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스타킹이 읽을 다섯 번째 책은 마리아 미즈(Maria Mies)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입니다. 이틀 전인 월요일(3월 12일)에 첫 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날에 새로운 두 분이 스몰토크에 찾아오셨어요. 저는 이 날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책 1장까지 다 읽고, 토의 내용들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모임 당일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모임에 불참하게 됐어요.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묻히기가 너무 아까워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1장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단상 형식으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첫 번째 모임 공식 후기는 내일 공개될 예정입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1986년에 출간되었고, 1999년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한국어판에는 1986년 초판본 서문, 1999년 개정판 서문, 그리고 한국어판 서문이 실려 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가 개정판 서문을 읽어보니 좋은 내용이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 분이 하신 말이 맞았습니다. 개정판 서문에 마리아 미즈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집필하게 된 이유가 나옵니다. 먼저 한국어판 서문부터 살펴보죠.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세계적 차원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폭력의 결과로는 기후 변화를 개선할 수 없고, 지구의 자원 고갈과 원자력으로 인한 오염을 회복시킬 수가 없음을 오늘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패러다임은 끝없는 자본축적을 추구하는데, 이는 진보와 “좋은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한국어판 서문, 5쪽)
대다수 여성은 남성과의 평등을 우리의 주요 목표로 생각했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는 자본주의를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고, 가부장제만 주로 다루었다. 그들은 이 체제 내에서 남성과 평등해지기를 원했다. 그들은 남성이 우리 사회에서 갖고 있는 정치경제적 기회와 권력과 권위를 똑같이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보면, 가난한 국가나 부자 국가나 상관없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지 않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혀 평등하지 않다. 왜 그런가? 몇몇 여성이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국가나 정부의 수장이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목표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배적인 자본주의-가부장제 체제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에 여성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많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 체제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된 여성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성차별적 · 가부장적 문화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한국어판 서문, 6쪽)
맑스는 가사노동을 “재생산” 노동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이 노동은 임금노동자의 “생산노동”과는 대조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이었다. 일부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남성의 임금노동과 동등한 수준에 놓기 위해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나와 다른 이들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자본축척과정을 위해서는 왜 이런 무급노동이 필수적인지를 연구했다.
동시에 나는 식민지민과 자연이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본은 그들의 “생산”을 아주 적은 비용으로 전용했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나 멕시코 같은 국가에서 젊은 여성은 서구 시장에 공급할 의류 등을 세계에서 가장 싼 임금을 받고 생산했다. 이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여성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가치가 낮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방글라데시처럼 가난한 국가에서도 여성 노동은 더 저렴하다. 이곳에서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다. 오늘날 이런 심한 착취는 폭력 및 가장 잔혹한 노동환경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노동환경은 그들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한국어판 서문, 7쪽)
남성 중심 사회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구조였습니다. 이 때문에 각종 차별이 생기고 여기에서 뿌리 깊은 여성 억압이 생기게 된 겁니다. 자본주의는 가족,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일치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발달 이후 공 · 사 영역 분리의 성별화가 가속화되면서 남성의 삶은 더욱 공적인 것이 되었고 여성의 삶은 더욱 사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일’이 분리되는 성별 노동 분업 현상이 생겼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석입니다. 가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안식처가 됩니다. 여성은 집 안에 머물면서 가사노동을 하게 되고, 남성에게 예속됩니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비용을 줄이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마르크스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태동된 가부장제가 남녀 성차별을 심화시킨다고 보고 생산과 노동, 가족 등 각 영역에서의 여성억압을 폭로했습니다. 반면에 남녀평등을 주장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를 비판했지만, 자본주의 비판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식민지 통치를 경험한 아시아 대륙의 여성들의 삶은 여러 차원에서 고단합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환경에서 집안 살림을 챙기고, 직장생활에도 충실해야 하며 일부 빈곤층 여성은 생계를 위해 타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지내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미즈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연구가 자유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시즘 경제학 모두 넘어서는 도전이라고 밝혔습니다. 여성 억압을 ‘부차적 문제’로 보는 마르크시즘 역시 한계가 있었던 거죠.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이론적으로 처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자본주의 아래서 가사노동의 역할을 분석하면서였다. 이 운동은 198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가정에서 여성이 무급으로 하는 돌봄 노동과 양육이 남성 임금을 보조할 뿐만 아니라, 자본의 축적에도 기여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게다가 여성을 가정주부로 규정함으로서, 내 방식으로 말하면 ‘가정주부화’함으로써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무급 노동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고, 국민총생산에도 기록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것, 즉 ‘공짜’로 여겨졌다. 여성의 ‘가정주부화’가 가져온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성이 임금노동은 남성, 이른바 부양책임자를 보충하는 것으로 여겨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개정판 서문, 20쪽)
미즈는 무급 가사노동에 임하는 여성들을 가리켜 ‘가정주부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무급 가사노동 담당자는 ‘주부’가 된 여성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을 분해하여 연관성 없는 사건들, 시간들, 사회적 요소들의 조립으로 이해하려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주변에서 인지하게 되는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모든 것들이 인식을 ‘구성’하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의식의 기반을 흔들어 놓으려고 했다. 세계의 물질성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이상주의가 탄생했다. 이 이상주의는 모든 현실은 결국 가상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체제를 극복한다는 여성운동의 오랜 목표를 포기했다. 이제 유일한 목표는 젠더 평등이었다. 이는 여성이 갈망하는 것은 남성과 동등한 몫을 차지하는 것일 뿐이지, 체제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체제’라는 용어도 현실성이 없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폐기되었다. ‘주류’ 혹은 ‘주류화’에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이런 포스트모던 이데올로기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와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를 추종했던 페미니스트는 ‘주변부에서 벗어나’ ‘주류’의 어딘가에 둥지를 틀 수 있기를 기대했다. (개정판 서문, 29~30쪽)
저는 이 내용에 언급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어요.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들어봤어요. ‘포스트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같은 의미로 봐야 할까요? 일단은 저는 이 두 가지 용어를 같은 의미로 보려고 합니다.
* 소피아 포카 《포스트 페미니즘》(김영사, 2001)
《포스트 페미니즘》(김영사, 2001)에 따르면 포스트 페미니즘의 시작점은 1968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로 보고 있습니다. 이 날 프랑스의 ‘정신분석과 정치’ 그룹 회원들은 주류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행진 시위를 벌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류 페미니즘은 남녀평등만 주장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의미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목받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기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었습니다. 포스트 페미니스트들은 남녀 이분법을 강화시키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지위를 축소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미즈와 같은 학자들은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미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종속된 포스트 페미니즘도 비판합니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연암서가, 2014)
* 브누아트 그루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마음산책, 2014)
1장(‘페미니즘이란?)은 페미니즘의 전반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는 여권신장의 당위성을 프랑스 혁명의 민주주의 이념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여권의 옹호》(연암서가, 2014)를 발표하여 여성해방 운동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프랑스의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는 혁명으로 일궈낸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되자 ‘여성인권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 정진희 엮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책갈피, 2015)
계몽주의 · 자유주의적 이념에 기반한 자유주의 페미니즘 외에도 마르크시즘 및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여성주의 운동에 무시하지 못할 파급을 가져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불평등이 지배계급인 남성, 종속계급인 여성을 층위로 하는 계급적 착취구조에 있다고 파악했으며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강조했습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언급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는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입니다.
1장은 페미니즘의 발전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는 성폭력상담소, 학대받는 여성을 위한 보호소, 페미니스트의료센터 등의 자조 활동을 통해 도움을 주고자 했다. 여성이 남성의 물리적 심리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은 새로운 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 점차 분명해 졌다. 또한 이 차원에서는 법률 개혁이나 국가적 지원도 소용없다는 점도 분명해 졌다. 여성이 남성의 폭력을 피해 국가나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려고 해도, 남성이 가족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여성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국가가 간여하지 않음을 곧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1장 86쪽)
공공영역에 여성이 참여하고, 참정권을 얻고,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폭력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가부장적 남녀관계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차별적 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운동이 진행되면서 개별 남성의 명백한 ‘사적’ 침해와 가족, 경제, 교육, 법, 국가, 대중매체, 정치 등 ‘문명사회’의 중심 제도와 ‘기둥들’ 사이의 조직적인 관련에 대한 여성의 인식도 높아졌다. 개인적으로 다양한 양상의 남성 폭력을 경험하면서 여성은 강간, 아내 구타, 희롱, 여성에 대한 성희롱, 성적 언어폭력 등이 일부 남성의 빗나간 언행이라기보다는 남성 체제, 혹은 가부장적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체제에서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과 간접적 혹은 구조적 폭력 모두 ‘여성이 제자리를 지키게 하는’ 수단으로 여전히 흔하게 사용되었다. (1장 87~88쪽)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1장 86, 87~88쪽을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그동안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의 (성)폭력 문제를 외면했습니다. 미투 운동은 여성의 삶을 능멸하는 가부장적 남성의 지배 논리에 대한 분노와 저항입니다. 당신이 미투 운동을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여성의 집단적 감정 표출로 본다면 미투 운동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