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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샤르댕은 앞 주제에서 살펴본 로코코의 경쾌함과 피상적인 터치와는 다른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세계를 지향하였습니다. 샤르댕은 1728년에 정물과 동물화 부분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는데, 도3의 <홍어>는 이때 아카데미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털을 세운 고양이와 미끈한 홍어, 그리고 도자기와 흰 식탁보와 같은 다양한 물건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은 물론 정물화가로서의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세브르산 도자기(도8)나, 은식기가 아니라 검소한 중산층 가정의 부엌 한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엌의 가재도구와 식기들은 동시에 청교도적인 검소함과 노동을 상징합니다(도4). 도6의 작품 <부엌에서 물긷는 여자>에 그려진 청동물통을 보면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가사노동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처럼 말입니다(도5,6,7). 샤르댕이 즐겨 다루었던 소박한 물건들과 가정의 풍경은 마치 로코코 시대 궁정과 귀족들의 지나친 향유에 대한 해독제처럼 느껴집니다(도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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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샤르댕 <홍어> |
1728년, 캔바스에 유채, 114×146 cm |
파리, 루르브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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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샤르댕 <시장에서 돌아옴> |
1739년, 캔바스에 유채, 47×37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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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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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5 샤르댕 <가정의 물통> |
1734년경, 나무에 유채, 28,5×23 cm |
파리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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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6 샤르댕 <부엌에서 물 긷는 여자> |
1733년, 나무패널에 유채 |
스톡홀름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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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정치혁명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인 정서로 인하여 과장된 바로크 미술이 그다지 번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팔라디오풍의 별장을 짓고, 고전주의 미술이야 말로 고상함과 아름다움의 표본이라 믿고 있던 당시 영국의 상류계층들은 자기네 미술을 지방적인 것으로 폄하하여서 대부분의 미술품이나 장식품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수입하거나, 아니면 외국의 미술가들을 직접 불러들여서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는 자신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화가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작품을 제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호가스는 도시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절제한 악행들, 당시의 잡지나 통속소설에 자주 오르내리는 일화에서 주제를 찾아 이야기형식의 판화로 제작하여 판매하였습니다. 그는 주점이 있어 흥청거리고, 간판들이 즐비한 도시의 뒷골목을 즐겨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듭니다. 이러한 도시중심의 대중문화는 19세기 근대주의를 거쳐 더욱 가속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호가스가 그려낸 도시는 악덕의 온상처럼 보입니다. 도10의 <진 골목>은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방종을 경고합니다. 매춘부 일대기의 첫 번째 장면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순진한 처녀가 포주의 꾀임에 빠지는 장면입니다(도11). 이 때에도 도시는 순진한 여자를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악한 곳으로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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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0 호가스 <진 골목>, 1750-51년 |
에칭과 엔그레이빙, 359×341 m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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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1 호가스 <매춘부의 일대기> 첫 번째 이야기 |
1731년경, 동판화, 런던, 영국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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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스의 가장 잘 알려진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도12-16)은 귀족들과 부유한 계층의 탐욕과 무절제가 마지하게될 비극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사치로 재산을 소진한 귀족이 자신의 아들을 부유한 상인의 딸과 정략 결혼시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른쪽에 앉은 귀족은 짐짓 위엄을 가장하고 있으며, 돈은 많지만 교양 없는 상인의 모습은 희화되어 있습니다. 철없는 젊은 부부는 결혼 한 직후부터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합니다(도13,14). 향락가에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야 돌아온 남편의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고, 안주인 역시 밤사이의 카드놀이로 지쳐있습니다. 각종 청구서에 집사만 발을 동동 구릅니다. 특히 벽난로 위가 중국풍의 장식물들로 번잡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사치스러웠을 뿐 아니라 교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두 부부는 파산하고, 남편의 때 이른 죽음과 여주인의 자살로 비극적인 삶을 마무리하게 됩니다(도15,16). 이 이야기의 주제는 명료합니다. 사치와 방종, 무절제한 생활이 결국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지 알려주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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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2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첫번째 이야기, 1743년경 |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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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3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두번째 이야기, 1743년경 |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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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4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두번째 이야기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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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5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다섯번째 이야기 |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
런던, 국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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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6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여섯번째 이야기 |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
런던, 국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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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따른 결혼>과 같은 유화 연작은 귀족과 부유층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 작품은 쉽게 구매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판화를 통한 판매가 휠씬 쉬었으며, 판화의 독점판매권은 호가스에게 명성과 경제적인 여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런점에서 호가스는 대중화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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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카데미는 정물화, 장르화, 역사화와 같은 범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장르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화가들의 최고의 목표는 역사화가가 되고자 했겠지요. 그뢰즈의 장르화에서는 분명히 그러한 야심이 엿보입니다. 그런 점은 앞서 보았던 호가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훈과 도덕을 부르짖었던 호가스나 그뢰즈와 같은 계몽주의 미술가들에게 자신의 작품과 삶은 과연 얼마나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미술가들이 그림을 통해 도덕적인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철학자이거나 계몽주의자이기 이전에 성공을 쫓는 세속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그뢰즈가 말년까지 즐겨 그렸던 아래 그림들은 미술가의 이중성을 잘 보여줍니다. 샤르댕 보다는 호가스와 유사합니다. 도18,19에서 깨어진 항아리, 흐트러진 옷매무새는 이 여자아이들이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는 여성의 정숙함에 대한 경고겠지만, 소녀들은 매우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그뢰즈의 본심을 의심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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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8 그뢰즈 <깨어진 항아리> |
1785년, 캔바스에 유채, 110×85 cm |
파리,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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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9 그뢰즈 <기다림> |
1770년대, 캔바스에 유채, 79,3×61 cm |
뮌헨, 알테 피나코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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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 호가스, 그뢰즈는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하였던 반 로코코적인 미술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교훈을 실천하는 방식은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샤르댕의 미술에서는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구조가 두드러지며, 호가스에게는 위트와 유머가, 그리고 그뢰즈는 과장된 수사법이 그 특징입니다. 특히 샤르댕은 그뢰즈처럼 설교하듯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는 않지만, 화면의 절제된 구성의 아름다움은 누구보다도 설득력있게 구시대의 방종이나 사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8세기 말이 되면 이러한 성향들은 고전취향으로 수렴되며, 곧이어 혁명의 정신에 따라 근대 미술로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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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0 샤르댕 <비누방울>, 1739년경 |
캔바스에 유채, 61×63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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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1 호가스 <방탕아의 편력> 세번째 이야기, 1733-34년 |
캔바스에 유채, 62.2×75 cm, 런던, 존 소앤 경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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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2 그뢰즈 <마을의 신부>1761년 , 91.4×118.1 cm |
파리, 루브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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