 콜로세움은 거대한 원형의 단일 건물입니다. 그리스인은 주로 열주형태를 사용한데 반해 로마인은 아치를 주요 건축 요소로 적용하였습니다. 아치 사이에 그리스 식의 기둥이 있지만 건축적인 기능을 하지 않고 단지 장식적인 역할을 할 뿐이죠. 내부는 현대의 운동 경기장같이 스타디움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도11 에서 보는 현재의 바닥은 지하 부분이고 그 위는 마루로 덮여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에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건축물이죠.

도10 <콜로세움>, 석회석(트라베르티노), 높이 48.5m , 로마
 
 
 
도11 도10의 내부
 
 
 
 
 

로마 미술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초상 조각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12의 초상을 봅시다. 어떻습니까? 귀족의 초상이라고 여겨집니까? 왜 아니죠? 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서민도 사진을 찍을 때면 되도록 잘 나오도록 인상관리를 하는데 로마인은 귀족도 미화시키지 않다니 매우 특별한, 현실적인 사회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집에 조상들의 초상조각을 진열해 놓았다가 집안 식구의 장례 때 이 상들을 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조상이 후손의 장례에 참석한다는 의미일 테니 가문의 중요성이 컸던 사회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도13).

도12 <로마귀족의 초상>
1세기 중엽, 대리석, 높이 35cm
로마, 트르로니아 박물관
 
도13 <선조의 초상을 들고 있는 귀족의 초상>
기원전 1세기 말, 대리석, 높이 165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초상의 대상은 남녀노소가 다 포함되지만 우리 수업에서는 로마초기부터 4세기경까지의 황제초상을 살펴보겠습니다. 황제의 초상들은 각 시대가 어떠한 지도자를 원하였는지 잘 보여주어서 사회의 변천까지 느낄 수 있으니까요.

도14의 초상은 기원전 82년부터 4년 간 로마를 통치하였던 독재자 실라(Silla: 138-78 B.C.)의 초상입니다. 독재자로서의 권위보다 마른 얼굴에 집요한 성격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어서, 그리스의 인물상과는 매우 다른 로마의 초상 전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삼두정치시대를 마감하고 황제시대로 접어들면서 실제를 직설적으로 나타내던 로마의 초상방식은 점차 그리스 헬레니즘 양식을 가미하고 있습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제위27B.C.-14A.D.(도15))는 섬세한 얼굴에 예민한 성격의 개인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주름까지 나타내던 이전의 로마초상과 달리 얼굴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국가를 황제체제의 로마의 평화시기(Pax Romana)로 정립시키는 시기에 그리스방식을 적용시킴으로써 황제를 정통화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玉>(도16)은 이 시대 헬레니즘적 성격의 기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투구를 쓴 로마의 의인화 옆에서 그리스 영웅같이 반 누드로 있고, 우주의 상징인 오이코우메네(Oikoumene)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방패를 딛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옥좌아래엔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있으며, 아래 단엔 로마군들이 적을 포로로 삼는, 즉 승리의 순간을 새겨 넣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이상화시키는 이 모든 내용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헬레니즘 양식으로 잘 포장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4 <실라초상>
기원전 80-75년,대리석, 높이 26cm
베네치아 고고박물관
 
 
도15 <아우구스투스 황제초상>
기원전 35-29년, 대리석,높이 37cm
로마, 알바니 콜렉션
 
 
도16 <아우구스투스 玉>
15-37년경, 카메오, 19×23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다시 황제 초상으로 돌아가봅시다. 1세기 후반의 안정된 로마에서는 생김새를 그대로 나타내는 직설적 사실주의가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도17과 18의 두상은 모두 기원 후 69년에서 79년까지 집정한 베스파지아누스황제(Vespasianus : 제위69-79)의 초상입니다. 왼쪽 초상(도17) 을 보면 눈, 코, 입이 얼굴 한 가운데로 모여있고, 눈가와 이마에 주름이 많으며 코가 크고, 입이 들어간 황제의 실제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같은 황제의 초상으로 오른쪽 상도 있습니다. 똑같이 생겼으나 미묘하게 다르죠? 좀더 세련되게 다듬은 오른쪽의 초상(도18)은 아마도 공식적인 황제 초상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17 <베스파지아누스 황제>
69-79년, 대리석, 높이 29cm
코펜하겐, Ny팔스버그 글립토테크
 
도18 <베스파지아누스 황제>
69-79년, 대리석, 높이 40cm
로마 국립박물관
 
 
 

로마가 최대의 영토를 지니고, 또한 내부적으로도 가장 안정된 로마 전성기의 황제는 늠름한 젊은이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핀 <트라이아누스 기념주>(5주 주제2,도7)의 주인공인 트라이아누스황제(Trianus: 황제 98-117, 도19)는 98년에서 117년까지 19년 간을 통치한 소위 5현제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기념주에서도 부관과 의논하고 있는 인간적이고 현명한 황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도20).

도19 <트라이아누스황제 취임20주년 기념초상>
108년, 대리석, 75cm
런던, 프리티시 박물관
 
도20 <트라이아누스와 부관수라> 도7의 부분
110-113년,대리석, <트라이누스 기념주>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로마는 그들이 정복한 변방의 민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 황제 161-180년 A.D., 도21)는 그의 『명상록』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의무였음을 토로하며, 전쟁의 광경을 '뼈다귀를 위해 싸우는 인형들'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미술엔 특히 이러한 비참함이 강하게 베어있습니다. 그의 기념주엔 포로를 참수하는 끔찍한 광경이 묘사되고(도22), 그의 시대에 제작된 또 다른 부조의 장면은 적장이 아들과 함께 항복하는 장면을 처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도23,24).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옷자락을 깊게 파는 표현주의적인 조각기법은 참담함을 나타내는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되었습니다.

 

도2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도22 <포로들을 참수하는 로마군>,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도23 <적장의 투항을 받는 아우렐리우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부분,,180-190년
높이314cm, 대리석, 로마
 
도24 도23의 부분
 
 
 
 
 

시대의 어려움을 철학자적인 자세로 감수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는 달리 그의 계승자 콤모두스 황제(Commodus:제위 180-192)는 변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원로원이 아닌 경기장에서 세월을 보내어 국가를 더욱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강한 황제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헤라클레스에 비유하였습니다(도25). 안밖으로 흔들리던 로마는 이제 더 이상 훌륭한 한 인간인 황제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황제를 요구하는 사회심리를 볼 수 있습니다.

 

도25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황제>
190년경, 대리석, 높이 118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이보다 150년 가량이 지난 4세기 전반, 황제는 절대자가 되어갔습니다. 도26의 초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상(Constantinus:제위 305-337)입니다. 황제상은 더 이상 특정 인물을 닮은 초상이 아닙니다. 커다란 두 눈은 현실이 아닌 먼 곳을 응시하여 초월적인 인상을 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초상은 높이가 2.6m에 달하는 실로 큰 두상이지만 이 또한 거대한 좌상의 일부이니 실제의 황제상은 거의 12m에 달한다는 사실입니다(도27,28). 이제 황제상은 인간의 상이기보다 숭배의 상이 된 것입니다. 로마사에서는 1-2세기를 황금시대라 하고, 2세기말부터 나타난 정치적인 쇠퇴가 이어진 3-4세기를 녹슨 철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때는 47년 동안 25명의 황제가 바뀌고, 그 중 1명만이 자기 침대에서 죽었다고 하니, 죽고 죽이는 무력적인 찬탈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리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사회는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지도자와 신비종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도26 <콘스탄티누스황제 초상중 두상부분>
312-315년, 대리석, 높이 260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도27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두상이 진열된 모습>
 
 
 
도28 콘스탄티누스 황제 상의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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