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9 - 신고전주의

19세기는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폭풍 같은 혁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지도) 대혁명과 산업혁명만큼 서양문명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중산층의 삶이 미술에 반영되는 것은 19세기 중반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16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라든가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주장은 처음에는 너무도 과격한 것이어서 이를 성취하는데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로 알려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 서구의 미술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혁명의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이성에 대한 열렬한 신념이 반영되어 있고, 그런가하면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는 낭만적인 상상력이 한껏 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번주는 19세기의 전반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술을 통해, 정치적인 혁명, 개인의 발견, 민족국가의 형성과 제국주의의 시선과 같은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1760년 즈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진행되던 고대유적 발굴과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의 미학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고대 동경에 대해서는 14주의 3번째 주제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발견한 고대 유물들은 로마 시대의 대리석 복제물이기는 하였지만, 고대건축과 조각의 명료함, 단순 장엄함은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갈망하였던 새로운 시대의 덕목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특징이 왕정체제를 뒷받침해온 구시대의 미술이었다면, 고전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조류를 대변하는 문화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가 성숙하여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자 미술에도 역사적인 사건이나 영웅적인 주제를 다루는 역사화가 다시 등장합니다. 프라고나르부쉐의 감성적인 그림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는 바로 이러한 혁명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변합니다.

 
 

로마상(프리 드 롬: Prix de Rome)을 수상하고, 로마에서 유학을 마친 후 다비드(Jacqes-Louis David, 1748-1825)는 귀국하던 해의 살롱에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도1)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다비드는 6년을 로마에서 지내며, 고대의 유적을 몸소 체험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할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림의 원경에 보이는 오벨리스크와 로마풍의 건축물, 웅장한 기둥과 조각처럼 명암이 두드러진 인물들은 로마에서 체제하였던 경험의 산물이었습니다. 특히 다비드는 푸생의 고전적인 숭고함을 높이 샀는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로마는 그냥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푸생의 <포키온의 장례>(도2)에서처럼 영웅적인 행동에 걸맞는 무대일 것입니다. 게다가 두 그림에 동시에 나타나는 후경의 오벨리스크로 보아 다비드는 푸생의 그림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도1 다비드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
1781년, 287×312cm, 캔바스에 유채,
릴, 보자르 미술관
 
도2 푸생 <포키온의 장례>, 1648년,
캔버스에 유채, 웨일스 국립미술관
 
 

발리자리우스는 6세기경, 로마의 재건에 큰 공을 세웠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장님이 되어 추방되었던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치하의 장군이었습니다. 18세기 귀족들의 사치와 방종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되면서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시민으로서의 도덕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따랐던 로마 공화정시대의 영웅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비록 발리자리우스처럼 비극적일 종말을 맞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고전미술의 장엄함이야말로 애국적 희생이라는 정신적인 숭고함을 발현시키기에 가장 적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호라티우스의 맹세>(도3)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던 18세기 말을 대변하는 다비드의 대표작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의 『호라스』는 영국의 햄릿이나 멕베스처럼 고전비극의 대표작으로 당시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로마 건국시대입니다.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리던 로마와 알바 두 도시는 마침내 양쪽에서 3인의 전사를 내어 승부를 결정짓기로 하였습니다. 로마의 호라스 형제와 알바의 퀴리아스 3형제가 선택되었는데, 두 집안은 이미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호라스의 누이 카미유(오른쪽에 슬픔에 빠져 있는, 푸른 옷을 입은 여인)는 적군의 형제와 이미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호라스 형제들은 상대를 차례로 죽이고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주지만, 연인을 잃고 절망하는 여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죄인의 몸이 되고 맙니다. 원래 프랑스 왕실로부터 다비드가 주문받았던 장면은 아버지의 열렬한 변호로 호라스가 법정에서 사면되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출정전에 아들들이 아버지 앞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승리를 맹세하는 장면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이 장면은 원작에는 없었던 장면이었습니다. 다비드의 의도는 모든 것이 파멸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결과보다는, 고귀한 애국심 고취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도3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4년
캔바스에 유채, 330×42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1781년 로마에서 돌아온 다비드는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를 시작으로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포함하여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고대 영웅들의 도덕적인 용기를 찬양하는 작품들을 연속해서 그렸습니다. 악법이지만 국가의 법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와(도4)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모반혐의가 있는 아들들을 참수시킨 부르투스(도5)는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죽음과 인륜을 넘어서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다비드가 나중에 프랑스 혁명에 동조한 까닭에, 군주제를 반대하는 화가의 속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다비드가 과연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을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그림들이 부르봉 왕실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시민적인 덕목(civic virture)을 말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국가가 왕의 소유물이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인 애국심을 필요로 하는 구성체로 인식하게 된 것을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며, 그런점에서 다비드의 실제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19세기의 중요한 키워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도4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129.9×195.9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5 다비드 <브르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
1789년, 322.9×422cm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도3,6,7). 그리스 부조나 도기화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 같은 여인들은 슬픔에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어 보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조국을 구하겠다는 결의에 찬 남성들과 여성들의 나약함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로코코 시대의 여성적인 장식성을 구시대의 타락한 문화의 표현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의 표시로 더욱 남성적인 강인함을 연상시키는 고전주의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남성이 ‘이성’이라면 여성은 ‘감성’을 대변한다고 여겼으며, 이러한 감수성에 분명한 위계를 두었습니다. 위를 향한 소크라테스의 손가락이나(도8), 부르투스의 머리로 향한 손은(도9) 그들이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스춰입니다. 성에 따라 타고난 감수성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지금도 많은 논쟁을 낳고 있으며, 현대미술의 한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도6 <호라티우스의 맹세> 부분
 
 
 
 
도7 <호라티우스의 맹세> 부분
 
 
 
도8 <소크라테스의 죽음> 부분
 
 
 
도9 <부르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 부분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에 동조하여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의 일을 도왔습니다.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우는 데도 기꺼이 찬성하였으며, 혁명정부가 주관하는 국민축제를 기획하기도 하였습니다. 도10의 <마라의 죽음>은 바로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급진적 공화주의자였던 마라는 왕당파의 열성단원이었던 샤를로트 코르디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피부병으로 늘 욕조에서 업무를 보았다고 하는데 욕실에서 무방비상태로 젊은 여자에게 칼을 맞은 이 사건 자체로는 어떠한 영웅적인 결말을 그려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현실의 사건을 영웅적인 순교의 장면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화면의 절반을 비워두고 시선의 초점을 마라에게만 집중시킵니다. 현실의 욕조는 고대의 석관으로 변화되며, 다비드는 일부러 집무 테이블을 ‘마라에게,A MARA’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흰 터번은 후광이 되어 마라를 혁명의 순교자로 이상화시킵니다. 이전의 역사화처럼 고대를 연상시키는 어떠한 직접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어떤 신고전주의 역사화보다 숭고함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정신이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10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캔바스에 유채, 165×128.3 cm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도11 벤자민 웨스트 <울프장군의 죽음>
1770년, 캔바스에 유채, 151×213 cm
오타와, 캐나다 국립미술관
 

영국에서 활약하였던 미국인 화가 벤자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는 20여 년 전에 퀘백 전투에서 프랑스 부대를 물리치고 목숨을 버린 젊은 영국인 장교의 죽음을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도11). 벤자민 웨스트 역시 울프장군을 종교적인 순교자의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당대의 사건을 주제로 삼은 역사화입니다만, <마라의 죽음>과 비교하여 볼 때 그뢰즈식의 과장된 설교는 그만 그림의 숭고함을 감소시켜 버렸습니다.

 
 

19세기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미술은 권력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가 실각한 이후 다비드는 다시 나폴레옹의 제정기의 미술가로서 다시 한번 선전미술을 담당하게 됩니다. 코르시카의 일개 장교에서, 프랑스를 구한 구국의 위인으로, 종신통령을 거쳐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나폴레옹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통치자였을 것입니다.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로 세습황제가 된 그는 그해 12월에 노틀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룹니다. 다비드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파노라마로 재현하였는데, 그 호화로운 금실의 장식과 생생한 인물들의 초상이 보는이를 압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림에 포착된 장면이 나폴레옹이 관을 쓰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황제는 교황에게서 관을 받았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며(왕권신수설), 교회는 국가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이러한 교회와 군주라는 봉건적인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교황에게서 관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았던 것에는 무엇인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이 국민의 제정을 다시 펴지만, 혁명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내보이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능력으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던 것에 걸맞게 이 놀라운 장면을 주관하는 마스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12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5-07년
캔바스에 유채, 629×979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3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부분
 
 
 
 
 

나폴레옹이 권력을 구가하던 시기에 미술가들은 그의 초상이나, 전쟁기록화같은 선전미술에 동원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장터의 열혈남아로(도14), 자연위에 군림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도15),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그림에서는 제우스의 도상을 빌어 신의 영역에 입적하고 있습니다(도16). 이 모든 것들이 화가의 신념에 의한 것일까요? 정치적인 선전에 미술이 하녀의 노릇을 한 것일까요. 전체주의 시대의 미술은 항상 이러한 난처한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도14 그로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
1796년, 74.9×58.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5 다비드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
1800-01년, 캔바스에 유채, 뮤제 드 샤토 말메종
 
 
 
도16 앵그르 <옥좌의 나폴레옹>
1806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무제 드 아메
 
 
 
 
 

숭고함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의 이상은 회화보다는 조각에 더 적합한 미학이었습니다. 카노바(Antonio Canova,1757-1822)는 조각에서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합니다. 카노바는 18세기 ‘대여행’시대의 골동품 취미에 맞추어 이탈리아에서 작업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고전 조각에 버금가는 순수함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카노바는 <테세우스와 미로타오르>(도17)에서 그리스 영웅의 결렬한 싸움의 장면 대신 미노타오르를 제압한 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보통 바로크적인 운동감보다는 정적이며 안정된 구도를 더 즐겨하였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카노바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생명력이 결여된 복고양식으로 여기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특히 나폴레옹 제정기에도 그의 그리스풍 조각은 환영받았는데, 도18은 나폴레옹의 누이 보르헤스의 초상조각입니다. 손에 쥔 파리스 사과로 보아 왕가의 여인은 그리스 여신, 비너스로 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7 카노바 <테세우스와 미로타오르>
1781-83년, 대리석, 73×74×50cm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도18 카노바 <승리의 비너스로 분장한 파올리나 보르헤스>
1808년, 대리석, 높이 2m
로마, 보르헤스 미술관
 
 
 

우리는 이 시대의 다른 한편에서 우동의 고전주의에서 벗어난 리얼리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앙트완 우동(Jean-Antoine Houdon, 1741-1828)은 계몽주의 철학자나, 혁명기의 정치지도자들의 동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하였던 초상조각가였습니다. 도19의 볼테르의 주름진 얼굴의 묘사와 섬세한 근육의 표정을 보면 그가 볼테르를 이상화시키기 보다는 현실적인 인간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쇄한 육체는 오히려 그의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우동의 명성은 미국에도 전해져서 미국건국의 아버지 워싱턴의 기념동상을 의뢰받았습니다(도20). 우동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실제 몸 치수를 재고 어깨나 손을 캐스팅하여 작품제작에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도19 앙트완 우동 <볼테르>
1778-80년, 테라코타, 실물크기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도20 우동 <조지 워싱턴>
1786-96년, 대리석, 실물크기
리치몬드, 버지니아 주의회사당
 
 
 

다비드 이후 프랑스 미술은 낭만적인 성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앵그르는 낭만주의에 맞서고자 하였으며, 혁명적인 성향에 반대하여 끝까지 왕정체제를 지지하였던 보수적인 화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랑 오달리스크>(도21)에서 볼 수 있듯이 인체의 곡선을 추상적으로 왜곡시키는가 하면, 풍부하고 화려한 색상은 색채화가로서의 면모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음 주제인 낭만주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국적인 취미나, 낭만적인 신화이야기를 즐겨 다루었습니다.

도21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
1814년, 캔바스에 유채, 89.7×6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는 다비드와는 달리 역사화에는 큰 재능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솜씨가 마음껏 발휘된 장르는 초상화입니다. 과거 아카데미 화가들의 역사화는 국가에서 구입하였으며, 국비로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지원은 기대만큼 충분하지 않았으며, 아카데미 화가들은 초상화에 많은 수입을 기대하여야 했습니다. 아마도 앵그르의 초상화도 그러한 사회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앵그르의 초상화는 사진이 초상의 기록을 떠맡게 되는 시기 이전의 회화적인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22 앵그르 <마담 므와티시에>
1856년, 캔바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신고전주의는 대륙에서는 다비드, 카노바, 앵그르와 같은 회화나 조각을 통해 꽃을 피웠던 반면, 영국에서 팔라디오니즘이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사실 팔라디오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로서 그의 빌라 로톤다(도23)는 그리스식 주식과 박공의 현관을 제외하고는 고대 건축물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계몽귀족들에게 도24의 치즈윅 하우스와 같은 팔라디오식 별장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인 진보적인 개혁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건축양식은 식민지 미국에도 전해져 ‘조지안 양식’으로 불리는 미국의 건축양식을 유포시킵니다. 특히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하였던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자신의 저택을 팔라디오식으로 개조하였을 뿐 아니라(도25), 도27의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시대를 근거로 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워싱턴의 도시계획에도 적용하고자 하였습니다(도26.27). 당시 미국인들 역시 신고전주의를 자유에 근거를 둔 미국의 이상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국회의사당이나 백악관과 같은 이때 세워진 미국의 공공건물들이 대부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도23 팔라디오, 빌라 로톤다, 비첸자
 
 
 
 
도24 벌링턴 경과 윌리암 켄트 <치즈윅 하우스>
1725년 시작, 런던근교
 
 
도25 토마스 제퍼슨, 몬티첼로, 버지니아
1770-84년 1796-1806년
 
 
도26 손튼 라트로브 벌핀치, <미국 국회의사당>
워싱턴, 1793-1830년
 
 
도27 <워싱턴 전경 상상의 드로잉>, 1852년
 
 
 
 
 
 
신고전주의는 곧이어 낭만주의의 반격에 직면하게 되지만,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서로 상반되는 양식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고전주의는 넓게 말한다면, 혁명기의 낭만적인 열정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던 미술양식을 지칭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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