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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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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처음엔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 보도를 전해 듣긴 했어도 대단한 사고가 아니라는 공식 발표가 곧바로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들려온 소문에 따르면 일대는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이 병원에 수용된 아이들만 오늘도 벌써 오전 중에만 일곱 명이 죽었다. 대체 오늘 하루 동안에 몇 명의 아이들이 시체 처리실로 보내질 것인가.” (117쪽)

 

1986년 4월 26일, 당시 소련이었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원자로가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방사선 피폭 때문에 56명이 사망했다. 고도 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은 20만 명. 이 중 2만 5000명 정도가 사망한 걸로 알려졌지만, 그린피스는 이 사건 때문에 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집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뒤에 회고하기를 체르노빌 사고 수습 비용이 소련 1년 예산과 맞먹었으며, 그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도 언급할 정도니 사고의 피해 정도는 실로 엄청나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정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최고 등급인 레벨 7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양으로는 일단락 난 것처럼 보이는 체르노빌과 달리, 후쿠시마 사태는 진행 중이다. 지금 2년 전 그 때의 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남긴 위험한 흔적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걱정해야 한다. ‘등급’이 모자랄지도 모르는 이 사태야말로, 현대 문명을 운용하는 인간들의 위기 감지 능력이 얼마만큼 경화되었는지를 증명한다.

 

문제는 방사능의 흔적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그 흔적을 지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출된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 없는 듯 우리 안에 존재하는 적.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에 침투하고 그 없는 것에 DNA 구조가 바뀐다. 그것은 인류의 그늘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소설로 형상화한 일본 작가 히로세 다카시의 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보면 그 그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하다. 원자력 발전소 간부인 아버지 안드레이는 사고 직후 결사대의 일원으로 뽑혀 발전소 뒤처리 작업 중에 사망해 영웅 칭호를 받는다. 소설은 안드레이의 아내 타냐, 그리고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가 사고를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당국에 의해 아무런 보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격리 수용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방사능 피폭자의 주검은 참혹하게 묘사되어 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참상의 피해를 실감나게 그려낸 나카자와 케이지의 만화 『맨발의 겐』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그녀(타냐)가 내민 팔에는 이네사보다 어린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안겨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머리카락, 얼굴 전체에 뒤덮여 부풀어 오른 검붉은 반점 무늬들이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최후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까지 제 손으로 쥐어뜯은 손톱자국이 무수하게 남아 있었다.”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천재지변이나 폭격에 약하다는 점을 위험요인으로 든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핵발전소는 곧바로 핵폭탄이 된다는 것이다. 방사능 물질은 냄새도 색깔도 없지만 한 번 누출될 경우 대량의 치명적인 피해를 낳을 뿐 아니라 후유증 또한 극심하다.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났고, 체르노빌의 경우 러시아 등지에서 무려 30만 명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그 외에도 핵폐기물의 안전한 저장과 처리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어려우며, 온배수로 인한 열 오염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전 세계의 반핵 평화 운동가들의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체르노빌 이후 전 세계의 핵발전소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났다. 그 와중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일본 정부의 대책 마련은 뒷북이다. 재미있게도 옆에 있는 한국 정부 역시 일본 정부의 모습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오늘 국립수산과학원은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가 우리나라 바다에 유입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의 발표만으로 방사능에 노출되기 쉬운 우리나라는 과연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오염수가 유입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오염수가 남아있는 해역에서 자란 물고기들이 우리나라 연근해로 유입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보도의 진실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심은 더욱 커져만 갈 뿐이다.

 

히로세 다카시의 책은 쉽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이 쉬운 이유는 전문가들이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원전산업을 장악한 독점기업과 그들을 비호하는 국가는 대중이 원전의 악취 나는 비밀에 접근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때 당근을 받아먹은 전문가들은 원전산업의 훌륭한 방호벽이다. 더 재미난 것은, 전문가들조차 원전 사고가 추후에 확대될 피해의 정도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점. 체르노빌의 경우 국가는 피해자들을 분산시키고 의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림으로써 원전 사고와의 관계성을 영영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핵과의 싸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지구를 리셋(Reset)하는 공포 앞에서 인류 문명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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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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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한 청년이 온몸에 석유를 뿌렸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채 달려가며 외쳤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고통과 진실의 절규였다. 몇 시간 뒤 작고 초라한 주검이 덩그러니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기적인 셈에 골몰하던 머리들, 따뜻한 지붕 아래 안온하게 잠자던 가슴들, 빈곤은 오로지 게으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마음들 곳곳에 불꽃이 움트더니 이내 활활 큰불로 번져 갔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죽은 청년 노동자의 삶은 그렇게 불씨가 되어 마침내 노동 해방의 거대한 불길이 된 것이다.

 

전태일.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그는 1970년 11월 13일, 스물두 살의 젊음을 던지며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살인적인 작업 환경과 형편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며 죽어 가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구원의 목소리였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외면했거나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반성과 눈뜸의 쇠망치였던 것이다. 지금도 서울 도심의 자연을 소생시킨 청계천에 전태일의 뜨거운 마음은 다시 태어나 세상을 밝히고 있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옆 버들다리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전태일 동상.

 

오늘은 8월 26일. 전태일이 태어난 날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누려야 할 세 가지 큰 권리’를 외치며 자신이 읽고 있던 근로기준법과 함께 한 줌 재가 된 그 겨울날만 기억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권리 투쟁의 흔적은 서울 평화시장에 우뚝 서 있지만 본적은 대구 출신이다. (신기하게도 전태일의 본적과 생일은 나랑 똑같다) 봉제공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에서 잠시나마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전태일은 진정 공부하기를 좋아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대구에서 잠시 공민학교(집안 사정으로 인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남대문초등학교를 1년 남짓,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몇 달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지만 학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그 때의 기억은 전태일이 남긴 수기 중에서 소년의 감성의 느껴질 정도로 해맑기만 하다. 22년이라는 짧은 생애동안 전태일에게 이렇게 행복했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아홉 번째 서브까지 성공시키고 게임이 끝났습니다. 시합장엔 요란한 박수갈채와 승리의 개가가 퍼지고 나는 일약 오늘 이 게임에서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55쪽)

 

그는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며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자신의 배고픔보다 동생들의 배고픔을 더 아파했다. 가난 때문에 또래들처럼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던 전태일은 이때부터 자신의 여린 마음으로 스며드는 가난에 의한 고통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가고 기억하기 위해 흔적을 더듬어야 할 전태일의 고향은 너무나도 조용하기만 하다. 이러다가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 흘린 소년 전태일의 눈물마저 잊을까봐 걱정된다.

 

 

 

 ♣ ‘똑똑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바보’가 되다

 

전태일의 삶은 정말 뼛속깊이 가난했다. ‘밑바닥에서’.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 시작한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전태일은 서울과 대구 등을 오가며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궁핍하기만 한 현실이 싫어 부산, 서울, 대구를 오가며 전전하지만 어디를 가도 배를 곯는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담배꽁초 줍기, 아이스케이크 장사, 우산장사, 손수레 뒤밀이 등... 그 시대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이란 일은 다 하며 눈 붙일 새 없이 열심히 살았건만 가난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재봉틀 일을 배운 전태일은 열일곱 나이에 평화시장에 위치한 봉제공장의 시다(견습공)로 취직했다. 재봉틀사와 재단 보조를 거쳐 드디어 재단사가 됐다. 그러나 봉제공장에서 나름 높은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재단사가 되어도 노동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휴식 없이 장시간 노동해서 그의 손에 쥐어진 돈은 쥐꼬리만 했다.

 

실밥과 먼지, 소음이 가득하고, ‘햇빛을 잘 못 보는’ 공장. 어리게는 12살부터 시작하는 시다들과 19살부터 시작하는 미싱사들은 하루 14시간을 일을 하고 한 달에 두 번 쉬었다. 그러고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거나 사먹기가 어려웠다. 일하다가 병을 얻으면 치료가 아니라 해고를 당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주인 있는 개보다 못한’ 이들의 현실을 지켜보며 조금씩 분노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전태일은 순진했고 그런 그가 생각했던 해결책은 그 스스로 모범이 되는 재단사가 되어 여공들을 살피어주는 것이었다. 본인 역시 형편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도봉산 기슭에 살던 전태일은 버스 요금으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걸어 다녔다. 이따금 통금시간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가진 것도 없는 그가 수백 번 호의를 베풀어봤자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손바닥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거세게 밀려오는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 애쓰는 꼴이었다. 작은 물고기가 아무리 애를 써봤자 거대한 물결은 움찔거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스스로 거센 물살에 밀려 한없이 떠내려갈 뿐이다. 그는 재단사가 되면 업주와 협의해 여공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화’로 근로조건을 개선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아버지에게서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전해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이냐? (전태일의 수기에서, 204쪽)

 

기업주들의 횡포 탓에 모범 재단사로서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좌절한다. 그런 그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다시 희망을 품게 되고 환희와 희열까지 느낀다. 법적으로 자신들의 노동시간과 휴일 시간, 건강 지침이 마련돼 있다는 사실, 태일이 꿈꾸던 작업 환경이 꿈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는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6개월 치 월급에 달하는 책을 사 밤새 읽고 또 읽는다.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 밤새 읽어도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지만 근로기준법 조문을 해석하는 게 유일한 하루의 낙이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며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공장을 만들려는 사업계획을 세웠다. 실천방법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는 1970년 3월 17일 쓴 글에서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 중에도 나의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될(댈) 만한 사람도 없다”“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할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의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라고 적었다. 같은 달 24일 한 일간지에 실린 실명자에 대한 기사를 보고 당사자에게 “저의 한쪽 눈을 김형 께 드리겠습니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생각이 맞는 재단사를 모아 ‘바보회’를 결성하기도 하고, 노동청에 건의를 하며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동료 재단사들을 설득해 모임을 만들어나가기도 했지만 번번이 부(富)한 환경의 배부른 자들에게 기만당해야 했다.

 

반복해서 그려지는 태일의 좌절은 그가 왜 ‘오직 불타는 육신의 항의’로만 투쟁이 가능하다고 결정을 내렸는지를 설명해준다. 평화시장의 실상을 언론에 고발하는 데까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그는 결심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의 ‘호소’에 그쳐서는 안 되겠다고. 진정이니 호소니 청원이니 건의니 하는 따위와 근본적으로 다른 데모를 시작한 그는 가장 사랑했기에 가장 배신당했다 느끼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바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품 안에 안은 채 불타올랐다.

 

 

 

 ♣ 친구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전태일의 유서 중에서, 31쪽)

 

 

전태일이 산화한 지 65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낸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대중과 여론의 냉소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개정판을 거듭하여 꾸준히 나올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운동가 이전에 전태일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어린 소녀들이 빛이 들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각성제를 먹어가며 장기간 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것에서 시작한 그의 노동 운동은, 그 어떤 노동 운동보다 순수하고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125쪽) 전태일의 수기는 그의 정신이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를 웅변한다.

 

전태일의 죽음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가 하루하루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투쟁했던 22년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억압과 착취의 관계가 이어진다한들 ‘인간 선언’이 되고자 한 그의 존재를 잊어선 안 된다.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을 아는 것이 죽음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가 그토록 비장해지기까지 어떠한 서러움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왔는지, 한낱 개인에 불과한 그가 뿌리까지 썩어있는 사회를 마주하며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의 화형식은 그저 자극적인 하나의 이벤트로 느껴질 뿐이다.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는 불쌍한 가족들, 사랑하는 그 가족을 뒤로 하고 불길로 뛰어들기까지 안고 간 수많은 고민을 읽어내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바보’ 전태일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P.S.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읽을 때마다 어려운 법률용어나 한문이 나와 어려움을 느꼈을 때 똑똑한 대학생 친구 하나 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가 바랐던 똑똑한 대학생 친구가 될 수 없지만 오늘 같이 뜨거운 무더위가 가라앉은 선선한 오늘만큼은 그의 생일을 글로나마 축하해주고 그의 흔적을 기억해주는 대학생이 되려고 한다.

 

 

태일이 형,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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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린 이 시대 50대의 인생 보고서
송호근 지음 / 이와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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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로(歸路) 세대가 처한 현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 나는 왜 귀로(歸路)를 맴돌고 있나 아직 꿈이 가득해 그 자리에….’

 

10년 만에 나온 ‘가왕’ 조용필 앨범에 들어 있다는 ‘어느 날 귀로에서’ 한 대목이다. 사회학자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노랫말을 붙여 화제가 된 곡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돌아오는 퇴직자의 발그림자가 처연하게 느껴지는 가사다. 송 교수는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특이한 형식의 보고서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베이비부머의 내밀한 사연과 냉철한 세대분석을 교직한다.

 

1970년대에 베이비부머는 이른바 신문명의 담지자가 되었고, 이후 1980년대 ‘운동권 세대’, 1990년대 ‘탐닉 세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즉 베이비부머는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갈 수 있는 교량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스스로 몸을 누이면서 말이다. (8쪽)

 

 

 

2013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50대란 어떤 모습일까? 가정에선 외로운 아버지로, 직장에선 뒤안길로 밀려나는 선배로, 사회에선 말 안 통하는 꼰대 아저씨로 비춰지는 것이 씁쓸한 현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베이비붐세대 10만 명 당 자살율이 2008년 31.4명에서 2011년에는 40.6명으로 늘었다. 하루 평균 6명씩 자살로 세상과 작별 한다. 자살의 주된 원인은 2010년 글로벌경제위기 이후 조기은퇴와 창업실패 등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 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것은 이 같은 내용이 보도 되었음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OECD 자살율 1위 국가다운 우리 사회의 무덤덤한 반응이 더 무섭다. 한국의 중장년층, 농경시대에 태어나 산업화 시대의 주력으로 치열한 생존경쟁 무대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으며 IT 시대의 서막을 열고 퇴장하는 베이비부머들이 주류다. 대부분이 닮은꼴인 고단한 삶의 여정을 달려 왔다. 그럼에도 인생의 끝자락까지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짊은 그대로 진 채 고려장 같은 은퇴자로 밀려나 자살로 마감하는 이 시대의 암울한 초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독재정권에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민주화 투사들이었고, 찬란한 미래를 꿈꿨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실상 이 땅의 산업화를 일군 성공의 주역들이다.

 

베이비부머는 경륜, 기술, 인간관계가 성숙한 경지에 도달했고 이제 남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재가동하려는 투지로 가득한 연령 집단이다. 본격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양질의 인력(人力)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들에게 귀가조치를 발령한다. 자립심과 책임감이 강해 힘겹게 가정을 꾸려왔지만 정작 자신의 독립은 위태롭다. 정처 없이 ‘귀로’를 맴도는 숫자가 매년 100만 명이다.

 

 

 

 ♣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없는 ‘가교(架橋) 세대’

 

책은 한달음에 읽힐 정도로 분량은 얇다. 삶이 그믐달처럼 오그라드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온’ 50대의 삶이 ‘날것’으로 담겨 있다. 공고 출신 박 회장, 대기업 출신 대리기사 등 실제 베이비부머의 사례를 들어 국민연금 고갈, 부동산 거품 같은 한국사회 고질병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은퇴 후 상실감, 노년을 앞둔 공포 등 정서적 공허함도 따스한 시각으로 어루만진다.

 

송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직장에서 은퇴한 50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게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 자영업은 이미 포화상태로, 은퇴 후 작은 식당이라고 해볼까하는 생각은 곧 망하는 지름길이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재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다. 특히 단순 기술·기능직에 비해 좋은 대학 나와 번듯한 기업에서 고위직까지 오른 사람들일수록 기업들이 받아주기를 꺼리고, 그만큼 재취업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 고용센터에서 제공하는 각종 취업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하더라도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일 뿐, 대부분 50대 은퇴자들이 눈치 보면서 집에서 돈만 까먹고 있는 상태라고 할까? 게다가 자녀 결혼문제는 닥쳐오고, 모아놓은 돈은 점점 바닥나고... 부러움의 대상일 법한 ‘서울대 교수’인 저자도 팔순 넘은 부친을 부양하는 장남이며 두 딸의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이다. 노후 문제를 해결할 자원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한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는 1970년대 대학가 구호였다. 송 교수는 베이비부머를 가교(架橋) 세대면서 마지막 유교 세대라고 규정한다. 근대를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자 김수영이 자신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일갈했듯 베이비부머는 이단(異端)의 세대였으나 전통과 온전히 결별하지 못했다. 유교라는 굴레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않았다. 충, 효 같은 낱말에 매여 살았기에 가난했으되 당당한 부모와 개성 넘치는 자녀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물러날 때가 되니 다리가 돼줄 사람이 없다. 이제 자신의 삶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가교가 없는 것이다.

 

최빈국이던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리고 현장에서 물러나는 베이비부머들에게는 허무함이 엄습한다.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가고자 쉼 없이 달려왔으나 여전히 교육, 주택, 부모 부양으로 허덕인다. 젊고 튼튼했던 허리는 점점 휜다. 힘들고 아파도 그저 묵묵히 참고 견뎌낼 뿐이다. 그저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았다.

 

 

 

 ♣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공감과 위로가 필요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50대 베이비부모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고, 내 자식, 내 형, 내 동생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체감하고 적극적 대책마련에 나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정부가 월급쟁이 중산층 유리지갑에 손을 댄 세법 개정안 때문에 베이비부머들의 눌린 기를 또 한 번 크게 죽일 뻔했다. 과연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마음껏 소리 내 웃는 날은 언제 올까?

 

이 책 또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서글픈 현실을 고발할 뿐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게 비단 베이비부머 세대와만 관련된 것도 아니요, 일자리정책, 교육정책, 주택정책, 복지정책과도 맞물려있어 “금 나와라 뚝딱” 같은 요술방망이 식으로 해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한국의 50대 절반이 이런 절망의 균열 상태에 내몰리게 된 이유는 결국 십시일반 자신들의 자산을 할애해서 공적 안전망을 만들지 않은 탓이다... 베이비부머들이 구축하고 자신이 스스스로 갇힌 저 지독한 양극화 구조는 한국 사회 전체로 그대로 증폭되고 젊은 세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은 베이비부머 세대 스스로가 만든 탓도 있다. 결국 베이비부머 문제는 비단 정부에게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결국엔 우리 모두가 풀어야한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들은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보지 말고 공동체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볼 때다. 연대감 확인을 통한 공감과 위로는 곧 베이비부머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에겐 아버지 세대, 가장의 힘겨운 삶을 이해할 기회를, 장년층에게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가질 기회가 생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포용과 나눔. 배려가 필요한 때이다.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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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은 죽지 않는다 - 종이책의 미래를 짊어진 서점 장인들의 분투기
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백원근 옮김 / 시대의창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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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서점에 대한 아련한 추억

 

스위스의 소설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한 책방으로 들어가 포르투갈어로 된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중년의 서점 주인이 그 옆으로 오더니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세요?”라고 묻는다. 주인공이 모른다고 하자 “그럼 번역을 해드릴까요?”하며 서문을 읽어준다. 주인공은 그 문장들에 매혹되어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책을 갖게 되고, 마침내 책의 저자를 추적하고 싶은 마음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다. 서점 주인이 읽어준 책 한 권 때문에, 예순을 앞둔 사람이 그제까지 유지해왔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일종의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저 정도로 극적이진 않지만, 내게도 내 일생에 큰 영향을 준 동네 서점 하나가 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이 사준 세계문학전집류 외엔 다른 책을 읽은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스스로 책을 고를 줄도 몰랐다. 그날 나는 처음 내 돈으로 책을 살 작정이었다. 뭘 골라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내게 책방 주인이 걸어와 추천한 책이 정재승 교수의 <과학 콘서트>였다. 처음으로 굳어 있던 생각의 시선을 과학의 세계 쪽으로 향하게 만든 의미 있는 책이었다.

 

동네 서점들의 폐업 위기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엔 그런 소식이 부쩍 잦다. 그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건, 동네 서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독서 체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쾌적한 환경과 합리적인 시스템의 대형서점이 지금보다 더욱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줄 수 없는 작지만 빛나는 2%의 그 무엇. 사상 최악의 출판 위기라는 지금 그 무엇이 더욱 애타게 그립다.

 

누군가는 책의 몰락을 말한다. 출판 불경기가 극심하고 책 읽는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만든 책은 팔리지 않고 서점은 문을 닫는다. 이러다가 책의 운명이 영영 소멸해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일은 생기지 않는다. 출판사가 망해도 책은 죽지 않고 서점이 문을 닫아도 책은 살아남는다. 다만 바람직하고 다양한 책이 살지 못하고 잘 팔리는 책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 애서점가들이 말하는 책 알리는 비결 

 

그렇다면 동네 서점도 살리고, 팔리지 않는 좋은 책이 살아남아 고객에게 반응을 줄 최고의 방법이 있을까?

 

그 해답은 일본의 출판 전문 주간지 편집장을 지내고 있는 이시바시 다케후미가 만난 소형 서점 운영자들의 비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 <서점은 죽지 않는다>에서 등장하는 여덟 명의 서점 사람들이 책을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신조는 같다. 책 제목처럼 ‘서점은 죽지 않는다’라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객들에게 좋은 책 한 권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소통하려는 그들은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책 한 권을 알리기 위해 서점을 지키고 있을 진정한 ‘애서점가’(愛書店家)다.

 

그래도 종이 만지는 일은 언제나 몸부림이다. 운명적으로 팔리지 않는 책을 서가 한쪽 구석으로 옮기는 검열에 시달리는 일이며, 자본에 한없이 부대끼는 일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종이를 만지고 소개하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이들에게 책은 소비재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와야 서점의 점장으로 활동했던 이토 기요히코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런 일들은 하던 시대는 끝났다.’ 눈앞의 판매량에 따른 수익을 좇아 베스트셀러나 화재의 신간만 찾아 진열하는 과거의 모습을 단절한 것이다. 이제는 책을 멀리하는 고객들의 냉담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지 못하는 낡고 고집스러운 판매 전략이다. 과거의 서점들은 일방적인 판매의 이윤목적 달성에만 관심을 뒀기 때문에 고객이 선호하는 책의 종류나 독서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네 서점은 비교적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길 가다가 편안한 마음에 방문해서 종이책을 음미할 수 있는 안락한 휴식처가 될 수도 있다.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켜 가장 효과적인 방향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서점의 역할이 필요하다.

 

 

 

 ♣ 책 읽어주기 100회 도전

 

이하라 아트숍을 운영하는 이하라 마마코의 사례가 지역 동네 서점이 존속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하라 아트숍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서점에 불과하다. 남녀노소 지역 주민은 이곳을 방문하는데 책을 사기 위해서 오는 건 아니다. 서점은 책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판다. 책장이 아니라 냉장고로 향하는 손님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이하라는 책 대신에 아이스크림을 사더라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이하라는 어린이 책 전시 판매회를 홍보하기 위해서 본인이 직접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명 ‘책 읽어주기 100회 도전’. 가게 출입구에서 그림책을 읽는 것이다. 진지하게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이하라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지나가는 길을 멈추고 그녀의 낭독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하라는 책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홍보 방법이라고 말한다.

 

독서 행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손님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것. 단순히 책을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판매 전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동네 서점에게는 좋은 책을 널리 알리려는 열정을, 주민들에게는 열독(熱讀)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해야 할 어린이들이 직접 이하라의 ‘책 읽어주기’ 행사에 참여한다면 금상첨화다.

 

즐거운 놀이는 아이의 언어적, 인지적, 사회성 발달을 촉진한다. 이때 아이의 몸에서는 자연스레 엔도르핀이 나오고 아이들은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게 된다. 책을 소리 내서 읽는 행위를 하나의 즐거운 놀이로 만들어 아이의 성장과 지적 발달을 도모할 수 있다.

 

그리고 ‘책 읽어주기’는 시각 및 지적 장애인들에게 실제적인 독서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들은 신체장애 등의 이유로 일반적인 독서활동에 제약을 받는 편이다. 공공기관으로부터 화면 낭독 및 확대 S/W, 독서확대기, 점자정보단말기 등의 통신 보조기가 지원되고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동네 서점이 이들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복지 서비스 제공자가 되어 서점의 역할이 재조명된다. 꾸준한 참여가 이루어진다면 지식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낭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볼런티어리딩’(volunteereading)으로 발전할 수 있다. 육성을 통한 도서 낭독은 장애인들의 독서 능력과 사색의 범위가 성장하고, 책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서점의 미래를 만드는 것은 바로 한 사람

 

이시바시는 말한다. 서점의 미래를 다시 한 번 만드는 것은 바로 한 사람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책의 존재는 건실하여서 한 사람 한 사람 책을 읽게 하는 독서 문화를 만든다면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은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라고 말했다. 독서에는 혼자 읽고 이해하고 느끼는 개인 독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공유하는 독서, 즉 ‘소셜 리딩(Social Reading)’이 있다. 같은 책을 읽고 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환경과 맥락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 그 안에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같은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주민은 서점 존재의 중요성을, 동네 서점은 주민이 원하는 독서의 유형을 알 수 있다. 동네 서점과 지역 주민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화합의 장이 마련된다면 동네 서점과 독서의 중요성이 무관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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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나라 - 갑을관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배해왔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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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는 것은 192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풍속화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돈과 섹스, 그리고 파티와 사치에 빠진 상류층, 서슬파란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지겹게 반복하는 일상성을 알코올 소비로 상쇄하려는 대중들, 주류밀매로 한몫 챙겨 상류층으로 상승을 도모하는 약삭빠른 부류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술과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로스트 제너레이션’ 젊은 미국인들의 모습이다.

 

돈과 사랑, 신의와 배반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자기 파멸로 치닫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작가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집필하게 한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미 20대 초반에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피츠제럴드가 28세 되던 해에 집필하기 시작한 개츠비의 이야기는 가난한 청년은 부유한 여자와 결혼할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개츠비는 군 복무 중 미모의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유럽 전선으로 떠나고 기다린다던 데이지는 곧 시카고 출신의 부자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종전 후 귀국한 개츠비는 데이지의 결혼 사실을 알고 그녀를 되찾고자 롱아일랜드에 대저택을 산다. 개츠비는 3년 동안 번 돈으로 큰 저택을 사고 호사 주말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모은다. 첫사랑을 만나보려는 일편단심에서다. 이제 개츠비는 재산을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사용한다. 다시 그녀를 차지하고자 한다.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단지 첫사랑 때문에 젊은 졸부가 된 개츠비의 모습은 어이없이 찾아온 불행한 최후를 생각해본다면 너무나도 허무하기만 하다. 소설과 영화를 본 사람은 그가 어리석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가난했던 그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부자가 되게 만든 열등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전쟁과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운의 소용돌이, 언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지 모르는 총탄에 두려움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도 이어지는 가난한 삶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전장에 간 그를 기다릴 줄만 알았던 연인은 부유한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그 열등감과 분노감은 말 못할 정도로 자존심을 짓밟았을 것이다.

 

개츠비와 데이지 두 사람이 8년 만에 만난 장면은 아주 극적이다. 데이지를 자신의 호화스러운 집에 초대한다. 그동안 쌓여왔던 열등감의 서러움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게다가 오랜만에 데이지와 함께하는 단 둘만의 시간. 개츠비의 집을 본 데이지는 그 규모에 놀란다. 의기양양한 개츠비는 영국 주재원이 자신에게 선물한 호화 셔츠를 방안에 던지며 과시한다. 데이지는 그 중 하나를 잡고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는 처음 본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왜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느냐는 개츠비의 물음에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하며 덧붙인다.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 억울해? 억울하면 출세해라!

 

피츠제럴드의 유명한 대표작이 영화로 리메이크되어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내용 속 당시 시대적 배경의 이면을 살펴보면 개츠비가 처한 현실의 구조는 갑과 을로 관계를 구분 짓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기업들의 지나친 '갑'의 노릇으로 우리 사회는 심한 홍역을 치루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불합리한 차별의 제도가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놓여 있다. 개천에서도 용이 탄생할 수 있는 사다리는 있어야 평등한 사회라 할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근검절약으로 을에서 갑으로 진입하려는 힘없는 세력의 노력이 경쟁의 초석이 되고 갑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게 하는 경쟁력이 된다. 갑들이 많은 세상은 을들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 힘들고 도처에 갑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가 높은 장벽이 되어 을들의 반란을 부르기도 한다. 성공한 갑의 집단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을은 언제나 피해자인양 억울해 하다보면 양극화 현상으로 사회문제를 야기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된다. 우리 사회는 갑의 과부화에 노출되어 있다. 갑을 관계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노예관계’라는 말이 나올 만큼 더 심각하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오늘날 갑을 관계의 뿌리를 조선 시대 관존민비로부터 찾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관은 민을,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지배하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직’이라는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반공을 앞세운 과대성장국가는 시민사회를 억압하면서 형성됐기에 기존 관존민비를 더욱 강고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존민비에서 출발한 갑을 관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뜯어먹기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결국 갑을 관계는 한국 사회의 삶의 방식과 연결되는 문제다. 갑을관계를 일상적인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출세할 수 있고 배가 아파 병원을 갈 때도 인맥이 있어야 빨리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이 ‘갑을 관계’다. 갑질이라는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돈을 벌어서 크게 출세를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우선 인맥이라도 갖춰야 한다.

 

 

한 대기업 임원이 항공기 여승무원 폭행 사건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중략) 네티즌들의 댓글 한두 개를 보자. (중략) “돈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듯하군요. (비즈니스 석에 탑승해서) 발 닦아달라는 요구도 한다지요.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할 듯!!” (7쪽)

 

 

 

이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게 한국적 갑을관계의 가장 큰 비극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인격적으로 평등한 사회이고 사회적 위치가 다르더라도 개개인 모두 동등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물질적으로 열세인 상대방을 동등한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 ‘나보다 부족하거나 못한 사람’으로 보는 전근대적·봉건적 인식이 남아 있다. 약탈과 착취를 위해 도입된,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을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현실을 인식하도록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을이 강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억울하지만 출세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한다"라는 열등 의식이 내포된 사고가 내면화된다. 빈농이었던 개츠비가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을 다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부가 되는 과정은 을의 전형적인 심리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갑을 미워하면서도 자신 또한 갑처럼 닮아 가는 것이다.

 

 

 

 ♣ 증오에 호소하는 시위만으로 갑을 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

 

갑에 대한 을의 분노는 시위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촛불 시위가 등장해 평화적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고 있지만 과거에 흔히 보던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의 하나로 이는 집단적 형태로 행하여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의 일종이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민주정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이자 소수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불법시위에 대해 대체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과격한 행동을 하더라도 인내하였고 영업방해를 받더라도 감내하였다. 수십 년간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생긴 면역력 때문일 것이다.

 

강 교수는 심정에 호소하는 감성 민주주의의 ‘뗑깡 시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의사 표시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시위 집단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식의 감성적 분쟁해결 습성이 법 절차에 의한 해결에 앞서 작용하기 때문에 건전한 시위문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피해 의식에 대한 분노가 조종하는 폭력적 시위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하고 그 폭력에 짓밟히는 제2, 3의 을이 나올 수 있다. 갑이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된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때 간도에서 생활하는 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그린 최서해의 <홍염>의 결말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문 서방은 소작인으로 살아가지만, 소작료를 제때 내지 못해 그의 외동딸 용례를 중국인 지주인 인가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에 문 서방은 자신의 딸을 빼앗아 사위가 된 중국인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그를 도끼로 쳐 살해하고, 딸을 구하게 된다. 조선의 ‘을’로서 억압받는 조선인 빈농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울분의 심정을 장중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빈곤과 계급 차별을 폭로하고 이에 저항하는 인물을 설정하는 신경향파 소설에 한계가 있다. 문 서방이 선택한 문제 해결의 방식인 살인과 방화라는 장치가 한 충동적 개인의 보복 수단에 그쳤다. 주인공의 극단적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고찰함으로써 을이 갑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 방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파편화된 개인적 체험으로 끝나버린다.

 

강 교수는 갑을관계의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는 을의 반란이 ‘증오의 이용’을 넘어 ‘증오의 종언’을 향하는 정신의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원한과 복수심이라는 증오만으로 갑을 관계의 뿌리를 완전하게 뽑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적과 동지’, 일명 편 가르기 식으로 모든 문제를 갑을 관계로 해석해서 자신의 행위가 폭력적, 불법적인데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한 갑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공감,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성찰이 필요하다. '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는 관계여야 한다. ‘슈퍼 갑’으로 통하는 대기업, 공무원과 그 아래로 통하는 중견기업, 하청업체, 대리점 등 대부분의 사례를 찾아보면 갑은 을을, 을은 병을, 병은 정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갑도 을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을도 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잘못된 주종, 상하 관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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