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리스 도자기를 통하여 살펴본 아르카익 시대의 회화는 기원전 5세기의 고전기에 큰 규모의 벽화로 발전하였습니다. 원근법과 명암법, 다양한 색채가 구사된 사실적인 회화는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이들은 2500여 년의 흐름과 함께 소멸되었으나 문헌의 기록들은 그리스 회화가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를 제시 합니다.
기원전 4세기 초에 활동한 제욱시스(Xeuxis)와 파라시우스(Parlasios)에 대하여 로마의 플리니우스(Plinius)는 다음과 같은 경쟁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루는 제욱시스가 포도송이를 그리니 새가 진짜인줄 알고 그림에 날아 앉았다고 합니다. 득의양양한 제욱시스는 파라시우스의 그림을 보자고 앞에 있는 커튼을 걷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커튼은 바로 파라시우스의 그림이었습니다. 제욱시스는 자기는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우스는 화가인 자기의 눈을 속였으니 파라시우스가 더 훌륭한 화가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그림은 진짜 같이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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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화가 중에서도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아펠레스(Apelles)는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그를 능가하는 화가는 아무도 없었다고 칭송 받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화가였던 그는 대왕에게 충고하고, 대왕 또한 그를 존경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왕의 초상뿐만 아니라 신화와 역사이야기까지 광범위하게 그렸으나 전해지는 진품은 없고, 로마시대의 모작을 통해 짐작할 뿐입니다.
도1의 <알렉산더 모자잌>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Ⅲ세에게 크게 이긴 익수스대전을 그린 기원전 4세기 후반의 그림을 폼페이에서 모자잌으로 모사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왼쪽의 알렉산더 대왕은 창을 들고 공격하고, 페르시아왕은 황급히 마차를 돌려 뒤를 쳐다보며 후퇴하는 박진감 넘치는 구도입니다. 대각선으로 배치된 페르시아 군대의 창들은 원근감을 느끼게 하고 인물엔 명암법을 구사하여 볼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도2). 우왕좌왕하는 퇴각의 혼돈스러움과 다리우스의 겁먹은 표정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느낄 수 있습니다.(도3). 모자잌 모사가 이렇다면 그리스의 진작이 연출하였을 생동감 넘치는 효과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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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익수스 대전> |
310년경 B.C. , 그리스의 2~1세기 그림의 로마시대 모자잌모사, |
폼페이, 목신의 집 출토, 나폴리 국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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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 도1의 왼쪽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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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다리우스 도1의 오른쪽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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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림은 언제나 실제 장면이 아니고 특정효과를 내는 연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숨막히는 전쟁에서 알렉산더는 투구도 쓰지 않았으니, 이는 알렉산더를 젊고 건장한 영웅의 이미지로 남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미술을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 활용한 최초의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용맹스럽게 보이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사자탈을 쓴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며(도 4,5), 언제나 태양신 헬리오스를 연상시키는 사자갈기 머리에 보는 이를 제압하는 깊은 눈의 강렬한 시선으로 묘사하게 하였습니다(도4).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조각이라 전하는 (도4)의 두상은 알렉산더 이미지를 짐작케하며 이 모델은 이후에도 크게 유행하여 거듭 복제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것이라 전해지는 도6의 석관은 그 진위가 논란거리이지만 사자머리를 쓰고 적을 짓밟는 용맹스런 알렉산더 이미지가 크게 확산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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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알렉산드로스 대황의 두상> |
340~330년경 B.C. , 대리석, 35cm |
아테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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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5 <알렉산드로스 동전> |
318년경 B.C. |
런던 대영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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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6 알렉산더 석관, 기원 전4세기, 시돈출토, 대리석, 69cm,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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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로 새겨진 다이나믹한 움직임과 격렬한 표정의 장면들은 <神들과 거인족의 싸움>입니다(도13-17). 신화의 싸움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균형과 절제를 지니고 있었던 고전기의 부조들과 달리 기원전 2세기 소아시아에 이식된 그리스 조각은 온통 격렬한 움직임 뿐 입니다. 조각들은 깊게 파여 강한 표현력을 지니며 신들에게 패배한 거인들의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습니다. 신전의 구조와 조각수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주제에서 그리스인의 방식을 받아들여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인들이 신이나 영웅을 한편에 두고, 이에 대항하는 반인반수의 괴물이나 거인족을 적으로 대치함으로써, 그리스인과 非그리스인의 싸움을 선과 악의 대결로 삼았듯이, 페르가모인은 자신들과 갈리아인의 싸움을 신과 거인의 전투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에겐 자신들도 야만인이었으니 그들 또한 문화적인 식민종주국의 방법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거대한 제단과 조각을 완성하는데는 페르가모의 조각가 뿐 만이 아니라 로디(Rhodi) 등 그리스 전역의 조각가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페르가모에서 적용된 조각수법은 그리스 전역에 공통된 이 시대의 양식이기도 하였습니다. 스페르롱가 지역에서 제작된 <오딧세이의 모험>(도18)이나 <라오콘>(도19)은 모두 격렬한 표현의 바로크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두 아들과 함께 뱀에 감기는 고통을 당하는 라오콘은 고통의 절정의 순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조각은 온통 비틀려 있으며, 일그러진 근육은 격렬하고, 고통스런 표정은 장렬합니다. 이제 조형의 성격은 고전기의 성격과 정 반대편에 있습니다. 균형은 다이나믹함으로, 절제는 무절제로, 평정은 격렬함으로 영원함은 순간적 묘사로 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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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8 <오딧세우스> |
1세기 B.C, 스페르롱가 출토, 대리석 |
스페르롱가, 고고학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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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9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
1세기경 B.C., 대리석, 184cm |
로마 바티칸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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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0 도19의 라오콘 머리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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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이후 지중해 전역이 그리스화 되고, 사회가 급변하면서, 행운과 좌절이 점철된 인간의 삶은 예견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격렬함이나 처절함, 또는 기이하거나 에로틱한 극단적이고 다양한 미술을 낳았습니다.
이름 없는 <술 파는 노인>(도21)은 밑바닥 인생의 처절함을 보여주며, 꼽추나 기형의 기이함을 즐기고(도22), 디오니소스 주제의 성적사랑(도23), 남녀양성을 지닌 아프로디테의 변태적 性(도24)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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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3 <아프로디테, 에로스, 판> |
100년경 B.C., 델로스출토, 대리석, 111cm |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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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4 <에름 아프로디테> |
2세기경 B.C., 페르가모 출토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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