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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알프레트 쿠빈 지음, 홍진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2월
평점 :
알프레트 쿠빈(‘알프레드 쿠빈’으로도 표기할 수 있다, Alfred Kubin)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화가다. 쿠빈은 칸딘스키와 함께 첫 번째 ‘청기사’ 그룹전에 참여했고, E. A. 포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등을 위한 삽화를 제작했다. 쿠빈은 괴생물체, 지옥, 인간의 욕망과 타락 등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기괴한 그림체로 표현했다. 그래서 쿠빈의 그림은 어느 하나 불쾌하지 않은 게 없다.
쿠빈은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친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는데,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섬약한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병약한 쿠빈에게는 학교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쿠빈은 어머니의 무덤에 찾아가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0년대 초반부터 쿠빈은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창 잘 나가던 중에 쿠빈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진 쿠빈은 또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쿠빈은 우울증에 억눌려 잠잠했던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했고, 그는 4주 만에 자신의 유일한 장편소설 《다른 한편》을 완성했다. 이 소설은 1909년에 발표되었다.
기괴하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소설답게 환상적인 세계와 초자연 현상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소설의 주인공은 무명이며 직업은 화가다. 어느 날 주인공의 친구 클라우스 파테라는 자신이 세운 ‘꿈의 왕국 페를레’에 주인공을 초대한다. 주인공과 그의 아내는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꿈의 왕국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한다. 꿈의 왕국은 외부 세계의 침입을 차단하는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지역이다. 꿈의 왕국을 드나들 수 있는 문도 하나뿐이다. 꿈의 왕국에 사는 ‘꿈의 주민들’은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옛 것을 좋아하며 나날이 진보하는 현대 문화를 거부한다. 파테라는 꿈의 왕국 지배자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가 좀처럼 힘들다. 주인공의 아내는 파테라를 직접 마주친 이후로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꿈의 왕국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 이곳을 떠나기로 하지만, 실패한다. 주인공과 이곳 주민들은 알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는 파테라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 출신의 억만장자 허큘레스 벨은 꿈의 왕국에 들어온 ‘외부인’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업을 펼쳐보려고 했으나 파테라는 미국인을 무시한다. 자신의 사업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에 못마땅한 미국인은 꿈의 왕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그는 ‘루시퍼’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꿈의 주민들에게 ‘이성’과 ‘진보’의 가치를 전파한다. 또 주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파테라를 비난하는 선전을 펼친다. 미국인은 대대적인 여론몰이를 통해 선동을 일으켜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꿈의 왕국에 내부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상식을 뛰어넘는 기이한 일들이 발생한다.
소설 1부, 2부는 주인공이 꿈의 왕국에서 생활하면서 겪게 된 일련의 경험들을 비교적 평이하게 묘사하면서 전개된다. 3부 3장부터 이야기는 ‘범상치 않은 전개’로 흘러가고, 독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3부 3장 제목은 ‘지옥’이다. 3부 3장은 평화로운 꿈의 왕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리듯 이상 증세를 보인다. 사람을 죽이는 난폭한 행동도 이어진다. 꿈의 왕국 전역에 ‘잠 중독’이 전염병처럼 퍼진다. 이 병에 걸린 주민들은 잠들어 버린다. 그들이 잠든 사이에 동물과 곤충들이 왕국을 점령한다. 꿈의 왕국은 ‘동물의 세계’로 변하고, 퇴폐적 욕망에 사로잡힌 주민들은 무질서한 삶을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주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무의미하다. 번역본의 ‘해설’ 편에 《다른 한편》을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들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한 기존 해석을 거부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싶다. 나는 이 소설이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한 창작 방식인 자동기술법(Automatisme)으로 쓰였을 거로 생각해본다. 주인공의 꿈을 묘사한 2부 5장 마지막 장면(부제는 ‘꿈의 혼란’, 211~214쪽)과 3부 3장 ‘지옥’ 편을 읽어 보면 초현실주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치 꿈을 꾸듯 작업을 했다. 그들은 논리와 합리, 이성이 무의식을 구속한다고 봤다. 그들이 선호한 자동기술법은 미리 계획하고 다양한 조건을 철저히 계산하는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무의식 상태에 자신을 내려놓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꿈의 왕국이 몰락하는 과정은 예기치 않은 변모의 연속이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 앞에 무너지는 왕국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무(無)’로 귀결되는 허무적인 패배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은 이미 낡고 닳아서 힘없는 파테라의 권력을 파괴하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환기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무시무시한 악몽에서나 볼 법하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담담하게 묘사한다. 기괴한 상황과 아무 상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의 모습은 거대한 세계 하나를 파괴하는 인간 내면의 잔혹성과 대비돼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다른 한편》에 관통하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은 섬뜩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쿠빈의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소설이 보여준 그로테스크는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로테스크는 우스꽝스러운 것과 괴기스러운 것 둘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범주다. 따라서 《다른 한편》이 발산하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은 이중의 의미로 구조화되어 있다. 하늘에서 추락한 기구의 파편을 ‘거대한 고래’라고 착각하는 주민들의 반응(294~296쪽), 꿈의 왕국 주민이자 은행가인 알프레트 블루멘슈티히의 죽음(310쪽)은 이 소설의 그로테스크를 보여주는 적절한 장면이다. 쿠빈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죽고 죽이는 게 우스운 일이 된 부조리함을 연출한다. 《다른 한편》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알프레트 쿠빈’이 누군지 모르는 독자라도 상관없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당신도 소설의 ‘마력’에 이끌려 끝까지 다 읽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단연 3부 3장이다. 이 장의 제목은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