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예술, 미적 상실의 시대

 

 

 

 

 

 

 

 

 

 

 

 

 

 

 

 

1962년, 앤디 워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화랑에서 캠벨 수프 깡통을 실크 스크린 방식으로 그린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길 건너 경쟁 갤러리는 실제 깡통을 쌓아놓고 “우리는 진짜를 단돈 29센트에 판다”는 문구로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아서 단토는 워홀의 깡통 그림을 웃으면서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비누상자인 브릴로 상자를 똑같이 만들어 전시한 워홀에 대해 아서 단토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철학적 지성을 가졌다고 말했으니까.

 

 

        

 

 

앤디 워홀  「캠벨 수프 깡통」 1962년 / 「브릴로 상자」 1964년

 

 

진품과 똑같이 여러 개 그린 캠벨 수프 깡통과 브릴로 상자의 모사본을 높이 쌓아서 슈퍼마켓의 창고처럼 전시한 브릴로 상자는 워홀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예술품이다. 그렇다면 왜 공장 사람들이 만든 캠벨 수프와 브릴로 상자는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단토는 ‘창작자의 의도’를 작품의 한 근거로서 제시한다. 예술가가 제목을 달아 작품으로 전시함으로써 어떤 물리적 대상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는 동시에 ‘의미론적 기능’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주관적 의도나 의미가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 주관적 의도가 객관적인 맥락 속에서 수용돼야 한다는 점을 단토는 강조한다. 그 ‘객관적 맥락’으로 단토가 지목하는 것이 예술계(예술가, 예술비평가 등), 예술사, 예술이론이다. 그것이 이해될 때, 수프 깡통 같은 평범한 사물이 예술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단토는 예술은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가 왔기 때문에 예술의 영역과 정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을 의미한다. 해방된 예술가들은 이제는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예술이 끝났다는 의미보다는 예술의 목적이 상실된 것이다. 어떤 양식이 어떤 양식보다 미적으로 낫다는 판단이 무의미해진다.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미술을 시각의 문제가 아닌 철학의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화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는다. 자신의 소박성과 고뇌, 철학을 조형언어인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화가들 스스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느꼈던 행복의 20세기는 지났다. 워홀의 선구적인 작업 때문에 이제 무엇이든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 그동안 고고한 예술의 산정에서만 놀던 예술이 일상생활로 하산한 격이다. 기존의 영역에서만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치기에는 한계가 왔을 뿐더러, 예술과 상품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가 됐다.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파괴된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로, 무엇이든 작품 대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Scene #2  예술은 죽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 1969년

 

 

영국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가 작년 5월 12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4240만 달러(1528억)에 낙찰됐다. 이 낙찰가는 2012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1990만 달러(1200억)에 팔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의 가격을 갱신한 것이라 한다.

 

 

 

 

 

 

 

 

 

 

 

 

 

 

 

 

인터넷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미술시장의 뉴스는 보통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과연 무엇이 이토록 가격을 폭등시키는 것일까? 영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인 매튜 키이란은 그의 저서 <예술과 그 가치>에서 이러한 질문에 하나의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예술작품이 실현할 수 있는 가치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치들이 미묘하고 복잡한 상호관계를 이루며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원본성, 일품성, 상상력, 독창성, 진실성, 도덕성 따위의 요인들이 예술의 가치를 만드는 다양한 요인들이며 결과적으로 인문학 이론에 정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가 인문학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런던이나 뉴욕에서 전해오는 작품가격의 고공행진 소식을 제대로 납득하기는 힘들다. 오늘날 예술의 가치는 인문학적 혹은 미학적 가치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지구촌 대부분의 국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된 것처럼 오늘날 현대미술의 현장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과 경제의 메커니즘이다.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장에 올라온 작품이 비싼 것은 상업적 메커니즘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경매회사라는 거대자본업체의 시스템은 작품에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강력한 장치가 된다.

 

그런데 그림 경매에 나서는 큰손들은 현대미술의 오묘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는 것일까? 그림을 자신의 미적 취향을 위한 컬렉션이 아니라 투자 대상으로 그림을 사들인다. 이들의 미적 기준은 그림 값이 얼마냐 오르느냐 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예술은 바로 무가치, 무의미, 비의미를 요구하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미 무가치한 데도 더욱 열렬하게 무가치를 지향한다. 일종의 반대추론을 이용한 교묘한 속임수다. ‘무가치하다’고 할수록 사람들은 그것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급스러운 미술관 갤러리의 분위기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포장하는 평론가들이 합세하면 대중은 주눅이 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갖게 된다. 이를 두고 조직적인 전문가 범죄라고 보드리야르는 일갈한다. 실제로 수백억, 수천억의 돈이 오간다.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뭔가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꽝인 것, 그러나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기에 모호하게 아이러니와 지적 유희를 방패삼아 자기유용성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을 보드리야르는 현대 예술의 운명적 귀착점으로 봤다. 종말의 시작을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등장한 60년대로 잡고 있다. 브릴로 박스는 캠벨 수프 깡통과 더불어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본격적으로 무너뜨린 작업이었다. 한마디로 ‘뭐든지 예술이 될 수 있는 예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신선한 예술은 이제는 일률적으로 돼 버린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워홀과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은 모방에 불과할 뿐이며 새롭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을 ‘암세포의 증식’으로 비유함으로서 ‘무가치’로 남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아서 예술은 죽는 것이다.” (보드리야르)

 

 

 

 Scene #3  예술가들은 우릴 보고 비웃지

 

 

 

 

 

 

 

 

 

 

 

 

 

 

 

현대미술의 무가치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몰래카메라 실험 하나 소개하겠다. 두 마리의 침팬지가 물감으로 마음대로 그리도록 한다. 침팬지가 마구 그린 그림 두 점을 가지고 부자 동네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이름은 <제3세계에서 온 미개인전>. 그림의 화가가 침팬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그림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재미있게도 관객들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봤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명망 있는 어느 주간지의 미술평론가는 ‘유럽 화가, 특히 말레비치와 미로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는 만족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 그림들을 감상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몰래카메라의 실험 결과를 통해서 우리, 심지어 미술평론가마저 현대미술은 난해하고, 보드리야르의 지적대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현대미술에 대해서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미술평론가들의 모습은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나체의 임금님이 착한 사람만 보이는 멋진 옷을 입었다고 말하는 신하와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술평론가들은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유머 작가 에프라임 키숀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서 이러한 평론과 알 수 없는 현대 예술들을 두고 통렬한 비판과 풍자를 던진다. 현대미술 비평가들은 천문학적인 작품가격과 알 수 없는 평론으로 관객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평론가들의 권위와 미술품시장에 많은 부분 좌우되는 현대미술의 기만성을 비판한다. 현재에 와서 현대 미술에서는 시선을 끌기 위한 의미 없는 기획들이 재생산될 뿐, 아름다움이란 도무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지속된 그의 현대미술 비판들을 통해서 그는 많은 ‘대중’들에게 여러 방면으로 지지를 받았지만 많은 관련 전문가들로부터 ‘예술 이해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예술을 모르는 속물’ 취급을 받아야 했다.

 

다시 몰래카메라 이야기를 들자면, 침팬지의 그림에 대해 ‘나는 저 그림이 무엇을 그렸는지 전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평가들이나 미술을 좀 안다는 고고한 사람들에게는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하하겠지만, 실상 지극히 당연한 생각인 것이다.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현대예술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겁에 질려서 “나는 전혀,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외칠 뿐이다.

 

책의 제목인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피카소가 자신의 유언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비웃었다는 가정에서 나왔다. 키숀에 따르면, 실제로 재능으로 충만했던 피카소는 대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저 뭔가 자극을 원하는 시대와 영합했을 뿐이고, 이 유언장에서 그러한 자신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그들이 나의 익살과 기지에 경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나의 익살과 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중략) 나는 단지 나의 시대를 이해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 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피카소,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중에서)

 

이 모호한 유언장을 피카소의 생애를 통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현재 피카소가 스스로 기대했던 것 그 이상, 혹은 뭔가 다른 것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미술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그림값과 이름값으로 재벌과 미술평론가들에 의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Scene #4  예술의 종말이 곧 예술의 민주주의?

 

이들이 공유하는 예술 개념과 예술 이론에 의해 작품이 해석되어지고 예술작품으로 지위를 얻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경계하게 되는 것은, 예술이 부와 고상함, 그리고 학식을 상징하는 차별화에 이용됨으로써 특정 집단, 특정 계급의 전유물로 독점화된 채 머무르는 것이다.

 

 

 

 

 

 

 

 

 

 

 

 

 

 

 

 

서평가 로쟈는 단토의 ‘예술의 종말’을 소개하는 글(‘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한겨레, 2008. 5.27)을 일상적인 사물이 예술작품이 되는 이 종말의 시기를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의미, 곧 예술의 완성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컨템퍼러리 미술이 워홀과 뒤샹 이후로 여전히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되고 있을 정도로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나 현대미술을 여전히 어렵게 생각하는 우리가 예술창작자가 되어서 ‘예술계’의 수용 범위로 진입되기에는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즉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민주주의 그리고 예술의 완성으로 이르지 못했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울지 몰라도 관객 또는 예비 예술창작자가 되기 위한 일반인들은 예술계가 만든 그들의 경계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오늘날의 예술은 완성되었다기보다는 예술가, 전문가 그리고 예술을 아는 척하는 엘리트들만 향유하는 반쪽자리에 불과하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모독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름다움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사라져 버리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직도 입을 열 엄두를 못하고 있는 이른바 교양을 지닌 식자층이다. (에프라임 키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169쪽)

 

단순히 미술작품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의 예술이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간의 삶과 정서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점점 더 알 수 없다고 느끼며 전문가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실로 비극적인 일이다.

 

단지 수십억을 호가하고 저명한 언론으로부터 극찬 받은 작품에 딱히 감동 받지 않더라도 부끄러워하거나 부족한 문화적 소양 탓을 할 필요는 없다. 진짜 부끄러워야 할 사람은 미술에 ‘미’자도 모르면서 돈으로 그림을 사들이는 재벌과 뭣도 모르면서 현학적인 문장만 늘어놓은 전문가들이다. 우리가 동시대의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예술의 종말’이다. 예술이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뻥이라서 예술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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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란 무엇인가 -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2014. 3.13 / 한길그레이트북스 인문학 특강 제6강 후기)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에서 박물관장 자크 소니에르는 피습당해 숨지기 직전 자신의 몸을 ‘비트루비우스의 비례도’처럼 눕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라는 암호다.

 

 

 

 

비트루비우스는 기원전 1세기의 건축가로 ‘자연이 빚은 인체비례’를 강조했다. 이를 재발견해 다빈치가 그린 그 비례도에는 가장 아름다운 체형은 ‘8등신’이라는 내용이 있다. 밀로의 비너스상은 대표적인 8등신 조각상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들은 미(美)의 표상으로서 수천 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 이러한 조각상에 대해 어떻게 수많은 사람이 문화와 언어 및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면서도 유사한 공감대로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을 가리켜 고대 그리스인들은 ‘칼로스(kalos)’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름다운 것이 곧 선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선한 미’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이런 고대 그리스의 미적 이상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폴리클레이토스의 ‘카논’(canon)’이다. 조각가인 그는 황금 비율(1:1.618)을 인체 조각에 적용했다.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비율을 '황금비'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정오각형의 별을 통해 설명했다. 정오각형에서 짧은 변과 긴 변의 길이의 비는 5:8로 약 1:1.618의 비율인데, 이 비율이 가장 아름답고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이러한 미의 이상 혹은 비례가 유일한 미의 가치 기준인가. 그것은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 기준이 민족이나 지역,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까다롭다(non so she, 말할 수 없는 것). 미학사를 보면 미의 정의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가령 중세 때 미는 현세보다 내세에 맞춰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부터 미는 대체로 예쁜 것이었고, 고대 그리스 예술을 동경하기도 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접어들면 이탈리아에서의 원근법 발견이나 새로운 회화술의 확산, 피렌체의 수사, 사보나롤라에 의해 조장된 신비주의적 분위기 등의 영향으로 미에 대한 개념이 크게 바뀌게 된다. 당시의 미는 완벽한 수준으로 확인된 규칙에 따라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로 간주한다. 유럽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는 르네상스기의 세밀화, 인물화는 이와 같은 미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르네상스기는 후대의 미가 어떻게 전개돼 갈지를 알려주는 데 손색이 없다. 엄격한 비례와 균형, 그리고 세밀한 묘사에 바탕을 둔 르네상스기의 미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중심에서 이탈해 불안정하고 충격적인 모습을 지닌 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접어들게 되면 미는 미학적 주관주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흄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는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다. 미는 오로지 사물을 응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모든 정신은 미를 서로 다르게 지각한다.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부분을 다른 사람은 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각 개인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에 만족해야 한다.” 이후 인상파 화가들은 하루 중 어떤 시간에 본 풍경, 해안선, 인물의 인상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데로 그림으로써 자신의 그림 속에 영원한 무엇인가를 표현하기를 바라게 된다.
 
19세기로 오면 미적 범주에 ‘추’(醜)도 포함된다. 이런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들어설수록 심해진다. 그만큼 미의식이 부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예술의 미는 너무 분화돼 심지어 미 없이도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이 내 느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의 상대성이 이를 말해준다. 가령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목이 길수록 미인으로 간주해서 심지어 30cm나 되는 긴 목을 가진 여성이 있다. 또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 앞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부인이 죽어 슬픈 사람의 눈에는 그 풍경이 아름답게 보일 리 만무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도 느끼는 것, 즉 객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나와 대상은 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칸트는 이것을 ‘주관적 일반성’이라고 표현했다. 미는 내가 느끼는 것(주관적)이면서 다른 사람들도 느낀다고 생각하는(객관적) 것이다. 따라서 미는 감각과 사고, 개인과 사회를 잇는 일이 된다. 이 매개 속에서 미는 현실을 성찰한다.

 

이러한 예들은 미학적으로 말하면 미적 향수 혹은 미적 판단과 관련된다. 칸트는 인간이 미를 판정하는 능력, 즉 취미 판단을 다룬 바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 판단이 보편타당한 근거를 어떻게 지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취미 판단은 미적이다”라면서 취미 판단은 ‘쾌 혹은 불쾌의 감정’에 관련되며,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구상력이라고 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칸트가 말한 무관심성의 개념이다. 즉 어떤 대상이 아름다운가 아닌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감각적인 욕구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나오는 그림의 떡(畵中之餠)처럼, 그림을 보면서 그림 속에 들어 있는 떡을 보고 군침을 흘리면 제대로 된 감상은 어렵다. 이때 실제적인 욕구를 억누르고 대상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감각만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자신과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고, 모든 사람이 공유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에는 이런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감각은 사고되지 않고, 외양은 내면과 겉돌기 때문이다. 예쁘고 젊고 날씬하고 섹시한 것이 미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회는 가련하다. 가는 허리와 쌍꺼풀진 눈만이 미의 표본이라 불린다면, 우리는 이 표본을 누가 만들어내는지 물어봐야 한다. 유행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을 자기 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미는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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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은행나무 그늘 속의 침묵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를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트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침묵의 거리에서』1권, ‘작가의 말’ 중에서, 7쪽)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다 보면 가면 뒤에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들킨 것처럼 뜨끔한 경우가 있다.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결정적인 순간에 직면하면 겉과 속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그것이 독자의 내면으로까지 파고들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는 책 표지에 광고 등을 위해 덧붙이는 띠지에 “오쿠다 히데오의 새로운 최고 걸작, 탄생”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글쎄. 사실 히데오의 대표작 『공중 그네』를 포함해서 그가 쓴 소설들을 읽지 않아서 이번 신작이 걸작의 수준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띠지가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의 무게감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그래도 ‘종횡무진하는 이야기’는 작가의 말처럼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모든 정황에 대해서 흑백을 가를 수 없게 만든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했지만, 비극적인 색채를 띠는 일반적인 학교 왕따를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달리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구분하지 않는다.

 

한여름, 학교에서 벌어진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단순한 사고사나 자살인 줄 알았던 죽음에 잔혹한 학교 폭력이 결부됐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학교, 유가족, 가해 학생, 경찰, 법조계, 언론이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중학교에서 열세 살 학생이 죽음을 맞는다. 2층 높이의 운동부실 지붕에서 학교의 자랑인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 속 도랑에 떨어져 사망한 나구라 유이치.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당황한 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 아이를 찾아 나선 교사가 소년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다. 최초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단순한 실족 사고인지 사춘기 소년의 자살인지 아니면 훨씬 무거운 비밀이 숨어 있는 사건인지 수사에 나선 경찰과 학생을 보호하려는 학교의 의견이 갈린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유가족, 학교 폭력 주도자로 지목된 자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가해자 가족, 끝내 비밀을 밝히지 않으려 애쓰는 중학생들, 전대미문의 스캔들에 당황하는 교사들, 흉악한 소년 범죄를 밝혀내려는 말단 형사, 처음으로 만난 호외 앞에서 기자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신참 기자, 잠을 줄이면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젊은 검사,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입을 다무는 마을 주민까지. 말없이 죽은 소년의 시신 앞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페이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가운데 어른도 아이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는 굳게 입을 다문다. 모든 진실은 소년의 죽음을 지켜본 교정의 은행나무 그늘 속에 침묵할 뿐이다.

 

 

 

 Scene #2  ‘폭력에 침묵하는 학교’, 학생들도 교사도 두렵다

 

 

 

 

 

 

 

 

 

 

 

 

 

 

초동(初動). 맨 처음에 하는 행동이다. 어떤 지역에 지진이 일어날 때, 큰 진동에 앞서 나타나는 작은 진동을 뜻하기도 한다. 작은 것부터 살피지 못하면 크게 터진 후 대책은 온전하게 받아낸 재앙에 대한 피해 수습뿐이다. 그 여파가 한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면 복원 시간도, 후유증도 길고 암울하다.

 

폭력 왕따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가해자, 피해자, 침묵자만이 있을 뿐 친구도 교사도 구세주가 돼주지 못한다. 자살하고 정신치료를 받는 끔찍한 일들이 사랑과 우정, 우리를 배워야 하는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히데오의 소설에 나오는 ‘침묵의 학교’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학교는 오래전부터 아파왔다. 또 정해진 시간대로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학교의 일상은 무척 분주하다. 학생들은 학교폭력, 왕따, 성적 경쟁에 시달리며 아프고, 교사들은 공문 폭탄에 치여 학생들 한 명 한 명에 관심을 가질 여유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다. 봄이 왔지만 봄을 느끼고 음미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는 지금 '침묵의 봄'이다.

 

이런 기막힌 현실 속에서도 남몰래 아픔을 겪고 있는 학생들과 무척 바쁜 교사들은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고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아니 심각한 갈등 속에 방황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숨 돌릴 틈 없이 갈등 관계가 이어진다. 이러한 일상 중에 오랫동안 내부에서 조용히 곪고 있던 왕따, 폭력 문제가 터진다면 학교 전체가 사건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된다.

 

교사들은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고 말하며, 사건이 발생하면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고 먼저 생각한다고 말한다. (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87쪽)

 

그렇다고 교사들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알면서도 모른 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를 뿐이다. 교사가 몸이 열 개가 아닌 이상 수많은 학생을 일일이 관리하고 보호해야 하는 책무를 부담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교사가 학생들 간의 왕따, 폭력 사건의 조짐을 알고 있다고 해도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학생들까지 끝가지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면 교사 입장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세우고 싶어도 해결하기가 난감해진다. 학교 폭력 문제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커지고 그동안 묵인되었던 전체적 상황이 알려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세운다. 그야말로 교사는 학생들이 조립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따, 학교 폭력 문제가 일파만파 학교 외부까지 알려지게 되면 사건에 휘말린 폭력의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학생뿐만 아니라 이들을 담당하는 교사도 괴롭다. 아니, 누구에게 쉽게 말하기 힘들 정도로 무력감을 느낀다. 가해 학생만 학교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가 이전에 나온 학교 폭력, 왕따를 다룬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입시제도 같은 구조적 억압이 작동되어 스트레스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가득한 학교현장을 묘사하지 않은 것이다. 폭력 사건의 중심이나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를 직접적으로 표출했을 법한데 놀랍게도 그런 묘사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히데오가 입시위주 교육경쟁에서 벗어난 현실과 동떨어진 학교를 애초부터 설정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히데오가 묘사한 학교 폭력은 학생들, 특히 어른처럼 행동하고 싶고 자신보다 약한 학생 앞에서 ‘힘’으로 우위에 서고 싶은 남학생들의 분별력 없는 감정적 표출이다.

 

나구라 유이치는 한눈에도 왕따를 당할 만한 아이였다. 몸집도 작은 데다, 부잣집 아들에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침묵의 거리에서』1권 57쪽)

 

나구라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품이 너무나도 유약한데다가 고지식할 정도로 답답해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친구들의 심한 폭력에 시달리면 허약하게 보이면서도 또래 여자나 1학년 후배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이중적인 면도 있다. 특히 테니스 능력이 한참 부족한데도 테니스부 훈련에 매일 꼬박꼬박 나오면 무조건 값비싼 테니스 라켓을 챙겨온다. 또래친구들이나 테니스부 1학년 후배, 3학년 선배 그리고 항상 약한 친구를 괴롭히고 부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일진들의 눈에는 나구라의 모습이 유난히 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생들은 나구라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구라가 반 아이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는 왕따가 된 것은 불쌍하지만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장례식 때 분위기에 휩쓸려 눈물을 흘린 일부 여학생들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침묵의 거리에서』2권 292쪽) 나구라는 내성적이면서도 착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구라가 매일 왕따와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 주변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방관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에 반해 가해자로 지목된 네 명 가운데 단짝인 사카이와 이치카와는 또래는 물론 교사들로부터도 신망이 두터운 학생들이다. 심지어 사카이는 3학년 일진들에게서 나구라를 지켜주려고까지 했다. 열세 살의 중학생은 왕따, 폭력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막상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면 옮고 나쁨을 구분하는 사리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처음에 나구라를 지켜준 사카이와 이치카와는 또래집단 내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왕따, 폭력 분위기에 동조한 것이다.

 

학교 입시제도에 의한 분노만이 학교폭력의 원인이 아니다. 또래집단에서 공통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감정적 분노도 무시할 수 없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왕따, 폭력이 단순히 가벼운 장난처럼 여길 수도 있어도 아직은 판단력이 미숙하고, 폭력에 무덤덤하다. 자신보다 약하고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한 학생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나무라는 착한지 나쁜지 알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교사에게는 나무라 같은 학생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조용하고 ‘착한 학생’일 것이다. 그러나 엄기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착한 학생’ 나무라는 어떤 학생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텅 빈 기표’이며 투명인간과 같은 ‘노바디’(Nobody)다. 학생들에게도 대면하고 싶지 않은 ‘노바디’이고, 교사들의 눈에도 띄지 않는 조용한 ‘노바디’인 것이다. 이런 학교의 ‘노바디’는 학교의 적극적인 관리 대상이 되는 순간, 언제 사고칠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구라는 학교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보잘 것 없는’(Nobody) 학생이었다. 그냥 학생들 사이에서 괴롭히고, 놀리는데 적합한 관심 대상이었다. 이 ‘텅 빈 기표’는 죽어서도 ‘노바디’였다. 학교 폭력에 대한 기나긴 침묵 때문에 비밀 속에 묻힐 뻔한 죽음의 진상이 완전히 드러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사람 아니 전교생의 침묵이 사건 결과 하나에 촉각을 곤두서는 학교와 가해 학생 부모, 나구라의 부모 사이에 서로 불신만 더욱 키우고 말았다.

 

 

 

 Scene #3  신뢰와 우정이 존립 불가능한 텅 빈 폐허     

 

사회는 수업 붕괴와 학교 폭력의 원인을 교사의 무책임과 무능력이라고 말한다. 교직이라는 ‘철 밥그릇’에 안주해 열정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교사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폭력사건이 터지고 나면 폭력 가해 학생 부모들은 말한다. 학생들이 처한 상황에 교사들이 무감각하고 무책임하다고.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학교 폭력 문제의 원인을 교사의 책임으로만 전적으로 돌릴 수 없다. 학생들은 교사와 관계 맺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고 지적한다. 학생들에게 다가가려 애를 써도 “당신이라고 꼰대가 아니겠냐?”고 밀쳐낸다. 그리고 히데오의 소설에 나오는 학생들처럼 한 사람이라도 진실을 언급하지 않는 이상 폭력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학교 폭력 사건 이후 학교의 대책에 폭력 가해, 피해 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불신만 가득할 뿐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들의 부모는 모임을 조직해 대응에 나서고 나구라의 부모와 친척은 학교를 상대로 진실 규명을 요구한다. 가해 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불미스러운 폭력 사건에 귀한 자식이 연루되는 것을 꺼린다. 피해 학생 부모 입장은 학교의 대책 방안을 강구하는 태도를 믿지 못한다. 가해 학생이든 피해 학생이든 이런 부모 중에는 자기 자식만 눈에 보이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른다.

 

나구라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 말처럼, 당연히 아들이 인기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침묵의 거리에서』2권 258쪽)

 

 

 

 

 

 

 

 

 

 

 

 

 

 

 

폭력은 밖으로 향하기도 하지만 안으로도 향한다. 똑같이 실연을 겪었는데 누구는 상대방을 찌르지만 또 누구는 자신을 찌른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밖으로 향하는 폭력뿐이다. 사실, 많은 아이들은 자기 내부를 향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을 혼자 감당하면서 내상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 (중략) 아이들은 이 끔찍한 폭력과 스트레스의 충격을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37~38쪽) 

 

학교는 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고통과 상처를 나누기보단 단절하고 대립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심지어 사건의 규모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으려고 학생들의 침묵은 그대로 은폐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폭력의 중심 한가운데에 있는 가해, 피해 학생 그리고 교사는 서로 고립할 수밖에 없다.

 

친구가 죽었는데도 숨죽여야 하는 학교, 제대로 된 애도를 하지 않는 학교, 가해자를 몰아내고 나쁜 기억을 황급히 지우려는 학교의 모습 곳곳에 폭력이 도사린다. 학생들이 죽음으로써 폭로하는 것은 학교 공동체의 침묵에서 기인한 무관심이다. 폭력이 만연하면서도 침묵하는 학교는 신뢰와 우정이 존립 불가능한 텅 빈 폐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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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3-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폭력에서 피해 학생 가족들이 제일 힘든 것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쉬쉬하려고 가해학생과 교사 학교 측이 똘똘 뭉치는 경우입니다.그래서 몇 년 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에서도 피해 학부모(이 사람도 현직 교사더군요)는 학교와 담임교사를 고발했지요.그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맞아...교사 자녀들도 왕따되지 말라는 법이 없겠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꼈지요.

cyrus 2014-03-12 21:39   좋아요 0 | URL
히데오의 소설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교사나 가해학생 부모 캐릭터는 나오지 않았어요. 다만 고슴도치가 제 새끼 이뻐한다고 가해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가해자의 위치로 낙인 찍히지 않으려고 피해 학생 부모와 학교 측과 맞서려는(?) 모습이 있을 것 같아요.
 

 

 

 

 

 

 

 

 

 

 

 

 

 

 

 

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내다본 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었다. 괜히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였을까? 문득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네는 살면서 사랑을 많이 해봤나?”

 

원칙주의자로 일만 알고 살아온 항공 책임자 리비에르는 상대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는다. “자네도 나랑 같군. 시간이 없었단 말이지.” 이 작품 속에서 리비에르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됐을 것이다.

 

그래, 그도 나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들을 언젠가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미뤄 왔을 것이다. 그러나 늙어서 삶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그런 여유를 얻는다면 그때는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도 있는데.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난 그녀의 미소 때문에, 그녀의 모습 때문에,

그녀의 상냥한 말씨 때문에, 그녀의 사고방식이

나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언젠가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런 것들을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맺은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 모르니,

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그대의 애정 어린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도 마세요. 그대의 위로를 오래 받은 나의 사랑이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로써 그대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그러니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대가 영원한 사랑으로 나는 늘 사랑할 수 있도록.

 

 

-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20쪽) - 

 

 

이 시를 쓴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8세 때 호메로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읽고, 14세 때 서사시 『마라톤의 전쟁』을 쓸 만큼 조숙한 소녀였다. 그러나 소아마비에 척추병, 동맥파열 등이 겹쳐 늘 자리에 누워 지내야 했다. 유일한 즐거움은 독서와 시 쓰기. 그녀가 두 권의 시집을 펴낸 뒤,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당신의 시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시집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당신을.’ 여섯 살 연하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보낸 연서였다.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이들은 주위의 반대 때문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가서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그곳에서 사랑의 힘으로 병을 극복한 그녀는 네 번의 유산 끝에 훗날 조각가로 활약하는 아들까지 낳았다. 15년 동안 ‘옛 슬픔에 쏟았던 정열’과 ‘어릴 적 믿음’을 아우르는 행복 속에 살다가 남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헤아려 보죠. 존재와 은총을 베푸는

이상적인 존재의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느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햇빛과 촛불 곁에서,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용한 필요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이, 나는 그대를 자유로이 사랑해요.

사람들이 칭찬으로부터 돌아서듯이, 나는 그대를 순수하게 사랑해요.

옛날에 내가 슬픔에 쏟았던 정열로, 내 어린 시절의 신앙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가 잃어버린 성자들과 함께

내가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랑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 평생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오로지 그대를 더욱더 사랑할 거예요.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58쪽)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는 그녀가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온전히 사랑한 남편에게 바친 연애시다. 병석에 누워 지내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준 남편을 통해 ‘잃은 줄만 여겼던’ 열정을 되찾고 한없이 큰 사랑 속에서 삶을 마감한 그녀의 생애를 생각하면 더욱 애틋하다.

 

 

 

 

 

 

 

 

 

 

 

 

 

 

 

사랑은 꼭 이렇게 해피엔드로 끝나지 않더라도 아름답다. 『시라노』는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사랑처럼 말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무적의 검술가인 시라노는 재기 넘치는 록산느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만 흉물스러운 코를 가진 추남이라는 생각에 선뜻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못한다. 반면 록산느는 그저 잘생겼을 뿐인 크리스티앙에게 반한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써주고, 그의 영혼을 담아낸 편지 덕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곧 전쟁터에 나가 죽고 록산은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시라노는 그 후 14년간 매주 록산을 찾아가 위로해준다. 괴한의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은 날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록산느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준다. “록산느, 부디 안녕히, 난 곧 죽을 것이오!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지금도, 저 세상에 가서도 당신을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당신을….”

 

어느새 황혼의 어둠이 짙게 깔리지만 시라노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간다. 록산느는 시라노가 지켜 왔던 숭고한 침묵의 진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죠, 이렇게 어두운데? 아! 너무나 많은 것들이 죽고 태어나는군요! 왜 지난 14년 동안 입을 다무셨나요? 이 편지에 남은 이 눈물은 당신이 흘린 것이었나요?”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항상 너무 늦게 온다. 시라노는 칼을 치켜든 채 죽음의 여신을 향해 마지막 대사를 외친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고?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늘 성공할 거라는 희망으로 싸우는 건 아냐! 헛된 명분을 위해 의미 없는 싸움을 해왔으니까!”

 

에드몽 로스탕은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이 주인공에게 기형적으로 거대한 코라는 외적 장애를 준 대신 더욱 헌신적인 사랑을 구현토록 했다. 게다가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당당한 정신은 시라노를 더욱 멋진 인물로 만들어 준다. 처음부터 록산느가 사랑했던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고귀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에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라는 구절처럼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절대적 사랑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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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도 코가 큰 것이 컴플렉스였다고 하더라구요.
시도 잘 쓰고, 칼도 잘 쓰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니~ 부럽네요.
저도 한때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부질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4-03-05 21:52   좋아요 0 | URL
저도 건강을 위해서 운동 하나쯤은 해봐야하는데.. 엄청 돌아다니면서 사람 만나는 것은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몸 움직이는 운동은 하기 싫은지 모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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