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에서의 죽음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더크 보가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예술이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 (토마스 만)

 

 

 

 

 Scene #1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예술가, 아셴바흐

 

 

            

 

G. Mahler / Symphony No. 5  Mov. IV. Adagietto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미에 사로잡힌 자는 달콤한 질식에 숨통이 조여 오는 줄도 모르고 그저 헐떡거릴 뿐이다.

 

마치 죽은 자가 지상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스틱스 강을 건너듯 안개 낀 베니스를 건너가는 장면이 음울한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의 느린 4악장을 배경으로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자기통제야말로 한 인간이 발전해 가는 일종의 운명이라 믿고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누리며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아셴바흐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작품에 열렬한 유희적 흥취가 결여됐다는 자각과 함께 ‘이국적인 바람’과 ‘새로운 피를 솟구치게 할 무엇’을 좇아 베니스로 향하게 된다.

 

 

 

 

 Scene #2  예술가의 정체성

 

 

 

 

 

 

언뜻 들으면 ‘열정에 우롱당해 사랑에 빠진 늙은 남자가 가당치도 않은 희망을 품은 채’ 혼란스러워 하는 감정의 때늦은 모험이야기 같다.

 

 

 

늙음과 젊음의 대비, 삶과 죽음의 대립을 테마로 예술가와 시민성, 예술적인 삶,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무질서, 절대성의 지향 등을 내포한 이 소설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늘 고민한 토마스 만의 다른 소설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 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소설과 영화의 다른 점을 두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는 소설 속의 작가인 아센바흐는 영화에서는 음악가가 된다. 영화는 문인보다는 음악가를 그리는 것이 훨씬 수월함에서이다. 음악가로부터는 그의 음악을 듣게 할 수 있는 반면 문인은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간접적으로 표현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 아센바흐가 작곡가로 등장하면서 음악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두번째는 소설의 서사구조를 삭제하고 또 덧붙이는데 있다. 영화는 소설의 1, 2장을 삭제했고 3장에서 시작하여 소설 줄거리를 쫓아가면서 원작에는 없는 7번의 회상 장면을 삽입한다.

 

영화는 아센바흐가 오직 미소년을 보려는 감정의 격량속에 휘말릴 때마다 말은 사라지고 음악이 깔리면서 보고자 하는 시선의 욕망을 부각시킨다. 토마스 만이 언어를 매개로 빼어난 산문 예술을 창조했다면 비스콘티는 시각과 말러의 음악을 매개로 탁월한 영상 예술을 만들어내었다.

 

음악은 이야기를 따라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후에 진행될 복잡하고 다의적인 표현을 암시한다. 아센바흐가 타치오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소년에 대한 감정의 변화, 이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그를 동반한다. 음악은 타치오에게 결코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아센바하의 감정을 선취하여 알려준다. 이 순간부터 아센바흐는 언제나 아름다운 소년을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음악에 깊이 압도되는 장면은 아센바흐의 죽음에서이다. 그가 죽어가면서 쓰러지기 직전 관광객들이 거의 떠난 쓸쓸한 해변에서 아카펠라로 이어지는 자장가를 들으며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갈 때 뒤이어 아다지에토가 비통한 시간의 파동이 되어 죽음의 길에까지 동반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감각을 완전하게 지배하게 될 때만 성취할 수 있다. 예술이란 그렇게 고양된 정신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은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이 하나로 겹친 미소년 타치오를 통해 신체성에 깃든 충동적이고, 감각적인 관능들은 정말 극복되고 배제되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Scene #3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예술가는 어떤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좇아 채집하는가. 아름다움의 심연은 결코 살짝 외접해 지나가는 방식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다. 예술가가 절대미라는 실체의 겻불이나마 쪼이려면 광기와 혼돈의 염천 아수라를 돌파해 비밀의 불씨 하나라도 챙겨 와야 한다. 그 영감의 불씨로 비로소 창작의 열탕을 끓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극단까지, 끝까지 간다는 것에는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그렇기에 제정신을 잃고 미에 침 흘리는 탐미적 예술가들은 시나브로 죽음의 향에 도취되기까지 한다. 그들은 경련적 혼돈을 일으키는 이 황홀의 느낌을 따라 죽음의 불길로 뛰어드는 부나비들이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에서 아센바흐는 예술의 불온한 광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탐미에 도사리고 있는 혼돈과 광기어린 열정은 명철한 조형적 기율의식으로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건강하고 건전한 교육적 예술을 신봉한다. 그의 신분이 이제는 창작혼이 시들해진 대학교수로 나오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던 그가 한없이 무너진다. 휴양차 방문한 베니스에서 ‘완벽하게 신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타치오를 그만 목격하고 만 것이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정체모를 돌연한 설렘의 물살이 인 바로 그 순간, 그는 아름다움의 심연에 위험한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존재를 흔드는 치명적 아름다움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는 건 아니다. 아름다움의 섬광은 이처럼 매복과 기습에 능하다.

 

아센바흐의 이성은 에로스의 신에 무릎 끓었다. 베니스에 콜레라가 창궐해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 와도 무감각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정열의 노예가 돼 버렸다. 관광객은 하나 둘씩 떠나거나 죽어가고, 화장기 걷힌 베니스는 썩은 내 나는 폐허로 변해 있다.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콜레라에 전염된 듯 신열에 떨며, 식은땀을 흘리며, 바닷가 의자에 앉아 타치오를 바라보며 그렇게 쓰러져가야 했다.

 

 

 

 

 

 Scene #4  같지만 다른 아셴바흐의 죽음 

 

원작이 ‘예술가에 대한 성찰’이였다면, 영화는 ‘예술가를 위한 변명’이다. 따라서 똑같은 아센바흐의 죽음도 그 성격은 다를 것이며 토마스 만이 보는 아셴바흐와 루이스 비스콘티가 보는 아셴바흐는 동명이인일 것이다.

 

먼저 원작과 영화 초반부에 설정된 아센바흐의 심리적 처지부터가 다르다. 원작에서의 시인 아센바흐는 엄격하고 조화로운 고전적 예술로 이미 성공한 인물이다. 즉 그는 베니스에 올 때부터 아폴론적 요소로 자족해 있는 예술가이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쇼크로 그 자족 상태가 무너져간다.

 

이에 비해 영화에서의 음악가 아센바흐는 당초 탐미 없는 예술로 쓰디쓴 실패를 맛본 처지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결핍으로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베니스에서 그는 미의 충격적 광기를 접하며 이 결핍 상태가 점차 채워져 감을 느낀다. 니체가 “인간은 자기 운명이 자기를 어디로 더 데려갈지를 모를 때 가장 높이 솟는다”고 했던 바로 그 디오니소스적 고양의 황홀감을 맛보며 죽어간다. 따라서 원작의 죽음이 돌연사라면 영화의 죽음은 안락사이다. 전자가 비참한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행복한 죽음의 향을 피워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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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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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변화 없는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책상을 왜 항상 책상이라고 불러야하는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책상은 양탄자로, 양탄자는 옷장으로, 옷장은 신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방에 틀어박혀 모든 것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물과 언어의 짝짓기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는 공책에 자신이 바꾼 새로운 단어들을 적어놓고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며 차츰 원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옛날에 쓰던 원래의 언어를 대부분 잊어버리게 되어 자기 공책에서 원래의 단어를 찾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 남자는 다른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남자는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만든 셈이다. 노인은 외계인이 됐다.

 

중학생 시절 이 슬픈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공책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이 불쌍한 남자는 어떻게 될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모든 낱말을 바꾼 것이 그 남자 자신이며, 그이가 많은 것을 기억하려 노력할 것이지만, 기억이란 기록보다 불완전하고 미심쩍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터 빅셀의 단편집 속에는 사물의 이름을 바꾸는 남자 이외에도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하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확인한답시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사내, 세상을 등지고 수십 년 발명에 전념해서 완성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모든 단어를 ‘요도크’로 바꿔 부르게 된 할아버지. 정말 읽다 보면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소외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 속의 남자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를 연상시키는 점도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의 한없는 자유로움과 한없는 무의미함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에서 평소 감히 꿈꿔보지도 못했던 일탈을 실행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낯익은 이들 틈에 있어도 한없이 무의미하다. 그러면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한 때 우리의 대화를 끈끈하고 이끌어주던 종교적 믿음과 사상적 명분 등의 거대한 신념체계들은 허공으로 흩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나를 광고하고 나의 상품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나의 능력 있음과 나의 무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그리고 꾸준히 자본의 세계에 설득해서 그 세계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가 도태되는 것, 내가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이라는 잘 포장된 진실 속에서 이제 나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밤의 불안을 각종 자기개발서로 덮어가면서 이렇게 서서히 ‘나’라는 인간은 소모되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 모든 대화는 실없는 농담이거나 가벼운 잡담이다. 겉도는 대화, 체면치레인 몇 마디 말, 외로움을 고립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 끼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음 같은 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정도 ‘히키코모리’의 특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간결한 글이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함축적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언어로 택했을 뿐 언어의 굴레만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변화의 어려움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개혁의 어려움이다. 개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동참, 뚜렷한 방향제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개혁을 꿈꾼 사람은 외톨이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기존의 이름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사물들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이 명명식은 남자에게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옹알이를 하던 아이들이 한순간 말문을 트고 하나하나 단어를 익혀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을 짖지 않는다. 이처럼 책상이 반드시 '책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소통을 위한 사회적인 약속일 뿐이다.

 

사람들의 말을 그는 그 식대로 바꿔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소통조차도 불가능해지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침묵했고 그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둘째의 말 배우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옹알이하던 때의 갇히지 않았던 그 말들이 이제 딱딱한 형식과 약속 속에 갇히고 있다. 책상은 역시 책상일까.

 

낱말을 자기식대로 바꾸어버려 소통이 불가능해져버린 한 남자는 실은 오래전부터 이미 소통불가능의 상태였다.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자적 형태의 이웃들 틈으로 난 균열을, 꾸역꾸역 올라오는 단절의 감정을 밀봉하려고 서로를 향해 배시시 웃는 가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 터였다. 그래서 비록 그가 선택한 방법이 어리석기 그지없더라도 달라지기를 바랐고 이를 직접 행동으로 옮긴 이 회색빛 주인공에게 나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나만의 낱말을 만듦으로써 거짓 소통에서 멀어져보려 한 이 남자에게 어리석은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경외의 마음을 품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낱말을 자기 식으로 바꿔 부른 남자는 낱말이 가진 강제성을 알고 있었을까? 낱말은 나의 사유를 돕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나의 사유의 확장을 억압한다. 유교가 사회의 지배논리였던 시대에는 권력자에 의해 유교를 합리화하는 언어가 형성되고 널리 유포되었다. 일부종사니 상명하복이니 입신양명 등의 낱말이 그렇다. 물건을 만드는 기업인은 인간 욕망의 구조를 연구해 상품이 많이 팔릴만한 이름을 짓는다.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가는 인간의 욕망을 연구해 한 마디 슬로건을 만든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언어의 연구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포장되어 출시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 차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방금 했던 생각을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금 곱씹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성찰지능을 가졌다. 생각에 대해 생각하기, 느낌에 대해 느끼기.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 그런데 생각이 100% 타인에게 전달된다면 우리의 대화는 번복과 부정으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은 무릇 정리와 숙고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살짝 포장하여 완곡하게 표현하는 세련된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 의사소통의 불완전성에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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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서평단 모집 (2014.04.22~30)


─ "무엇을 사든 고장이 보장됩니다!"

 


올이 풀리지 않는 나일론 스타킹, 2500시간 사용 가능한 전구는 왜 사라졌을까?

새 컴퓨터 모델은 왜 호환이 잘되지 않을까? 아이팟 배터리 수명은 왜 18개월일까?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 눈부신 기술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물건들은 점점 더 빨리 고장 나는가?
‘계획적 진부화’ 개념을 통해 보는 자본주의 소비 사회의 진실

경영학에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란 용어가 있다. 기업이 내구 소비재의 대체 수요를 증대할 목적으로 제품을 계획적으로 진부화시키는 행동을 말한다. 진부화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 진부화란 기술적 진보로 인해 기존 설비가 구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옛날 청동기가 뗀석기를 대신하고, 증기 기관차가 마차를 대체한 것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심리적 진부화란 광고나 유행에 의해 제품을 구식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 경우 기존 제품과 새 제품의 차이는 겉모습, 즉 외양과 디자인의 차이, 심지어는 포장의 차이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요 주제인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애초 설계 시점부터 제품의 수명이 조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린터에는 인쇄 매수가 1만 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 칩이 삽입되어 있다. 1940년 듀폰사에서 출시된 스타킹은 올이 풀리지 않고 자동차 한 대를 끌 수 있을 만큼 튼튼했지만, 자외선 차단 첨가물의 양을 조절한 이후부터 여성들은 규칙적으로 새 스타킹을 구입하게 되었다.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 수명은 1500시간이었고, 1920년대 생산된 전구의 평균 수명은 무려 2500시간이었지만, 현재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제너럴 일렉트릭 등 기업 간 담합으로 1000시간 이하로 정해졌다. 수리가 불가능한 아이팟의 배터리가 제조 단계에서부터 이미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 가치의 쇠퇴를 대량 생산하는 ‘발전된’ 사회 일회용 제품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일회용 콘돔과 생리대, 그릇, 포장 등 각종 생활 용품뿐만 아니라 수리할 수 없는 휴대용 라디오, 3년 주기로 바꾸는 자동차, 유행에 따라 리모델링하는 건물, 유통 기한이 도입된 식료품, 정년퇴직 등 이제 제품 수명 단축의 논리가 산업 생산 전체를 지배한다. 경영학자 시어도어 레빗은 다윈의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product life cycle)’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냈다. 이렇게 계획적 진부화는 일종의 자연적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겐세일, 정기 세일, 가격 파괴, 가격 인하, 할인, 특가, 프로모션 행사 등과 동의어가 된 소비주의는 염가 처분, 가치 하락과 상실의 정신을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덕, 원칙, 이상의 상실”을 부추긴다. 

모든 
것은 판매 가능한 것이 되는 동시에 가치 하락을 겪는다. 이른바 ‘발전된’ 사회는 쇠퇴를 대량 생산한다. 다시 말해 가치의 상실,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 포함하는 일반화된 퇴락을 양산한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 벼랑 끝에 선 생태계,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향하여

평균 18개월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2002년 미국에서는 작동 가능한 휴대 전화 1억 3000만 대가 폐기 처분됐다. 전자 제품 폐기물의 처리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지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테면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셈이다.

 한편 제한된 자연 자원의 고갈과 관련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의 문제도 발생한다. 아프리카 콩고는 휴대 전화 생산에 필요한 콜탄 때문에 전쟁 중이다. 중국 서부에서 진행 중인 희토류 개발은 투르크계 주민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며, 나이지리아 니제르 삼각주의 석유 개발은 오고니 부족의 학살을 불러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신상’으로 교체하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는 이런 현상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휴대폰을 오래 사용하자는 구호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물건은 반드시 고장 나고 우리는 새 물건을 사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검소한 생활을 제안하는 차원을 넘어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책에서 라투슈는 검약과 자기 통제, 내구재의 공동 사용, 에너지 자립을 갖춘 전환 마을 운동, 비재생자원 관리를 위한 세계 공동 기구 설립 등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탈성장 방법론의 핵심은 우리의 상상력을 탈식민화하는 데 있다. 즉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까지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민음사) 차례

 

머리말

서론: 성장 중독

 

1 말과 사물_계획적 진부화의 정의와 성격

1 계획적 진부화란 무엇인가?

2 제품이 죽어야 소비 사회가 산다

 

2 계획적 진부화의 기원과 영역

1 계획적 진부화의 등장

1 인류학적 상수

2 전통이라는 장애물

3 위조의 시대

4 사고방식의 전환

 

2 계획적 진부화의 영역

1 ‘일회용 제품’의 등장

2 디트로이트 모델

3 진보적 진부화

4 유통 기한의 도래

5 음식의 진부화

 

3 계획적 진부화는 도덕적인가?

1 계획적 진부화의 사회적 역할

2 진부화와 윤리

3 인간의 진부화

 

4 계획적 진부화의 한계

1 소비자와 시민의 반응

2 진부화와 생태 위기

결론: 탈성장 혁명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낭비사회를 넘어서』 지은이 세르주 라투슈 Serge Latouche

1940년 프랑스의 항구 도시 반에서 태어났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파리 11대학 경제학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로, 발전 지상주의와 경제를 통한 세계 지배라는 관념을 통렬히 비판한다. 저서로『메가머신(La Megamachine)』(1995), 『탈성장에 걸다(Le Pari de la decroissance)』(2006), 『평화로운 탈성장 소론(Petit traite de la decroissance sereine)』(2007), 『소비 사회를 넘어서(Sortir de la societe de consommation)』(2010), 『검소한 풍요 사회를 향하여(Vers une societe d’abondance frugale)』(2011) 등 다수가 있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옮긴이 정기헌

파리 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란츠의 레퀴엠』, 『퀴르 강의 푸가』, 『프랑스는 몰락하는가』, 『해피스톤은 왜 토암바 섬에 갔을까』, 『리듬분석』 등 다수의 책을 옮겼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 『낭비 사회를 넘어서』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알라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와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4월 22일(수)~2014년 04월 30일(일) (8일간) 입니다.
셋, 총 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 발표일은 2014년 05월 01일 (목) 오후에 공개됩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5.07(수)~05.18(일) 11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낭비 사회를 넘어서』서평 발표 페이지에

개인블로그/알라딘 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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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2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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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6)

 

 

 

작은 아들은 결국 떠났다. 녀석의 말은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장차 내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주십시오.” 결국 녀석의 몫을 주었다. 떠나버렸다. 먼 타국으로. 멀리서 온 객들에게 간간이 아들의 소식을 듣는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창기와 몸을 섞는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단다. 타들어가는 이 마음, 큰 아들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큰 아들은 묵묵히 집안을 세우고 있다. 들에 나가 종일 일하고 돌아온다. 믿음직스런 녀석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내 마음을 모른다. 집 떠난 작은 놈을 향한 나의 간절한 마음을. 차라리 일을 팽개치고 미친 듯이 동생을 찾아 나서기를 내심 바랬다. 그 놈의 귀향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매일 밖으로 나갔다. 하염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8년

 

기적과도 같이 아들의 귀향 소식을 들었다. 아비에게 아들의 귀향, 그것은 기적이었다. 먼발치에서 거지꼬락서니를 하고 둘째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체면 무시하고 달려갔다. 어린 아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놈은 말했다.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대해 주세요.” 아비 마음 모르기는 첫째나, 둘째나 매 한가지다. 하인들에게 명했다. “어서 좋은 옷을 가져다가 내 아들에게 입히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줘라. 발에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잔치를 열자. 내 아들이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아들이 돌아왔단 말이다.”

 

하지만 이를 본 큰아들은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고 따랐지만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다”며 반발한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타이른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조금 각색했다. 신자들은 말할 것 없고 비신자들도 이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한량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 내용을 기초로 렘브란트는「탕자의 귀향」 이란 그림을 그렸다.

 

‘나는 탕자인가, 아님 그의 형?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면 대부분의 이들은 작은아들인 탕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였던 헨리 나우웬은 달랐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점점 변해갔다. “내가 바로 작은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한 폭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몇 날 며칠을 꼬박 그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고 고백한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1983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그는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만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탕자의 귀향」을 묵상했고,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봤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실물보다 크게 그린 거대한 「탕자의 귀향」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다. 그리고는 그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 책에 옮겼다.

 

그는 자식이 자기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내고, 작은아들의 낡은 샌들과 새 신발, 반지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 그리고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공간이 갖는 의미, 아버지와 큰아들의 닮은 외적 요소들이 암시하는 바 등을 세밀하게 하나씩 탐색해 이 책에 옮겼다.

 

그는 먼저 작은 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을, 다음엔 큰 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그 다음엔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이는 나우웬이 경험한 영적 여정의 단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째아들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던 첫째아들로, 그래서 질투와 분노, 완고한 태도,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에 사로잡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그 그림을 통해 결론적으로 깨닫게 된 세계는 내가 ‘탕자’라는 것, 그러면서 또 ‘큰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결국은 ‘아버지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길을 잃은 탕자라면, 그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력, 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을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가 이 그림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깊이 있게 감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에 빨려 들어갈 듯한 깊은 감상을 통해 열린 더욱 깊은 묵상은 놀라움을 줌과 동시에 감동과 큰 은혜를 선사한다.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탕자에서 큰아들의 모습으로 빗대는 순서를 거쳐, 끝내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징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우웬은 이보다 ‘더 큰 부르심’을 듣게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우리의 손이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우린 매일, 매시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힘겨운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다 쓰러진 자녀를 비웃지 않으신다. ‘귀향’의 조건으로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채 잘못을 고백하는 걸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는 한없는 관용과 용서로 자녀를 안타깝게 떠나보냈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반가이 집안으로 맞아들이신다.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늙은 아버지의 그 사랑. 고향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다. 조건을 뛰어넘는 그 사랑, 자격과 상관없이 받을 수 있는 그 사랑. 하늘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리라. 귀향길은 화해의 길이다. 사랑의 길이다.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아들로서 사랑을 받는 길. 그 길은 배움의 길이다. ‘아버지처럼 용서하고,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삶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선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일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여정에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참을성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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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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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과 만나는 일도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에 날려 온 홀씨가 바늘 끝에 내려앉는 말도 되지 않는, 그 기가 막힌 확률로 수많은 책 가운데 하나가 독자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과장이 심한 걸까.

 

저자의 이름을 다른 책에서 우연히 자주 보게 된다거나 번역을 맡은 사람을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되면 이내 그 책을 구하게 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는 온데간데없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나 성격을 가진 채로 묘사되고 있다. 아밀리아는 사팔뜨기 회색 눈에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이며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다. 라이먼은 작은 키에다가 폐병까지 지닌 곱추등이다. 마빈 메이시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포악한 성격 때문에 멋진 외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어느 날 사료 창고로 쓰이던 카페에 지저분한 몰골의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 후 카페는 새 단장을 하여 고단하고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안을 주고 마을에 유일한 사교 장소가 된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던 아밀리아는 라이먼에게 새 옷을 입히고 정성껏 보살펴주는데, 이 같은 아밀리아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아밀리아는 보잘것없는 라이먼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돈 밖에 모르던 아밀리아는 이전에 없던 활력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카페는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게 4년 동안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어느 날 나타난 마빈 메이시로 인해 카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의 전 남편이었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사랑했지만 아밀리아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고작 열흘간의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았다. 마빈 메이시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을 정도로 못된 짓만 하고 다녔으므로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마을은 긴장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외로운 사람이 바로 아밀리아다. 라이먼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마빈 메이시를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 예전처럼 홀로 외롭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마빈 메이시와 같은 공간에서 지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결과는 라이먼과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이나 그 둘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아밀리아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준 채로.

 

그 후 카페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가엾은 아밀리아는 슬픈 카페에 홀로 갇혔다. 스스로 목수에게 부탁해서 모든 문을 판자로 막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카페에서 예전의 평화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아무도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떠난 삭막한 아밀리아의 마음처럼 흉측하게 변한 카페로.

 

 

 

 

우리는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소설을 보면 그 모든 말에 수긍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서 세상이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멋대로 생기더라도 성격적으로 장애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의미 없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마술 같은 사랑의 힘을, 사람을 변하게 하는 사랑의 존재를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의 덧없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짧은 사랑이 지나가면 영원한 고통만 남는다는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사랑론을 인용해 본다.

 

“사랑이 신비로운 이유는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 경험이 아니라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요, 외로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일이다.”

 

故 장영희 교수가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고 표현했듯, 사랑에 고통 받는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다. 그러나 작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신장에서 나온 돌로 장식한 시곗줄을 선물하거나 콜라 병에 꽂아놓은 백합처럼 등장인물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5쪽)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슬픈 카페의 노래』는 사랑 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 받는 일보다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지라도 기꺼이 사랑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물음표 하나를 던져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은가?’라고.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사랑받을 수 없는 남자의 사랑이야기는 슬프기에, 그래서 더 아름다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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