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해도 한창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서 혈기왕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내딛는 발걸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나에게 서울은 지금도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가 한강철교를 지나가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재미있고 기억에 남을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에 나 혼자 들떠 있곤 했다. 지금까지 삶의 절반(파주에서 지낸 군 생활 제외)을 거의 대구에서 지냈으니 서울 촌놈인 건 확실하다. 2010년부터 올해까지 4년 동안 서울 왕래를 최소 열 번 이상 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서울 촌놈 인상을 벗어내기가 힘들다. 누군가가 서울 촌놈 같다고 말해도 좋다. 서울 촌놈이 맞으니까. 오히려 영원히 멈추지 못하는 호기심은 진부하게 느껴지는 서울을 더욱 새롭게 보이도록 만든다.

 

 

서울 왕래하는 동안 가장 기억남은 일이라면 독서모임을 절대로 빠질 수 없다. 2010년 말에 펭귄클래식코리아 출판사를 알게 되어 출판사 공식 온라인 카페회원들 중심으로 펭귄클래식 시리즈 중 한 권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한 달에 둘째, 넷째 주 토요일마다 모임이 이루어졌는데 출판사에서 지원해준 책을 읽은 모임 회원은 그 날 모여서책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독서모임이 참석하는 회원은 서평을 의무적으로 써야 했다. 사정상 독서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서평은 꼭 써야 했다. 5개월 혹은 6개월 동안 독서모임이 진행되었다. 그 기간에 진행된 독서모임은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1기’였다. 이 기간 동안 진행된 독서모임의 횟수는 10~12회인데 사실 학생 신분인 나로서는 모든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모임 초반기에는 자주 참석하다가 복학하면서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결석이 잦았다. 그리고 서울을 왕래할 경제적 비용이 부담되어 하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서평 쓰기는 미루지 않았다. 1기 독서모임 활동하는 동안 출판사에서 공짜로 받은 책을 무조건 읽었고, 서평은 꼭 작성했다. 절대로 단 한 권도 서평을 안 쓴 것이 없다.

 

 

2011년에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1기 활동이 마무리된 이후에 만남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달의 궁전’이라는 이름의 독서 커뮤니티였다. ‘달의 궁전’은 폴 오스터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재미있게도 나와 친분이 있는 독서모임 회원 중에는 폴 오스터 애독자가 꽤 있다. ‘달의 궁전’ 독서 커뮤니티를 이끄는 주인장 누님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폴 오스터 애독자다. 사실 원래 ‘달의 궁전’은 그냥 평범한 독서모임 커뮤니티라기보다는 폴 오스터 팬클럽 같은 마니아 성향의 독서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즉,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폴 오스터 사랑은 펭귄클래식 독서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모임이 진행되면 항상 지정도서에 대한 것만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가끔 열띤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주제가 다른 작가나 그의 작품으로 바뀔 때가 있었다. 그 분들이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폴 오스터의 문학 세계를 열광적으로 설명할 때 신선하면서도 낯설었다. 왜냐하면 폴 오스터의 소설을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서모임이 끝나고 뒷풀이에서도 폴 오스터 예찬은 계속되었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어본 그 분들에게는 폴 오스터에 관한 대화 주제가 흥미로운 문학적 안주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학적 안주거리에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아니,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새로운 안주 메뉴가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나도 직접 호기심의 손을 내밀어 집어보지만, 그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일단 작품을 읽어야지 오스터라는 이 새로운 문학 메뉴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워낙 한 권이 아닌 두 세 권 이상 다독하는 무척 산만한 독서 습관 탓에 오스터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꼭 읽어볼 것이라고 다짐을 했건만, 아직 제대로 읽기 시작하지 않았다.

 

 

‘달의 궁전’이 네이버 온라인 카페에 개설되었을 때 폴 오스터 광팬인 주인장 누님의 초대로 가입하게 됐는데, 거기서도 내가 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현재 ‘달의 궁전’은 폴 오스터 작품 읽기뿐만 아니라 원서읽기, 서평단, 기존의 독서모임 활동 등이 진행되고 있어서 오스터에서 비롯된 단절감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시기처럼 그 곳에서 왕성하게 온라인 활동을 하는 편은 아니다. ‘달의 궁전’ 독서모임에 참석한 것은 올해 딱 한 번뿐이다. 펭귄클래식 독서모임 때부터 만난 분들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과연 재회의 시간은 언제 찾아올까? 지금 현 상황으로서 봐서는 그 시간이 너무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겁도 없이, 어찌 보면 무모해보일 수 있는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원래 ‘달의 궁전’에서 진행되는 서평단 활동을 블로그를 통해 알리기 위한 글을 쓰려고 했는다. 그런데 어떻게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시 기억의 서랍에 보관하고 있었던 예전 독서활동에 관한 추억을 꺼내 봤다. 그런데 지금까지 흘러 지나가버린 4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많은 세월이 아닌데도 내 기업의 서랍은 과거의 추억을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할 정도가 너무 낡아버리고 망가져버렸다. 새삼 시간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크로노스의 위력이 느껴진다.

 

 

각설하고, 본론을 들어가자면 이번에 ‘달의 궁전’에서 진행하게 될 서평도서가 최근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펴낸 폴 오스터 인터뷰 모음집이다. 폴 오스터를 사랑하는 주인장 누님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이벤트가 생길 수가 없다. 정말 존경스럽다.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열혈 독자라면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특히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달의 궁전’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면 서펑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아직까지 서평 활동을 신청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인간사랑 출판사가 지원한 책의 권수는 총 5권. 아마도 신청자 5명이 딱 나오게 되면 이벤트가 종료될 것 같다. 만약에 신청자가 그 이상일 경우에는 ‘달의 궁전’ 온, 오프라인 활동이 많은 분이 우선적으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 5권이면 좀 부족한 개수이지만, 이런 기회 흔치 않다.

 

 

참고로 나는 이번 서평단에 지원하지 않는다. 여전히 폴 오스터는 멀고도 낯선 이름이다. 폴 오스타에 관심이 많고,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가 서평단으로 활동하는 것이 맞다. 주인장 누님의 뜨거운 열정 덕분인지 이제 정말로 오스터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폴 오스터라는 새로운 문학 메뉴에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일단 오스터 문학 코스 메뉴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오스터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쓴 작품 몇 권 읽고 난 뒤에 저랑 대화합시다. 그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꾸벅)

 

 

 

 

 

 

 

 

 

 

 

 

지금 내가 맛 볼 수 있는 오스터 코스 메뉴로는 <스퀴즈 플레이><우연의 음악><뉴욕 3부작><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신탁의 밤>, 총 5권이다. 진짜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런데 지금까치 출간된 오스터의 일부 작품은 품절 또는 절판되고 말았다. <우연의 음악><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신탁의 밤>은 절판되었고, 특히 주인장 누님이 강력 추천하는, 오스터의 대표작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달의 궁전>마저도 이미 절판으로 영면했다.

 

 

열린책들 출판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독보적인 작가로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그가 쓴 모든 책이 열린책들 출판사 한 곳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도 무시할 수 없다.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일기, 영화 시나리오까지 오스터가 쓴 작품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국내에 폴 오스터 마니아도 꽤 두텁게 형성되었고, 최근에도 그의 신간을 열린책들에서 단독으로 번역 출간하고 있기에 나머지 일부 작품이 품절, 절판된 것은 유감스럽다. 그런데 오스터 마니아가 아닌 내가 왜 유감스럽게 생각 하냐고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랍스터, 아니 오스터라는 문학 코스 메뉴를 맛보려고 하는데 일부 메뉴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서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제발 <달의 궁전>만큼은 재판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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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2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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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2 1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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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3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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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3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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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4 0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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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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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부처와 내기를 한다. 부처는 난공을 피우다 걸린 손오공에게 “  손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구름을 타고 수만리를 날아간 손오공은 구름 위 다섯 기둥에 ‘손오공 다녀감’이라고 쓴 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부처의 다섯 손가락이었다. 여기서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인터넷 포털과 SNS에 올라오는 새로운 소식을 검색한다. 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할 때도 중요한 업무회의 시간에도 틈만 나면 뉴스를 검색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습관이다. ‘손안에 세상을 펼쳤다’며 흡족해하지만 실은 뉴스에 의해 가공, 편집된 손안의 세상에 갇힌 것이다. 뉴스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가까이하자니 그 물량 공세 앞에 자칫 헤매기 쉽고, 떨어져 있자니 시대에 뒤처지지 않나 불안하다.

 

잠시라도 찾지 않으면 미친 듯이 초조해지는 뉴스에 대한 탐닉.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뉴스에 탐닉하는 이유를 불안과 공포를 꼽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면 뒤처질 것 같은 공포와 불안, 동시에 엄청난 재난이나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괜찮다’는 상대적 안도감을 얻기 위해 뉴스에 몰입한다.

 

이 공포와 불안 아래에서는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곳이 뉴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통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해 왔다.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인 판옵티콘은 규율사회의 특징인 감시와 통제의 원리가 잘 드러나고 있다. 간수는 중앙의 높은 곳에서 언제나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한다.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되는 감시와 통제는 감옥뿐 아니라 병원, 군대 등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규율사회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이러한 판옵티콘의 구조가 바로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도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근대사회의 판옵티콘에서 보여준 시선이 정보로 대체된다. 정보를 독점한 국가권력이나 기업이 대중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감시와 통제의 방법이 좀 더 비가시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제는 권력을 감시해야 할 신문은 신앙이 누리던 권력과 지위를 차지해 대중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Scene #2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

 

우리는 단순히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의해 감시받는다. 뉴스티콘에서 뉴스는 피감시자가 된 대중을 볼 수 있지만, 대중은 뉴스 감시자를 볼 수 없다. 뉴스는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낸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여기에 겁먹고 동요하는 대중을 더욱 자극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선의 비대칭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뉴스 탐닉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뉴스는 일상을 통제한다. 아침뉴스로 일어나는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전해주는 종합뉴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뉴스가 시작되는 정각 시간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에 리모컨 컨트롤을 쥔다. 뉴스는 계시를 주고, 선악을 구분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라고 타이른다. 이 모든 의식을 거부한다면 ‘뉴스의 이단’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뉴스를 보지 않는 이단자는 시사 상식에 부족한 자로 낙인찍힌다. 뉴스를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른 기준은 상대방의 지적 수준을 판단한다. 즉, 뉴스를 보는 생활은 교육과정의 연장성이 되기도 한다.

 

 

 

 

 

 

사진출처: 중앙일보의 기획 기사 '정치 수능' (2014년 7월 23일)

 

“우리는 태어나서 고작 18년 남짓 교실에 갇혀 보호받을 뿐, 나머지 l8년은 사실상 어떤 제도권 교육기관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력을 무한정 행사하는 뉴스라는 독립체의 감독 아래에서 보낸다. 일단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끝나면 뉴스가 선생님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18쪽)

 

 

이렇듯, 오늘날의 뉴스는 투명한 감시자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창조하고 감정을 통제한다. 뉴스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그리고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를 알려주며 그러면서 정치적ㆍ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중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대중은 뉴스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판단하며, 그에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좌절한다. 바로 이것이 뉴스가 지닌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스 그 자체에 무지하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라는 보통의 말처럼 우리를 ‘감정 교육’시키려는 뉴스의 이면을 모른다. 언론은 특정한 뉴스들을 폭탄처럼 쏟아냄으로써 오히려 무관심을 선도한다. 정치뉴스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정치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분노하다 결국 허탈해진다. 정치뉴스는 여야 정치인들이 왜 싸우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여야의 공방만 비춘다. 어쩌다 저런 비리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잡혀가는 정치인의 모습만 비춘다. 결국 우리에게 정치에 대한 냉소만 생기게 한다.

 

민주 정치의 진정한 적은 흔히 보도 통제와 검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검열보다 무서운 것은 냉소다. 독재자라면 통제 대신 닥치는 대로 언론이 뉴스를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끊임없이 쇄도하는 뉴스 기사와 이미지는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긴다.

 

 

 

 

 

앤디 워홀  「실버 카 크래쉬」  1963년

 

“재난 뉴스는 불행한 사건을 다루는 뉴스 중에서도 주목도가 높고 대중적인 또 하나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재난 뉴스’ 중에서, 230쪽)

 

 

정치 뉴스에 시큰둥할수록 셀러브러티에 관한 다양한 소식에 집착한다.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과 연애 소식 등은 대중적 뉴스감이 되어 각종 포털 사이트 뉴스란에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요즘 재난 뉴스의 내용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 지상파 종편 뉴스채널 등은 재난 쇼를 하듯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경쟁을 벌였다.

 

 


 Scene #3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세상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자극적인 범죄 기사에 저절로 눈이 가고, 유명연예인의 열애 소식이나 폭행사건에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대중은 답답한 삶의 도피처로 뉴스티콘을 삼고 있다. 뉴스티콘에 갇힌 대중은 자신들의 감정을 통제하는 뉴스를 어떻게 올바르게 보는지 잘 모른다. 뉴스티콘에서 탈출하여 제대로 된 뉴스를 봐야 한다. 뉴스와 대중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에서 머리를 맞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좋은 뉴스는 세계와 나, 타자와 나의 만남을 이끄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것은 생생한 인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동안 뉴스에 탐닉하는 바람에 정말 인간적인 뉴스를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뉴스를 많이 접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뉴스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정보의 조각이 모아 만들어진 뉴스에서 감춰져있는 세상의 의미를 끄집어 내야한다. 우리는 세상에 모든 뉴스를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다. 가끔 스마트폰에 진동으로 울리면서 나오는 뉴스 속보를 멀리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뉴스로부터 철저하게 도망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보통은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탱크를 몰고 습격하라고 말한다. 사회뿐만 아니라 대중의 감각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만들어낸 불량하고 나쁜 뉴스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정말 나쁜 뉴스가 너무나도 많다. 이런 나쁜 뉴스로부터 통제당하면서 생긴 세상에 관한 무관심, 분노로 쌓인 정신적 우울증을 치유하고기 위해서 우리의 신경중추를 자극해온 뉴스티콘을 향해 탱크를 몰아 무너뜨려야 한다. 뉴스티콘을 지배하는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뉴스티콘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견지해야 할 진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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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Scene #1  애서가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고 어안이 벙벙한 적이 있다. 지독한 독서가로 유명한 그의 행적이 상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500여 권의 참고서적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약과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개인 장서를 정리하려고 지하 1층, 지상 3층의 자그마한 서고 빌딩까지 지었으니 말이다. 이 빌딩으로도 모자라 그 부근에 새 저장소를 마련했단다. 좋게 말하면 책에 쏟는 엄청난 열정이 존경스럽고, 나쁘게 말하자면 거의 광적인 수준이다.

 

한국에도 다치바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적지 않으리라. 조선시대의 학자 이덕무 선생은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불렀다. ‘책만 읽는 바보’란 뜻이다. 그만큼 그는 독서를 즐겼고 많은 책을 모았다.

 

이들에게 책은 ‘사랑’의 대상이다. 애인 다루듯 소중하게 읽고 간직해야 한다. ‘책을 사랑한다’는 것은 책의 내용이나 책 읽는 행위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넘어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애서가’(愛書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애서가에게는 얼마만큼의 책이 필요할까? 금속활자 이전에는 3천 권 정도 소유하면 책 부자였다. 현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는 2천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면 모범장서가로 선정한다. 나에겐 두 경우 모두 해당 사항이 없지만 나만의 보물 같은 서가를 바라볼 때면 마음만큼은 ‘부자’가 된다.

 

이덕무 선생은 ‘간서치’라면 나는 ‘책성애자’(冊聖愛子)다. 성애자(性愛子). 원래 정신의학 용어로 풀이하면 어떤 특정 대상에게 사랑을 느끼는 성적 지향 혹은 취향을 의미한다. 요즘 기존의 의미에서 확장되어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것을 가리키는 유행어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수 존 박은 평양냉면을 무척 좋아해서 ‘냉면 성애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책성애자’의 ‘성애자’는 단순히 책에 어떤 기이한 성적 취향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책성애자’(冊性愛子)라는 단어에 야한 사진이 가득한 성인 잡지나 야설을 보면서 성적 희열을 느끼는 취향의 느낌이 난다. 그래서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의 의미로 ‘성 성’(性) 자 대신에 ‘성인 성’(聖) 자로 쓴다.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구입하면 책 속 내용보다 초판 혹은 절판본인지 먼저 본다. 두 가지 조건 모두 충족한 책이라면 더 좋다. 절판본 중에 의외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내용으로 구성된 것도 있다. 나처럼 책 좋아하는 애서가 중에서도 절판본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내용의 책이라도 거들떠보지 않는 취향을 고집하는 경우가 꽤 있다. 절판본 중에 희소가치가 높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절판본은 책의 정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나오기 힘든 절판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많지 않은 1%의 귀한 보물을 혼자 가진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부심은 애서가가 느끼는 착각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또 다른 애서가도 나와 같은 절판본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함정에 잘도 빠지면서 절판본을 소중히 여기는 애서가를 보면 범인(凡人)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책 한 권을 사는 것을 책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이지 않은 책에 대한 집착으로 비춰진다.

 

 

 

 

 

 

"애서가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애서가는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도 많지만, 책을 팔 땐 무척이나 신중하게 생각한다. 나는 직접 구입한 책을 팔게 되면 쓸데없이 고민을 하는 성격이다. 책을 팔고 나면 뒤늦은 후회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평소에 손길을 주지 않은 책인데도 말이다. 이런 허전함을 잊기 위해서 책을 팔아 생긴 돈으로 또 다른 책 몇 권을 구입한다. 책상 위에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이처럼 애서가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Scene #2  제대로 책을 읽을 줄 알고, 보관할 줄 아는 장서가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가의 괴로움』을 읽으려는 독자들 중에 자신이 장서가, 애서가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마음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책을 많이 사는 당신의 습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되는 상황이 찾아올 것이다.

 

‘책성애자’(冊性愛子)인 나에겐 이 책의 제목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상대방의 지적인 속살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장서 3만 권을 가진 저자의 괴로움이 무척 즐거워보였고 이상하게도 지적인 쾌감이 느껴졌다. 저자가 섭렵해 온 책의 목록을 구경하고, 아끼는 책을 손에 쥐게 된 경로를 추적하는 애서가 이야기에 흥미로운 지적 풍경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그의 괴로움은 읽을 책이 많은 장서가의 행복한 엄살이 아니다. 어느새 점점 쌓여가는 책 때문에 집 안은 발 디딜 틈 없다. 함께 사는 가족의 원성은 하늘을 찌른다. 그토록 책을 좋아하던 애서가가 자신의 보물들 때문에 집이 무너질 걱정을 한다. 일본은 목조 건물이 많다. 오래 지은 목조 건물일수록 지진에 의한 진동에 쉽게 무너진다. 목조 건물은 많은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만 권 이상 되는 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책이 가득 쌓여 있는 방 어디선가 ‘삐걱’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애초부터 저자는 위험에 노출된 상태에서 저자는 책을 사 모으면서 지내왔다. 하지만 이 정도 장서의 괴로움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3·11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면서 책을 소실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다.

 

결국 오카자키 다케시는 장서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3만 권 이상의 책으로 가득한 서재를 과감히 비우는 건전하고 현명한 장서 관리를 시도한다. 일단 그는 먼저 헌책방에 책을 판다. 오카자키가 생각하는 적당한 장서량은 500권이다. 500권 이상 책을 소유하고 있다면 초과된 책을 버리고, 더 이상 책을 구입해선 안 된다. 다 읽은 책을 헌책방에 팔면, 그 책이 또 다른 독자의 손으로 넘어가 새 생명을 얻게 되면 책의 가치가 높아진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장서가의 의미심장한 충고. 자신에게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손에서 놓을 줄 알아야 한다. 시대가 변해서 오래되고 낡은 정보가 있는 책이라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현재 관심 없는 분야의 책도 다시 읽을 일이 없다면 팔아야 한다. 책은 구입하자마자 바로 읽으면 좋지만, 대부분 애서가들은 구입한 책을 읽지 않고 바로 책장에 꽂는 악습관이 있다. 이렇게 읽을 기회를 미루다보면 책장이 아닌 박스에 보관하기에 이른다. 이러면 책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바로 읽지 못하더라도 항상 눈에 띌 수 있도록 책등이 보여야 한다. 정말로 읽을 이유가 없다면 불필요한 책을 과감하게 처분하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헌책방에 팔게 되는 책을 분류하는 과정에 정말 팔아선 안 되는 책 몇 권이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 책들은 여러 번 읽었을 것이고, 다음에도 또 읽을 수 있는,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책일 것이다. 건전한 장서가가 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독서법도 지녀야 한다. 오카자키는 진정한 독서가라면 서너 번 다시 읽는 책을 한 권이라도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책을 많이 사고 모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책을 읽을 줄 알고, 보관할 줄 아는 장서가가 되어야 한다.

 

 


 Scene #3  나를 아프게 만든 『장서의 괴로움』

 

이 책에는 오카자키 개인뿐만 아니라 일본 장서가들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일본은 애서가가 살기에는 적합한 나라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동안 일본의 장서가라면 가장 먼저 다치바나 다카시가 먼저 떠올렸는데 나는 그동안 일본의 책 사랑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에게 최상의 책을 판매하고 매입하는 일본 헌책방들의 유통 과정은 애서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장서가라면 오카자키와 같은 장서의 괴로움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세 가지 아픔을 가져다줬다. 첫째, 고생해서 모아놓은 책들이 자연 재해로 인해 한 번에 소실되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일본 장서가들의 사연은 같은 장서가로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둘째, 과연 나는 살면서 500권 정도의 책을 모을 정도로 소유욕을 줄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모은 책을 과감하게 팔 수 있을까? 책을 처분해야 하는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셋째, 헌책방을 애용하는 일본 장서가들의 모습에 배가 아팠다.

 

오카자키 다케시는 각자의 자리에서 책을 모으려고 부단히 노력중인 세상의 모든 애서가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진정한 애서가라면 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당신이 마음을 비우고 장고 끝에 눈물을 머금고 ‘애장’ 이라는 미명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책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면 자연히 책의 대여 또는 전자책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궁극의 질문. “죽고 나서 자신의 서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책의 우주』 마지막 장을 나오는 이 질문은 아직 갈 길이 먼 어설픈 애서가로서는 요원한 질문이다. 책을 처분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기증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 기증 문제를 두고 에코는 우리 애서가들의 정곡을 찌른다.

 

“내 컬렉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물론 그것이 흩어지는 걸 원치 않아요. 우리 가족이 그걸 어떤 공공 도서관에 기증하든지, 혹은 어떤 경매를 통해 팔 수 있겠죠. 이 경우, 예를 들면 어떤 대학교 같은 곳으로 가서 컬렉션 전체가 통째로 가야 합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에요.”

 

 

 

 

 

컬렉션이 담보된 기증이 꼬리를 문다면, ‘바벨의 도서관’은 영영 문을 열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바벨의 도서관’을 만드는 것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책 사는 습관을 고치고, 오카자키처럼 건전한 독서법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이놈의 책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던데『장서의 괴로움』을 읽고 나서도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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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8-28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이 책 사 보겠다고 책 권 수 늘려야 한다면
이책 사야하는 거니, 말아야 하는 거니?
그런데 제목만으로도 너무 공감이 가서 사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ㅠ

cyrus 2014-08-28 16:30   좋아요 0 | URL
이제 책 사는 습관을 고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고치지 못할 것 같아요.. ㅠㅠ 장서가라면 이러한 괴로움 평생 안고 가야할 듯 해요.. ㅎㅎㅎ 그래도 책 내용은 무척 재미있어요.
 
웨이파인더 - 인류 최초의 지혜로 미래를 구하다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과학기술과 진보를 향한 숭배에 내재하는 만인을 위한 단일한 문명이라는 이상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지고 불구가 된다. 세계관 하나가 소멸할 때마다, 문화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생명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옥타비오 파스, 『웨이파인더』 중에서, 178쪽)

 

 

 

 

 Scene #1  오만한 문명    

 

“그는 몹시 불편해했다. 바지를 입는 일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윗도리의 소매로 말미암아 어깨와 팔 안쪽에 찰과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서 자꾸 아프다고 말하는 부분을 몇 군데 넓혀 주었는데, 그는 점차 자신의 신체를 의복에 길들여갔다.”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중에서)

 

프라이데이를 처음 본 로빈슨은 무척 놀랐을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백주대낮을 활보했으니 말이다. 신앙심 빵빵한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야만인 옷 입히기'를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혜택이라고 생각했다.

 

'문명'이 고고학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30년대부터다. 이때부터 실제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문명이라는 사회단계의 개념화가 진행됐고, 문명 단계로의 이행을 가져온 다양한 요인에 대한 검토가 이뤄졌다.

 

'문명' 개념은 인류는 발전한다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믿음 속에서 탄생했다. 인류학자 헨리 루이스 모건은 '발전'의 개념을 도입해 인류가 야만과 미개가 단계를 거쳐 오늘의 문명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당시 유럽에선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듯 인종이나 사회도 거친 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발전한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졌고, 자기 문화권과 다른 사회는 야만으로 규정해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정신문명을 압도하는 오늘날, 기술과 자본이 개입되지 않은 삶의 모습은 이질적이고 비문명적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옷을 입지 않고 산다거나 피부에 무수한 상처를 남기는 고통스런 통과의례 등은 흔히 야만적인 풍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인식이 상대 문화에 대한 무지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문명은 오만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불붙은 유럽 제국은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을 단죄했다.

 

도시문명이 발달한 유럽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시선처럼 원주민 문화는 야만스러운 것일까?

 

 

 

 Scene #2  인류학자, 문명과 야만 사이로 직접 뛰어들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수 백만 년이 지났지만 서로 긴밀한 교류를 시작한 건 채 수 백 년도 되지 않는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 단계에서 보편적 경로를 밟기도 했으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왔다.

 

캐나다 출신의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물질문명의 단선적인 흐름을 근거 삼아 진보를 주장하는 서구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한다. 그가 쓴『웨이파인더』는 단순한 서구 탐험가의 오지 탐험기가 아니다. 전 세계 토착 부족 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했다. 자연과 인간, 문명과 야만 사이로 나누어진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떤 소통을 꿈꾸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웨이드 데이비스는 문명인의 눈에는 미개하게 느껴지는 야만의 모습을 그저 야만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곳에 살아가는 토착 부족민은 물론이고 동식물에 이르는 생명들의 삶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경이롭고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야만적 문화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그들이 스스로 터득한 뛰어난 지혜다.

 

폴리네시아인은 지도와 나침반이 없어도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바람, 파도, 구름, 별, 해 등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이 항해하는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부표다. 예를 들어 달무리가 생기면 다음 날에 비가 온다는 징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는데 오래전에 폴리네시아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밖에 달무리 안에 보이는 별의 개수를 통해 폭풍의 강도를 예측할 수 있고, 구름이 떠있는 형태나 움직이는 정도로 대기 상태나 바람의 세기 및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항로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항해 과정 중에 보고, 겪은 자연현상들도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이것을 지도 삼아 직접 눈으로 바닷길을 찾는 그들은 바닷길잡이(wayfinder)인 셈이다. 기억으로 축적된 폴리네시아인의 추측항법은 오늘날의 천문학, 해양학으로 증명된 지식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들은 추측항법을 따로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다음 후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다행히 폴리네시아의 추측항법은 보존되고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콜롬비아의 바라사나 족의 우주론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들은 거대한 지구를 구성하는 자연에 각각의 생명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영적 기운으로 살아 숨 쉰다고 말한다. 인간, 동식물 모두는 하나의 우주적 기원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서로 관계 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는 통합체로 인식한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생명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커다란 생명체로 본다. 그러나 바라사나 족은 열린 눈과 마음으로 온갖 생물, 무생물을 보듬어 안은 인류의 지혜를 살아 있는 자의 의무로 봤다. 바라사나 족뿐만 아니라 일부 토착 부족도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대한 공공 재산이자 영적 기운이 들어있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생각한다.

 

 

 

 Scene #3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근대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무기로 삼는 인류사회의 진보를 자랑해왔지만, 그 이면에는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야만의 역사가 성장해왔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줄기차게 울려왔다. 그 목소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야만'과 '미개'라는 단어를 붙였던 토착 부족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내는 진실 되고 간절한 목소리 앞에 귀를 막아버렸다. 표면적으로는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과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또 다른 세상 보기를 시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때론 편견과 오만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을 느낀다.

 

1854년, 북미 대륙에서 잔혹하게 인디언을 몰아낸 백인들이 내민 계약서 앞에 시애틀 추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웨이드 데이비스도 시애틀 추장처럼 인류학적 근거를 들어 자연과 공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를 강조한다. 자연을 개발하고 소유하는 인식은 미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과 하나로 연결된 채 살아가는 토착 부족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자연개발론자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에 자연을 이윤 획득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본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오랫동안 한 곳의 터전에서 살면서 자연을 소중하게 여긴 토착 부족을 집단학살(genocide)하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생활방식을 말살하는 문화학살(ethnocide)도 일어난다. '진보'의 불도저를 앞세운 문화학살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최고(最古)의 언어, 문화 그리고 내일을 내다보게 만드는 삶의 지혜마저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희귀종의 멸종이나 서식지 파괴와 같이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과 언어 및 문화 다양성은 무관하지 않다. 자연과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수세기를 살아온 인간의 언어들 속에는, 자연에 대해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거는 방법이 무척 다양했다. 그래서 특정 언어가 사라지면 특정 생물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생물종의 상실을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손실 즉, '인종권'(ethnosphere)이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방관하고 있다. '인종권'이란 인간의 지성과 의식이 함축된 인류를 총칭하는 문화적 재산으로 정의된다.

 

과학 기술의 지속적 발명과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 하에 진행되는 인류에 의한 자연 정복이 이대로 계속될 때 틀림없이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은 지구의 황폐, 생태계의 파멸, 인류 종말 및 모든 생명체의 멸종이다.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지구는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병에서 회복될 수 없어 사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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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래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물질을 치료에 이용해왔다. 현재까지 많은 의약품들이 식물체로부터 얻어지고 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은 키나나무에서, 진통제인 모르핀은 양귀비 열매에서, 마취제로 쓰이는 코카인은 코카나무에서 추출됐다. 하지만 모르핀, 코카인은 의학용이라기보다는 심각한 중독 증상이 나타나는 마약으로 분류하고 있다.

 

코카인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과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며, 심장 박동수와 혈압을 높인다. 또 도파민을 신경전달물질로 사용하는 뇌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도파민이 전기신호를 전달한 뒤 다시 시냅스에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막아 흥분상태가 이어지도록 한다.

 

코카인은 체내에서 급속히 분해되기 때문에 약효가 신속한 대신 지속시간이 짧다. 적절량을 사용하면 힘이 넘치고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는 등 쾌락적인 흥분과 환각 경험을 갖게 되지만, 과량 흡입하면 불안, 구역질, 구토 등을 일으키고 나아가 심장마비나 호흡정지 등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코카인의 특이한 독성작용 중에는 ‘Coke Bugs’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피부 속에 벌레들이 떼 지어 기어 다니는 듯한 환상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이 일어나면 벌레를 잡기 위해 피부를 마구 긁어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이렇듯 코카인의 해로움은 의학적으로 증명되었으나 코카인을 합법화하는 나라 및 지역이 남아 있다. 그들은 코카인은 몸에 좋은 약물이라고 주장한다. 코카인은 남아메리카의 코카나무 이파리에서 추출하는데, 잉카문명에서 이미 약초로 쓰였다. 잉카인들은 코카 잎을 씹으면 피로와 졸음을 쫓아주고 고된 노동의 고통을 완화해 준다고 믿었다. 1855년에 코카인이 처음으로 코카 잎에서 분리 추출되는 방법이 발견되면서 마취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잉카인의 후예들이 사는 볼리비아에 코카 잎을 사용하는 전통이 남아있다. 그들은 코카나무에서 추출하는 물질을 ‘코카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코카’라고 부른다. 코카 잎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인 볼리비아는 코카 잎으로 만든 에너지 음료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볼리비아는 2006년부터 코카 재배농 출신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가 코카 재배 양성화 정책을 추진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볼리비아 정부의 코카 재배 양성화 정책이 마약류인 코카인 생산을 늘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코카인의 해로운 영향이 공식적으로 밝혀지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히려 코카인에 대한 경계가 느슨했다. 19세기 중반 인기 음료엔 코카인이 버젓이 들어 있었고, 미국의 존 팸버튼이 1886년 첫 선을 보인 이후 20여 년간 코카콜라에 이 중독성 물질이 함유됐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5년간 코카인을 규칙적으로 흡입하면서 “중독성 없이 지속적 행복감을 제공한다”는 예찬과 함께 주변에 권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와서 코카 재배 근절이 하나의 국제적 정책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코카인은 건강에 해로운 마약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오래전부터 코카를 피로회복제로 이용했고, ‘신의 불로초’라 여긴 잉카인의 코카 숭배 문화가 코카인 생산을 부추기는 사회악의 원인으로 지적받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1970년대까지 잉카인들이 사용하는 코카 성분에 대해 과학적 입증이 밝혀지지 않았다. 코카 잎에서 코카 성분을 추출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정작 코카 원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웨이드 데이비스는 『웨이파인더』(정은문고, 2014년)에 코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안데스 산맥을 탐사하는 여정을 소개하는데 남아메리카 지역에 나오는 코카가 단지 마약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데이비스는 코카의 영양학적 연구를 실시한 결과, 유해한 물질임을 밝혀낸다. 코카 잎에서 나오는 효소는 탄수화물을 소화시키는 능력을 높여주는데 안데스 지역의 감자 위주 식단에 아주 적합하다. 그리고 비타민과 칼슘 성분도 포함될 정도로 영양학적 가치가 높다. 잉카인들이 씹는 소량의 코카 잎에 0.5~1%의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있는데 인체에 무해하다. 그래서 잉카인들이 코카에 중독되지 않은 것이다.

 

코카인이 위험한 마약이라고 해서 코카를 즐겨 사용했던 잉카 전통 문화를 ‘최악의 문화’로 보는 것은 왜곡된 편견에서 비롯된 문화적 차별이다. 그들의 신성한 식물을 함부로 사용한 진짜 주범은 무기를 앞세워 타 민족의 문화를 파괴한 근대의 문명인이었다.

 

 

 

 

 

 

 

 

 

 

 

 

 

 

 

 

 

잘못 알려진 음식, 건강, 환경 관련 분야 상식을 소개하는 제임스 콜만의 『내추럴리 데인저러스』 (다산초당, 2008년)에 코카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잉카 제국을 침략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미 코카인의 효능을 알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인들을 금광으로 끌고 가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코카인을 사용하게 했다. 금을 캐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광에 투입된 잉카인들은 평소보다 많은 코카인을 강제로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잉카인들은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금을 캤을 것이며 코카인을 과다 복용하는 바람에 그 많은 잉카인들을 사망케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마약은 인류가 발견해 낸 물질 중 가장 신비스럽고 귀한 물질임에는 틀림없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 내는 신통력이 있는가 하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고 심각한 질병을 앓아 수술할 때에는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다. 

 

이처럼 마약이 의학적으로 적정한 용도로만 사용된다면 신비의 묘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확산을 우려하는 이유는 마약류가 지니는 엄청난 파괴력 때문이다. 마약류의 남용은 개인에게는 신체적, 정신적, 가정적 파괴를 사회적으로는 각종 범죄와 혼란을 일으킨다. 중독은 특정한 자극물을 사용하면 만족감을 얻기 때문에 이러한 자극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길 원하게 되고 또 사용을 중단하면 불쾌한 기분과 금단 증상을 경험하게 되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자극물에 의존하게 된다.

 

특히 마약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진보라는 환상에 취하고, 끊임없는 발전에 만족하지 못해 탐욕스러워진 문명인이 이 위험한 약을 만들었다. 결국 마약은 문화제국주의 시대가 낳은 잘못된 근대적 발명품 중 하나다. 지금까지도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란 현대인은 잘못된 역사적 진실을 믿으면서 아무 죄도 없는 타 민족 문화를 오해하고 무시한다. 그리고 이 근대적 발명품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중독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코카 잎을 씹는 잉카족과 코카인에 중독된 문명인 중에 과연 누가 더 야만스러운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의 지혜가 깃들어진 문화를 멸시하고, 가차없이 짓밟고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문명인이야말로 야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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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문고 2014-09-0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