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8 - 고대 취향과 여행 취미

18세기에 유럽(지도)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대한 관심과 동경의 열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지중해에서 기원한 고대문명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역사학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으며, 여행문학이 넘쳐났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는 18세기 전반기에 발견된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의 고고학적인 발굴도 한몫을 하였습니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고대국가를 ‘자연’과 ‘합리성’이 결합된 이상적인 사회로 믿었으며, 계몽주의 시대에 새롭게 건설해야할 문명의 모델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문명의 뿌리인 고대의 향기를 맡기 위해 몇 년간의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영국의 상류사회의 자제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등을 두루 돌아보고 최종적으로 로마와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대여행 Grand Tour'로 자신들의 교육을 마무리하였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와르 기본 Edward Gibbon은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그 영원한 도시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내 마음을 뒤흔든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포름의 폐허와, 로물로스와 키케로스와 시저가 서 있었을 역사적인 장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티슈바인(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751-1829)이 그린 아래그림의 주인공 괴테는 가장 유명한 여행객 중 한 명이었습니다(도1). 시인은 로마 외곽의 캄파냐에서, 마치 로마의 황제처럼 편안한 자세로 명상에 잠겨 있습니다. 그의 발치에는 무너진 신전의 이오니아식 주두가 뒹굴고 있어서 더욱 문명의 무상함이 고조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은 로마나 베네치아에서 역사와 시간이 주는 장엄한 감동을 느끼고자 하였는데, 로마유적을 배경으로 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기수, 괴테의 초상에서 우리는 당시 지식인들의 이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1816년에 인쇄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가장 뛰어난 이탈리아 여행보고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1 티슈바인 <로마 캄파냐의 괴테>, 1786년
캔바스에 유채, 164×206 cm, 프랑크프르트, 시립미술관
 
 
 
 
 

18세기에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와 같은 북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낭만적인 고대취향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지만, 18세기에 등장하는 역사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럽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교황권이 힘을 잃은 후에 현저하게 정체되어 가는 당시의 이탈리아 도시들을 보면서, 문명이 탄생해서, 부흥하고 몰락해가는 역사의 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지중해 지역을 과거에는 화려했으나 지금은 정체된, 유적의 무덤과 같은 곳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폐허와 유적을 주제로 삼은 풍경화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도14,15,16). 그런 점에서 유럽인의 고대에 대한 동경은 퇴행적인 회고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에 대한 낙관론과 낭만적 자유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비행기와 철도망이 없는, 18세기의 ‘대 여행’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지중해로의 여행은 한 두달 안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아마 여행경비도 엄청나게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여행객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 도시에는 그들을 상대로 하는 여관과 주점들이 들어섰을 것이며, 이러한 관광업의 번성은 지역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겠지요. 이와 같은 18세기의 현상은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관광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관광객들은 이러한 뜻 깊은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유적을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리고, 골동품이나 복제물들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자신의 거실과 갤러리, 즉 회랑을 장식하고 싶어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념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는 것과 거의 흡사합니다. 도2는 영국 귀족, 탈보트의 젊은 날의 기념초상입니다. 화가 판니니는 로마의 골동품(혹은 미술품) 가게에서 여행객들이 기념품과 소장품을 마련하려고 물건을 고르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도3). 이런 풍경화와 유적의 발굴품들, 고대의 복제물들이 빽빽이 걸려 있거나 놓여 있어서 당시에 어떤 장르의 미술품들이 즐겨 거래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도2. 바토니 <존 탈보트>1773년
캔바스에 유채, 로스엔젤레스, 폴 게티 미술관
 
 
도3 판니니 <로마의 골동품상>, 1755 년 경
캔바스에 유채, 186×227 cm,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
 
 
 
 

경제력 있는 유럽의 상류층들이 로마나 베네치아로 몰려들고 기념품 사업이 붐을 이루자, 많은 미술가들도 수요를 쫓아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반 비텔(Gaspar Van Wittel, 1653-1736)은 일찍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네덜란드 풍경화의 영향을 받은 지형학적인 풍광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18세기의 지형학적인, 명승지 풍경화를 ‘베두타 veduta’라고 합니다. 왼쪽의 포폴로 광장은 로마에 입성하는 관문으로 여행객들에게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도4). 오벨리스크를 이정표 삼아 마침내 ‘영원한 도시’ 로마에 들어선 관광객들은 여기에서 갈라져, 콜로세움이나 포름과 같은 유적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입니다(도5). 판니니는 도시의 풍경뿐만 아니라, 판테온이나 성 베드로 대성당과 같은 건축물의 실내를 원근법에 맞게 정확하게 묘사한 그림을 많이 제작하였습니다(도6,7).

 

도4 반 비텔 <로마, 포폴로 광장의 광경>, 1678년경, 에칭
 
 
 
 
도5 반 비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1711년경
캔바스에 유채, 57×11 cm , 개인소장
 
 
도6 판니니 <성 베드로 성당의 실내>
1754년경, 캔바스에 유채, 154.5×197 cm
 
 
도7 판니니 <판테옹의 실내>, 1734년경
워싱턴, 국립박물관
 
 
 
 

18세기 베네치아 베두타의 대가는 카날레토(Antonio Canaletto, 1697-1768)였습니다. 베네치아의 바다와 옛 건물을 배경으로 한, 그의 이국적인 풍경화는 영국의 부유한 여행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도8,9,10,11). 반 비텔이나 카날레토의 풍경화는 지금의 관광기념 엽서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카날레토는 도시의 여러 광경들을 섬세한 건축 드로잉과 지형학적인 원근법에 맞추어 여러 장의 드로잉을 준비해 두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조수들을 시켜 인물과 빛에 수정을 가하여 각기 다른 제품들로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관광철에 밀려드는 주문과 이에 대한 빠른 대응의 모습, 그리고 당시 풍경화의 효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림의 마무리는 물론 카날레토의 몫이었습니다. 카날레토의 아름다운 풍경화는 일차적으로는 베네치아 경치에 감탄하고, 그곳의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했던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한편으로 베네치아의 당시의 모습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도시의 행사들을 기록한 연대기이기도 합니다(도8,9).

 

도8 카날레토 <축제일에 총독배의 도착>
1730-35년, 캔바스에 유채, 윈저궁 왕립컬렉션
 
 
 
도9 카날레토 <살루트 교회에서 바라본 대운하>
1738-42년, 캔바스에 유채, 121×151cm
취리히 개인컬렉션
 
도10 카날레토 <프랑스 대사의 베네치아 도착>
1740년대, 캔바스에 유채, 181×259,5 cm
성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쥐 박물관
 
도11 카날레토 <석조건물의 안마당>, 1725-30년
캔바스에 유채, 123.8×162.9 cm, 런던, 국립미술관
 
 
 
 

구아르디 (Francesco Guardi, 1712-1793)는 카날네토 만큼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낭만적이며 회화적인,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구아르디는 가벼운 붓놀림과 물감의 자국으로 베네치아의 빛과 물의 반짝이는 느낌을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표면의 회화적인 느낌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비슷합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는 물고기잡이와 같은 평범한 베네치아 주민들의 일상도 포착되어 있습니다.

 

도12 구아르디 <리오다리가 보이는 운하>
캔바스에 유채, 카라라 아카데미아 미술관
 
 
도13 구아르디 <바다에서 바라본 산 안드레아 성곽>
1712-93년, 펜과 갈색 잉크, 30×45.9 cm
 
 
 
 

18세기 고대에 대한 관심과 낭만적인 상상은 여러 종류의 풍경화를 낳았습니다. 아래 도14의 그림에서 판니니는 고대의 페허 더미에서 기독교 성인들이 설교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로마의 판테온과 허물어진 고대 신전, 아폴로 신상과 멀리 원주가 그려져 있지만 실제 로마의 풍경은 아닙니다. 지형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베두타와 구별하여, 이러한 상상에 의존한 풍경화를 '카프리치오' (capriccio: 환상)라 부릅니다. 이끼가 끼고, 풀이 무성하게 자란 고대문명의 폐허는 그 자체로 위대한 과거와 지나간 시간의 허망함,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게 합니다. 카프리치오는 당시의 고대취향, 신고전주의가 가지는 낭만적인 성향을 잘 반영합니다. 이러한 낭만적인 감수성은 혁명의 시기가 되면 근대적인 '개인'의 자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폭발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로베르 위베르(Robert Hubert, 1733-1808)는 특히 이러한 카프리치오를 잘 그려 '폐허의 로베르(Robert des ruins)'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습니다(도15,16).

도14 조반니 판니니 <아폴로 동상이 있는 로마의 폐허에서 설교>
1740년대, 캔바스에 유채, 81×125 cm,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
 
 
 
도15 로베르 위베르 <카프리치오 풍경>, 1772년
펜, 갈색잉크, 푸른색 수채물감, 1/2×30 3/4 inch
로스엔젤레스, 폴 게티미술관
 
도16 로베르 위베르 <폐허가 된 루브르 대회랑의 상상의 풍경>
1796년. 캔바스에 유채, 114,5×146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의 화가 피라네지(Giovanni Battista Piranesi, 1720-1778)(도17)는 이러한 카프리치오를 더욱 극단적인 환상과 악몽의 세계로 밀고 나갔습니다. 주로 에칭으로 남아 있는 피라네지의 카프리치오는 과거에 대한 무겁고 강박적인 상상력을 들추어냅니다(도18). 그는 1740년대부터 <감옥Carceri>연작(도19,20)을 제작하였는데, 그의 판화는 섬뜩한 명암의 대비와 상상력으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고안해낸 상상의 감옥에는, 아치와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흉칙한 고문 도구나 밧줄들이 늘어져 있어서 보는이에게 오싹한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초자연적인 힘과 인간의 무의식속에 감추어진 광기가 넘쳐나는 그의 작품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전조라 하겠습니다.

 

도17 피라네지 <자화상>, 인레이빙
 
 
 
 
도18 피라네지 <알바노의 술뤼스 성문>, 인그레이빙
 
 
 
도19 피라네지 <감옥시리즈>
표지, 인그레이빙
 
 
도20 피라네지 <감옥시리즈> 네 번째 장면
1760년경, 에칭, 54,5×41,5 cm
 
 
 
 

로마나 베네치아의 여행을 통해 유럽인들은 고전적인 취향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특히 클로드 로렌 스타일의(도22) 고전풍경화를 높이 평가하였던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풍경에서도 그와 유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였습니다. 리차드 윌슨 (Richard Wilson, 1713-1782)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던 영국 풍경화에 고전적 원리인 엄격함과 장중함을 첨가시켰습니다(도21). 클로드 로렌 풍의 고전적인 풍경화는 곧 영국의 풍경자체를 바꾸어 놓게 됩니다. 눅눅한 영국의 대지는 이제 목가적인 전원풍경에 고전적인 원리를 적용한 영국식 픽처레스크 풍경으로 변모하게 됩니다(14주. 주제3 영국과 프랑스의 자연관 비교 참조). 한편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베르네 (Claude-Joseph Vernet, 1714-1789)는 클로드 로렌의 풍경화처럼 프랑스 항구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도23,24).

도21 리차드 윌슨 <알바노 호수와 간돌프성>
1754년, 캔바스에 유채
영국,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도22 클로드 로렌 <파리스의 심판>
1645-46년, 워싱턴, 국립 박물관
 
 
도23 클로드 베르네 <난파>, 1759년
캔바스에 유채 96×134,5 cm
브뤼쥬, 그레냉쥬 미술관
 
도24 클로드 로렌 <메디치 빌라의 항구>, 1637년
캔바스에 유채,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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